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69 49. 1598년 =========================================================================
연초부터 얄미운 얼굴을 이틀 연속 보게 됐다. 나라 전체가 하룻밤 사이에 도망갔다가 덜미를 잡혔던 술루왕국의 지배자, 술탄이었다.
“전하. 또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어? 또 왔네?”
지난해 4분기에 이민호가 북미에 순행을 가는 바람에 술루 술탄에게서 인사를 못 받았다. 그래서 올해 1분기까지 해서 인사를 두 번 받는 게 맞았다. 따로 두 번 오게 하는 것은 너무하고 해서 이틀 연속 입조를 하도록 시켰는데, 중요한 일이 아니라서 잊어먹고 있었다.
“객관에서 칼 뽑으면서 살벌한 분위기 조성하지 말라 그랬지? 한때 해적이었다고 위세 부리는 거야? 상인들이 반발이 심해.”
“어흑흑! 사실 반란이 일어나서 호위병들 절반이 공물이 실린 배를 훔쳐서 도망간 겁니다.”
“무슨 소리야? 자세히 말해봐.”
조선은 사신단을 파견하기에 일년삼공 이상도 가능했지만 군주가 일 년에 네 번 종주국에 입조하는 것은 사실 무리였다. 술루 술탄을 태운 배가 바다에서 일 년의 절반을 보내는 동안 백성들 일부가 배를 훔쳐 타고 꾸준히 도망갔다. 술탄이 고산국에 왕복할 때마다 백성이 줄어들어서 조만간 나라가 망한다면서 분위기가 흉흉한 판에, 황금을 본 호위병들의 눈이 뒤집혀서 이런 일이 생겼다.
“그래서? 배를 타고 도망쳤나? 어떻게 생겼어? 공물이라면 결국 내 것이란 소리잖아?”
“그렇습니다. 그 배는 술루 술탄의 가문 문장을 그린 삼각돛을 달았습니다.”
“아! 무단 출항하려던 배 한 척이 나포됐다는 보고가 들어왔던데 술탄의 배였군. 이미 잡아놨어.”
아리수 항에 대한 보호는 요새 하나로 그친 게 아니었다. 아리수 항에는 해군과 해안경비대 함선들이 정박하고 있었다. 모든 배는 아리수 항을 출항할 때 반드시 선박통제소에 신고해야 하는데, 술탄의 호위병들은 그 절차를 몰랐거나 무시했다가 해안경비대 함선에게 나포됐다.
“황공하옵니다. 사실 지금 상태로 나라를 운영하기가 버겁습니다. 구원을 해주십시오, 전하!”
“술루 술탄국이 사라지면 곤란한데. 어떻게든 도와주지. 비서! 파푸아 섬 지도 좀 갖고 와.”
이민호는 술탄과 머리를 맞대고 지도를 보면서 협의했다. 파푸아 섬은 면적이 78만 평방킬로미터로서 그 크다는 브루나이 섬보다 조금 더 컸다. 섬에는 농사짓는 원주민들이 띄엄띄엄 떨어져서 살기에 인구는 적은 편이었다. 새로운 땅을 농지로 개척해서 함께 살면 좋겠지만, 원주민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았다.
“불리하다고 움츠리면 안 돼. 그럴 때는 오히려 과감하게 치고 나가라구. 정치지도자는 백성들에게 함께 가야할 방향을 가리키는 사람이야.”
“그, 그렇습니까?”
이민호가 술탄보다 훨씬 젊었으나 성공한 군주로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술탄도 입 닥치고 고분고분 들어야 했다.
이민호는 파푸아 섬 서쪽 지역 중에서도 폭이 가로 세로 200km인 반도의 남동쪽, 만이 육지 쪽으로 깊숙이 들어와 육지의 폭이 20km로 줄어드는 목 지점을 가리켰다.
“여기까지 단번에 진출해서 식인종 원주민들의 유입을 차단하는 거야. 인간 사냥 경로를 막는 거지. 술탄에게 화승총이 있으니 적당히 높은 작은 석성 서너 개만 쌓아도 충분할 거야.”
“그 안쪽에도 호전적인 원주민 부족들이 몇 있습니다만.”
“그 부족들은 식인종이 아니래. 기회가 생기면 먹겠지만 일부러 인간을 사냥하려고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는다는 거야. 그리고 섬 전체라면 원주민이 많겠지만 여기 목 지점까지라면 술루 술탄국 백성들이 훨씬 많잖아? 원주민들과 협의해서 일정 영역에 가둬버려. 나머지에서 농지를 개발하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어.”
“개간할 지역이 꽤 넓으면서도 방어부담이 적겠습니다.”
“그래. 술루 술탄국 영역에 설마 다른 나라 해적들이 들이닥치지는 않겠지. 제대로 정착할 때까지 땅만 지키도록 해.”
