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484화 (433/1,000)

00484  49. 1598년  =========================================================================

공식적인 알현 행사가 끝나고 자리를 옮겼다. 사도궁전 내부에는 길목마다 세로 줄무늬 옷을 입은 스위스 용병들이 할버드를 들고 서 있어서 여진족 호위들이 바짝 긴장했다.

이민호는 비올레타를 옆 자리에 앉히고 교황, 추기경들과 편하게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그 전에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를 위한 건축 기금을 비올레타 이름으로 헌납해서 재정담당 추기경의 얼굴을 헤벌쭉하게 만들었다. 대성당이 원래 역사보다 조금 앞당겨 완성될 것 같았다.

“폐하께서 비록 성도는 아니지만 동양 곳곳에 교회와 신학교를 세워주시고 사제들을 도와주신 사실은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자리를 통해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국왕으로서 종교를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입니다. 다만 제가 다른 종교들도 로마 가톨릭과 똑같이 보호하는 것을 문제 삼지 말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당연합니다. 예전에 걱정스럽게 지켜보던 사제들도 지금은 폐하의 진심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의 개혁과 국제 평화를 추구한 클레멘스 8세는 위그노였던 앙리 4세의 국왕 즉위를 공식 인정함으로써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서게 만들기도 할 정도로 아량이 넘쳤다. 어쨌든 교황이 공식적으로 인정해준 덕택에 이민호가 앞으로 이교도 악마로 몰리지 않게 됐다.

“로마로 오는 중에 사라센 해적들이 베네치아 상선을 약탈하는 것을 봤습니다. 어찌 할 방법이 없어서 저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타깝지만 폐하께서는 국왕으로서 다른 나라와의 우호도 신경 써야 하니까 이해하겠습니다. 국왕폐하께서 베네치아 귀족 영애들뿐만 아니라 기독교도 노예들과 무슬림 노예들까지 모두 해방시켜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유럽의 국왕들이 배워야 할 훌륭한 인격이십니다.”

“돈 들여서 노예를 해방시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수백 년 동안 단지 기독교도라는 이유로 잡아다가 노예로 팔아먹은, 사략선의 탈을 쓴 이슬람 해적을 일소해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 성 요한 구호기사단의 역할 변화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구호기사단과 사라센 해적이 서로를 핑계 댄다는 말씀이시겠지요. 구호기사단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저도 압니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우리가 먼저 물러나기는 어렵다는 점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문제는, 사라센 해적과 성 요한 구호기사단 소속 군함들이 바다에서 마주치면 서로를 피한다는 것이다. 강력한 무장을 한 군함이나 해적선보다는 상선이나 바닷가 마을이 훨씬 쉬운 상대이기 때문이다. 또한 큰돈이 벌리는 사업이기도 했다. 이렇게 해적과 기사단이 존속하는 목적을 잃고 가장 중요한 상대를 못 본 척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조직을 유지하려면 돈이 많이 들어서 이상은 어느덧 현실에 매몰되고 만다. 그래서 평화롭게 살고 싶어 하는 농민과 어민들이 자유와 생명, 재산을 박탈당하는 피해를 계속해서 입게 됐다.

“여섯 달, 제가 오스만제국에 국서를 보낸 다음 여섯 달만 구호기사단을 방어적으로 운영해주십시오. 구호기사단이 북아프리카를 침공하지 않고, 시칠리아나 이탈리아 해안에 약탈하려고 접근하는 해적선만 격멸해달라는 뜻입니다. 그 후에 제가 사라센 해적을 일소하겠습니다. 여섯 달 동안 구호기사단의 운영비는 제가 내겠습니다.”

“이슬람 해적을 없애주신다니 주님의 종으로서 기쁜 일입니다. 구호기사단의 운영은 당연히 성도들이 감당해야 할 일이니 고맙지만 운영비는 사양하겠습니다. 다만 폐하께서 오스만제국과 충돌하지 않을지 걱정입니다.”

“오스만제국도 기독교도들의 해적질에 피해를 입고 있으니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슬람 해적들은 종교적 열정이 아니라 해적질을 계속하기 위해 오스만에 겉으로 신속하는 것뿐입니다. 오스만이 사라지더라도 해적은 남을 것입니다. 이익이 되니까 해적을 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지역이 해적질하기 만만하다는 이유로 기독교도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다음 기독교 지역에서 해적질을 하는 꼴을 며칠 전에 지켜봤다. 요즘은 사라센 해적 중에 이슬람교도보다 원래 기독교도였던 자들이 더 많을 것 같다는 의심까지 들었다.

