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476화 (425/1,000)

00476  49. 1598년  =========================================================================

1598년 3월에 아일랜드 이주민 2천여 명을 태운 고산국 여객선 한 척이 처음으로 북미 동해안 새강릉에 도착했다. 고향에서 경작할 땅을 잃고 잦은 반란으로 인해 도시에서도 살기 어려운 시대에 마지못해 선택한 이민이었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출발할 때에 이주희망자들 전체에게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입혔고, 상륙할 때도 마찬가지 과정을 거쳐 전염병의 유입을 줄이려고 노력했다.

새강릉 시청에서는 이주민들에게 한 달 동안 교육을 시키면서 잘 먹여 건강을 회복시킨 다음, 미리 준비된 개척마을에 분산 배치했다. 시청에서 개간이 완료된 농경지를 내주고, 길가에서 마주치는 원주민들마다 친절하게 새 주민들을 맞아주었다.

이들은 한 달 동안 교육을 받고도 파종을 준비할 시간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분배된 땅이 넓고 집도 깨끗해서 다들 흡족해했다. 기후는 온화하고 관개시설 덕택에 물도 풍부해 농사는 풍년을 예상했다.

모든 것이 이주민들이 처음 배를 탈 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고, 아일랜드에서 배고프고 쓰라렸던 기억은 어느새 옛 추억이 되었다. 식량과 의료 등에서 최고 대우를 받은 아일랜드 이주민들은 이주한 지 몇 달이 지났어도 여전히 꿈인지 생신지 구별할 수 없었다. 인구가 부족한 북미 새강릉 입장에서는 첫 번째 이주민들에게 최고 대우를 해줄 수밖에 없었다.

빨간 머리를 특이하게 여긴 북미 원주민들이 괜히 아일랜드 개척마을에 들락거리면서 칠면조를 선물하는 일이 없었다면 치안 문제도 더 높이 평가받았을 것이다. 이주민들이 고향 친지들에게 편지를 보내 아일랜드에서 이주 희망자가 대폭 늘어나고 있다는 고무적인 소식을 접했다.

“백성들을 수천 단위로 데려가는데 잉글랜드에서 반발하지 않아요?”

“쓸데없이 반란이나 일으키는 벌레들을 왕의 영토에서 퇴치해준 셈이니까.”

혜영이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딱 이 정도가 당시 잉글랜드 정부가 아일랜드 사람들을 보는 인식이었다. 감자 대기근 이전인 17세기 중반에 아일랜드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크롬웰은 아일랜드 인구 4분의 1을 학살했다.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더블린에서 고산국 여객선을 타는 일은 아일랜드 반란군 또는 잉글랜드 반란진압군의 삼엄한 경비 아래에서 평화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어느 쪽도 이민을 반대하지 않았기에 충돌도 없었다.

5월에 낭트 칙령이 발표되고 프랑스에서 종교의 자유가 공식적으로 인정됐다. 그러나 위그노는 프랑스에서 소수에 불과했기에 여전히 불안감에 사로잡혔고, 실제로 신교도들에 대한 테러가 종종 발생했다. 바로 이때 이민호에게서 포도나무 묘목을 가져오라는 의뢰를 받은 에스파냐 선장이 공작에 나섰다.

결국 종교의 자유를 찾아 북미로 이주하겠다는 사람들이 천여 명에 달했고, 고산국 여객선이 보르도에 입항해 이들을 태웠다. 보름에 걸친 대서양 항해 끝에 새동래에 입항한 위그노들은 남프랑스보다 따사로운 햇살에 감탄했다.

포도 농장을 경영하겠다는 남프랑스 사람들은 대부분 플로리다에 배치됐다. 그러나 포도농원을 개간하는 동안 북미 원주민들과 약간의 충돌이 발생했다. 결국 원주민들이 경작할 농지를 개간해주는 조건으로 원주민 마을들이 40km쯤 물러나는 것으로 해결됐다.

수에즈 운하 건설은 이민호의 개인 자금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오스만제국과 이집트 맘루크들이 이미 운하 건설 공사에 협조하고 있기에 이집트 농민들을 공사인력으로 충원하는 문제도 순조롭게 해결됐다. 공사 현장을 약탈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던 시나이 반도의 베두인 족, 즉 바다위윤 유목민들도 높은 임금에 홀려 공사에 적극 참가했다.

현재 철도와 도로를 먼저 개설하고 공사구간을 열 곳으로 나눠 중장비를 투입해 빠르게 건설이 진행됐다. 오스만제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공사 진행 상황을 지켜보면서 매번 놀랐다. 거대한 다리 몇 개가 운하에 물이 통하지 않은 상태에서 건설이 끝났고, 공사 시작 6개월이 지나면서 어느덧 완공이 눈앞에 다가왔다.