이 지역의 면적은 4만 평방킬로미터가 넘어서 고산국 본토보다 넓었다. 적도에 가까운 열대우림 지역이라 산지를 제외하더라도 수량이 풍부한 강변을 농경지로 개간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개간만 제대로 된다면 농업생산성은 고산국 본토보다 좋을 것 같았다.
“영역 내의 원주민들이 순순히 말을 들을지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말을 안 듣겠지. 파푸아 섬에 사는 부족들과 전쟁을 하지 않으려면 간단해. 그들이 주장하는 토지 임대료를 좀 주는 거야.”
고산국 탐사대가 파푸아 섬에 직접 상륙해서 조사한 것은 몇 번 되지 않았고, 자세히 조사하기에는 땅이 너무 넓었다. 그래서 테르나테나 암본 등 주변 상인들을 통해 파푸아 섬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지금은 파푸아 섬에 대한 정보가 꽤나 많이 쌓여 있었다.
“주변 부족에게 조금씩 주면 됩니까? 마치 공물을 바치는 것 같습니다.”
“기분 나빠도 매년 꾸준히 줘야할 거야. 그리고 한 부족에게 주면 멀리 떨어진 다른 부족에서도 친척이랍시고 달라고 할 거야.”
“도둑놈들이네요!”
“생각하는 게 해적들과 비슷하지.”
술탄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의 억지에 당해 보면 당연히 억울하다는 느낌이 든다. 술루 술탄국이 해적 왕국으로서 강했을 때야 약한 놈들은 다 죽으라는 논리로 무장했었지만, 약해진 지금은 모든 것이 불공평하게 느껴진 듯했다.
낙심한 술루 술탄이 안 돼 보여서 고산국에서 지원해주기로 했다. 중장비 몇 대를 보내서 저수지와 수로 등 관개시설을 건설하고 숲을 밀어 농경지로 개간해주기로 약속한 것이다. 술루 백성들이 손에 익지 않은 농기구를 잡고 깨작깨작 개간하느라 고생하는데 고산국이 단시간에 중장비로 확 밀어주겠다니 술탄이 엄청나게 고마워했다.
“그 동안 말썽만 부렸는데 이렇게 도와주신다니 황공합니다.”
“술탄이 내게 성의를 보이는 만큼 나도 은혜를 베푸는 거야.”
“속국으로서 언제든 고산국에 충성하겠습니다.”
“나는 은원이 확실한 사람이야.”
“압니다. 알고말고요! 절대 고산국을 배반할 일은 없을 겁니다.”
이민호의 목표는 술루 술탄국이 파푸아 섬 동쪽으로 계속 이동해서 영토를 넓히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은 생존을 위해 병목 지형을 지키면서 경작지를 넓히는 일에 주력해야 하지만, 여유가 생기면 영토를 더 확장하도록 시킬 방침이었다.
현대 인도네시아의 파푸아바랏 주는 파푸아 섬 서쪽에 국한됐지만 면적이 11만 5천 평방킬로미터로서 대한민국보다 넓었다. 동쪽 경계는 폭이 100km 정도로, 아직은 좁은 편이었다. 그러나 더 동쪽으로 가면 땅이 확 퍼진다.
이민호가 술루 술탄국에게 영토 확장을 시킬 목적지는 바로 이곳이었다. 술루 술탄국을 안전한 농업국으로 전환시키는 동시에 원주민들의 침공을 막느라 정신이 없어 바다로 다시 진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이민호가 채택한 전략이었다. 일부 원주민들에게서 식인 습성을 없애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이민호가 해양에 진출할 가능성이 높은 민족에 대한 대응책은 두 가지였다. 유구국처럼 확실히 내 편으로 만들어 일을 시키거나, 일본처럼 섬 안에 가둬두는 것이었다. 술루 술탄국은 해적질을 한 전력이 있으므로 두 번째, 일본과 같은 처분에 처해지게 되었다. 일본은 너무 커서 고산국이 직접 전쟁을 해야 했지만, 술루 술탄국은 인구가 적어서 원주민들과 싸우게 강제하면서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홀로 섬을 비롯한 옛 영토는 어떻게 할 거야? 빈 섬에서 해적들이 날뛰면 곤란하잖아.”
“그, 그거야 전하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그 땅에서 떠난 이상 저희는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합니다. 이제는 브루나이도 무섭고, 마구인다나오 왕조도 예전에는 우방이었지만 지금은 잡아먹힐까봐 무섭습니다.”
술루 술탄국이 한때는 민다나오 섬 서쪽 지역인 삼보앙가 반도를 지배한 적도 있었다. 술루 술탄국은 마구인다나오 술탄국과 형제국이었지만 이렇게 약체화된 상태라면 언제든 흡수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려했다.
“빈 땅을 쉽게 구할 수 있으니 백성만 지키면 된다는 건가?”
“그런 면도 있습니다. 차라리 전하께 옛 영토를 바치겠습니다. 알아서 처분해주십시오.”