오스만제국의 정예보병 군단 예니체리도 아직 이 시기에는 기독교 가정에서 아이들을 데려와 이슬람으로 개종시키는 방식이었다. 유럽의 일부 영주들은 이익에 따라 신교와 구교로 수시로 개종했다. 이 시대에 종교는 언제든 벗을 수 있는 옷에 불과했다.

“지중해에서 해적을 소탕하겠다는 신념이 확고하시군요. 국왕폐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실 수에즈 운하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가능하다면 시칠리아에서 크레타를 걸쳐 수에즈와 예루살렘까지 중립 해역을 설정하고자 합니다. 남유럽에서 인도 및 아시아 지역과의 무역은 물론 예루살렘까지 성지 순례가 가능하도록 협의해보겠습니다.”

“오오! 성지 순례가 가능하다면 큰 복입니다. 기독교 국가뿐만 아니라 개신교 국가에도 이 사실을 알려 폐하께 협조해주길 요청하겠습니다.”

이제는 포기해버린 십자군 운동의 목적이 잘하면 이민호 덕에 공짜로 이뤄질 수도 있었다. 이민호는 교황을 알현한 자리에서 지원 약속을 단단히 받을 수 있게 됐다.

“그런데 갈릴레이라는 젊은 교수가 고산국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 왕립대학교 교수 겸 천문대장을 맡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증거로 미루어 지동설이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성서의 말씀과 어긋날까 두렵습니다.”

지리상의 발견 이후 지구가 공 모양으로 생겼다는 것은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달의 모양이 바뀌는 것도 지구 그림자 때문이라는 사실도 천문학자들에게는 잘 알려졌다.

그러나 지구의 모양과 지구가 중심이 되는 천동설은 이 시대에는 상관이 없었다. 천문학자들은 천동설과 천문관측 자료를 짜 맞추기 위해 내행성과 외행성의 궤도를 다르게 해석하는 등 전통적인 천체관을 바꾸지 않으려고 헛된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다.

“구약성서에 기록된 그 문장만으로 섣불리 교리를 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약 지동설이 옳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공개된다면 천동설을 지지한 교회의 과거가 비판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위신이 크게 떨어질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주십시오.”

“신교도들도 대부분 천동설을 지지하지 않습니까?”

“신교도는 위신이랄 것도 없으니 언제든 말을 바꿀 수 있습니다만, 로마 교황청은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저는 과학 연구가 신학적 진리의 해석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봅니다.”

“교황 성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지동설은 큰 문제가 아닌데 나중에 진화론이 발표되면 성경과 양립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나 현대 과학자들 중에 로마 가톨릭 신자도 많았다. 성경에 몇 가지 과학적 오류가 기록됐다 해도 믿음을 지키는데 큰 상관은 없었다. 다만 성서에 기록된 문구와 다른 과학적 발견을 발표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다.

로마에서 테베레 강 하구로 출발하는 길에 베네치아 귀족 영애들이 이민호를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이미 옷도 여러 벌 주고 노잣돈도 줘서 내보냈는데 귀족 영애들은 고향 집에 편지만 보내고 다시 따라붙었다.

“기회가 왔을 때 확실히 잡아야 해요. 부모님도 같은 생각일 거여요.”

베네치아 귀족 영애들은 해상 무역도시의 딸들답게 모험심이 강했다. 그래도 쫓아내려 했으나 비올레타가 말동무가 필요하다고 해서 결국 시녀로 고용하기로 했다. 베네치아가 무역왕국으로서 각국의 정보에도 밝기에 유럽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면도 있었다.

베네치아 시녀들의 녹봉은 월 은 4냥으로 결정됐다. 시녀들은 귀족 영애로서 대우를 받게 됐다고 기뻐하는 것 같았지만 고산국 왕궁에서 새로 고용된 하녀에게 지급하는 금액이었다. 이들과 달리 내명부 소속인 갈라티아 궁녀들이 받는 녹봉이 월 50냥이었고, 여진족 호위들이 받는 녹봉은 100냥이 넘었다.

“귀찮게. 내명부 소속이 아니라 피고용인으로 대하도록 하시오.”

“아무래도 내명부에 넣어야겠는데요?”

마차로 위장한 장갑차의 윗자리는 세 사람이 앉기에는 비좁았다. 귀족 영애 하나가 백조가 끄는 마차에 타고 싶다면서 억지로 들어오더니 이민호 무릎에 앉았다.

그러나 도로 상태가 나빠 신체 접촉이 많았는지 귀족 영애가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웅크린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활달하긴 한데 남자 몸과 처음 접촉해봤는지 몹시 예민하게 반응해서 이민호가 보기에 귀여웠다.

“전하께서도 싫지 않으시다면 받아들이세요. 앞으로 지중해나 대서양에서 일 시킬 것 많잖아요. 이야기를 해보니 상업과 행정 분야에서 충분히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에요.”

