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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483화 (432/1,000)

00483  49. 1598년  =========================================================================

“폐하! 저는 사랑을 위해 개종할 수도 있어요. 신실한 FSM교도가 되기 위해 면 종류 음식을 잘 먹도록 노력할게요.”

“저도요, 폐하! 그리고 구해주셨으면 끝까지 책임을 지셔야 해요.”

“저는 상인의 딸이에요. 동방 무역왕국의 군주이신 폐하를 곁에서 제대로 보좌해드릴 수 있어요. 물론 밤에도요. 아잉~”

귀족 영애들이 내뱉는 오글거리는 말에 이민호의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잠시 지켜보던 수석 기사가 허탈하게 웃었다.

“기회가 왔다고 착각하는 자매님들은 명심하시오! 베네치아 출신 귀족 영애라 해서 아무나 누르 바누 술탄이나 사피예 술탄이 되는 것이 아니요. 그리고 고산국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나라이니 개종할 필요도 없고 여자 술탄이 될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오. ‘동양박물지’의 내용에 따르면 고산국 국왕폐하께서는 출신지나 신분을 떠나 능력이 출중한 여성을 높은 자리에 두는 것 같소.”

“소피아 바포 같은 하급 귀족 영애보다 제가 더 능력이 있어요.”

본명이 소피아 바포인 사피예 술탄은 현 메흐메트 3세 황제의 모후로서 여성으로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사피예 술탄 한 사람 때문에 오스만제국이 베네치아를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오스만의 모든 원정 계획과 군사 정보는 사피예 술탄과 콘스탄티니예 주재 베네치아 대사를 통해 베네치아로 줄줄 흘러 들어갔다.

그러나 사피예 술탄 이전에 누르 바누 술탄이 있었고, 그녀는 사피예 술탄보다 훨씬 고위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본명이 체칠리아 베니에르인 누르 바누 술탄은 레판토 해전 때 베네치아 해군을 지휘하고 나중에 도제(Doge)로 선출된 세바스티아노 베니에르의 조카딸이었다. 해적에게 붙잡힌 체칠리아는 황자였던 셀림 2세의 첩이 되고 후계자 무라트 3세를 낳으면서 누르 바누 술탄이 되었다.

셀림 2세의 애첩일 때도 권력이 강했던 누르 바누 술탄의 힘은 모후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발휘됐다. 역시나 제국의 모든 정보가 베네치아로 줄줄 흘러 들어갔다. 베네치아 출신의 두 여자는 해적에게 붙잡혔다가 모후가 됨으로써 오스만제국의 최고 권력자가 된 동시에 베네치아에 정보를 제공해 애국자로 평가받았던 셈이다.

수석 기사로부터 설명을 듣고 이민호가 혀를 찼다. 잔뜩 들뜬 베네치아 처녀들은 왕비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모후로서 최고 권력자가 될 꿈에 젖어 있었다. 이민호가 작은 소리로 수석 기사에게 물었다.

“돈 후안! 혹시 베네치아 처녀들이 해적에게 납치당하는 일이 자주 있었소?”

“여자들이 활발하게 상업 활동을 하는 베네치아에서는 흔하다 못해 거의 수백 년 간 이어진 전통문화라고 볼 수 있지요. 베네치아는 부유한 무역도시라 몸값을 후히 계산해서 주기 때문에 해적들에게 인기가 좋습니다. 그러나 해적들이 여자를 황자에게 진상하지 않고 몸값을 받아 풀어준다면 미녀가 아니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21세기에 들어서서도 여전히 산마르코 광장에서 열리는 베네치아 카니발은 마리 축제(Festa delle Marie)로 시작하는데 해적에 납치됐다가 석방된 젊은 신부들을 기념하는 행사다. 이 시기에 이미 천년이 넘은 베네치아의 역사에서 처녀나 신부들이 해적에게 숱하게 납치됐기에 축제의 주제로 삼을 정도였다.

“처녀가 오스만 황자에게 진상되기 위해 납치당하는 자작극을 연출할 수도 있겠군요. 평민인데 귀족 영애라고 거짓말할 수도 있지 않겠소?”

“오스만제국에서 속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납치당한 처녀를 오스만 황자들에게 진상할 때 처녀의 신원을 조회하면 베네치아에서 친절하고 정확히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맙소사!”

이민호는 거대한 오스만제국 앞에서 100년 넘게 버티고 있는 무역 국가 베네치아에 관심을 가진 것이 사실이었다. 가능하다면 우호관계를 맺어 지중해에서 강력한 해군력을 가진 베네치아의 힘을 이용하고 싶었다.

