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482화 (431/1,000)

00482  49. 1598년  =========================================================================

“함장! 접근시켜.”

“이 일에 개입하신다면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만, 어명을 따르겠습니다.”

“걱정하지 말게. 거래를 할 뿐이야. 수에즈 운하가 개통돼도 지중해에서 이렇게 해적들이 날뛴다면 무역선들이 운하를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큰일입니다.”

국왕좌승함이 갤리선에 접근한 다음 통역장교가 이슬람 해적선 선원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러나 뜻밖에 아랍어와 터키어가 잘 통하지 않았다. 바르바리 해적이 북아프리카 해안 근처에서 활동하는 이슬람 해적이라지만 이 시대에는 유럽 출신 백인들도 많았다. 갤리선에는 일부 무어인과 노예 선원인 것으로 보이는 흑인 외에는 주로 백인들이 타고 있었다.

갤리선 선장인 듯한 백인이 호탕하게 웃으며 선수로 나왔다. 이민호는 선장이 독일 남자 같다고 생각했지만, 남유럽이나 동유럽에서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선장은 남프랑스에서 사용하는 오크어가 모국어인 듯했고 스페인어와 터키어를 대충 구사할 수 있었다. 결국 스페인어로 대화하기로 했다.

“물고기도 어선이 잡은 바로 그 자리에서 요리해 먹어야 싱싱한 법입니다. 멀리 동방의 귀족께서는 싱싱한 여자를 요리하는 방법을 알고 계시는군요.”

“닥치고 가격 제시해.”

“쳇! 농담도 못하게 하시네. 원래 바다에서 젊은 여자를 구하면 총독이나 태수로 나가 있는 황제의 후계자 후보들에게 골고루 상납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우리도 살아남아야 하니까요. 하지만 고산국의 귀족께서 몸이 달아오르신 모양이니 싸게 넘기겠습니다. 여자 하나에 은 10파운드만 내십시오.”

10파운드라면 4.5킬로그램이 넘는 양이었고 120냥에 해당했다. 고산국 기준으로 쌀 240석, 760가마에 달하는 큰 금액이었다.

“왜 이리 비싸?”

“헹! 비싸면 사지 마십시오. 누르 바누 술탄에 이어 사피예 술탄이 오스만 황제의 모후가 되는 바람에 제국 내에서 베네치아 출신 여자들의 몸값이 폭등했습니다. 이 여자들은 옷차림으로 보아 귀족 여식들이 틀림없으니 사피예 술탄에게 줄을 대려는 후계 경쟁자들에게 팔면 더 높은 값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모두 20명인 베네치아 처녀들을 200파운드를 주고 사들였다. 나중에 물어보니 베네치아에서 크레타로 가려다가 길목을 지키고 기다린 해적에게 공격당했다고 한다. 처녀들은 베네치아의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다가 방학을 맞아 크레타에 있는 집으로 가던 베네치아 관리나 상인의 딸, 또는 크레타 대농장주의 딸들이었다.

크레타는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했던 4차 십자군 원정 기간인 1212년부터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였다. 이탈리아 반도 서쪽 코르시카 섬과 사르디냐 섬의 북부가 제노바 공화국의 영토인 것처럼 해상 무역 국가가 본토에서 멀리 벗어난 다른 지역을, 특히 섬을 영토로 소유한 경우가 흔했다.

베네치아는 베네치아 시를 비롯한 ‘도제령’, 달마티아 지방과 그리스 연안의 수많은 섬과 크레타를 포함한 ‘바다 영토’, 그리고 ‘본토 영토’라 불린 이탈리아 반도 내륙의 영토뿐만 아니라 멀리 흑해 안쪽 여러 곳에 상업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한때는 키프로스를 영유하고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무역 국가였으나, 오스만제국이 팽창하면서 점점 영토가 줄어들었다.

“파티마! 여자들 좀 씻겨줘.”

“다들 미인이시네요. 주인님은 좋으시겠어요. 호호!”

“아니야!”

처녀들은 다들 엉엉 우느라 눈물에 화장이 지워져 흉한 몰골이 되었다. 갈라티아 궁녀들에게 이들을 씻기게 한 다음 해적 선장과 교섭을 계속했다.

이때 해적들은 나포한 베네치아 범선을 갤리어스 후미에 연결하고, 갤리어스는 갤리선 후미에 밧줄로 연결하고 있었다. 갤리어스는 돛도 달고 노도 젓지만 자체 추진력이 거의 없는 멍텅구리 배에 가까웠다.

고산국 순양함에서 공격할까봐 일부 해적 선원들이 불안에 떨었지만 이민호는 그들을 공격할 뜻이 없었다. 사실 몇 번이나 공격할 마음이 생겼다가도 해적선에 붙잡혀 있는 인질들 때문에 공격할 수 없었다. 갤리선의 빈틈으로 고개를 내밀어 불쌍한 표정을 짓거나 기도하는 노잡이들이 불쌍해서 차마 이곳을 떠나지도 못했다.

