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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457화 (406/1,000)

00457  48. 북미 개척  =========================================================================

새강릉 별궁에서 잔 이민호는 오랜만에 편하게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왕궁 생활에 익숙해져서 배나 객사에서 자는 건 아무래도 불편했다. 이민호의 배 위에 올린 민영의 다리를 내리고 이불을 덮어준 다음 침대에서 내려왔다.

일어나서 테라스로 나가 담 넘어 주택가의 분위기를 살펴봤다. 이민호처럼 자기 집이 새로 생긴 개척민이나 병사들의 얼굴도 활짝 폈다. 이제 저들은 앞으로 몇 년 동안 죽어라 일해야 했다. 왠지 고소했다.

새강릉의 별궁 본관은 하얀 기둥이 늘어선 바로크 양식의 2층 석조 건물이었다. 건물 정면은 벽돌로 포장한 길을 중심으로 양쪽에 배치한 분수대와 넓은 잔디밭이 조성됐고, 본관 뒤에는 각종 꽃나무를 심은 후원이 가꿔지고 있었다. 주변을 높은 담장으로 둘러쳐서 외부인과 코요테의 침입을 막았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정문까지 너무 멀다는 것이었지만 이민호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상관없었다. 아침식사를 마친 이민호는 민영과 함께 현관 바로 앞에서 화려한 마차를 타고 항구에서 가까운 총독 관저로 이동했다.

“북미 동부는 이렇게 좋은 땅인데 왜 아직도 유럽이 식민지를 개척하지 않았을까요?”

“에스파냐와 영국에서 당연히 시도야 했지. 매번 실패해서 그렇지. 단순히 탐사하는 것과 그 지역에 영구 거주하는 것은 차원이 달라.”

그러나 북미 동해안에서 성공적으로 개척을 진행 중인 나라가 있었다. 이 시기에 누벨프랑스는 북쪽 허드슨 만을 통해, 또는 세인트로렌스 강을 통해 오대호 연안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남쪽 플로리다에도 욕심을 냈으나 몇 년 전에 에스파냐에 의해 쫓겨났고, 그 후에는 대서양 연안과 캐나다 동부 지역 개척에 집중하고 있었다. 미시시피 강을 따라 내려오면서 멕시코 만까지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는 것은 나중 일이었다.

영국은 새강릉 남쪽 100여 km에 위치한 로어노크 섬에 1585년 개척을 시작했다. 개척민들이 모두 실종된 다음에도 영국은 체서피크 만과 제임스 강 유역에 대한 탐사를 계속했다. 버지니아에 제임스타운 정착지가 성립된 것은 1607년, 청교도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매사추세츠에 도착한 것은 1620년이었다. 한동안 버지니아와 뉴잉글랜드는 독립적으로 발전했다.

네덜란드가 현대의 뉴욕 주변인 니우암스테르담을 탐사한 것은 1609년, 맨해튼에 식민지를 건설한 것은 1624년이었다. 스웨덴은 체서피크 만 북쪽 델라웨어 강 유역에 1638년부터 식민지를 개척했으나 1655년에 니우네덜란드에 정복당한다. 누에바 에스파냐는 플로리다를 고산국에 넘긴 다음부터 카리브 해와 서인도제도에 대한 경영에 집중했다.

“프랑스하고 전쟁을 해서 몰아내야 하나요?”

“글쎄. 앞으로 영국이 가장 큰 위협이라서 프랑스하고는 우호적인 편이 나아. 그런데 에스파냐하고 관계도 얽혀서 조금 복잡하다.”

북미 동해안 영토를 지키는데 위협을 줄 만한 나라라면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웨던 순서였다. 현재 프랑스가 허드슨 만에 식민지를 세우고 세인트로렌스 강 유역에서 모피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었다. 이들 프랑스 인들을 내쫓거나, 가급적 흡수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었다. 정 안 되면 영토 일부를 내줘야 할지도 몰랐다.

핼리팩스에 유럽 어선들이 몰려와 근해에서 조업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함대를 몰고 직접 가서 확인하기로 했다.

어느덧 총독 관저에 도착해 국왕집무실에 자리 잡았다. 아침 문안인사를 드리러 오는 관리들과 장교들을 보면 여기가 마치 고산국 왕궁 같았다. 이민호는 이국 참의와 함께 탁자에 자리 잡고 편안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이국 참의를 직제 개편에 따라 이조 참판으로 칭하겠소. 참판이 잘해서 승진시킨 것은 절대 아니고 일괄 승진에 불과하오.”

“일괄 승진이라도 성은이 망극하오이다. 몇 년 만에 겨우 승진 한 번 해보는데 일괄 승진이라니, 제가 참 무능한 것 같습니다.”

“관리가 무능한 건 윗사람을 닮기 때문이라면서요?”

“하하! 전하께서도 잘 아시는군요.”

이조 참판은 조선의 양반 출신치고는 꽤나 쾌활한 사람이었다. 이민호는 이조 참판과 이야기할 때마다 장난꾸러기에 독설가이면서도 할 일은 제대로 다 하는 이항복이 떠올랐다. 그래서 이민호도 장난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참판이 그 동안 일을 잘하지는 못했으나 큰 문제도 없었으니 별로 내키지 않더라도 할 수 없이 승진시켜준 것이오. 그러니 앞으로 더더욱 충성하도록 하시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충성심이 절로 우러나올 것 같습니다, 전하.”

농담은 이것으로 그치고 이민호는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원주민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형성하고 있소?”