하지만 권력욕의 화신이 된 것 같은 이들 베네치아 여자들을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왕비로서 행사하는 부차적인 권력이 아니라 모후로서 국왕을 넘는 전권을 쥐게 된다면 훨씬 위험했다. 조선에서도 명종이 말을 듣지 않으면 대비인 문정왕후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국왕의 종아리를 피가 나도록 때렸다고 한다.

“안타깝지만 나는 이미 결혼했으니 영애들은 다른 혼처를 알아보시는 편이 빠를 것이오.”

그래서 냉정하게 대했으나 이 여자들이 줄기차게 이민호에게 구애공세를 펼쳤다. 누르 바누 술탄이나 사피예 술탄처럼 권력을 휘두르고 싶어 하는 철없는 처녀들을 설득하기란 쉽지 않았다.

“늦어서 죄송해요.”

“어서 오시오, 비올레타.”

비올레타가 아기를 안고 식당에 들어서자 이민호는 온 세상이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죄에 빠진 인간들을 구원해주는 것 같았다. 비올레타의 위엄에 눌린 베네치아 귀족 영애들이 당장 입을 다물었다.

“여기 조심해서 앉으시오. 마르그레타는 내게 맡기시오.”

이민호가 옆 자리에서 의자를 가져와 비올레타를 앉혔다. 조리사에게 따뜻한 음식을 갖고 오도록 명하고, 비올레타가 자리를 정돈하는 동안 이민호가 아기를 안았다. 베네치아 처녀들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비올레타만 주시했다.

“어머! 아리따운 귀족 영애들이 많이 오셨군요.”

“소개하겠소. 내 아내이며 전직 필리핀 총독의 따님이신 비올레타 도미니카 다스마리냐스요.”

“반가워요. 비올레타예요. 베네치아는 물에 반쯤 잠긴 아름다운 도시라고 들었어요. 과연 출신 도시만큼 아름다운 영애들이군요. 베네치아 말을 몰라서 라틴어로 대신할게요.”

베네치아 귀족 영애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비올레타의 미모도 훌륭하지만 20대 초반에 유창하게 라틴어를 구사하는 것만으로도 베네치아 영애들은 비교하기를 포기했다. 아직 토스카나 방언이 표준 이탈리아어가 되기 이전 시대라서, 지방마다 방언을 쓰거나 지식인이라면 라틴어를 사용하던 시대였다.

비올레타가 출현하면서 단지 몇 마디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베네치아 귀족 영애들의 기가 팍 죽었다. 그래도 몇 명은 기회를 노리며 이민호에게 계속 달라붙었다.

결국 베네치아 처녀 스무 명 중에서 열세 명은 몰타에 남고 일곱 명은 로마에 가겠다며 함대에 머물기로 했다. 로마에 가서도 다른 핑계를 대고 함대에 남을 것 같았다.

다음 날 몰타의 노예 시장에서 무슬림 노예 전체, 3천여 명을 구입했다. 이들을 깨끗이 씻기고 새 옷을 입히니 다시 사람 모양을 갖췄다. 기본적인 치료를 마친 다음 모든 노예들에게 식량과 포도주를 마련해주고 노잣돈으로 은 두 냥씩 나눠주었다. 그리고 수송선에 태운 다음 바다 건너 트리폴리 항구에서 풀어주었다.

거대한 함선들이 나타나자 바짝 긴장했던 해적들은 해방된 무슬림 노예 수천 명이 ‘신은 위대하다’는 구호를 외치며 기뻐하자 어리둥절했다. 그 사이 이민호는 병사들을 상륙시켜 노예 시장에서 기독교도 노예를 사게 했다. 차떼기도 아니고 배떼기라서 5천여 명이 넘는 노예들을 수송선에 간단히 실을 수 있었다. 문제가 생기기 전에 함대는 즉각 출항했다.

돈 냄새를 맡고 급히 추격하는 이슬람 해적선 10여 척에 5인치 함포를 쏘아 트리폴리 항구 입구에서 침몰시켰다. 그저 착하기만 할 줄 알았던 고산국 함대가 포격을 가한 후에야 사라센 해적들은 동방에 강력한 해양대국이 있다는 소문을 떠올렸다.

“오! 주여! 오! 주여!”

기독교도 노예 수천 명이 몰타 섬에 상륙하자 수석 기사가 연신 성호를 그었다. 이민호는 눈언저리가 축축해진 중년 기사에게 노예들의 신병을 넘기고, 고향에 데려다줄 것을 부탁했다. 이를 위해 필요한 자금도 충분히 넘겼다.

이슬람과 기독교를 막론하고 일부 노예들은 해방되길 거부했다. 돌아갈 고향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혹은 고향에 돌아가면 죄를 받는다는 걱정에서 못 돌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이민호는 이들을 북미에 이주시키기로 결정했다. 양쪽 합해서 천여 명이 배에 남았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출발해 오후에 로마 외곽 테베레 강변의 항구에 도착했다. 1590년에 선종한 교황 식스토 5세는 재위 기간이 5년으로 짧은데도 철저한 도시계획으로 로마를 재탄생시켰다. 덕택에 항구에서부터 넓은 도로를 따라 교황청으로 직행할 수 있었다.

