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90 50. 에스파냐 =========================================================================
“흑!”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비올레타.”
점심을 비올레타와 그녀의 부모 팔라완 백작 부부와 함께 했다. 에스파냐 새 국왕의 면모를 확인한 세 사람은 식사도 제대로 못한 채 한숨만 내쉬었다. 걱정이 태산 같았던 비올레타는 결국 이민호 품에 안겨 훌쩍거리고 말았다.
“정말 상상하기조차 힘든 자가 국왕이 됐습니다. 폐하의 용안을 뵙기가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폐하! 염치없는 말씀드려서 죄송하지만 국왕폐하께서 우방국 군주로서 저희 에스파냐를 잘 보살펴주시길 당부 드려요.”
“어허! 여보! 그런 부탁은 아니 되오. 군주는 그 나라를 위해 항상 최선의 결정을 내려야 할 의무가 있소. 고산국과의 관계에서 에스파냐가 손해를 보게 되더라도 마땅히 감수해야 하오.”
“하지만 어느 정도까지죠. 이대로 놔두면 에스파냐가 얼마 못 가서 망할 것 같아요. 고향이 외국 군대의 말발굽에 짓밟혀도 좋아요?”
전 필리핀 총독 다스마리냐스 부부의 걱정을 이민호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에스파냐 국왕이 중간에 바뀌면 좋을 텐데, 이민호가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 봐도 에스파냐에 반란이 일어나 왕이 교체됐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다. 1700년까지 수준 이하의 국왕들이 다스리다가 대가 끊기는 바람에 에스파냐 계승 전쟁이 일어난다는 단편적인 상식뿐이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에스파냐의 우방으로서 도와줄 수 있을 때는 도와주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사실 에스파냐가 중남미를 고산국에 빼앗긴다 해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고산국이 더 이상 영토를 확장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에스파냐를 계속 우방으로 두는 편이 고산국의 국익에 합치될 것입니다.”
잠시 후 데니아 후작이 숙소를 방문했다. 다른 고관대작들을 줄줄이 달고 다니는 것이 마치 펠리페 3세 대신 왕 노릇하는 것 같았다.
에스파냐 고위 귀족이 시에스타 시간에 활동하는 것은 특이한 경우였다. 물론 에스파냐 중부와 북부는 별로 덥지 않은 지역이고 지금은 햇볕이 따스하게 느껴지는 가을이라 반드시 낮잠을 자야 할 필요는 없었지만, 오래도록 존중된 문화였다.
“고산국 국왕폐하께 에스파냐 국왕의 진실한 모습을 보여드리기 전에 저희들 입장에서는 큰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그 고충을 충분히 이해하겠소, 후작.”
예조 판서가 데니아 후작을 설득하기까지 뇌물이 많이 들었다. 그러나 뇌물을 쓴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바하마 제도를 넘긴 것이오?”
“섬이 자그마치 700개가 넘는다지 뭡니까? 도저히 다 지킬 수 없고 해서 고산국 해군의 도움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섬이 700개가 넘는다고요? 그보다 적을 텐데, 우리 해군이 탐사를 제대로 안 했나? 확인해보겠소.”
이민호가 화들짝 놀랐다. 휴양지로서 바하마는 파라다이스가 분명했다. 야자수 아래 황금빛 백사장과 파란 하늘,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천혜의 관광지라서 덥석 받았는데, 섬이 700개가 넘는다면 플로리다에 주둔한 해군 전선 전대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됐다. 그래서 급히 지도를 가져와서 확인했다.
“지도를 보니 바하마 제도가 쿠바 섬의 북쪽과 동쪽을 가리는 식으로 퍼져 있군요.”
“헤헤! 쿠바가 에스파냐에 매우 중요하지 않습니까? 바하마 제도를 잘 지켜주십시오.”
에스파냐는 고산국 해군을 해적들과 싸움 붙이고 그 사이에 에스파냐 선단의 안전을 도모하겠다는 의도로 바하마 제도를 고산국에 넘겼다. 펠리페 3세에게 즉위 축하 선물을 안 줬더라도 언젠가 고산국에 넘길 계획을 갖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영토를 넘긴 것을 두고 에스파냐의 음흉한 계략이라고 비난하기에도 이상했다.
“후작! 잠시 지도를 보시오. 여기 표시에 따르면 바하마 제도에 섬이 700개가 안 된다고 나왔습니다.”
“이상하군요. 아하! 고산국에서 발행한 지도에는 바하마 제도의 범위가 저희 것과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소? 미래에 영토분쟁이 생길지도 모르니 이 기회에 확실히 영토 경계선을 정합시다. 우리 해군이 바하마 제도로 표시한 섬이라도 얼마든지 에스파냐 영토로 가져가시오.”