“섬이 그렇게 많은 지역을 준다고? 고산국도 인구가 적어서 병력을 보내서 지킬 수가 없어.”
“국왕전하께서 홀로 섬을 정복한 순간 술루 제도 전체가 이미 고산국 영토입니다.”
“혹시 브루나이나 다른 나라에 넘겨도 되는 거야?”
술탄이 몹시 침통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수긍하고 말았다. 홀로 섬은 면적으로 따지면 그저 그런 작은 섬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술탄이 태어난 고향이었고, 수십 년의 추억이 담긴 곳이었다.
“물론입니다. 고산국 국왕전하의 영토입니다.”
국무회의에 옛 술루 술탄국 영토를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를 놓고 토의에 붙였다. 조정 대신들은 다들 난감해했다. 없는 병력을 보내서 지킬 수도 없고, 호주와 고산국 중간 항로에 위치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섬들을 남에게 넘길 수도 없었다.
국무회의에서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런데 브루나이 술탄이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며칠 후에 외륜선을 타고 득달 같이 왕도에 달려왔다.
“우리 사위 국왕전하! 홀로 섬을 비롯한 주변 섬들은 예전에 브루나이의 영토였습니다. 저희에게 돌려주시면 은혜가 백골난망이겠습니다.”
“브루나이 영토가 그렇게 넓은데 작은 섬들에 신경 쓰시나요? 아직 해군을 재건하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지키려고 합니까?”
어떻게 보면 이민호와 가장 많은 인척 관계로 얽힌 사람이 브루나이 술탄이었다. 고산국 궁성 내에서도 열심히 일하면서 큰 수입을 내고 있는 브루나이 공주 여섯의 힘은 결코 무시하지 못했다.
“자존심 문제입니다. 하하! 술루 해적 그 침략자 놈들, 멀리 식인종 섬으로 도망갔다죠? 나라가 해체되기 직전이라니 참으로 쌤통입니다.”
“그런데 술루 술탄이 예전 영토를 고산국에 넘겼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술루 해적 두목 놈이 들르는 항구마다 크게 소문을 내고 다녔습니다. 고산국에 고스란히 넘기는 것이 그나마 나중에 옛 영토를 되찾을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술루왕국 백성들은 이미 파푸아 섬에 정착했으므로 술루 제도를 술루 술탄에게 돌려줄 마음은 들지 않았다. 만약 술루왕국이 두 영토를 바닷길로 연결하게 되면 자칫 짧은 시간에 해적 집단이 재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방 해역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고산국 외의 강력한 해상세력을 이민호는 용납할 수 없었다.
“술루 제도를 술루 술탄에게 돌려주지 않겠소. 그렇다고 브루나이에 넘기면 또 다른 나라에서 이 지역 균형이 깨진다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고산국이 직접 영유하십시오. 저도 다른 나라에서 술루 제도를 갖는다면 몹시 불안할 것 같습니다.”
에스파냐 필리핀 총독부에서도 사신을 보냈다. 에스파냐 사신은 술루 제도가 마카오에서 향료 제도로 가는 항해로 중간에 위치한 중요한 섬이니 다른 나라, 특히 이슬람 세력에게 함부로 넘겨주지 말라는 청원을 하고 돌아갔다. 주변이 다 이슬람 국가들이니 고산국에서 책임지고 지켜달라는 요청이나 다름없었다.
마구인다나오 왕조의 왕세자는 괜히 고산국 왕도에 와서 이민호를 알현할 때마다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술루 제도를 주지 않으면 울어버릴 것 같았다. 이민호는 왕세자에게 비단 몇 백 필을 주고 민다나오로 쫓아 보냈다. 마구인다나오 왕조에서는 민다나오 서쪽 삼보앙가 반도를 차지한 것만으로도 큰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술루 제도를 팔라완 섬처럼 고산국 직할령으로 편입했다. 당장 필요하지는 않았으나 주변 국가들의 이익이 첨예하게 대립된 곳이라 어느 한 국가로 넘기기에는 부담이 컸다. 얼마 전까지 술루 술탄국의 영토였고 그 전에는 한때 브루나이의 영토라서 주변국에 골고루 나눠주는 것도 문제가 있었다.
옛 술루 술탄국의 수도인 홀로 섬에 기병 1개 중대와 전선 한 척을 교대로 파견해서 지켰다. 이슬람식으로 건축된 홀로 성 주변에 논과 밭을 개간해 일종의 둔전을 실시했더니 곡물이 과도하게 생산됐다. 일 년에 3기작이 가능한 열대지역이었다.
그 뒤부터 향료 제도로 향하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배들이 홀로 항에 입항했다. 괜히 병력을 파견해서 서양 상선들의 안전만 보장한 셈이 되었다. 속이 뒤틀린 이민호가 한 마디 했다.
“입항세를 얼마나 받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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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연관돼서 다른 이야기로 전환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