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492화 (441/1,000)

00492  50. 에스파냐  =========================================================================

다음 날 오전에 고산국 함대는 비고 항구 북쪽 빌라가르시아 항구에 도착했다. 영접하러 나온 빌라가르시아 시장의 도움을 받아 마차 수십 대를 빌려 기독교도들을 태웠다. 그리고 장갑차 중대와 기병에게 호위시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짧은 성지 순례를 보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은 9세기에 성 야고보의 유해가 발견되면서 레콘키스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계기가 된 곳이었다. 프랑스 남부 국경에서 시작되는 800km에 달하는 도보 순례길이 유명했다.

이민호는 기독교도가 아니었지만 비올레타를 따라 순례에 참가했다. 길 곳곳에 세워진 조개 표지를 따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다. 고딕 형식의 웅장한 대성당은 절로 신앙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슬람 해적에게 붙잡혀 노예가 됐던 가난한 기독교도들은 이민호가 아량을 베풀어준 덕에 꿈에서나 바랄 성지 순례를 공짜로 마칠 수가 있었다. 잔뜩 흥분한 기독교도들에게 고산국 백성이 되면 조만간 예루살렘 순례를 할 수 있다는 소문을 의도적으로 흘렸다. 프랑스 항구에 도착하면 배에서 내려 고향에 돌아가려던 기독교도들 사이에 큰 반향이 일었다. 승객들의 의사를 전해들은 수송선 선장이 이민호에게 보고했다.

“전하! 노예에서 구해주신 기독교도들이 성지 순례를 허락해주신 전하께 감사 인사를 전해달랍니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갔다가 가족과 함께 북미로 이주하길 원하는 자들이 말하길, 자기들을 계속 보호해줄 의무가 전하께 있다고 합니다.”

“오호! 구해준 사람에게 의무가 남아있다는 말이지? 잘 됐네. 그럼 증명서를 받으면 고향에 갔다가 나중에 북미로 이주할 수 있다고 설명해. 국적이 다양하니 이들을 태울 항구는 세 군데 정도로 정해야겠군.”

기독교도들 중에서 고향에 갔다가 북미로 이주하겠다는 사람들을 선발해 노잣돈을 더 지급했다. 옷도 제대로 입히고 고향에 도착한 다음 갈아입을 좋은 옷도 나눠줬다.

이민호는 이들이 소문을 잘 내줘서 유럽 전체에 북미 이주 바람이 불기를 기대했다. 나중에 이민허가서로 오해된 증명서가 매매되면서 가격이 치솟았다. 누구든 북미에 이주할 수 있었기에 구매자들은 사기당한 셈이었다.

순례를 마친 후 다시 움직인 함대는 이베리아 반도의 북쪽 끝 항구 도시인 비베이로에 도착했다. 비올레타의 고향은 아니고 할아버지 고메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가 태어난 곳이었다.

비베이로는 만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온 곳에 위치한 천혜의 양항이었다. 그리고 주변에 한적한 백사장이 여러 곳 있어서 여름에 좋은 휴양지가 될 것 같았다.

지중해에 고산국 함대가 사용할 항구가 필요하다면 당연히 섬을 선택해야 했다. 그러나 만약 에스파냐 영토의 대서양 방면에서 항구를 빌린다면 바로 이곳이 가장 좋을 것 같았다. 비스케이 만은 수심이 깊어서 근처에 쓸 만한 섬도 별로 없었다.

“비올레타 당신이 꿈에 그리던 고향이오.”

“아아! 정말 갈리시아의 비베이로 맞아요.”

비올레타는 할아버지가 레온의 행정장관이었을 때 레온에서 태어났다. 이후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다니면서 성장했기에 친척들이 많이 사는 비베이로를 고향으로 여겼다.

비올레타의 할아버지 고메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는 레온에서 고기 시장을 새로 열고 여러 곳에 샘을 파거나 도로를 닦아 시가지를 건설했다. 여기서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한 그는 계속 중요한 관직을 맡게 됐다.

