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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480화 (429/1,000)

00480  49. 1598년  =========================================================================

급히 마중 나온 공조 참판과 만난 이민호는 다음 날 아침부터 안내를 받았다. 현재 수에즈 항부터 운하 구간 중간의 호수와 이스마일리아까지 운하가 완성됐다. 함대는 좁은 수로를 따라 북쪽으로 향했다.

주변이 온통 사막인데 수로를 따라 서쪽에만 길게 농경지가 개간되고 있었다. 동쪽은 누런 황토나 모래가 쌓인 사막 또는 황무지였다.

“이 근처는 사막 아니었소?”

“공사가 계획보다 빨리 진행되면서 남는 장비로 이집트에서 요청한 몇 가지 사업을 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자금은 이집트가 댔습니다. 수에즈 항 북쪽 호수에서 물을 끌어다 대는 관개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공사에 사용하기 위해 뚫은 우물도 공사가 끝나면 다 넘겨주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이집트의 농지가 꽤 늘어날 것 같습니다.”

“해외에서 주로 영업할 토목건설 회사를 만드는 것도 생각해봐야겠소. 우리는 설계와 토목기술자 몇 명만 파견하고 나머지 공사 인력은 현지에서 모집하는 방법은 어떻겠소?”

“농지를 늘리는 일이라면 누구든 환영할 겁니다. 특히 이 지역은 주변이 모두 사막이라 우물을 찾아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사업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북미와 호주부터 먼저 개발하는데 진력하셔야 합니다, 전하.”

“물론이오. 나중에 생각해 봅시다.”

땅 깊숙이 시추관을 박아 넣으며 유전 개발을 하는 고산국에게 지하수 개발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이집트인들은 운하를 건설하면서 대량으로 노동자를 고용해주고 사막을 옥토로 만드는 관개사업은 물론 마을마다 우물도 파주는 고산국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의외로 모스크를 건축해줘도 기뻐하는 이집트인들은 드물고 오히려 시큰둥했다.

“일부 이집트인들이 이집트의 독립을 지원해달라고 제게 부탁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어서 거절했습니다.”

“잘했소.”

“한때는 이집트가 인류의 문화를 이끌어왔다고 들었으나 지금은 이 모양입니다. 수백 년 동안 피지배 민족으로 살아온 사람들이라 조금 불쌍합니다.”

일반 이집트인들에게는 오스만제국이나 이집트 맘루크나 어차피 외국 정복자들일 뿐이었다. 독립에 열성적인 이집트인이 별로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미안해 할 것 없소. 우리가 손해를 보면서 이집트인들을 위해 싸울 이유가 없으니까요. 봉기해서 자기들이 직접 싸울 생각도 없으면서 이집트의 주권을 공짜로 돌려주길 바라다니, 어이가 없소. 계속 남의 노예로 살라고 하시오. 그리고 그런 제안을 한 놈은 만약 이집트가 독립하면 권력에만 눈독 들일 놈이오.”

“그 자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고산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니 이런 제안은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이집트가 중요한 위치에 있는 만큼 언젠가 큰 이익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나중에는 그렇더라도 지금은 아니오. 그리고 어느 나라든 민족을 팔아먹을 자들은 혐오감부터 드니 교섭하지 마시오. 이집트가 중요한 위치에 있다지만 속국으로 삼을 생각은 전혀 없소. 지금은 오스만제국과의 친선에 주력하시오.”

흔히 레판토 해전 이후부터 오스만제국의 국력이 저하됐다고 평가하지만 망하려면 아직 한참 멀었고 국력은 여전히 유럽을 압도했다. 오스만제국은 17세기 들어서서 중간 중간에 어려운 점이 생기더라도 발칸반도를 계속 차근차근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런 강대한 오스만제국을 상대로 오래도록 싸울 이유가 없었다.

“물론입니다. 시간 날 때마다 콘스탄티니예로 사신을 보내 메흐메트 3세의 어머니인 사피예 술탄에게 선물 공세를 퍼붓고 있습니다. 공예품이나 보석, 옷보다는 그 나이에 의외로 고산국의 화장품을 높이 평가했다고 합니다.”

“잘했소. 사피예 술탄에게 계속 뇌물을 보내시오. 서른 넘은 황제가 아직도 어머니 치마폭에 감싸여 있다니, 웃기는 일이오. 덕택에 우리는 적은 비용으로 황제를 우리 편으로 만들 수 있으니 좋은 일이오.”

이 시기 베네치아 공국 출신인 사피예 술탄의 비서 겸 경제고문은 유대인 에스페란차 말치였고, 유대인이었다. 화폐가치를 폭락시킨 주범으로 몰려 1600년에 발생한 폭동 때 성난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에게 잡혀 죽었다. 그리고 당시 오스만제국은 에스파냐를 공동의 적으로 둔 잉글랜드와 협력 관계를 유지할 정도로 국제적인 안목이 있었다.

