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486화 (435/1,000)

00486  50. 에스파냐  =========================================================================

50. 에스파냐

함대는 이베리아 반도 정 중앙에 위치한 마드리드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인 발렌시아를 향했다. 에스파냐의 무역을 평가하려면 이베리아 반도 남서쪽 세비야에 가까운 카디스를 선택해야 하고, 추방당할 예정인 모리스코인들을 살펴보려면 남쪽 그라나다에 갈 수도 있었으나, 일단 마드리드에 가서 조문을 해야 하므로 두 곳 모두 나중에 찾기로 했다.

- 전하! 함교입니다. 북동쪽에 돛대가 나타났습니다! 같은 배에 돛대 세 개입니다. 배가 또 있습니다.

함장이 전화로 보고해서 이민호가 급히 함교로 달려갔다. 마요르카 섬 방면에서 범선 네 척이 나타나 가까워지고 있었다. 범선들은 남쪽 알제리로 향하는 침로를 잡고 있었다.

“선형은 갈레온입니다. 최근 에스파냐와 베네치아에서 지중해 무역에 도입하고 있는 종류입니다. 깃발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범선의 항해능력이 점차 향상되면서 지중해에서도 노예들이 노를 젓는 갤리선이 아닌 갈레온으로 무역을 하는 경우가 흔해졌다. 이민호는 그 범선들을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는데 갑자기 베네치아 시녀들이 비명을 질렀다.

“갈레온 아니에요. 상갑판이 한 칸 더 높다면 잉글랜드 해적선이에요!”

“또 해적이야? 어떻게 된 게 지중해 전체가 물 반 해적 반이네. 전단장! 저 선단을 정지시키고 임검을 하시오!”

수송선들을 뒤에 두고 순양함들이 흩어지면서 넓게 반원형으로 전개했다. 범선들이 허둥지둥 항로를 바꾸려했으나 순양함이 훨씬 빨랐다. 범선들이 도주를 포기하고 고스란히 포위망 안에 갇혔다.

함포가 돌아가고 해병들이 총을 겨눈 가운데 이민호가 고개를 내밀었다. 이 시대에 지저분한 것은 상선 선원이나 해적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단검이 꽂힌 가죽 혁대나 권총 벨트를 양 어깨에 치렁치렁 걸친 것을 보아 해적이 틀림없었다.

그것도 베네치아 시녀들이 말한 대로 잉글랜드 해적이었다. 루니 닮은 인간들이 여럿 있는 것으로 알아봤다. 바르바리 해적과 달리 오스만 해군을 자처하지 못하는 잉글랜드 해적이라면 당장 때려잡아도 상관없겠지만, 좀 더 확인하기로 했다.

“굿 모닝, 젠틀먼?”

“굿 데이 투다이! 아르트 다우 엥글리시멘?”

“발음이 참. 위 컴 프럼 고산. 스삑 어나더 랭귀지.”

“워어! 스페인어로 대화하겠습니다.”

영국인에게 영어 발음 후지다고 뭐라 하면 안 되는데, 이민호가 공대 출신이라 짧게 배운 영어로도 너무 어색한 발음을 들어서 참을 수 없었다. 이 시대 영어는 현대 영어와 많이 달라 해적들과 직접 영어로 의사소통하기 어렵기도 했다. 2인칭 단수 인칭대명사로 you 대신 thou를 쓰고 동사도 변형되던 시대였다.

“너희들은 해적인가? 현재 지중해에서 활동하는 잉글랜드 사략선은 없다고 알고 있다.”

“그냥 무역선입니다.”

“기독교 영역에서 노예를 수확해서 이슬람 지역에 파는 무역선이란 뜻이야?”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순박한 상인들입니다.”

“상인들이 순박할 리가 없지. 어떤 상품을 파는데?”

“에, 그게. 마르세유 항에서 양모를 팔고 포츠머스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현재 빈 배입니다.”

“오호! 지브롤터 해협에서 에스파냐 함대가 잉글랜드나 네덜란드 배의 출입을 막지 않아?”

“밤에 지나가면 됩니다. 들키더라도 뇌물 좀 건네주면 안 잡습니다.”

바로 몇 시간 전에 셜리 형제가 활동하는 것을 봤으니 영국인이 지중해에서 상업 활동을 한다고 뭐라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흘수선이 꽤 깊어 보여 배에 뭔가를 잔뜩 태웠을 가능성이 높았다. 선장이 거짓말하는 것이 분명해 이민호는 선내 수색을 하기로 결정했다.

배를 수색하려고 널빤지를 걸치고 해병들이 건너가려는 찰라 범선의 아래 갑판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스페인어였다.

“살려주세요! 해적들에게 납치됐어요!”

“모두 손을 들고 무기 버려!”