“고마워요, 전하.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제 생전에 고향에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고국에 들렀으면 당연히 고향에도 와 봐야지요.”

비올레타가 이민호 품에 안겨 흐느껴 울었다. 진심으로 감동한 것 같아 이민호도 몹시 기뻤다.

다스마리냐스 전 총독 부부는 이 지역 출신으로서 크게 출세한 유명인사가 되어 옛 친구들을 만나러 다녔다. 금의환향이라는 말에 걸맞게 화려한 옷을 입고 이웃이나 친지들에게 선물도 잘 주는 다스마리냐스 부부는 짧은 사이에 시에서 최고 인기인이 되었다.

“저희들이 꿈은 크지만 황송하게도 아직 아무런 경력이 없습니다.”

“나이가 어리니 당연히 경력이 없겠지. 전혀 문제가 아닐세. 환영하네.”

그 사이 비올레타 친척 가문의 젊은이들 여럿이 몰려와 이민호 밑에서 일하길 원했다. 고산국 국왕의 아내인 북 아메리카 공작부인을 배출한 팔라완 백작가의 방계 출신이 된 청년들은 에스파냐 귀족들이 결코 무시하지 못할 신분상승을 한 셈이었다. 이민호는 이들을 대서양 무역이나 전쟁에 기용하기로 결정했다.

비베이로와 주변 갈리시아의 청년들은 고산국 왕립대학이나 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다음 탐사단 소속이나 군인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이 시대에 반드시 고등교육을 받아야 할 필요는 없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 당장 힘든 일을 시킬 수가 없었기에 이민호가 권한 탓이었다.

갈리시아의 청년들은 프랑스의 게르만계 혈통이나 갈리아 족의 특징이 남아 있었다. 마드리드에서 흔히 봤던 에스파냐 사람들과 용모가 약간 달라 남유럽이 아닌 서유럽인 분위기가 확실히 드러났고, 발렌시아 사람들과는 생김새에서 꽤 큰 차이가 있었다.

비올레타가 고향 출신 말동무가 필요하다고 해서 몇몇 처녀들을 정식 시녀로 채용했다. 주상아 공주나 아라 공주처럼 처음으로 비올레타의 전용 시녀가 생긴 셈이었다. 비올레타가 몹시 기뻐해서 이민호도 즐거웠다.

처녀들이 입은 옷은 평범하거나 초라한 편이었지만 다들 미녀에 그 나이답게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이민호가 흐뭇하게 웃었고, 바로 그 장면을 비올레타에게 걸리고 말았다.

“전하! 제 시녀들에게 눈독 들이지 마세요! 제 친척 동생이나 친구들을 건드리면 절대 안 돼요. 이들이 나중에 에스파냐 귀족들에게 시집가면 고산국의 영향력을 크게 늘려줄 거여요.”

“알았소. 비올레타는 나를 뭘로 보는 거요?”

“짐승이요.”

비올레타가 이민호를 간결, 명료하게 규정했고, 평소 하던 짓이 있던지라 이민호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이야 이민호에게 별로 생각이 없더라도, 상황에 따라 시녀들이 은근슬쩍 넘어오게 되는 경우가 없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그리고 내명부 소속이 되면 기본적으로 국왕의 여자라는 공적 신분이 된다. 주상아 공주나 아라 공주, 또는 미카의 시녀들처럼 주인을 따라 국왕의 침전에 들어가야 할지도 몰랐다.

이민호가 툴툴거리면서 침전으로 향했다. 침전 안에서 에밀리아가 꽃병의 물을 갈고 제시카는 침대보를 바꾸고 있었다. 베네치아 시녀들은 아직 승은을 못 입어 내명부 품계가 낮기에 이런 허드렛일도 해야 했다.

“에밀리아와 데스데모나는 오셀로의 등장인물인가?”