백양 왕조 시절부터 100년 넘게 오스만과 싸운 이란의 사파비 왕조는 영국인 안토니 셜리를 유럽 사절단에 포함시켜 보내 오스만 포위망을 구상했다. 그리고 로버트 셜리를 포병 고문관으로 삼았다가 이란의 대사로서 유럽에 두 번이나 파견했다. 조선 선조 임금이 유구 국왕과 국서를 주고받은 것처럼, 이 시대 서남아시아와 유럽 국가들도 국가 생존을 위해 국제적으로 개방돼 있었다.

몇 년 전에 수에즈 운하 건설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던 무라트 3세는 1595년에 서거하고 아들 메흐메트 3세가 즉위했다. 그러나 메흐메트 3세는 마마보이로 이름이 날 정도로 조금이라도 어머니의 눈 밖에 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매일의 일상이 그저 기름진 음식만 먹고 미녀를 안는 일만 하는 비대한 몸집의 메흐메트 3세는 정치적 실권을 베네치아 공국 출신인 어머니에게 통째로 갖다 바치다시피 했다.

이것은 사피예 술탄이 의도한 바였다. 대대로 이어지는 황제의 어머니들답게 역시나 노예 출신이었던 사피예 술탄은 황제의 어머니로서 당연히 섭정 역할을 맡았다. 원래 후계자 경쟁을 하기 전에 아들들이 지방 태수로서 파견될 때 그 어머니가 섭정으로서 공동운명체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황제 즉위 후에도 아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도록 좋은 음식과 미녀를 끊임없이 공급한 사피예 술탄은 아들을 폐인으로 만들었고, 결국 1603년 겨우 재위 몇 년 만에 황제를 죽게 하고 말았다.

“그래도 황제는 동유럽에 친정을 가기도 했습니다.”

“황제는 어처구니없게도 전투 첫 날부터 궁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소. 그리고 나쁜 소식을 듣기만 하면 병이 나는 특이 체질이라니, 어쩔 수 없이 신하들을 간신들만으로 채워야 하는 대단한 황제요.”

이 시대에 진행 중인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은 세계 대전이나 다름없었다. 오스만에서 15만 대군을 헝가리에 투입하고 유럽 쪽에서는 클레멘스 8세 교황이 십자군 동맹을 결성해 신성로마 황제, 트란실바니아 군주, 몰다비아 공작, 왈라키아 공작 등이 참가해서 맞섰다. 전쟁은 지지부진하면서도 메흐메트 3세가 죽은 이후로도 계속 이어져 1606년에 지트바토로크 조약을 체결하면서 끝났다.

“부황 무라트 3세가 진짜 사나이였지요. 자그마치 100명이 넘는 자식을 생산해냈습니다. 전하께서 새로운 기록에 도전해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2세 생산은 왕의 임무이기도 하지만 고산국 모든 백성들의 의무이기도 하오. 나도 열심히 하고 있소.”

이민호는 지난밤에도 열심히 의무를 수행했다. 비올레타에게 배정된 갈라티아 시녀 12명 중에서 출발할 때 열 명이 처녀였는데 지금은 네 명만 남았다. 비올레타와 민영을 포함한 호위들의 차례도 있어서 국왕좌승함의 침전은 밤이나 낮이나 도홧빛으로 물들었다.

수에즈 운하의 중간 지점인 이스마일리아를 조금 지난 지점에서 수로가 끝이 났다. 그 북쪽은 수로를 팠더라도 아직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은 구역이었다. 이제부터 배가 땅을 지나야 했다.

순양함들이 바퀴 달린 거대한 수조 같은 반잠수형 화차에 실린 다음 지름이 한 뼘이나 되는 강철 밧줄에 잡아당겨져 차례대로 선로 네 줄 위에 올라섰다. 복선으로 2대씩 배치된 기관차 네 대가 뒤에 배가 담긴 화차 여섯 량을 연결한 다음, 사막을 천천히 달렸다. 기관차 앞부분이 옆 선로를 달리는 다른 기관차와 철봉으로 연결돼 있었다.

이민호는 화차에 실린 국왕좌승함에 탄 채로 이동했다. 철도와 평행으로 이어진 수로 건설 현장은 거대한 계곡 같았으나 조만간 바닷물이 채워지고 나면 수면 아래 잠기게 될 것이다.

수로를 가로질러 다리가 세워진 곳마다 중간에 섬을 만들고 수로를 상행선과 하행선 둘로 나눴다. 이 시대 범선의 높은 마스트 높이를 감안해 수로보다 50미터 이상 높이 세워진 다리들 가운데 둘은 철교와 비슷한 형상이었고 하나는 현수교였다. 다리 하나와 터널 하나에 불과한 현대 수에즈 운하보다 운하 양쪽의 교통에 더 신경을 쓴 편이었으나, 현지 이집트인들은 멀리 돌아 다리를 건너기보다는 웬만하면 거룻배를 타고 운하를 건너다녔다.

