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88 50. 에스파냐 =========================================================================
기병과 장갑차 대열 중간에 필리핀에서 함께 출발한 에스파냐 귀족들이 탄 마차 몇 대가 섞여 있었다. 해안 평야를 지나 산맥을 넘는 동안 진창에 빠진 마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정이 계속 지체됐다. 그래서 마차에서 말을 떼어내고 장갑차 뒤쪽에 연결해 빠르게 움직였다. 마차바퀴가 부서지지 않는 한도에서 최고 속도로 달릴 수 있게 됐다.
이동 중에 이민호는 비올레타 및 베네치아 시녀들과 같은 장갑차를 타고 갔다. 도로 대부분이 꼬불꼬불한 산길에 비포장이라 마치 짐짝처럼 실려 가는 기분이었다. 보병 탑승 공간을 화려하게 치장해봤자 어차피 장갑차 내부일 뿐이었다. 이것이 백조 네 마리가 끄는 마법의 마차의 진실한 모습이었다.
“비올레타! 마리가 멀미를 심하게 앓는 것 같소. 위로 올라가서 주변 경치를 구경하라고 하시오.”
“위에 세 명이나 있어요. 눈 감고 있으라고 할게요.”
아리따운 베네치아 처녀가 같은 차량에 일곱 명이나 탔지만 이민호가 건드리고 말고 할 상태가 도저히 아니었다. 시녀들은 먹은 것도 없는데 마구 토했다. 베네치아 출신이라 뱃멀미는 안 하는 여자들이 땅 멀미를 심하게 했다.
발렌시아에서 마드리드까지 직선거리는 겨우 200km 남짓했으나 도로 사정이 나빠 나흘 일정을 잡았다. 중간 중간 작은 도시나 마을에서 묵었다. 귀족의 영주관이나 여관 건물을 빌려 숙박할 때 장갑차들이 건물 사방을 에워싸면서 경계했다.
그러나 다들 지쳐서 불침번을 제대로 설 수 있을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가끔 밤에 총소리가 나서 깨어보면 주민들이 도둑질하러 기어들어왔다가 붙잡힌 경우였다.
“에스파냐가 정치적으로 안정돼 있다고 들었는데 도둑이 많소.”
“고산국이 워낙 부자 나라로 소문나서 그래요. 그리고 내부 소비세를 두 배로 올리는 바람에 에스파냐 사람들도 요즘에는 살기가 팍팍해요.”
비올레타가 권해서 도둑질하려다가 잡힌 에스파냐 사람들을 풀어주었다. 간혹 집시 여인들이 병사들을 유혹했으나 이미 대부분이 유부남인 기병과 해병들은 도깨비처럼 생긴 유럽 여자들에게 결코 넘어가지 않았다. 병사들이 보기에는 백인 여자들을 가까이 하는 이민호가 이상한 취향을 가진 인간이었다.
사흘 만에 산맥을 넘었다. 평지에 도달한 이후 널찍하고 평탄한 도로를 만난 장갑차들이 부드럽게 달릴 수 있었다. 발렌시아에서 출발한 나흘 만에 드디어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이 시대 기준으로 마드리드는 유럽에서 대도시에 해당했다. 특히 궁전과 거대한 성당이 시내 여러 곳에 세워져서 도시의 스카이라인이라 불릴 만한 것을 갖고 있는 몇 안 되는 도시였다.
마드리드에서는 여전히 침울한 국장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시민들이 대로에 몰려나와 이민호 일행을 환영했으나 웃고 떠드는 것은 극히 자제해서 열광적이었던 발렌시아와 전혀 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후계자인 펠리페 3세가 좋은 왕이 되지 못할 거라는 걱정 때문에 시민들이 더 암울한 표정을 짓게 됐다고 나중에 들었다.
조문단은 마드리드 시내를 지나 북서쪽 과다라마 산맥에 위치한 엘에스코리알 궁전으로 직행했다. 마드리드 교외 농촌 지역은 유럽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농민들이 죽지 못해 땅을 일구는 그런 절망의 땅이었다. 널따란 도로 덕택에 빠른 시간에 엘에스코리알에 도착할 수 있었다.