이민호가 묻자 못 알아들은 에밀리아가 갸웃거렸다. 이민호의 예상과 달리 셰익스피어가 아직 오셀로를 발표하기 전이었다. 공대 출신 이민호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니 희극이니 하는 것들을 읽지도 않고 다만 영화의 등장인물 이름이나 줄거리만 어렴풋이 기억할 뿐이었다. 심지어 극작가이며 시인인 셰익스피어를 소설가로 알 정도였다.

침대에 드러누운 이민호가 베갯잇을 가는 제시카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잠시 바동거리던 제시카가 이민호의 품 안에 쏙 들어왔다. 제시카는 이탈리아에서 흔한 이름으로 한국의 유명 걸 그룹 멤버와는 전혀 다르게 생겼다.

“뭘 부끄러워 해? 더한 것도 했으면서.”

이민호는 민영과 베네치아 시녀 일곱 명까지 여덟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던 때를 기억했다. 여자들은 젖먹이 강아지를 연상했을지 몰라도 당하는 이민호 입장에서는 암사자 떼에게 산 채로 살을 뜯기는 물소가 된 기분이었다.

베네치아 시녀들은 몸이 매우 부드러워 이민호의 마음에 들었다. 호위들은 평소 훈련을 해서 몸을 만드느라, 갈라티아 궁녀들은 후원을 가꾸느라 살이 단단한 편이었다. 탄탄한 몸도 나쁘지 않았으나 이렇게 살이 야들야들한 여자도 좋았다.

이민호가 제시카의 몸을 주무르는데 제시카가 자꾸 몸을 빼려 했다. 가슴을 만지며 다른 손이 허벅지 사이로 파고든 순간 제시카가 잘 하지도 못하는 조선말로 경고했다.

“주인님. 낮. 조심.”

“응? 뭐 어때. 괜찮아.”

이민호가 제시카의 예쁜 얼굴을 잡아당겨 입을 맞췄다. 두 손은 여전히 제시카의 가슴과 허벅지 사이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저녁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있어서 제시카를 안으려고 옷을 벗겼다. 베네치아 귀족 영애의 하얀 몸이 어깨부터 가슴까지 드러났다. 상체가 벗겨진 제시카가 오들오들 떨자 이민호는 늑대가 된 기분이었다.

그런데 막 덮치려는 순간 하필 그때 문이 왈칵 열리고 비올레타가 침전에 들어왔다. 제시카가 화들짝 놀라 침대에서 벗어나고, 잠시 침묵이 이어진 직후 비올레타가 다시 나갔다.

문이 닫히기 직전에 비올레타가 내뱉은 짐승이라는 말이 길게 여운을 끌었다. 이민호의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 나갔다.

“저기, 왕가의 뿌리를 튼튼히 내리기 위해서......”

그러나 비올레타는 이미 나갔다. 졸지에 비참한 처지가 되어 훌쩍거리며 우는 제시카도 달래줘야 했다. 비올레타가 다시 들어올까 봐 제시카가 겁을 집어 먹어서 달래는 것도 힘들었다.

“호위! 아무도 못 들어오게 막아!”

“네, 주인님!”

여진족 호위 두 명이 문 바깥에 서고 나서야 제시카가 울음을 그쳤다. 이민호가 제시카를 한참 달랬으나 분위기가 깨진 다음이라 다시 안을 시도조차 못했다. 야망과 애국심만으로 이민호에게 몸을 맡긴 베네치아 하급 귀족 영애의 험난한 시녀 생활이었다.

저녁 식사시간에 비올레타는 그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이민호가 바람을 피운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민호에게 베네치아 시녀들을 어서 안으라고 권했다. 다만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자제해달라고 권했을 뿐이었다.

“갈리시아 지방은 레콘키스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지만 그 후에 에스파냐의 국정에서 소외된 지역이에요. 그래서 해외로 진출하려는 젊은이들이 많아요. 부디 전하께서 젊은 인재들을 잘 대해주세요.”

