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72 49. 1598년 =========================================================================
역시나 수라바야와 투반 등 자바 섬의 여러 도시국가에서 긴급 구원 요청을 브루나이 유전 수비대에 접수시켰다. 수비대에서는 부랴부랴 왕도로 연락선을 보내 자바의 상황을 보고했다. 자바에 네덜란드 배 네 척에서 일곱 척이 돌아다니면서 약탈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해중국을 공격한 세 척 외에 몇 척이 더 있는 것 같았다.
2년 전 처음으로 동인도제도에 도착했던 하우트만 형제의 네덜란드 배 4척은 신사적으로 무역만 하고 돌아갔다. 도중에 한 척이 좌초하는 바람에 결국 잃고 말았지만 네덜란드에 돌아가 큰 이익을 봤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다른 기회를 노리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나중에 동인도제도에 도착할 모든 네덜란드 배들이 이 지역 사람들에게 해적선으로 몰릴 수 있는데도 남 생각은 전혀 해주지 않는 자들이었다. 이 시기 네덜란드에는 통합된 동인도회사가 아직 설립되지 않았고, 여러 투자회사들이 난립하며 저마다 선단을 구성해 동인도제도로 보내던 시기였다.
“제가 직접 포로들을 심문해봤는데 나포된 배 한 척이 세 척의 대장선도 아니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형님께 상의 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렇다면 침몰한 배들을 인양하고 싶다는 건가, 전하?”
해군본부에 돌아온 이민호는 이순신과 함께 해도를 살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범선 두 척이 가라앉은 곳은 돛대 끝이 물밖에 나와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으나, 내버려두면 배가 해류에 끌려가 다시 찾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네덜란드 배 두 척이 가라앉은 곳은 대륙붕이긴 해도 수심이 조금 깊었다. 25미터를 넘어선 수심에 잠수부들을 장기간 내려 보내 보물 인양 작업을 시키기에는 위험이 따랐다. 산소통을 메고 잠수한다 해도 질소마취나 산소중독, 감압병, 공기색전증 등 온갖 잠수병에 걸릴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감압장치를 아직 못 만든 상태에서 보물에 눈이 어두워 잠수부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
“인양하면 좋죠. 적당한 방법이 안 떠올라서 그래요.”
“나중에 침몰한 아군 배를 인양해야 할 수도 있으니 이번에 인양해보세.”
“오! 형님께서 반대하실 줄 알았는데요. 제가 없는 동안 인양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통지 자네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으니 차마 반대하기 어려웠네. 그런데 자바 섬 여러 왕국에서 구원요청이 왔다는데 바로 안 가도 돼? 아! 1전단 함선들이 내일부터 근무이니 내일 출항하는 게 나을 거야.”
“잘 됐군요. 그럼 오늘은 인양작업 좀 지켜보죠. 방법이 있습니까? 바지선과 부두에 설치한 기중기를 총동원할까요?”
“닻줄 물레를 써야지.”
이민호는 기중기와 부력을 늘려 침몰선을 띄우기 위해 거대한 풍선을 생각했으나 이순신은 단순히 수송선 네 척만 동원했다. 침몰한 범선들은 천 톤 정도로 추정되고, 해저에 가라앉았으니 그 몇 배의 무게를 끌어당겨야 했다. 그러나 수송선 네 대면 충분하다고 이순신은 판단했다. 이민호는 그저 이순신이 하는 대로 구경만 했다.
네덜란드 배들이 침몰한 해역에 도착하자 수송선 한 척이 닻을 내렸다. 이 닻을 다른 수송선 갑판에 끌어올린 다음 서서히 멀어졌고, 처음 수송선은 계속해서 닻줄을 풀었다. 어느 정도 닻줄이 풀리자 수송선 두 척이 닻줄을 물속 깊이 늘어뜨렸다. 그리고 침몰한 배에서 솟은 돛대의 좌우를 천천히 지나가면서 쌍끌이 저인망 어선처럼 바닥을 쓸 듯 침몰선 밑에 닻줄을 걸었다. 닻줄이 팽팽히 당겨진 순간 수송선들이 멈췄다.
반대 방향에서도 두 척이 지나가면서 침몰선 밑에 닻줄을 걸었다. 그 다음 수송선 네 척이 닻줄 물레를 가동해서 조심스럽게 침몰선을 수면 상으로 끌어 올렸다. 수송선 네 척을 순양함 함미 갑판에 우뚝 선 이순신이 손짓만으로 지휘했다. 범선이 반쯤 잠긴 상태에서 배 네 척이 동시에 아주 천천히 움직여 해안으로 옮겼다.
범선이 작아서 의외로 쉽게 인양과 예인에 성공했다. 나머지 한 척도 수면으로 인양한 다음 항구로 예인했다. 이민호는 몇 달 걸릴 줄 알았는데 이순신이 단 몇 시간 만에 이룬 쾌거였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그 좋은 머리를 좀 쓰게.”