“노 젓는 사람들은 노예인가?”

“그렇습니다. 저들은 기독교도 노예들입니다. 오스만제국 황제로부터 면허를 받은 사략선들이 성전의 일환으로 기독교 지역을 약탈하는 것은 아시지요? 이때 포로가 된 자들 중에서 몸값을 못 내는 자들은 노예로 팔려갑니다. 불쌍해도 제국의 국가 전략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기독교 쪽에서도 몰타 기사단이 저희와 똑같은 짓을 합니다.”

“이 지역에서 수백 년 동안 서로에게 했던 일이라서 내가 섣불리 개입하기 어렵겠군. 알겠네. 우리는 이만 돌아가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동방의 귀족이시여! 불쌍하게도 갤리선이나 갤리어스에서 노를 젓는 자들은 과로와 배고픔으로 인해 오래 못 삽니다. 구출기사단이나 구출수도회가 모금을 통해서 기독교 노예들을 사서 풀어주고 있다지만 자금에 한계가 있어서 매년 만 명 이상을 구해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구호단체에서는 최근에 붙잡힌 사람들을 우선 구해주니까 이렇게 노잡이로 팔려온 이상 조만간 죽는다고 봐야지요. 제가 예전에 기독교도라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구출기사단은 무력에 의존하지 않고 협상과 매입을 통해 500년 동안 꾸준히 기독교인 포로와 노예들을 구해냈다. 구출수도회는 1199년부터 500여 년 동안 50만 명 넘는 사람들을 구했다.

<돈키호테>를 지은 세르반테스도 구출수도회에 의해 자유를 찾은 포로 중 한 명이었다. 세르반테스는 레판토 해전에 장교로 참가한 후 귀향하는 중에 풍랑으로 인해 표류하다가 해적선에 붙잡혔다. 그는 5년 동안 갤리선 노잡이로 일하면서 수시로 탈출을 꾀하다가 구출수도회가 금 500 에스쿠도를 지불하고 나서 해방됐다.

“노잡이 노예들을 사달라는 거야? 그럼 싸게 넘겨.”

“헤헤! 감사합니다. 구출수도회에 넘기는 정찰제 가격으로 인도하겠습니다.”

세르반테스는 사형집행 직전의 특이한 경우라서 비싸게 구해야 했던 예외적인 경우였다. 16세기에 일반적인 노예 가격이 100년 전에 비해 다섯 배로 올랐더라도 말 값의 6분의 1에서 8분의 1 사이였다.

갤리어스와 갤리에서 노를 젓던 자들 200여 명이 풀려났다. 쇠사슬에서 풀린 기독교인 노예들은 후들거리는 발걸음으로 간신히 수송선으로 이동했다. 이민호는 노예들을 일단 씻기고 죽부터 먹이도록 했다. 군의관과 의사들이 바빠졌다.

거래가 끝난 직후 해적선들은 돛을 올리고 꽁지가 빠져라 달아났다. 지금이라도 쫓아가서 격침시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갤리선에는 노잡이 노예가 아직 100여 명이나 남아있었다.

“주인님이 남자 노예도 풀어주는군요.”

“놀리지 마. 흑인노예들도 대부분 남자들이었어.”

민영과 파티마가 서로 얼굴을 보며 웃는 사이에 이민호는 괜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여진족 호위들과 갈라티아 궁녀들은 한때 노예였다가 이민호의 여자가 되었다.

밤이 되어 베네치아 처녀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몇몇은 가족을 잃는 등 끔찍한 일을 겪었지만 이 지역에서 평소에 숱하게 일어나는 일이라서 그런지 금방 회복했다. 해적에게 공격당한 배가 여객 수송을 겸하는 상선이라서 여러 가문의 여자들이 같은 배에 탈 수 있었다고 했다.

“나는 멀리 동방에 위치한 고산국의 국왕이며 내 직할 함대는 현재 시칠리아 남쪽 몰타 섬에 정박 중이오. 예루살렘의 성 요한 구호기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섬이오.”

동양인들은 유럽인과 투르크인을 구별하기 어려운데 유럽인 시각에서 동양인은 투르크인과 비슷하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베네치아 처녀들이 이민호 얼굴을 보고 부들부들 떨었다. 보다 못한 유럽인 기사가 나섰다.

“나는 구호기사단의 수석기사 후안 페드로요. 고산국 국왕폐하의 말씀은 사실이니 자매님들은 안심해도 괜찮소. 주변에 사라센 해적선이 없으며 자매님들이 안전하게 귀가할 때까지 보호해줄 것임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약속하겠소.”