펠리페 2세가 에스파냐 왕가의 무덤으로 삼기 위해 직접 수도원과 교회 건설을 지시했으며, 20년 넘는 공사 끝에 엘에스코리알 궁전이 완공됐다. 말년에 통풍으로 인해 움직일 수 없게 된 펠리페 2세는 이곳 엘에스코리알에서 일하다 죽었다. 세계사에 큰 발자국을 남기고 한 시대를 풍미한 대군주는 의외로 차분히 생을 마감했다.
“내일 오전에 전하께서 에스파냐 국왕의 묘에 참배하시겠습니다. 저녁에는 새로 즉위하신 에스파냐 국왕이 주최하는 만찬이 예정돼 있습니다.”
예조판서가 에스파냐 쪽과 협의해 다음 날 일정을 보고했다. 이민호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예조판서가 한숨을 내쉬며 추가로 보고했다.
“새 국왕과의 정식 알현 후에 독대를 요청했으나 에스파냐 대신들이 몹시 곤란해 합니다. 어떻게든 새 국왕과 접촉하는 것 자체를 막으려고 필사적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새 국왕의 자질이 크게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에스파냐에 온 목적이 바로 그것이오. 판서가 어떤 방법을 쓰든 반드시 새 국왕과의 면담을 성사시키시오.”
“알겠습니다. 총신 데니아 후작에게 뇌물을 주고 에스파냐의 자존심을 살짝 건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며칠간 지겹게 이동한 탓에 이민호는 저녁을 대충 먹고 바로 침대에 기어들어가 잠에 빠졌다. 거리로는 겨우 하룻길을 산길을 지나느라 나흘이나 걸렸으니 아주 지긋지긋했다. 반대로 에스파냐 군인과 관리들은 고산국 조문단의 이동속도에 놀라 자빠질 정도였다.
이민호는 일찍 잠들었다가 새벽에 깨었다. 넓은 침대에 혼자만 누워있자니 왠지 모르게 쓸쓸했다. 침대 옆 소파에 베네치아 시녀 하나, 갈라티아 궁녀 하나, 우크라이나 하녀 둘이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여진족 호위는 침대 밑이나 커튼 뒤에 숨어 있을 것이다. 호위들 절반은 밤에 활동했고, 낮에는 어디선가 안 보이는 곳에서 잠을 보충한다고 들었으나 낮잠을 자는 모습을 이민호가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쯧쯧! 보조 침대를 갖고 와서 편하게 잘 것이지.”
시녀나 궁녀들이 고산국이나 순양함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지만, 이곳은 외국 땅이라서 국왕의 품위를 조금이라도 떨어뜨릴 만한 일은 철저히 자제하고 있었다. 그 마음이 가상했으나 이민호는 그것이 바보짓이라고 여겼다.
이민호가 여자들을 하나씩 안아서 침대로 옮겼다. 다들 피곤해서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지경으로 곤하게 자고 있었다. 자는 모습이 다들 천사 같이 예뻤다. 에스파냐 국왕 문상을 앞두고 나흘째 독수공방인 이민호는 처녀들을 옮기면서 살짝 욕심이 동했으나 하루만 더 참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우크라이나 하녀를 옮기는데 직접 보기 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멋진 비율을 가진 몸매였다. 검은색 스타킹과 가터벨트 사이로 하얗게 빛나는 허벅지가 눈길을 끌었다.
하녀가 눈을 뜨더니 화들짝 놀랐다가, 취침등을 통해 이민호 얼굴을 확인하곤 오들오들 떨었다. 안아서 옮기는 중에 메이드 복장을 한 소녀가 가련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 장난기가 샘솟았다. 그러나 말이 안 통해서 오해만 더 깊어질 것 같아 관뒀다.
“편하게 자라.”
