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470화 (419/1,000)

00470  49. 1598년  =========================================================================

고산국이 술루 제도를 직접 장악함으로써 예상치 못하게 주변국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고산국이 2천 km나 남진해서 주변국과 이웃이 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가까운 브루나이와 민다나오뿐만 아니라 남쪽 술라웨시 제도와 멀리 말루쿠 제도까지 안정시키는 효과를 얻었다.

그 덕에 고산국 본토와 호주 사이의 항로가 훨씬 안전해졌다. 고산국 배들이 들락거린 이후 해상장악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툴툴거리던 테르나테 제국도 이제는 고산국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술루 제도의 홀로 항을 지키는 것이 고산국 입장에서 결코 손해는 아니었다.

“양 손에 떡 들었는데 떡을 더 주면 어떡하나?”

고산국이 제국주의 국가처럼 여러 나라를 영향력 아래에 두었지만 직접적으로 남의 영토를 노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주변국들이 안심하고 의지하는 경향이 점점 커졌다.

그러나 북미와 호주 등 새 영토를 개척하기 바쁜 이민호 입장에서는 영토를 늘리게 되는 일만은 제발 사양이었다. 무리하게 영토를 늘리다간 자칫 체하거나 토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고산국이 기존 영토 외에 더 이상 영토 확장을 안 하겠다고 선언하면 어때요?”

혜영이 모처럼 좋은 제안을 했으나 이민호는 부정적이었다. 오해를 받을까봐 싫다고 해도 영토를 고산국에 믿고 맡기려는 군주들이 있을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얼마 후에 명나라가 무너질 위기에 놓인다면 반드시 그런 상황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외국 신경 쓰기 전에 내 재산이나 건들지 마시지?”

“고산국은 이미 주인님의 사유재산이 아니에요. 저는 주인님께 그렇게 배웠어요.”

“뭐, 일단 맞다.”

혜영이 주인인 이민호에게 속하면서도 일단 고산국 백성이니 국가에 충성해야 했다. 특히 관료가 된 이상 일반 백성들보다 더욱 국가에 충성을 바쳐야 했다.

“고산국이 왕국이며 주인님이 고산국 국왕이라 해도 국왕과 국가는 분리해서 생각해야 해요. 그렇다면 영토에서 나는 지하자원을 그 국가를 위해 써야 하는 건 당연하거든요. 주인님은 모든 고산국 백성들이 이런 식으로 고산국에 충성하길 바라시죠?”

“쳇! 구구절절이 다 맞다.”

다른 사람들이 백성이 된 이상 고산국 자체가 이미 이민호의 소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아무리 고산국이 왕국이라 하지만 그것은 이민호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용을 들여서, 혹은 옛 기억을 간신히 되살려서 자원을 캤는데 그때마다 혜영이 국영기업으로 전환시켜버리면 자원을 탐사할 의욕이 별로 안 생겼다. 반대로, 다른 사람이 고산국 영토 내에서 자원을 발견해 독점한다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국왕이라도 개인으로서의 국왕과 국가기관으로서의 국왕을 분리해야 했으며, 왕국의 정체성을 뜻하는 국가기관으로서의 국왕이 무엇보다 우선했다.

“주인님이 유전이나 광산을 발견한 공로를 인정해서 이익 일부를 나눠드릴게요.”

“그게 얼마나 남는다고 그래? 자원 가격을 최대한 싸게 정할 거잖아?”

“호호! 당연하죠. 하지만 석유를 수출하게 된다면 많이 달라질 거여요.”

“고래 기름이 다 떨어지고 나면 석유로 호롱불이나 키겠지.”

이민호가 생존해 있는 동안 과연 유럽이나 다른 나라에서 석유를 대량으로 사용하게 될지 의문스러웠다. 유럽의 산업혁명은 아직 기반만 간신히 갖춰진 단계였기 때문이다. 언제 외연기관을 개발해서 석탄을 때고, 언제 내연기관으로 발전해 석유를 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고산국이 앞으로 조금만 더 발전한다면 중국이나 유럽과 상관없이 스스로 발전하게 될 수도 있었다. 북미 원주민들을 예상보다 훨씬 평화롭게 백성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인구 부족 문제가 조금 풀린 덕택이었다.

이번에 아일랜드 인구를 받아들인 다음, 나머지 유럽인 이민은 장기적으로 조금씩 받을 생각이었다. 한꺼번에 받아들였다가 온갖 문제가 터져 나올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지역별 독립운동이나 인종분쟁을 미리 대비해야 해서 어딜 개척하든 항상 인구비율에 신경 써야 했다. 그래서 이민호가 북미 개척을 진행하는 동안 사실 무척 피곤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유럽 이민자들보다는 고산국 출신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줘야 하는 문제도 있었다.