공사 현장이 평지이면서 건설단이 인명 사고에 신경을 써서 그런지 운하가 거의 완공된 지금까지 사고사는 200명 이하에 그쳤다. 원래 역사에서 1869년 개통될 때까지 9천여 명이 사망한 것에 비해 희생자가 훨씬 적었다. 파나마 운하를 건설했던 공조 참판이 위생에 워낙 신경을 써서 말라리아나 다른 전염병도 발생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빨리 공사가 진행됐군요.”

“예. 전하께서 오실 줄 알았다면 완공을 좀 앞당길 걸 그랬습니다.”

“무리할 필요는 없지요. 이번에도 수고하셨소.”

수에즈 운하 북단, 사이드 항과 후아드 항을 멀리서 바라보는 지점에서 순양함들을 다시 수로에 올려놓았다. 나머지 배들을 옮기기 위해 기차들이 남쪽으로 돌아갔다.

“그 동안 별 문제는 없었소?”

“베두인 부족들 대부분은 공사에 노무자로 적극 참가하고 있습니다만, 일부가 가끔 약탈하러 왔다가 쫓겨 가곤 합니다. 운하 경비에 투입된 예니체리가 막아줘서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장갑차를 배치할 걸 그랬소.”

경운차의 차대에 사방으로 강철판을 두르고 기관총을 단 것이 장갑차였다. 현대 장갑차처럼 무한궤도는 아니었지만 논과 밭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도록 크고 두꺼운 바퀴를 달았다. 그러나 사막 지형에서 제대로 가동할 수 있을지 의문이어서 운하 공사 현장에 배치하지 않았다.

“나머지 배들이 오는 사이에 조금 기다리셔야겠습니다.”

“잘됐소. 사막 적응 훈련이나 시켜야겠소.”

순양함마다 두 대씩 적재한 장갑차들을 내리고 말 없는 기병 중대가 탑승했다. 장갑차는 한 대가 분대로서 운전병과 차장, 기관총 사수, 보병 6명으로 구성됐다. 장갑차 10여 량이 굉음을 울리며 사막을 달리자 누런 모래먼지가 일어났다.

“전방에 정체불명의 기병 집단이 출현했습니다!”

견시가 보고하자 이민호가 망원경을 집어 들었다. 사막의 모래바람 때문에 천으로 얼굴까지 가린 유목민 수백 명이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공조 참판이 바로 알아봤다.

“저들이 가끔 약탈하러 온다던 바로 그 베두인 부족입니다. 예니체리 부대가 방어에 나서고 있습니다.”

“함장! 장갑차에 공격 명령을 하달해!”

미처 명령을 전달하기도 전에 유목민 기병들이 장갑차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접근했다. 몇 정 안 되는 화승총을 하늘을 향해 발사한 유목민 기병들은 장갑차에 돌진해 신월도를 휘둘렀다.

멍청하지만 용감한 자들의 비참한 최후를 보게 됐다. 유목민 기병들은 말에 탄 채로 장갑차에 충돌한 직후 땅바닥에 굴렀다. 말이고 사람이고 가리지 않고 장갑차들이 깔아뭉개며 지나갔다. 그런데 장갑차의 진짜 공격 무기는 따로 있었다.

- 따다다다닥! 따다닷!

기관총이 발사되자 말과 사람을 가리지 않고 픽픽 쓰러졌다. 연발 총소리에 놀란 유목민들이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장갑차들이 급히 추격에 나섰다.

그러나 장갑차와 유목민 기병들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으며, 모래밭에 바퀴가 잠겨 헛도는 장갑차도 생겼다. 이때 유목민 기병들이 돌아와 화공이라도 퍼붓는다면 자칫 승무원들이 몰살당할 우려도 있었다.

“장갑차들을 정지시켜! 사막이란 참 대단하군. 함장! 기병 중대를 상륙시켜 근거지를 치도록. 가까운 곳에 약탈을 위한 근거지가 있을 거야.”

“멀리 하스나에서 온 것 같지만 이렇게 자주 습격을 한다면 가까운 지역에 근거지가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말히 산을 중점적으로 수색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이 시대 오버 테크놀로지의 정수로 기대됐던 장갑차들이 지리멸렬하자 평소 하던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병들이 순양함에서 내려 적지 행군 대열을 갖춘 다음 동쪽으로 달려 나갔다. 남쪽으로 도망갔던 유목민 기병들이 당황해서 기병 중대를 추격했으나, 마상 사격 몇 회에 절반쯤 죽자 더 이상 못 버티고 달아났다.

============================ 작품 후기 ============================

오늘 중에 하나 더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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