수에즈 운하를 개통하기 전에 가장 골치 아팠던 것은 수익 분배 문제가 아니라 운영 주체를 결정하는 문제였다. 원래는 고산국과 오스만제국, 이집트의 삼자협의에 따라 이집트가 운하를 운영하게 돼 있었다. 그러나 운하를 군용 시설로 지정한 오스만제국에서는 이집트에 파견된 오스만 병력으로 운하를 지키면서 운영도 담당하길 원했다.

그러나 이민호가 공사 중단 불사를 시사하면서 오스만제국을 압박해 야욕을 꺾었다. 오스만제국에서는 이런 결과를 예상했으면서도 괜히 한 번 건드려본 셈이었다.

뒤끝 쩌는 이민호는 이 사건을 붉은 글씨로 기록해두었다. 그리고 운하 운영에 필요한 예인선 여섯 척의 기관 장치를 오스만에서 뜯어보지 못하도록 철저히 봉인했다. 사실 오스만 기술자들이 뜯어보더라도 복제는 거의 불가능했고, 다만 원리를 이해하면 과학 발전을 수십 년 앞당길 만한 지식을 얻는 수준이었다. 이민호는 그런 지식마저 오스만에게 넘겨주기 싫었던 것이다.

그 사이에 석유를 실은 오만의 배들이 아부다비와 수에즈 사이를 왕복하면서 거대한 저유고들을 가득 채웠다. 전직 인도양과 페르시아 만의 해적이었던 오만 선원들은 잔지바르 항에 가득 쌓인 물자를 홍해를 지나 수에즈에 쌓는 일에 동원됐다. 오만 상선들은 마스트 끝에 오만 국기와 태극기를 함께 달고 다녔다.

1598년 7월, 조선에서 고산국 조정에 잠입시킨 간첩이 체포돼 고산국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간첩은 고산국의 군사제도나 지리 등을 살피는 흔한 우방국 간첩 수준이 아니라서 크게 문제가 됐다.

간첩은 가족들과 함께 이민을 가장해 조정에 들어와 형조의 중견급 관리로 일하면서, 수시로 고산국의 인구 변화와 무역 규모, 세입세출 등 국가 중요 정보를 빼내 일기 형식으로 서책에 기록한 다음 조선으로 보내는 일을 해왔다. 미카가 운영하는 정보국에서 간첩이 정보를 연락책에게 넘기는 순간에 덮쳐서 간첩단을 일망타진할 수 있었다. 간첩은 조사를 마친 다음 재판정에 끌려나왔다.

“이야! 정리가 정말 잘 돼있네. 고산국 관리들이 보고 배워야 해. 일 년 세액이 이렇게 나뉘어 지출되는구나.”

이민호가 증거 자료를 살피며 비꼬는 동안 간첩은 고개를 똑바로 세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30대 초반의 꼬장꼬장한 유생처럼 생긴 간첩은 자기 딴에는 조국 조선에 충성을 한 셈이니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판사가 간첩혐의로 기소된 관리의 신상명세를 읊었다.

“이름 강항, 자는 태초, 호는 수은 또는 사숙재입니다. 명종 22년에 태어났으니 양력으로 1567년생입니다. 1593년에 별시문과 합격, 공조 좌랑과 형조 정랑 등을 지냈습니다. 고산국에 이민 올 때는 조선에서의 신분을 학생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사람 호주로 보내 양 숫자나 세게 할까요?”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잡혀갔던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포로실기(捕虜實記) 중에서 가장 유명한 <간양록(看羊錄)>의 저자로 기억되는 사람이 겨우 30대 초반이라는 사실에 이민호는 꽤나 놀랐다. 한나라 소무가 흉노족의 포로가 되어 양을 세는 일을 맡았다는 고사에서 나온 제목이 간양록었다.

양을 돌본다는 것은 시베리아 유형을 가서 나무를 세는 일과 비슷하게 사소하고 의미 없는 일을 뜻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간 강항이 지은 책 제목은 원래 죄수가 타는 수레를 뜻하는 <건거록(巾車錄)>이었으니 강항 생전에는 간양록이라는 책 제목을 아예 몰랐다. 강항은 부끄럽지만 일본에서 먹고 살기 위해 지식을 팔았다고 간단히 언급했으나, 그가 가르친 인물들이 근세 일본 유학의 시조라는 후지와라 세이카 및 그의 제자들이었다.

이민호는 강항이 그렸다는 고산국 지도를 펼쳤다. 강항은 고산국에서 제작한 지역별 세부지도 여러 장을 축척을 통일한 다음 하나로 엮어 전혀 새로운 정밀 지도로 만들어냈다. 마치 대동여지도 제작과정과 비슷한 일을 강항은 사전 지식 없이 혼자서 해냈다.

“이야! 대단해! 왕도를 공격하기 적당한 상륙 지점이 세 곳이나 있었구나. 상륙한 병력이 왕도에 접근하기 좋은 곳인데 중간에 방어 시설이 전혀 없네. 반성해야겠어.”