전면에 기병 중대가 선도하고 장갑차 중대가 2열로 뒤따랐다. 중간에 화려한 군복을 착용한 근위 기병들에게 둘러싸인 마차가 움직이고, 그 뒤로 베네치아 귀족 영애들과 갈라티아 궁녀들이 탄 꽃마차 세 대가 따랐다. 다시 장갑차 중대와 기병 중대가 후미를 호위했다.

“마치 백조 네 마리가 날면서 마차를 끄는 것 같아요. 장난이 너무 심하셨어요.”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소?”

다리에 오색 비단 천을 매단 백조들이 우아하게 날갯짓하는 아래로 마차 모양을 한 장갑차가 빠르게 움직였다. 이민호는 비올레타와 함께 기관총 사수석을 개조한 높은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옆문을 방탄유리로 바꾸니 귀족들이 타는 마차와 별로 다르지 않은 외형이 되었다.

“만약 메카 근처에서 이런 장난을 쳤다가는 마법을 쓴다는 이유로 전하를 죽이려 들 거여요. 이슬람에서는 마법을 결코 용서하지 않거든요.”

“교황청이라고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지만, 억지로 작동 원리를 이해하려고 고민하겠지요. 앞뒤에 장갑차들이 움직이고 있어서 충격이 덜할 것이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충격적인 장면인지 주변 농지에서 일하던 농부들의 턱이 아래로 떨어지기 직전인 것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포인터 비슷하게 생긴 점박이 달마티안 강아지가 장갑차 행렬에 대고 미친 듯이 짖어댔다.

로마 시가지에 도착하자 모든 시민들이 쏟아져 나와 고산국 국왕 행렬을 구경했다. 다른 장갑차들은 보이지도 않는지 백조들이 이끄는 하얀 마차를 손으로 가리키며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동쪽에서 진입하게 돼 있었다. 거의 100년 동안 건축을 진행 중인데 외부 골조와 돔은 완성됐으나 완공되려면 아직도 멀었다. 현재 지어진 것만으로도 이 시대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건축물이었다.

이민호보다 먼저 내린 장갑차 기병들이 주변에 몰려드는 로마 시민들을 제지하고 통로를 확보했다. 기병들이 말을 탄 채로 움직여 저격 가능성을 줄이고, 장갑차마다 지정사수들이 주변 건물을 감시했다.

이민호는 여진족 호위들에게 둘러싸인 채 나중에 성 베드로 광장이 될 회랑에 들어섰다. 그런데 헐레벌떡 뛰어온 사제 몇 명이 이민호를 가로막았다.

“고산국 국왕폐하! 저는 이단 심문관입니다. 황공하오나 마법의 백조가 나타났다는 신고를 받고 왔습니다. 마법 여부를 확인하겠습니다.”

“백조는 다 똑같은 백조지요. 백조가 아니라, 마차가 다르다는 생각은 못 해봤소?”

“그, 그럴 수도 있겠군요.”

“백조는 마차 지붕에 내려앉아 쉬고 있소. 마차의 바퀴와 기계장치를 살펴보면 어디서 본 물건일 것이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은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대로 완성됐고 식스토 5세 교황의 임기 동안 성당 건축에 큰 진전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교황 클레멘스 8세가 대성당 안에 십자가를 세우고 큰 축제를 열었다.

순례를 마치고 이민호는 비올레타와 함께 사도궁전으로 향했다. 대성당 오른쪽, 교황의 집무실 겸 거주지 건물들이었다.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추기경들을 거느리고 이민호 일행을 맞이했다.

이민호와 비올레타 뒤로 갈라티아 궁녀 12명이 뒤따르고, 주변을 여진족 호위들이 경계하면서 움직이는 행렬만으로도 장엄했다. 사도궁전 주변에 고산국 병사들이 배치돼 경계태세를 갖췄다.

“성지 순례를 위해 국왕의 귀한 신분으로 멀리 동방에서 로마까지 오신 국왕폐하께 감사드립니다.”

“사도들의 으뜸의 후계자이신 교황 성하를 알현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정중하면서도 딱 외교적인 의례만 하는 이민호와 달리 비올레타는 가톨릭교도로서 교황에게 최고의 예우를 하려고 노력했다. 교황을 만나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비올레타를 보면서 교황과 추기경들이 안심하는 듯했다.

============================ 작품 후기 ============================

이슬람 해적 소탕을 위한 사전 작업으로 교황과 조약을 체결할 의도입니다.

다음 회를 마지막으로 편 제목을 바꾸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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