“저는 언제나 주인님 편이에요. 고산국이든 뭐든 골치 아픈 건 다 버리고 떠나자고 해도 저는 언제든 주인님을 따를게요.”

“얼씨구? 정말?”

“그러니 버리지 마세요. 저도, 고산국도요.”

이민호가 피곤할 때 가끔 그런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혜영도 여자랍시고 귀신 같이 그 순간을 캐치한 모양이었다.

“그 동안 투자한 게 아까워서라도 포기 안 해. 혹시 고산국을 포기하더라도 혜영이 너는 반드시 데려가서 일을 시키고 말 테다.”

“그래도 왕립여학교 학생들은 데리고 가 주세요. 애들이 똑똑하기에 정부에서 일하는 방법 위주로 교육시켰거든요.”

“으윽! 어린 애들한테 정치나 행정 일들을 가르쳤어? 일반 교과 수준이 아니었다니 놀랍다. 너나 애들이나, 쯧쯧!”

“불쌍하다는 표정 짓지 마세요. 저는 그렇게 일을 많이 했지만 즐거웠어요. 과로하더라도 즐거워하는 애들이 대부분일 거여요.”

남녀를 떠나 누구든 한창 잘 나가는 나라의 국정 운영에 직접 참가한다면 행복할 것이다. 브루나이 공주들이 목재회사를 운영하게 된 다음부터 얼마나 기뻐하는지 옆에서 지켜봤었다. 최소한 후궁들에게는 안심하고 마구 일을 던져줘도 괜찮았다.

고산국의 일반 백성들도 비슷했다.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여직공이나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 농민들의 얼굴도 이민호가 보기에는 너무 밝았다. 열심히 일하면 조선에서 일하던 것보다 훨씬 많은 보상이 생기니 즐겁게 일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북미가 급하다는 거야. 조만간 유럽 군함들이 우르르 몰려올 텐데, 우리가 그들을 막아내기에는 준비가 많이 부족해.”

“카리브 해에서 우리 해군이 영국과 프랑스 해적과 사략선들을 다 몰아냈다면서요? 유럽 국가들도 북미가 고산국 영토인 줄 알 테니 너무 조바심 낼 필요 없어요.”

“그런가?”

혜영의 의견을 들어보니 원래 역사를 알고 있던 탓에 괜히 조급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북미가 기회의 땅이니만큼 더 많은 고산국 백성들이 좀 더 빨리 이주해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이민호는 만에 하나라도 영국이나 네덜란드 군함에게 고산국 북미 백성들이 공격당하거나 포로로 잡히는 꼴은 결코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이민호가 정책 순위를 고려할 때 북미에서는 국방문제가 가장 앞섰다.

1월 중순에 대규모 수송선단이 북미로 향했다. 이번에는 군인과 기술자들보다는 일반 농민과 상인 가족 위주였다. 연말에 이민호가 돌아오면서 북미에 먼저 정착했던 사람들이 친지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인 것 같았다.

“새로 이민 온 사람들을 정착시키는 일도 정신없었는데, 북미로 떠난 사람들의 빈자리를 처리하는 것도 보통 문제가 아니겠어요.”

“이번에 3천 명이지? 월말에도 2천 명이 가겠다고 했으니까 5천 명이야. 매달 꾸준히 5천 명만 북미로 가면 좋겠다.”

“조선에서 오던 이민이 많이 줄어서 요즘에는 한 달에 3천 명밖에 안 돼요. 북미에 가면 넓은 땅을 얻을 수 있다고 홍보 좀 해야겠어요.”

“그럼 매달 2천 명 적자네. 조만간 조선에도 소문이 날 거야. 기다려 봐.”

“적자요?”

사람을 숫자로 세다 보니 이런 표현이 나왔다. 혜영이 이민호의 팔을 살짝 꼬집고, 이민호도 웃었다. 그러나 문제는 심각했다. 고산국 본토의 인구가 계속 줄어들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고산국에서 새로 태어나는 신생아들이 그 부족분을 보충해주고도 남았다. 신혼부부들 중에서는 북미나 호주에 이주하고 싶어도 아이들이 너무 어려서 선뜻 못 떠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도 성인 인구가 유출되고 있으니 고산국 본토는 앞으로 계속 인력 부족에 시달릴 가능성이 컸다.

“이주민들이 사격 연습은 다들 했겠지?”

“예. 성인 남녀들은 단발 소총과 권총, 12세 이상 청소년들은 권총 사격 연습을 했어요.”

북미로 떠날 고산국 민간인들은 빠짐없이 사격 훈련을 받았다. 본토는 아니고 북미에 국한된다지만 고산국 백성들 전체가 총기로 무장하는 무서운 지역이었다. 현대의 전미총기협회 간부들이 알았다면 기뻐서 눈물을 흘릴 만한 일이었다.

“총기 소지는?”