“전하. 조선은 고산국을 공격할 의도가 없습니다. 제가 만에 하나의 경우를 대비해 조사한 것에 불과합니다.”

“알아, 알아. 우방이라도 만약에 대비해 이 정도 준비는 해놔야겠지. 그런데 문제는 조선에서는 국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그 일에 동원된 간첩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거야. 모순이지만 이게 현실이지.”

“제가 그 일을 맡았으니 처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강항은 조선에서 공조와 형조에서 고위 관리를 지냈던 인물이지만 신분을 세탁해 고산국에서는 형조의 중견급 관리를 맡았다. 강항은 중범죄자들이 노역에 동원되는 원숭이 탄광 외에 형무소 여러 곳을 세워 교육 위주로 수형자들을 교화시키자고 주장했다. 무식해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는 사회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쌓게 해주고, 유식한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다면 여러 가지 공부를 시켜 지긋지긋하게 만들었다.

어떻게든 죄수들이 다시는 죄를 짓지 못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강항의 교도행정은 높은 점수를 받았다. 형기가 만료돼 출감하는 죄수들이 진저리를 치는 장면을 보고 이민호는 얼굴도 모르는 중견 관리에 불과했던 강항을 아주 높이 평가했었다. 억지로 공부를 시키는데 좋아할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이 다재다능한 사람이 간첩질을 했단 말이지. 웬만한 정보야 공개돼 있으니 상관없지만, 일부는 국가 중요 기밀로 지정된 것도 있단 말이야.”

“그건 조선국 국왕전하께서 개인적으로 요구한 내용이었습니다. 고산국의 국가안보에 위해를 끼칠 내용이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고산국이 본토든 속국이든 모두 후궁들이 나눠서 다스린다는 소문은 어느 정도 퍼져 있었어. 그러나 이렇게 세세하게 역할이 구분돼 기록된 문서는 지금까지 없었을 거야. 물론 강 선생은 정치와 행정 위주로 조사하려 해도 조선 국왕이 이것을 원했겠지. 야하니까.”

강항이 조사한 내용 중에는 뜻밖에 내명부의 일이 많이 포함돼 있었다. 이민호가 후궁들과 동침하는 순서가 정확히 기재돼 있었고, 후궁들이 밤을 준비하는 절차가 상세히 묘사됐다. 일부는 내명부의 기록을 복제한 흔적도 남았다.

“내명부에서 누군가가 정보를 제공했다는 뜻이겠지?”

“죄송합니다. 예전에 집안에서 계집종으로 일했던 아이를 궁녀로 들여보냈습니다. 그 아이를 용서해주십시오.”

강항이 조선에 보내려다 체포되면서 압수된 서책 중에서 하나를 펼쳤다. 이민호와 관계된 기록이 대부분이었고, 일부에는 살색 위주인 채색 그림이 첨부돼 있었다. 내명부 화원이 그린 것을 강항이 베껴서 그렸다는데 어쩐지 후궁의 몸이 더 육감적으로 재창조했다.

“체위, 지속 시간, 사정 여부, 후희 때 후궁들과 나눴던 대화 등등, 낯 뜨겁구먼. 내명부에서는 이런 것까지 다 기록했었나? 앞으로 조심해야겠어.”

“내명부에서는 당연히 국왕전하와 관련된 모든 것을 기록해야 합니다. 아마도 그 부분이 조선 국왕전하의 관심을 끌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그것을 상세히 조사하다가 제가 잡힌 셈입니다.”

“조선 국왕이 아니라 김 상궁이 보고 싶었던 내용일 수도 있겠다.”

김개시라는 상궁에 관련된 여러 가지 추문을 감안하면 가능한 결론이었다. 물론 광해군의 반대파에 의해 악의적으로 부풀려진 소문이겠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김개시는 포르노 여주인공에 못지않은 인물이었다.

증거와 정황이 확실하니 강항이 유죄를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판사들은 판결을 내리기 전에 몹시 곤혹스러워 했다.

“전하. 문제는 죄인이 고산국에 끼친 위험이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간첩죄의 경우 실제로 끼친 해악보다는 경고의 의미가 더 큽니다만, 이 정도라면 큰 벌을 내리기도 곤란합니다.”

“그래도 죄과는 받아야겠지요. 내 모습이 이런 야한 그림책에 담겼는데 화가 나지 않는다면 나는 성인군자일 것이오.”

현대라면 동영상에 찍혀 인터넷에 유포된 꼴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림에 나온 남자는 이민호의 얼굴과 많이 달랐기에 국왕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하기에도 어려웠다.

“황공하옵니다. 하오면 죄인에게 어떤 벌을 내려야 하겠습니까?”

“생각할수록 괘씸하니 편안한 감금형보다는 노동형이나 유형이 적당하겠소. 조선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좋겠소.”

============================ 작품 후기 ============================

내용이 이어질 예정입니다.

오늘 중에 하나 더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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