침실에 여자들이 네 종류나 있었다. 다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폭력에 의해 부모와 강제로 헤어지고 노예로 팔려와 이민호의 보호 아래 있게 된 젊은 여자들이었다. 여진족 호위들은 거꾸로 이민호를 보호하는 셈이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노예 매매로 인해 고산국에서 노동력이나 군사력을 쉽게 대량으로 얻은 적이 있었다. 이민호도 분명히 노예제를 이용해 이득을 얻었다. 하지만 이민호는 노예제가 인류사상 가장 끔찍한 제도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거의 식인에 필적한다고 봤다.
그래서 지금 당장이라도 노예 매입을 통해 북미대륙의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더라도, 좀 더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길게 보자면 노예제보다는 이민을 받아들이거나, 자체 출산율을 증대시켜 해결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주인님.”
“응? 그새 조선말을 배웠어?”
여진족 호위나 승은을 입은 갈라티아 궁녀가 이민호를 부르는 호칭이 주인님이었다. 메이드 복을 입은 늘씬한 금발벽안의 처녀가 주인님이라고 부르니 느낌이 전혀 새로웠다.
이민호가 하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고용인이라고 했지만 고향에 돌아갈 수 없으니 우크라이나 하녀들도 결국 갈라티아 궁녀들과 비슷하게 될 것으로 예상했다. 우크라이나 하녀 12명이 하나같이 매력적이라서 억지로 내보낼 생각도 없었다.
“고마워요.”
“그래. 피곤할 텐데 더 자라.”
이민호가 하녀의 머리를 쓰다듬자 무거워서 깜빡거리던 눈꺼풀이 결국 내려앉았다. 커다란 눈을 가리려면 눈꺼풀 면적도 넓어야 할 것 같았다. 위로 높이 솟은 콧대 아래 빨갛고 도톰한 입술에 이민호가 살짝 입을 맞췄다. 우크라이나 하녀가 잠결에 이민호의 목을 끌어안고 품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다음 날 오전 펠리페 2세의 묘지에 참배하기 위해 조문단 전체가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이민호를 비롯해 비올레타와 수행원들이 입은 옷은 모두 검은색 일색이었다. 의장대 역할을 맡은 근위병들도 검은 복장으로 통일했고, 심지어 소총도 검은색으로 칠했다.
이민호는 조문단을 이끌고 엘에스코리알 궁전에 도착한 다음, 곳곳에서 분수가 물줄기를 뿜어내는 정원을 지나쳐 입구를 통과했다. 6층 이상 높이의 석조건물이 사방을 둘러싸고 창문이 나 있었으나 각 층마다 천장이 높아 전체적으로 2층인지 3층인지 바깥에서는 알 수가 없었다. 가운데 성당의 돔형 지붕은 90미터는 확실히 넘고 100미터가 살짝 안 되는 높이였다.
에스파냐 근위병들이 핼버드와 장창을 세우며 고산국 조문단이 통과하길 기다렸다. 여기서부터 이민호와 조문단은 사제의 안내를 받아 ‘제왕들의 파티오’라는 건물로 들어섰다. 그 안쪽부터 성당인데 30미터 높이의 천장이 화려하고 장엄한 프레스코화로 장식돼 있어서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왔다.
“고산국 국왕폐하! 여기서부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입니다.”
사제의 안내를 받아 왕실 영묘 중에서 펠리페 2세의 거대한 관 앞에 도착했다. 황금 판으로 곳곳을 장식한 검은 석관 안에 펠리페 2세의 시신이 안치돼 있었다. 반대쪽에는 펠리페 2세가 이장한 부왕 카를로스 1세의 관이 있었다.
이때부터 주교가 집전하는 천주교 의식에 따라 미사 절차가 진행됐다. 소년 성가대가 높은 음으로 지하에서 노래를 부르니 온몸에서 전율이 일어날 정도였다. 구스만 총독과 다스마리냐스 전 총독 부부가 침통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미사는 계속 진행됐다.
“이제 거의 마지막 순서입니다. 고산국 국왕폐하와 북 아메리카 공작부인께서 한 걸음 다가가 펠리페 2세 선왕께 마지막 인사를 올리십시오.”