“알았소. 비올레타 그대가 원한다면.”

“그런데 손이 어디에 가 있어요?”

“베네치아 시녀들도 이제부터 내명부 소속이라고 하지 않았소? 녹봉을 올려서 지급해야 할 테니 아까워서 이렇게라도 해야겠소.”

가슴골이 드러난 드레스를 입은 귀족 영애 출신 시녀를 이민호가 손으로 마구 주물럭거렸다. 갈라티아 궁녀들을 안아주는 일이 끝나간다 했더니 다시 일곱 명이 더 생겼다. 그렇다고 싫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야들야들한 처녀의 몸을 이리저리 만지는 동안 참다못한 귀족 영애가 눈 주위만 가리는 가면을 썼다.

“뭐, 뭐야?”

가면을 쓰기 전에는 분명히 스무 살 될까 말까한 청초한 처녀였는데 가면을 쓰는 순간 20대 후반의 요염한 미녀로 변신했다. 빨간 입술 사이로 혀를 내밀며 귀족 영애가 뭐라고 말하는 것을 비올레타가 조선말로 옮겨주었다.

“낯 뜨겁지만 그대로 옮길게요. 전하를 잡아먹고 싶대요.”

“여우같은 마누라들과 토끼 같은 자식들이 있어서 잡아먹히는 것은 사양한다고 전해주시오.”

“저도 여우인가요?”

“비올레타 그대는 여전히 토끼 같소. 잠깐만.”

귀족 영애에게서 가면을 벗기자 금방 다시 순진한 처녀로 돌아갔다. 영애는 얼굴이 빨갛게 되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영애를 품에 안은 이민호가 가면을 비올레타에게 씌웠다.

“눈 주위만 가리는데도 굉장히 섹시, 아니 도발적으로 변하는 것 같소.”

“가면을 쓰고 나니 저도 용기가 생기는데요?”

비올레타가 이민호를 잡아당겨 입을 맞췄다. 이렇게 가면이란 좋은 것이었다. 항구에 도착할 때까지 여자 둘과 서로 쪽쪽 빨았다. 장갑차는 엔진소리가 커서 이때만큼은 좋았다.

베네치아에서는 13세기 후반부터 가면 축제를 열었다. 사순절 2주 전부터 시작되는데 이 시대에는 넘치는 도시의 부를 바탕으로 자그마치 6개월 동안 축제를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때때로 흑사병이 돌면서 인구가 대폭 감소할 때마다 도시는 활력을 잃어갔다. 매년 영토를 확장하는 오스만제국과 반대로 베네치아는 국력이 줄어들어가는 때였다. 베네치아에 만연한 세기말적인 패배의식이 거꾸로 귀족 영애들의 모험심에 불을 댕겼다.

함대를 북상시켜 피사에 도착했다. 여기서 할 일은 인재 영입이었다. 젊은 갈릴레오 교수가 고산국에서 일하는 것을 알고 있는 피사 대학의 대학생, 또는 교수들이 고산국에서 연구하길 원했다.

“그대들이 연구할 곳은 왕립대학교요. 대학교의 주인이 학생이나 교수가 아니라 국왕이라는 뜻이오.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겠소?”

“물론입니다. 국비로 모든 연구를 진행하는데 당연하지요.”

이렇게 해서 다양한 전공의 교수와 학생 300여 명을 수송선에 태웠다. 이들을 뒷바라지할 하인과 하녀, 요리사도 피사에서 고용했다. 그런데 몇몇 하인들의 정체는 세계 일주를 해보고 싶어 하는 모험가들이었다. 나중에 이들의 희망에 따라 탐사대에 전입시켜주기로 했다.

명단을 확인해보니 메디치 가문이나 몇몇 피렌체 귀족 가문의 학생들도 끼어있는 것 같았다. 피렌체가 정치,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중이라 인재 유출도 심해진 가운데, 교수와 학생 300명이라면 타격이 클 수도 있었다.

피사 상인들의 요청으로 교역도 간단히 했다. 비단과 옥 도자기, 모직물과 면직물, 모피와 여러 가지 향신료, 차 등을 판매했는데 피사 상인들이 무척 아쉽게도 대량 판매가 아니라 홍보용 견본 판매 위주였다. 모든 상품이 최고급 대우를 받았다.

고산국 수출가격과 이곳 수입가격에 차이가 커서 얼마 팔지도 않았는데 이익이 꽤 많이 났다. 수에즈 운하가 거의 완성됐다는 사실은 홍보할 필요도 없이 다들 알고 있어서 이민호가 조금 놀랐다. 사라센 해적의 준동에도 불구하고 목숨 걸고 지중해를 지나 고산국에 오려는 배들이 생길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쓰다 보니 늘어나서 한 회를 더 올린 다음 스페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