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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478화 (427/1,000)

00478  49. 1598년  =========================================================================

“국왕폐하께서 직접 해군 함대를 이끌고 에스파냐에 가시면 어떻겠습니까? 카리브 해의 해적들은 숨느라 바쁠 것이며, 유럽의 상선들은 고산국의 위엄에 절로 고개를 숙일 것입니다.”

“해적 때문에 조문단을 호위해야 하는 문제가 있겠구려.”

사실 조문단은 수송선에 타고 마스트에 태극기만 꽂아도 안전을 보장했다. 유럽 주요 항구도시의 게시판에는 고산국 배들의 선형과 국기가 그려져 있었다. 카리브 해에서 고산국 함선들이 해적들을 소탕했다는 소문이 퍼져 감히 고산국 배를 공격할 간 큰 해적은 없었다.

“대서양에 거대한 고산국 함선들이 나타나면 유럽 국가들에게 큰 인상을 남겨 앞으로 어느 누구도 감히 북미 영토에 욕심을 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한테 주시는 물량 말고도 직접 유럽 각국과 교역을 해야 더 많은 국부를 만들지 않겠습니까? 유럽의 왕족이나 고위 귀족들을 직접 만나보시면 앞으로 국왕폐하의 행보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고산국 같은 신생 국가를 유럽 여러 나라에 알릴 좋은 기회인 것 같소만, 일이 많아서 본국을 비워두고 떠날 수는 없소.”

이민호는 유럽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어도 혜영이 노려보고 있어서 얼씨구나 좋다고 할 수가 없었다. 구스만 총독도 혜영에게 찍혀서 좋을 일은 없었지만,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이민호를 설득했다. 총독은 에스파냐 갈레온으로 지금 출발해봤자 새해를 넘기고 말 것이기에 어떻게든 고산국 함선에 얻어 타고 가려고 노력했다.

“한창 개척 중인 북미에도 자주 들르셔서 관리들을 격려하셔야지요.”

“다들 알아서 잘 하고 있소.”

“보고서만으로 되겠습니까? 참! 비올레타 부인이 고향에 가보고 싶다면서 마닐라에 거주하는 부모에게 편지를 자주 보내고 있답니다.”

“으음.”

그 이유라면 상황이 달라졌다. 이민호가 잽싸게 혜영의 눈치를 살폈다. 혜영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다가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후궁들끼리 동병상련하는 덕택에 이렇게 길이 생겼다. 궁녀를 시켜 비올레타를 알현실로 부르자, 필리핀 총독이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던 비올레타가 단숨에 달려왔다. 유모가 아기를 안고 허겁지겁 뒤따라 왔다.

“비올레타는 혹시 고향을 방문하고 싶은 생각이 있소?”

“물론이지요, 전하. 혹시 에스파냐에 조문단을 보낸다면 저도 가고 싶어요. 반드시요! 아아! 죽을 때까지 고향에 다시는 못 가볼 줄 알았어요.”

비올레타의 커다란 눈망울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비올레타가 출산 전에 겁을 집어먹고 고향 이야기를 여러 번 했던 것이 기억났다. 이 시대에 출산 중에 산모가 죽는 경우가 흔했으나, 고산국에서는 그럴 일이 거의 없었다.

이민호가 유모에게서 아기를 받아들었다. 아기는 비올레타를 닮아 천사처럼 예쁜 공주님이었다. 내명부의 수장인 혜영은 산모와 아기의 건강을 무엇보다 우선하기에 비올레타가 유럽에 가는 것을 반대할 가능성이 컸다.

“우리 마르그레타가 아직 어리지만 어머니의 고향에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소.”

“물론이에요. 이제 배를 타도 될 거여요. 그리고 의사 선생님 말씀이, 두 돌 이전의 아기는 멀미를 거의 하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그래요? 시력이 아직 안 좋아서 그럴 수도 있겠소.”

비올레타는 눈치 빠른 여자라서 그런지 결정권을 쥔 자가 누군지 바로 알아봤다. 혜영의 발치에 앉아 흐느끼는 비올레타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혜영이 허락하고 말았다.

“주인님께 두 달의 시간을 주겠어요. 대신 주인님의 개인 계정에서 은 60만 냥을 정부재정으로 옮길게요. 철을 대량 생산하면서 운송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요. 어서 북미 현지에서 철을 생산해서 부담을 줄여주세요.”

고산국 본토에 탄광도 있고 철광도 발견했지만 광부를 모집하기 어렵고 깊이 갱도를 파고 들어가야 해서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차라리 외국에서 철은 수입하는 게 싼 편이긴 하지만, 그때는 품질이 문제가 됐다.

결국 석탄과 철광석을 외국에서 사오게 되는데, 무게가 만만치 않아 이는 운송비 상승을 불러왔다. 결국 북미에 철도를 부설하기 위해 선로를 뽑아내는 과정에서 운송비가 가장 많이 들었다.