관 앞에 똑바로 선 다음 45도 정도 허리를 숙이면 되는 인사였다. 그러나 이민호는 괜히 아쉬워서 조선식으로 절을 두 번 올렸다. 물론 생존한 동안에는 동등한 국왕 입장인 이민호에게 절을 받을 기회가 절대 없었겠지만, 이미 죽은 자에게 존경심을 표하는 것은 상관없었다. 70대에 죽고 40년 넘게 재위한 것만으로도 펠리페 2세는 대단했다.
필리핀 총독부를 통해 고산국이 신세를 많이 졌다는 생각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이민호가 무릎을 꿇고 정성스럽게 머리를 조아렸다. 비올레타가 당황하면서도 얼른 주저앉아 조선 여자들이 하는 것처럼 절을 했다.
주교 입장에서는 이교도의 관습이라도 이 정도는 용납하면서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오히려 동양에서는 절하는 것이 최상의 존경을 표하는 예절임을 알고 좋게 소문을 내주었다.
국왕의 묘소 참배가 끝나고 조문사절단은 새 국왕 즉위 축하사절단으로 변모했다. 조문사절단 전체가 칙칙한 검은색 복장을 벗고 화려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이민호는 오후에 새로 즉위한 펠리페 3세를 만났다. 예조 판서의 뇌물 공세가 통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새 국왕을 만나면서 이민호는 몹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대가 동방의 떠오르는 태양, 고산국왕 고미노라는 젊은 영웅이로군. 나는 이번에 새로 즉위한 펠리페 3세야. 유럽 최강대국의 군주이며 로마 가톨릭의 수호자가 됐지. 교황도 내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냐.”
두 국가 국왕의 정식 알현 즉 상견례가 끝나고 편안한 자리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언어 능력이 떨어지는 자가 하는 말을 들으려면 인내심이 많이 필요했다. 내용도 상상 이상으로 엉망이었다.
이민호는 꾹 참고 통역이 전해준 말을 들었다. 배석한 에스파냐의 고위 귀족과 대신들이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어, 그래. 너 대단하다. 에스파냐는 큰 나라니까 잘 다스려봐라.”
“좋아. 그렇게 편하게 말해도 돼. 늙은 신하들이 궁중예절을 따지더라도 내가 다 허락해줄게. 너는 나하고 비슷한 강대국의 국왕이니까.”
이민호는 새파랗게 젊은 에스파냐 국왕과 인내심을 갖고 대화를 나눴다. 나이는 비슷해도 지능이 낮고 개념은 아예 가출해버린 것 같은 펠리페 3세와 같은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몹시 불편함을 느꼈다. 필리핀 역대 총독들이나 며칠 전에 만났던 발렌시아 부왕 정도면 펠리페 3세에 비해 정말 훌륭한 국왕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펠리페 3세가 성격이 개차반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일부러 조문단을 빙자해서 이민호가 직접 에스파냐에 온 것은 펠리페 3세를 직접 만나 평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다.
“즉위 축하 선물 목록을 봤는데 고산국의 부는 정말 대단해. 앞으로 신하들에게 위신이 설 것 같아. 잘 쓸게. 정말 고마워.”
“우방국인데 당연히 이 정도는 해줘야지.”
속이 좀 쓰렸지만 국가의 위신을 세우는 것은 비싸게 먹히는 일이었다. 즉위 축하 선물로 넘긴 상품은 향신료와 비단, 옥 도자기와 나전칠기, 그리고 차 등으로 고산국 수출액 기준으로 백만 냥이 넘어가는 가치였다. 제노아에서 확인한 지중해 무역도시 기준으로 5백만 냥이 훨씬 넘는 액수였다.
“에스파냐도 대국이니만큼 이에 상응하는 것을 선물해야지 위신이 서겠지? 어떤 걸 원해? 아! 플로리다 앞에 바하마 제도를 줄게.”
“아니, 괜찮아. 아무리 국왕이라도 영토를 외국에 마음대로 넘기면 대신들이 싫어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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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통왕 등장.
주인공에게는 위기이기도, 기회이기도 하겠지요.
오전 중에 하나 더 올릴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