“물론이오. 고산국 배들이 대서양을 정기 운항하면 에스파냐에도 들르도록 해보겠소. 정기적으로 기항할 항구는 이곳이 좋겠소.”

“고국에 보내는 편지가 더욱 안전하게 도착하겠군요. 제 고향을 택해주셔서 고마워요.”

비올레타가 방긋 웃었다. 대륙 간 정기 운항은 에스파냐의 멕시코 부왕령에서 요청한 사항이기도 했다.

수송선이라지만 배가 커서 풍랑에 잘 버티고 웬만한 해적선은 다 때려잡을 무장 수준이라 운송에 가장 적합했다. 만약 에스파냐가 보물선단을 운영하면서 국적선 운송 규정을 폐지한다면 고산국 정기 수송선이 보물 운반선으로 지정될 가능성이 컸다.

“다음 행선지는 어디인가요?”

“남프랑스의 보르도에 가면 좋겠는데 아직 프랑스하고 국교관계가 없어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소.”

“설마 우리가 카리브 해에서 프랑스 해적들을 토벌했다고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겠죠?”

“모르지요. 법적으로는 사략선이라서 말이오.”

이 시대에는 사라센 해적들이 북유럽까지 가서 주민들을 노예로 잡아온 경우도 많았다. 현재 수송선에 탄 신교도 2천여 명 중에서 절반이 프랑스인, 나머지 절반의 국적이 독일과 네덜란드, 덴마크와 노르웨이였다. 바이킹이 지중해에서도 활동했듯이 사라센 해적들도 북해까지 가서 약탈했다.

지브롤터 해협과 건너편 세우타의 상황을 국왕좌승함 함장에게 물어봤는데 에스파냐 군함에 의한 해상 봉쇄는 어렵다는 의견이었다. 현재 지브롤터 항에 에스파냐 군함 20여 척이 상시 정박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유사시에 해협을 봉쇄하는 것은 가능해도 24시간 경비는 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실제 역사에서 1607년 26척의 네덜란드 함대가 지브롤터 항을 공격해 정박 중인 에스파냐 함선 21척을 불태우고 4천여 명을 전사시켰다. 에스파냐 함대사령관 돈 후안 알바레스 데 아빌라(Don Juan Álvarez de Ávila)부터 승조원들까지 거의 몰살당한 일방적인 패배였다. 네덜란드에서는 탐험가 출신의 함대사령관 야콥 판 헴스케르크(Jacob van Heemskerk)를 비롯해 100명이 전사하고 60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양쪽 주장은 크게 엇갈렸다. 네덜란드 함대의 전과 보고에 따르면 상대는 에스파냐 군함 21척이었으나, 에스파냐는 군함은 갈레온 10척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상업에 종사하는 작은 배들이었다고 주장했다. 피해도 에스파냐는 갈레온 5척과 작은 배 9척을 잃고 350명이 전사하거나 잡혀갔다고 밝혔다. 그리고 네덜란드 포로 110명을 잡았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사람들을 프랑스에 내려주고 갑시다.”

“네, 전하. 프랑스 사람들 중에서도 북미에 이주하고 싶어 하는 신교도들이 많지만 역시나 대부분은 고향에 남으려나 봐요.”

“마침 위그노 전쟁이 끝나서 기대가 클 것이오.”

에스파냐에서의 마지막 밤이 지나갔다. 중요한 우방국과 우호와 친선을 나눠서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새로 즉위한 펠리페 3세 때문에 조금 걱정이 들었지만, 군주가 영민하지 못하면 신하들이 잘해낼 것으로 믿어야 했다. 고산국 입장에서는 나쁠 것 없었다.

============================ 작품 후기 ============================

스페인이 아닌 유럽으로 넘어가는데 그리 길지 않을 것 같아 편 제목은 그대로 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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