“그 반대입니다, 폐하. 에스파냐에서는 바하마 제도 남동쪽 투르크 제도를 바하마 제도의 일부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터크스 케이커스 제도는 바하마 제도 남동쪽에 위치한 섬들이었고, 1512년에 에스파냐에서 발견했다. 이 섬들은 나중에 영국 식민지였을 때 바하마와 통합된 적이 많았지만 지리적으로 분리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민호가 위치를 확인하곤 벌컥 화를 냈다.
“후작!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그곳은 쿠바보다 아이티에 훨씬 가깝지 않소?”
“플로리다 앞에서 시작해서 같은 방향으로 쭉 이어진 섬들입니다. 이곳도 고산국에서 지키셔야 합니다.”
“후작에게 죽빵을 한 대 날리고 싶다. 통역관은 통역하지 마라.”
논란이 오가다가 데니아 후작이 결국 터크스 케이커스 제도와 함께 쿠바와 아이티 사이의 해협 방어를 고산국 해군에게 성공적으로 떠넘겼다. 에스파냐가 보물선단의 안전을 도모하는 동안 고산국은 공짜로 항로를 지켜줘야 하게 생겼다.
데니아 후작이 무능하다고 들었는데 이 정도면 꽤나 유능한 편이었다. 물론 영토를 넘겨주겠다고 하면 절대 사양하지 못하는 이민호의 성격 탓도 컸다.
“해군 유지비용이 많이 드는 판에 순찰해야 할 섬들이 늘어나면 안 되는데, 골치 아프게 됐소.”
“나중에 에스파냐에서 고산국에 양보할 일이 많을 겁니다. 이 정도 부담은 해주셔야지요. 헤헤!”
“끄응. 더 이상 고산국에 영토를 넘기지 마시오.”
데니아 후작이 용무를 마쳤으면 빨리 돌아갈 것이지, 괜히 우물쭈물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이민호가 상인이었을 무렵 조선과 명나라 관리들을 만나면서 자주 봤던 행동이라 대충 속셈이 파악됐다. 진주목걸이를 가져와 데니아 후작에게 다섯 개, 수행원들에게 한 개씩 선물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부인과 시집 간 따님들께 드릴 선물이라도 들고 가셔야지요.”
“아! 감사합니다. 진주가 큼직하고 윤기가 나는 게 정말 탐스럽게 생겼습니다. 거의 완벽한 구형입니다.”
“상인들에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완전 자연산 천연진주는 아니오.”
“당연합니다. 천연진주가 이렇게 완벽한 구형으로 만들어지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귀족부인들 사이에서는 천연진주로 통하겠지요.”
귀족부인들이 인공진주인 것을 알면서도 위신 때문에 천연진주로 인정해준다는 뜻이었다. 그만큼 완벽하게 구형인 천연진주를 구하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천연진주는 돈 주고도 못 사고, 품질 좋은 것은 더더욱 구하기 어려웠다. 인공진주를 눈감아줄 수밖에 없는 시장 상황이었다.
덕택에 문제 하나가 가뿐하게 사라졌다. 이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큰소리치면서 진주를 팔 수 있게 됐다. 인공진주라는 이유로 가격을 깎아줄 이유가 없었다.
“진주가 많이 필요한데 혹시 재고가 남는다면 좀 넘겨주시겠습니까? 마드리드 보석상에서 유통되는 도매가격으로 쳐드리겠습니다. 사실 품질은 고산국 생산품이 더 낫습니다만, 저도 좀 남겨야 하니까요. 국왕폐하 밑에서 제대로 일하려면 정치자금이 많이 필요합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여기저기 소모되는 비용이 많았고,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이권에 개입하는 경우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바로 그것이 부패의 온상이었다. 그러나 정치를 하면서 가문에 이익을 챙겨주느라 국고에 손해를 끼치는 파렴치한 자들보다는 훨씬 나았다.
“이해하겠소. 정치라는 것이 돈이 꾸준히 들어가지요. 하지만 필리핀 총독부의 교역상 권리를 인정해서 에스파냐 본토에서는 무역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소.”
“제가 폐하께 알현을 신청하면서 필리핀 총독하고도 이야기를 해놨습니다. 마닐라 갈레온에서 교역하는 양만으로는 에스파냐 귀족들이 사용하기에도 부족해서 말입니다. 옥 도자기나 비단도 남는 것은 넘겨주시면 좋겠습니다. 일부는 개인 자금으로 매입하고, 나머지 대부분은 국고에서 지불하겠습니다. 국고를 살찌울 기회를 놓치지 않겠습니다.”
“훌륭하시오. 하지만 마차 몇 대에 소량의 선물밖에 가져오지 않았소. 나중에 비고 항에서 상품을 인수하시오.”
“그렇다면 제가 믿을 만한 사람을 동승시켜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시오.”
적당한 양을 빼고 나머지 상품을 모두 처분했다. 며칠 후 마드리드에 사치품이 많이 풀리는 대신 은 유통량이 대폭 줄어들어서 마드리드에서 상품 가격이 오히려 안정되는 효과가 생겼다.