“하루에 일만 냥 꼴이라면 엄청나게 비싸구려.”

“싫으면 비올레타 님만 보낼게요.”

“아니오! 내가 가겠소.”

혜영은 적자 재정을 메워서 좋고, 이민호는 유럽 여행을 하게 돼서 좋았다. 그러나 준비할 것도 많고 시간도 부족했다. 급히 의상 제작자들을 불러 모았다.

“비올레타와 내가 유럽 궁정에서 입을 옷을 제작한다. 이동하면서 입을 정장, 장례미사에 참가할 때 착용할 검은색 상복, 연회복, 일상복 등등을 보석 색깔에 맞춰 제작하라. 기한은 사흘이다.”

이민호도 근세 유럽의 의상 디자인을 기억에서 억지로 끄집어냈다. 유구국의 아마가 디자인 감각이 좋아서 이민호가 말로 설명하거나 대충 종이에 그려도 멋지게 옷이 만들어졌다. 다들 급하게 준비하는데 문제는 계속해서 생겼다.

“비올레타 님을 수행할 시녀가 부족합니다.”

“갈라티아 시녀들 있잖아! 열두 명 정도 데려가자. 시녀들 복장도 통일해!”

“전하! 마차는 어떤 종류로 준비해야 합니까?”

에스파냐에서 마차 운영을 맡을 근위대장이 이민호에게 물었다. 궁성 경비대와 호위대에서 40명 정도를 뽑아 따로 창설한 근위대는 전투 능력은 거의 신경 안 쓰는 순전히 의전용 부대였다. 화려한 군복과 군모를 갖춰 입고 번쩍번쩍한 군도나 금박을 장식한 소총을 휴대한 장병들은 제식동작만 죽어라 훈련했다.

“비올레타와 내가 탈 것은 백조 네 마리가 끄는 꽃마차다. 근위대장은 무슨 뜻인지 알겠지?”

“물론입니다. 백조들을 잡아서 우아하게 날면서 마차를 끄는 훈련을 시키겠습니다.”

유럽에 가기 전에 에스파냐를 비롯한 유럽 정세도 알아야 했다. 미카는 국내 정보국 운영뿐만 아니라 해외정보도 관할했다. 당연히 유럽 최강국인 에스파냐의 국내정치 상황을 파악하는 일도 맡았다. 미카가 이민호와 비올레타, 그리고 혜영에게 간략히 요약해서 보고했다.

“펠리페 2세의 후계자는 선왕이 그랬던 것처럼 국내 정치를 왕실 총신인 데니아 후작, 프란시스코 고메스 드 산도발 이 로하스에게 맡길 거여요. 새 국왕은 지금까지 전쟁을 벌였던 서유럽 여러 나라들과 친교를 맺는 대신 35만에 달하는 국내 모리스코를 북아프리카로 추방할 것 같다고 주변 국가들에서 예상하고 있어요.”

데니아 후작은 나중에 레르마 공작이 되면서 국왕 펠리페 3세를 대신해 에스파냐 국정 대부분을 운영하게 된다. 1604년 런던 강화조약, 1609년 네덜란드와 12년 휴전조약을 맺어 외치를 안정시킨 다음 내정에 신경을 쏟을 수 있었다. 그러나 펠리페 3세는 유독 종교문제에서는 펠리페 2세 이상으로 고지식해서 국내에 이교도들을 남겨두지 않으려 했다.

“서유럽과 친교라. 좋지. 그런데 모리스코는 뭐야?”

“에스파냐에 항복한 무어인들인데 종교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신앙을 유지하는 사람들이에요.”

“종교가 다르다고 35만이나 되는 사람들을 내쫓는다고? 미쳤군!”

모리스코는 페루 부왕령에서 에스파냐 남성과 물라토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라는 뜻도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 에스파냐는 모리스코를 남김없이 북아프리카로 추방했다.

“모리스코 중에 약간의 농민이 있지만 이슬람 지역이 대체로 그렇듯 상인과 도시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에요. 어차피 추방될 자들이라면 이들을 북미로 이주시키면 좋겠어요.”

“상인이나 도시 노동자라고? 잘 됐군. 아주 잘 됐어.”

“그들을 광산에 배치하시려고요? 북미에서 노천 탄광과 노천 철광을 아직 못 찾았잖아요?”

혜영이 묻자 이민호가 북미 지도를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탐사대가 꾸준히 내륙으로 진출해 조사하고 있었지만 북미 원주민들과 충돌하는 경우가 잦아 아직 오대호에 접근도 하지 못했다. 지금은 시간과 자금을 들여 가까운 원주민 부족들부터 차근차근 안면을 익히는 식으로 탐사대의 작전이 전환됐다.