해중국 해안에 끌어당긴 네덜란드 배에서 해적들 시체 말고도 꽤 많은 것이 나왔다. 특히 선장실에 보관된 보물 상자가 너무 많아서 해병 30명이 네 번씩이나 어깨에 지고 옮겨야 했다.
나포한 배보다 침몰선 두 척에서 금은보화가 네 배 정도 더 나왔다. 해중국 요새 수비대와 교전에 참가한 배 세 척의 승조원들, 그리고 인양 작업에 참가한 선원들에게 승리수당을 나눠주고도 금과 은이 한참 많이 남았다.
“그런데 이건, 도저히 꿀꺽할 수 없겠군.”
그러나 금으로 만들고 보석으로 치장한 왕관과 큼직한 보석이 박힌 황금보검 같은 것들이 문제였다. 아마도 네덜란드 배들이 약탈한 자바의 어느 무역도시 왕궁 한두 곳에서 제대로 털린 것 같았다. 자바 섬 무역도시에서 해적들에게 난도질당하는 사람들이 내지르는 비명이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보물에서 소금기를 제거하는 처리를 한 다음 1전단 순양함들을 거느리고 브루나이를 거쳐 자바 섬으로 향했다. 목적은 두 가지, 자바 섬을 노략질한다는 네덜란드 해적들을 토벌하고 도시국가들이 약탈당한 보물을 돌려주기 위해서였다. 인양한 배에 금과 은만 있었다면 웬만하면 다 꿀꺽할 텐데, 왕관과 보검 등 그 도시국가의 국보에 해당하는 물건들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수라바야 항구의 건물들이 불에 홀랑 타서 새까맣게 된 것을 확인하면서 고산국 함대가 접근했다. 고산국 깃발을 확인한 수라바야 사람들이 몰려나와 함대를 열정적으로 환영했다. 고위 관리들이 몇 보이기에 이민호가 불렀다.
“술탄을 만나고 싶다.”
“지금 달려오고 있습니다.”
고위 관리들이라 해도 며칠째 네덜란드 해적선들이 털고 지나간 다음이라 다들 꼴이 말이 아니었다. 술탄을 순양함에 데려와 보물을 가리키자 몇 가지가 수라바야의 국보라고 했다.
“전대 술탄이 쓰던 터번이 틀림없습니다. 국왕께서 해적들을 무찌르고 이렇게 국보를 돌려주시기까지 하시니 그 은혜를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나머지는 마두라의 국보 같습니다.”
“수라바야의 것을 포장해서 넘겨주겠소. 침몰한 해적선에서 인양한 것이라 다른 보물들은 혹시 해류에 휩쓸려갔을지도 모르겠소. 나머지 금과 은은 인양작업에 소모된 비용으로 처리했소.”
“국보를 돌려주셨는데 저희들이 더 부담해야지요. 보상금을 드리겠습니다.”
“준다면 사양하지는 않겠소. 그런데 네덜란드 해적들이 자리 잡았다는 곳은 어디요?”
“해적들이 며칠 점령한 것을 두고 소문이 그렇게 퍼진 것 같습니다. 해적은 노략질을 마친 다음 서쪽으로 떠났습니다.”
수라바야는 부유한 무역도시로 이름이 났는데 지금은 마타람과 발리 등 강성해진 국가들로부터 군사적 압박을 받는 처지였다. 여기에 네덜란드에게 해적질까지 당했으니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항구 앞에 요새가 멀쩡히 서 있는데 방어에 사용하지 않은 것이오?”
“해적들이 배에서 포를 쏜 직후 요새가 무너진다면서 병사들이 다 도망갔습니다. 물론 요새에 포탄이 맞아도 흠집도 나지 않았습니다.”
“쯧쯧! 병사들에게 훈련을 좀 시켜야겠소.”
술탄이 몹시 부끄러워했다. 수라바야의 술탄은 최근 이민 온 명나라 사람들을 군사로 고용했으나 아직 수가 적어 큰 힘이 되지 못했다. 명나라 출신 병사들은 총과 포를 쏘는 전쟁에 그나마 익숙해서 무작정 도망가지 않을 수준은 됐다. 술탄이 해적들에게 포로가 되지 않은 것도 이들이 몸으로 막아 지켜준 덕택이었다.
무역도시에서 요청한 철근 콘크리트 요새를 고산국에서 설계해줄 때 3인치 함포에는 버티고 5인치 함포에 무너질 정도로 두께를 설정했다. 몇몇 도시국가에서는 그보다 더 튼튼하게 요새 벽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니 이 시기 네덜란드에서 보유한 그 어떤 대포로도 무너질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해적선에서 포를 쏘자마자 병사들이 다 도망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감의 문제라서 도망친 병사들만 욕하기는 어려웠다. 외국 배의 평균적인 능력을 고산국 함선 수준으로 오해할 경우 병사들이 공포에 질려 도망칠 수도 있다는 것이 이민호의 생각이었다.
“해적들도 문제지만, 요즘 마타람에서 사신을 보내 내부하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오?”