“개인이 보관해요. 총알은 일반 잡화점이나 비슷한 가게에서 팔기로 했어요.”

총이 아닌 총알에 한해서는 쇼핑몰이나 우편으로 총알을 사는 현대 미국과 비슷했다. 미국의 선거 연령은 수정헌법 26조에 의해 전국적으로 18세지만 텍사스 주 같으면 음주는 21세에 가능하고 섹스는 16세, 총기 소지는 18세에 가능했다.

텍사스에서는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총기 소지 제한연령을 없애거나 낮추자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됐다. 이따금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한 직후 총기 규제 운동이 펼쳐지는 것은 짧은 기간에 그쳤다. 전미총기협회 NRA의 로비와 총기제조 회사들의 키즈 마케팅이 활발한 가운데 위스콘신 주의 사냥 가능 연령은 10세, 미시간 주는 연령 제한이 없었다.

고산국에서도 창이나 칼, 활과 달리 총기 소지를 하려면 누구든 면허를 받아야 했다. 고산국 본토에서는 마을 자경단에 속한 성인 남자만 총기 소지가 가능했다.

그러나 북미 이주민들에게는 성인 남녀는 물론 농촌 지역에서는 특별히 미성년자도 총기 소지가 가능하게 했다. 이주민들에게 위협이 될 만한 대상은 북미 원주민, 외국 개척민이나 모험가, 곰이나 악어 같은 야생동물이었다. 불시에 나타날 위협이기에 일하는 중에도 총기는 항상 소지하도록 했다.

그리고 혹시나 북미 원주민에게 흘러들어갈 것이 무엇보다 걱정됐기 때문에 총기 가격도 원가보다 올려서 받았다. 얼마 전까지 군에서 사용하던 중고 단발 소총은 이번 달까지 이주 희망자들에게 무료로 지급했다. 그러나 6연발 권총은 은 7냥, 형식은 구형이지만 새로 만든 단발 소총은 10냥 가격이었다.

조선에서 임진왜란 후반기에 조총 가격이 많이 떨어져 백미 3, 4섬이었는데 조선에서는 백미 가격이 비싸서 은으로 거의 2, 3냥이었다. 조선 조총보다 고산국 단발 소총이 서너 배 비쌌으나, 비싼 값을 충분히 해내고도 남았다.

2월 초에 수에즈 운하 건설단을 실은 선단이 아리수 항을 떠났다. 파나마에서 고생하던 기술자들과, 새로 건설단에 지원한 명나라 노무자들 일부가 수송선에 타고 이집트로 향했다. 기술자들에게 원래 석 달을 주려던 휴식기간을 여러 가지 어른의 사정으로 인해 돈으로 지불하고 대폭 줄여야 했다.

1598년 무술년에는 양력 2월 6일이 설날이라 명나라 노무자들 숫자는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춘절을 쇠고 돌아온 노무자들이 많이 지원할 것으로 예상해서 인력 부족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이집트 현지에서도 노무자들을 대량 고용하기로 오스만제국과 협약을 맺어두었다.

“지중해라. 기대가 되는군.”

“유럽에서 아프리카와 마다가스카르에 눈독 들이지 말라고 수에즈 운하를 일찍 개통하려는 거죠?”

“그런 이유도 있고. 운하가 개통만 되면 고산국 상품이 유럽과 서남아시아 지역 시장을 장악하게 될 거야. 물량과 가격을 조절해서 최대한 뽑아먹어야지. 흐흐! 독점의 폐해를 알려주겠어.”

“사악해요.”

북미 남단이나 아프리카 남단 어느 쪽이든 배로 돌아가려면 엄청난 시간이 걸리고 암초가 깔려 위험한 해역도 산재했다. 그러나 중간에 운하가 개통돼 있으면 안전하고 빨리 갈 수 있었다. 특히 난공사였던 파나마 운하에 비해 수에즈 운하는 평지를 나눠서 공사를 할 수 있어 상대적으로 편한 공사에 속했다.

“이런 대규모 토목 공사는 일찍 할수록 비용이 적게 들어. 앞으로 아리수 항에 오스만이나 이탈리아 도시국가 상선들을 많이 볼 수 있게 될 거야.”

“우리가 직접 지중해에 가서 판매할 수도 있잖아요?”

“우리 배가 훨씬 빠르니 그럴 수도 있지만, 아쉬운 쪽에서 와야지. 아마도 상품 수출량이 우리 운송 능력을 넘어설 테니 어차피 사는 쪽에서도 와야 해.”

“저번에 비해 부피가 큰 상품도 판매할 수 있겠군요.”

“그렇지. 양모나 면화를 대량으로 팔 수도 있어.”

이민호가 씩 웃었더니 혜영이 표정을 굳혔다.

============================ 작품 후기 ============================

1시 전에 올린 건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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