현대 미국에서 오대호 인근 미네소타에 품질 좋은 노천 철광이 있다고 이민호가 기억하는데 제철소는 약간 거리가 떨어진 이리 호 인근 펜실베이니아에 세워졌다. 그래서 이민호는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탄광이 제철소 근처에 있다고 추측했다. 그것도 노천 탄광이라고 봐야 했다. 17세기 후반부터 영국에서 용광로, 그 이후 공장지대는 예외 없이 노천 탄광 지대에 세워졌다. 다른 무엇보다도 석탄 소요가 가장 크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 또는 이 시대 조선에서 하는 식으로 지하에 갱도를 파고 들어가는 식으로 석탄을 채굴을 하면 생산량도 적고 노임도 많이 들었다. 북미는 자원이 풍부한 만큼 초기에는 노천 광산 위주로 개발해도 충분했다. 사실 미국에 풍부한 지하자원보다는, 그 지하자원을 결합시켜 철을 생산하는 것이 핵심 문제였다.

“노천 탄광이나 철광이라면 원주민들에게 물어보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모리스코들이 거주할 지역과 이들에게 줄 일자리를 준비해야겠어. 오대호가 어떻게 수로로 연결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철광석을 배에 실어서 탄광 근처로 옮기는 게 효율적이겠지. 새원산에서 여기 이리 호수까지 철로 500km를 부설하겠다.”

현대 지명으로 뉴욕에서 클리블랜드 동쪽 이리 호 남쪽까지 선을 그었다. 애팔래치아 산맥의 북단을 피해서 우회해야 하므로 직선거리보다 더 긴 철도 노선이 예상됐다.

“어마어마한 길이에요. 명나라 노동자만으로 가능하더라도 시간이 걸리겠어요. 그 지역 원주민들의 저항도 예상해야 해요.”

“이로쿼이 원주민들이 저항하더라도 할 수 없어. 이 철도를 먼저 완공해야 제철소를 만들어서 북미 전체를 철도로 이을 수 있으니까. 내륙으로 진출하려면 철도가 가장 시급한 문제야.”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 철도를 만드는 게 어렵겠어요. 선로 재고가 부족해 새로 만드는데 시간이 걸리니까요.”

“알았어. 혜영이 철광석과 석탄 수입량을 늘려서 더 많이 보내줘.”

브루나이 섬에서 티크 목재 위주로 삼림이 개발되는 도중 엉뚱하게 대규모 노천 탄광이 발견됐다. 브루나이 섬 남동쪽 발릭파판이라는 곳이었는데 매장량은 고산국이 현재 기준으로 천 년 넘게 쓸 수 있는 엄청난 양이었다. 게다가 채굴 비용이 적게 드는 노천 탄광이었다.

그러나 탄광 근처에서 노동력을 구하기 어렵고, 지금도 명나라나 필리핀에서 충분히 싼 가격에 석탄을 수입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많은 운송비를 들여 발릭파판 탄광에서 캔 석탄을 고산국으로 운반할 이유가 없었다. 자원을 새로 발견하더라도 이렇게 조건에 따라 개발 여부가 결정됐다.

며칠 지나 유럽으로 갈 준비가 끝났다. 예상 외로 짐이 많아서 모아놓고 보니 산더미였다. 국왕좌승함과 수송선에 차곡차곡 쌓아 넣었다.

1전단 순양함 12척 외에도 수송선 여러 척이 동원된 대규모 원정 같은 조문단이 구성됐다. 구스만 총독과 가족, 마닐라에 거주하는 에스파냐 귀족들을 위해 수송선 한 척을 내줬다. 구스만 총독이 매년 정기적으로 마닐라 갈레온 선단이 하던 교역 외에 특별 교역을 요청해서 고산국 상품을 잔뜩 싣게 해주었다.

이민호는 궁성을 출발하기 직전에 후궁들과 자식들을 한 번씩 꼭 안아주었다. 애들이 많아서 항구까지 배웅하는 사람은 혜영 하나에 한했다. 잘못하면 인사하다가 해가 질 것 같았다.

드디어 20척에 가까운 함대가 출항했다. 왕도에서 해협을 지나 남서쪽으로 항로를 잡아 계속 항해하자, 수송선에 탔던 구스만 총독이 단정을 타고 와서 좌승함에 올랐다.

“국왕폐하! 어째서 북동쪽이 아니라 남서쪽으로 가십니까? 수에즈 운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만.”

“운하 옆에 부설한 철도를 이용해 배를 운반하려는 것이오.”

파나마 운하에서도 배를 수로가 아닌 철도로 이동시킨 적이 있었기에 구스만 총독이 겨우 이해했다. 조문 함대는 태평양이 아닌 인도양과 지중해를 통해 유럽으로 가는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 총독께서 직접 단정을 타고 오지 마시고, 앞으로는 함교에서 무선통신, 무전을 이용해 뜻을 전하시오.”

“혹시 전화선이 연결되지 않은 전화 같은 것입니까?”

“바로 그렇소. 구리선이 아니라 공기를 매질로 이용하는 전기 통신 방법이오.”

============================ 작품 후기 ============================

오늘은 한 회만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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