자바 섬 내부 문제에는 간섭하지 않기로 했기에 이민호가 이런 대답을 했다. 고산국을 종주국으로 모시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문제이기에 술탄이 한숨을 팍팍 내쉬었다. 어느 나라든 스스로 지켜야 했지만 수라바야는 나라 규모가 너무 작다는 문제가 있었다.
“마두라나 다른 무역도시들과 연합을 결성하고 있습니다.”
“좋은 생각이지만 몇 척 안 되는 해적에게도 줄줄이 약탈당하는 판이오. 이런 식으로 마타람이나 네덜란드가 도시국가들을 하나씩 점령한다면 금방 무역도시 연합 전체를 합병해버릴 것 같소.”
“그래서 고민입니다.”
무역도시 연합이라고 하니 마치 SF영화나 게임에 등장하는 세력 같았다. 자바 섬의 북쪽 해안에 줄줄이 이어져 있는 도시국가들은 이 명칭에 어울리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사이 수라바야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마두라에서 술탄이 직접 배를 타고 달려왔다. 마두라 술탄도 국보 여러 가지를 돌려받고 이민호에게 감사의 절을 올렸다. 특히 새까만 피리에는 사연이 많았는지 술탄이 눈물까지 흘렸다.
“마두라 왕족의 처녀가 이 피리를 불면 온갖 질병이 사라지고 해일과 해적이 물러난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겁에 질린 왕녀가 피리를 미처 불지 못한 새에 해적들이 빼앗아 갔습니다.”
“만파...... 간수를 잘하도록 하시오.”
아마도 왕녀가 피리를 불긴 했는데 네덜란드 해적들이 아랑곳하지 않고 마두라 궁성을 약탈하고, 왕녀는 처녀가 아닌 것으로 모함을 받는 스토리가 대충 그려졌다. 그러나 낙랑의 자명고나 만파식적 같은 전설의 신물은 실제적 효과보다 심리적인 효과가 크기에 다른 나라 사람이 미신이라고 섣불리 비판할 수는 없었다.
“공격할 때는 배가 효과적이겠지만 방어할 때는 요새가 훨씬 유리하오. 앞으로도 해적선이 공격해올 가능성이 높으니 대포 구경을 올려 사정거리를 늘리든지 하시오. 물론 도망가지 않을 병사를 양성하는 게 우선이겠소.”
“조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기존 대포는 너무 약합니다. 고산국에서 신형 대포를 제작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끄응! 우리 대포를 줄 수는 없고, 기존 대포를 개량해서 넘겨주겠소. 비쌀 것이오.”
“감사합니다. 고산국에서 제작한 대포라면 믿을 만하겠습니다. 국왕폐하께서 앞으로도 부디 많이 도와주십시오.”
두 술탄의 배웅을 받으며 함대는 바로 서쪽으로 출항했다. 해적선들이 동쪽에서 나타나 서쪽으로 향했다는 증언이 도움이 되었다. 해중국을 공격한 배들은 여기서 헤어져 북쪽으로 향했던 모양이었다.
서쪽으로 가는 동안 해안의 무역도시들 중에서 공격받지 않은 곳이 드물었다. 특히 평야지대 해안에 자리 잡은 투반의 시가지는 거의 초토화되고 말았다. 들판에 흩어진 농촌 마을들도 모조리 불타올랐다. 국왕좌승함 함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심하군요. 해적들이 항복하더라도 반드시 처단해야 합니다, 전하.”
“네덜란드가 해적질만 하면 차라리 다행인데, 나중에 올 놈들은 식민지배하겠다는 놈들이야. 더 위험하지.”
“강도질은 한 번으로 끝나지만 이 지역에 살지도 않을 거면서 지배하겠다면 나쁜 놈들입니다.”
이민호는 네덜란드 해적선들이 단순히 무역하러 왔다가 항구의 방어태세를 만만히 보고 해적질로 전환한 것으로 판단했다. 해중국 앞바다에서 침몰한 배들도 전형적인 해적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해적선이라면 작으면서도 선형이 더 길고 날렵해 속도에 주안점을 둬야 하는데 나포되거나 침몰한 네덜란드 배들은 전형적인 상선이었다.
함대는 속도를 높여 서쪽으로 쭉쭉 나아갔다. 해안선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모두 며칠 내에 해적에게 당한 상흔이었으며, 서쪽으로 갈수록 연기가 짙어졌다. 해적선들이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해가 저물어 해안에서 적당한 거리를 띄워 닻을 내린 다음 밤을 보냈다.
새벽 일찍 출항해서 현대의 자카르타에 가까워졌을 때 멀리서 포성이 은은하게 울렸다. 일방적인 약탈이 아니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급히 접근해보니 지상 요새와 해적선들이 포격전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하게 생긴 배들끼리 해전을 벌이고 있었다. 양쪽 모두 네 척이었는데 서로 치열하게 포를 쏘고 총을 쏘았다. 그런데 양쪽 모두 해중국에서 사로잡혔던 네덜란드 해적들과 거의 비슷한 복장이었다.
“어느 쪽이 해적입니까, 전하?”
“함장이 판단해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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