용기 있는 비명으로 인해 해적들의 운명이 결정됐다. 급히 화승총을 쏘려던 해적 몇 명이 해병들이 쏜 총탄에 맞아 줄줄이 쓰러졌다.

돛대 위쪽 망루에서 이민호를 저격하려던 선원은 처음부터 요주의대상이었다. 대여섯 발을 동시에 맞고 길게 비명을 지르며 그 선원이 갑판에 떨어진 직후, 나머지 해적들이 저항을 포기하고 손을 들었다. 이민호가 잉글랜드 해적들을 비꼬았다.

“해적사업이 돈이 되나봐.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일하고.”

“멀리서 오셔서 오해하신 모양인데, 저희들은 단지 구교도 국가인 에스파냐와 종교 전쟁 중일뿐입니다.”

“그럼 에스파냐 함대와 싸우지 그랬어?”

17세기 초반 사이먼 더 댄서 같은 네덜란드 해적들이 북아프리카 해안에서 활동하기 전부터 잉글랜드 해적들이 지중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원래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사략선 면허를 받았으나 더 좋은 사냥터를 찾다가 활동 해역에서 벗어나 아예 해적으로 전업한 자들이었다. 지브롤터 해협을 에스파냐 함대가 막고 있다지만 이렇게 수시로 뚫려 해적선들이 자유자재로 들락거렸다.

잉글랜드 해적들은 이슬람 해적선들로 들끓는 이곳 지중해에서 더 만만한 에스파냐와 베네치아 무역선들을 주로 약탈했다. 말로는 신교도의 종교 자유를 위해 구교도를 공격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당연히 돈 냄새를 맡고 내린 결정이었다. 잉글랜드 해적들은 금은보화를 바치고도 영국 국왕으로부터 사면을 받지 못하자 나중에는 아예 이슬람으로 개종한다.

“해적 353명을 체포했습니다. 해적이 납치한 마요르카 주민이 배 네 척을 합해 6백 명에 달합니다. 구호 절차를 실시했습니다.”

“좋아. 또?”

“선장을 심문해보니 최근 베네치아 무역선을 납치하지 못해 운영비라도 벌려고 노예사냥에 나섰답니다. 그래서 선장실을 샅샅이 수색해 봤더니 역시 금과 은이 몇 궤짝 없었습니다.”

“쯧쯧! 수고했다, 중대장.”

해병 중대장이 다시 해적선으로 돌아가 수색을 지휘했다. 마요르카 주민들은 수송선으로 옮겼다. 가난한 농민과 어민에게 약탈할 재산이 없으니 몸이 가장 큰 재산이었다. 주민들을 납치해 노예로 파는 해적들은 그 마지막 재산까지 털어가는 악독한 자들이었다.

전리품이 생겼으니 나눠야 했다. 병사와 노예를 불문하고 함대에 승선한 인원 모든 이에게 은 두 냥씩 나눠줬더니 은 한 궤짝만 남았다. 우크라이나 하녀들이 은을 받고 화들짝 놀라 울부짖는데, 말이 안 통해서 쫓아내지 않는다는 설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항해는 계속됐다. 수평선에 함대가 나타나자 해적으로 착각한 에스파냐 어선들이 분분히 도망가기 바빴다. 견시가 소리를 지르면서 모든 함선에서 입항 준비가 시작됐다.

“육지입니다! 에스파냐 땅입니다!”

함대는 조심스럽게 발렌시아 항에 입항했다. 처음에 사라센 해적으로 착각한 도시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그러나 그림으로만 봤던 태극기를 확인한 다음 모든 시민이 항구로 뛰쳐나와 고산국 함대를 환영했다.

유럽에서 외교적으로 고립된 에스파냐에게 고산국은 고마우면서도 중요한 우방이었고, 시민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민호가 항구에 발을 내딛는 순간 다시 한 번 함성이 터져 나왔다. 부두에 고위 관리들이 나와 있었다.

“에스파냐의 맹방이며 아시아의 강대국인 고산국의 국왕폐하를 기쁜 마음으로 환영합니다! 설마 이렇게 빨리 오시리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고향을 방문하신 비올레타, 북 아메리카 공작부인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발렌시아 항에 도착한 이민호와 비올레타는 ‘발렌시아 왕국’의 부왕 후안 알폰소 피멘텔(Juan Alfonso Pimentel de Herrera)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발렌시아는 물론 그 북쪽 카탈루냐도 에스파냐 국왕의 직접 통치 지역이 아니었고, 아직도 귀족의 특권이 강한 곳이었다. 심지어 발렌시아와 아라곤, 나폴리 등은 법적으로는 아직 에스파냐 영토가 아닌 독립 왕국이었고, 독자적인 법률체계를 유지하는 것은 물론 폭넓은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구스만 필리핀 총독과 전 총독 다스마리냐스 부부도 큰 환영을 받았다. 비올레타와 다스마리냐스 부인은 마치 여왕처럼 온갖 커다란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해서 고산국의 부가 뭔지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팔라완 백작, 백작 부인도 원로에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전 필리핀 총독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는 고산국으로부터 영지 없는 백작 작위를 받았다. 큰 정치적 의미는 없고 다만 비올레타의 부모인 전 총독 부부에게 연금을 지급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 로버트 셜리가 페르시아의 대사로 임명돼 유럽에서 활동하는 동안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청으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은 것과 비슷한 단순 명예직이었다.