이민호는 오후에 고대 로마식의 커다란 목욕탕에서 쉬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하녀들이 욕탕 안에서 홀딱 벗고 물놀이를 하며 놀았다. 처음 팔려왔을 때 겁에 질렸던 것과 달리 활짝 웃는 것이 이제는 마음을 완전히 놓은 듯했다.
그리고 이민호가 지켜보는데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욕탕 안에서 첨벙첨벙 소리를 내며 공을 갖고 놀았다. 덕택에 바로 앞에서 우크라이나 하녀들의 알몸을 여유 있게 감상할 수 있었다.
“다 큰 애들이 하는 짓이나 얼굴은 어려보이네. 귀엽다.”
“어머! 키가 커서 그렇지 쟤들 중에 아주 어린 애들도 있어요. 열네 살부터 스무 살 사이래요.”
“엥? 몸은 저렇게 성숙한데. 그런데 말이 통해?”
“손가락 오므려서 나이를 세었죠. 걱정 마세요. 제가 열아홉 넘은 애들만 주인님께 봉사 드리게 할게요.”
파티마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렇다면 우크라이나 하녀들 일부는 베이비 페이스가 아니라 그냥 베이비였다. 체형이 늘씬하고 가슴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크지 않아서 딱 좋다 했는데 키는 아니더라도 다른 부위에서 아직 성장 가능성이 남아있었다.
“궁녀가 아니라 하녀로 고용한 셈인데 그래도 될까 모르겠어.”
“풋! 주인님의 의도를 제가 아는데요. 쟤들이 다른 곳에서 일하겠다면 설마 보내주실 거여요?”
“간다면 보내줘야지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보내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여자들이 다들 이민호의 머리 위에서 놀았다.
“앞으로 유럽에 자주 오시게 될 텐데, 유럽 땅에 별궁이 필요하지 않아요? 이 궁전도 꽤 예뻐요.”
“지금은 아니야. 괜히 별궁을 만들었다간 관리하기 골치 아플 거야. 왜?”
“열아홉 명 다 데려가면 혜영님이 한숨 쉴 것 같아서요.”
베네치아 시녀들 일곱에 우크라이나 하녀 열둘을 합하면 열아홉이었다. 짧은 시간에 많이 늘어났으나, 하나 같이 비올레타나 파티마에 필적하는 대단한 미녀들이었다.
“여자를 궁에 들이는 문제는 혜영도 이미 포기한 것 같은데, 뭐. 베네치아 시녀들은 반드시 왕도에 데려가야 해. 일을 가르쳐야 하니까.”
“지중해에서 활동한 상인 가문의 여식들이라 반대로 우리가 배워야 하지 않나요?”
“지중해 상업에 관해서는 베네치아 시녀들이 더 잘 알겠지만 고산국에 대해 알려줄 필요가 있어.”
고산국의 생산능력은 유럽에서 예상한 것보다 훨씬 컸다. 현재 유럽에 은이 너무 많이 유통돼 상품 가격이 폭등하는 가격 혁명 중이라 하나 고산국에서 작정하고 상품을 유럽에 퍼부으면 가격이 폭락할 정도였다.
그러나 고산국에서 교역 규모를 통제하지 않으면 현재 유럽 여러 곳에서 싹을 틔운 면직, 견직, 모직 등 여러 가지 산업은 완전히 망가지고 만다. 피렌체와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직물 공업이 현재 독일로 옮아가는 추세였는데 여기에 고산국 상품이 쏟아지면 이탈리아와 독일의 경제적 몰락이 빨라질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장사해서 이익을 최대한 얻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교역 상대가 망하지 않게 하면서 오랫동안 이익을 빼먹는 방법을 배우게 될 거야.”
“저는 그런 것은 잘 몰라요. 하지만 제가 잘하는 것이 있죠.”
파티마가 온몸으로 이민호를 자극했다. 피차 알몸이면서 꾸준히 흥분한 상태라서 물속에서 쉽게 결합할 수 있었다. 신나게 뛰어놀던 우크라이나 하녀들이 입을 다물고 두 사람을 힐끔거렸다. 물속이라 다 보이지 않았지만 둘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조문단에 속해 마드리드를 방문한 여자들 중에서 에스파냐 화가들이 가장 그려보고 싶어 하는 모델이 이국적인 용모의 민영과, 묘하게 색기 어린 파티마였다. 이 정도 화사한 얼굴은 현대에서도 쉽게 보기 어려웠다. 그리고 장점이 또 있었다.
“우크라이나 하녀들 교육을 제가 맡았어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조금 겁이 나는군.”
파티마가 우크라이나 하녀들에게 뭘 가르쳤는지 기대가 되면서 한 편으로는 걱정됐다.
============================ 작품 후기 ============================
마드리드 내용이 한 회 분량 남았습니다.
오늘 중에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