갑옷 위에 걸친 검은 튜닉에 하얀 십자가 문양을 넣은 기사가 자기를 소개했다. 베네치아 처녀들이 전통적인 동맹군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구호기사단은 600년에 성지 순례자 보호를 위해 예루살렘에 세워진 병원에서 비롯됐다. 십자군 전쟁 때 기사단으로 개편돼 중동지역에서 싸우다가 로도스 섬으로 밀려났고, 다시 몰타 섬으로 물러나면서도 기사단을 계속 유지했다. 병원기사단, 성 요한 예루살렘 기사단, 로도스 기사단 등으로 불리다가 요즘은 약칭 몰타 기사단이었다.

현재 몰타 기사단의 존속 목적은 이슬람 해적들을 쳐부수고 기독교도를 구출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북아프리카 해안 지역을 약탈하고 무슬림 포로를 유럽에 노예로 팔아넘기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슬람 해적들이 지중해 연안은 물론 프랑스 해안 지방과 북해까지 가서 기독교도 마을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것과 똑같은 짓을 저질렀다.

그래서 오늘도 몰타의 항구도시에는 팔릴 때까지 쇠사슬에 묶인 무슬림 노예들이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이민호는 몰타 기사단이고 사라센 해적이고 가리지 않고 몽땅 쓸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현재의 국제 세력 구도에서는 그 어느 쪽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폐하.”

“오늘 불행한 일을 당했으나 그만하길 다행이오. 나쁜 일은 어서 잊어버리고 힘을 내시오.”

고산국 국왕이라는 말에 처녀들이 호기심을 내비쳤다. 말로만 듣던 먼 나라의 국왕이 바로 눈앞에 있다는 것이 신기했는지 요리조리 뜯어봐서 이민호는 얼굴이 뜨거웠다.

“고산국은 멀리 동방의 나라라고 들었어요. 한데 고산국은 오스만제국의 동맹 아닌가요?”

“동맹을 결성한 적은 없으나 우방은 맞소. 그러나 고산국은 에스파냐의 우방이기도 하오.”

프랑스와 영국이 얼마 전까지 치고받고 싸웠어도 이란의 사파비 왕조와 협력하는 유럽 2개국이었다. 프랑스는 에스파냐와 대적하기 위해 오스만과 사실상의 동맹이었다.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는 오스만제국 무라트 3세와 수시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에스파냐와의 전쟁에 어떻게든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국가 차원에서 이교도에 대한 증오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국익을 지키기 위한 무한 경쟁 중에 인종이나 종교, 문화적 유사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구호기사단은 유럽 국가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오늘도 외롭게 싸워야 했다. 노예로 팔려간 기독교도 구출보다는 해적질과 노예 매매가 주요 사업이 된 것을 이민호가 어느 정도 이해해줄 수 있었다.

“구호기사단 기사 사제님들의 도움을 받아 크레타로 가면 될 테니 식사 후에 여기 수석 기사님을 따라가 거처를 옮기도록 하시오. 혹시 베네치아로 돌아가고 싶다면 함대가 로마에 들르는 길에 태워주겠소.”

“해적이 시칠리아와 크레타 중간 항로를 차단했다면 지금쯤 크레타가 위험에 처했을지도 몰라요.”

“자매님은 걱정 마시오. 몰타처럼 크레타도 항상 이교도의 침략 위험에 노출됐지만 성도들이 일심 단결해서 이교도들을 막아낼 수 있었소.”

수석 기사가 한 말이 옳았다. 해안 도시의 높은 성벽과 베네치아를 비롯한 기독교 국가의 해군력 덕택에 지중해의 전략 거점인 몰타와 크레타를 오랫동안 오스만제국의 침략으로부터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베네치아의 영토였던 키프로스는 1570년 6만의 오스만제국 대군에게 정복당했고, 요새도시 니코시아에서 1만여 명의 주민이 처형됐다. 당장은 아니지만 크레타도 1669년 21년에 걸친 칸디아 공방전 끝에 결국 오스만제국에 정복됐다. 키프로스는 오스만제국에, 몰타는 북아프리카에 너무 가까웠다.

“자매님들은 왜 그리 주저하는 거요? 오호라! 혹시 고산국 국왕폐하를 따라가고 싶은 것이오? 하하!”

“아니에요!”

수석 기사 후안 페드로는 가톨릭 수사 신분이었으나 남녀 관계를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시대에 수녀원에서 교육받는 것은 가장 일반적인 신부교육이었다.

처녀가 혼처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했다. 특히 베네치아 처녀들에게는 우상이 두 명이나 있어서 정식 부인이 아닌 하렘에 들어가는 것에 거부감을 갖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스토리 진행은 적으나, 지중해 역사에 대한 설명입니다.

오늘 안으로 또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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