출발 전에 왕비 자리를 못 줘서 미안하다고 이민호가 사과하면서 비올레타에게 공작부인 직첩을 주었다. 북 아메리카 공작부인이라는 엄청난 명칭에 비올레타가 화들짝 놀라 몇 번이나 사양했다. 그러나 북미 대륙의 영토 주권을 확고히 하려는 목적을 갖고 이 명칭을 유럽에서 적극 활용하기로 했다.

“국왕폐하! 수에즈 운하가 개통 직전이라고 들었습니다. 사라센 해적만 없어진다면 고산국과 교역을 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게 아쉽습니다. 교황 성하와 말씀을 나눠봤는데 조만간 뭔가 방법이 있을 겁니다.”

사라센 해적 때문에 에스파냐에서 지중해 무역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대신 남서쪽이나 북서쪽 항구가 대서양 무역으로 인해 떠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발렌시아의 시내에는 최근에 새로 지은 건물도 없고 낡은 건물을 수리하지도 못해 쇠락해가는 도시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에스파냐의 부와 행운을 질시하는 것은 영국과 네덜란드뿐만이 아니었다. 프랑스 마르세유 항과 토스카나 공국에서는 해적선들의 입항을 허가하면서 일정 비율을 받는 대신 약탈품을 판매하도록 허용했다. 이런 식으로 에스파냐 함대가 진입하지 못하는 여러 나라의 항구에 해적선은 마음대로 드나들었으니 지중해에서 해적을 소탕하기 어려웠다.

“정말 반가운 소식이군요. 그런데 혹시 에스파냐 해군이 도우면 안 되는 일입니까?”

“아쉽게도 그렇습니다. 이슬람 해적들이 명색은 오스만제국의 해군이니까 에스파냐가 개입하면 오히려 곤란해집니다.”

이민호는 조만간 고산국 함대가 사라센 해적을 쳐부술 거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나가길 바랐다. 그러나 발렌시아 부왕은 쓸데없이 입이 무거운 사람이었다. 오스만제국과 국서를 교환할 때 자연스럽게 소문이 날 것이기에 큰 상관은 없었다.

항구에 접안한 수송선에서 가장 먼저 마요르카 주민들 600여 명을 석방했다. 노잣돈으로 은 두 냥씩 나눠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해적에게 납치돼 북아프리카로 끌려가다가 단 한 나절 만에 석방되면서 은 넉 냥까지 받게 된 마요르카 주민들은 고맙다고 눈물까지 흘렸다. 발렌시아 부왕이 이들의 신병을 인수해 배에 태워 고향에 보내주기로 했다.

해적선 네 척도 발렌시아 부왕이 인수했다. 신형 범선 두 척은 각각 은 16만 에스쿠도, 구형 범선 2척은 척마다 10만 에스쿠도에 구입해서 50만 에스쿠도 넘게 벌었다. 배에 실린 화물이 모두 싸구려라서 실망했던 이민호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그 다음은 알제리와 트리폴리에서 구입한 기독교도 노예들이었다. 5천여 명이 부두를 가득 메우자 발렌시아 부왕이 병사들에게 지시해 안 쓰는 수도원에 임시로 수용시켰다. 해방된 기독교도 노예들이 이민호와 고산국 병사들에게 감사인사를 전한 다음 병사들을 따라갔다.

수송선에는 신교도이거나 귀향하길 거부한 노예 2천여 명이 남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백 명이 밧줄에 묶인 채 순양함 밖으로 끌려나왔다.

“묶인 자들은 당연히 해적이겠지요?”

“마요르카를 약탈했던 잉글랜드 해적입니다. 마요르카 주민들의 진술을 들어보고 처벌을 결정하십시오.”

“철저히 수사하고 마요르카에 심문관을 파견해 조사한 다음 재판에 회부하겠습니다. 해적들은 아마도 교수형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배 값은 배 값이고, 기껏 해적선들을 나포했는데 금은보화가 없어서 이민호가 많이 실망했다. 미워서라도 해적들이 꼭 교수형 당하길 바랐다.

============================ 작품 후기 ============================

하나 더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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