“서쪽 낸스몬드 부족이 가장 가깝고, 처음부터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도시를 건설하는 것에 불만이 많은 것 같았지만 수적 차이가 커서 쫓아내려는 시도 자체를 포기한 것 같습니다. 남쪽 크로탄 족은 고산국 선박의 크기에 겁을 먹고 다른 지역으로 이주할까 심각히 고민하는 중이랍니다.”

배가 상륙하는 것을 보고 원주민 100여 명이 무장을 하고 몰려왔는데 이미 2천여 명이 새강릉에서 일하고 있어서 혀를 차면서 돌아갔다고 한다. 원주민들은 이미 영국 개척민, 에스파냐 탐험대와 전투를 벌여 몰아낸 적이 있어서 총이 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총이 아니라 돌도끼를 내리쳐도 죽는 게 사람이라 초반에는 전투의지가 높았다고 한다.

그런데 거대한 삽차와 밀차, 경운차가 기관 소리를 요란하게 내면서 움직이자 원주민들은 더 이상 전의를 다질 수 없었다. 이때 이조 참의가 원주민 전사들에게 손칼과 떡, 술 등 선물을 들려 보냈다고 한다. 이후 원주민의 모피와 고산국의 철기 중심으로 거래가 이어졌다.

“혹시 원주민들의 부족 연맹체가 있지 않소?”

“맞습니다. 낸스몬드 부족이 가입한 부족 연맹체를 포우하탄이라 부르는데 대추장 와훈수나콕이 사는 마을 이름이면서 동시에 부족 이름이라고도 합니다. 연맹체 내에서 수십 부족으로 갈려졌으나 말이 대체로 통한다고 합니다. 원주민들은 여기서 북서쪽으로 올라가는 강 이름도 포우하탄이라고 부릅니다. 현재 케코우탄 부족과 전쟁 중입니다.”

낸스몬드 부족은 협력 부족이지 포우하탄 직할 부족은 아니었다. 어쨌든 낸스몬드 부족 원주민들은 고산국이 건설하는 도시를 착잡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고산국이라는 침략자 부족이 자기들 영토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 도시를 건설해서 불만이 쌓였지만, 이 침략자들과 철기를 교역하면서 부족 연맹체 내에서 지위가 급상승하고 있었기 때문에 꾹 참고 있었다. 물론 수적 열세가 결정적인 이유였다.

“의외로 주변에 원주민 부족들이 많군요. 원주민들이 이렇게 많이 몰려 살면 주변을 탐사하기도 어렵겠소. 위험하지 않소?”

“의외로 원주민들이 우호적이라서 포우하탄 강 상류로 탐사대를 꾸준히 보내고 있습니다. 탐사대원들이 강변 마을에 내리면 원주민들이 교역하자고 먼저 모피를 내민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실제 역사의 제임스타운 개척민들과 포우하탄 부족들의 관계보다 훨씬 우호적이었다. 제임스타운 개척민들은 우격다짐으로 원주민들을 압박하고 원주민 마을을 강제로 이주시켜 농지를 빼앗기도 했다. 영국인 개척민들은 처음 상륙한 초기부터 원주민을 총으로 쏴 죽였고, 그 이후에 전쟁도 자주 치렀다.

포카혼타스라는 포우하탄 추장의 딸도 백인과 서로 사랑하다가 결혼한 것이 아니었다. 제임스타운 정착민들과 포우하탄 부족연맹체가 전쟁을 벌이는 중에 다른 부족의 보호 아래에 있던 포카혼타스를 백인들이 납치해서 인질로 삼았다가 담배농장 홀아비하고 결혼시킨 것뿐이었다. 포카혼타스는 아들을 낳고 2년 후에 전염병으로 죽었다.

“갑자기 돌변해서 공격할 수도 있으니 최대한 조심하도록 하시오.”

“윤당하옵니다, 전하. 그런데 강 상류로 올라간 탐사대가 뭘 발견했는지 아십니까?”

“뭘 그리 자랑스러워하시오? 혹시 점결탄 노천광산이라도 발견한 거요?”

“헉! 다른 사람이 보고했습니까?”

“정말이오?”

점결탄은 해탄이라 불리는 코크스 제조에 이용되는 역청탄이었다. 북부에서 발견할 줄 알았는데 버지니아에 있는 줄은 몰랐다.

“원주민들을 통해 검은 땅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탐사대를 보내 확인했습니다. 대단위 노천광산이라 삽차로 그냥 퍼내면 됩니다. 이제 철광만 찾으면 용광로를 만들 수 있고, 조만간 철도 부설 공사가 가능하겠습니다.”

“북미에는 자원이 널려있는 것 같소.”

미국에서는 철광도 노천광이 흔했다. 그러나 좋은 철광산은 주로 수피리어 호 주변, 미네소타에 집중됐다. 철도를 깔기 위해서는 철이 대량으로 필요하고, 철을 생산하기 위해 철광석과 코크스를 한 곳에 모으려면 철도가 먼저 깔려있어야 한다.

이런 모순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고산국에서 선로를 계속 싣고 오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오대호의 수운을 이용해 미네소타의 철광석을 배로 실어 나르는 편이 싸게 먹혔다.

“전하! 포우하탄의 대추장 와훈수나콕이 새강릉을 방문해서 전하를 알현하고자 합니다. 낸스몬드 강 건너에 전사들을 데리고 와서 어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찰 나갔던 해병 소대장이 황급히 달려와서 보고했다. 이민호는 해병 소대장이 몹시 당황한 것을 보고 어깨를 툭툭 치면서 격려했다.

“수고했어. 그런데 원주민과 의사소통이 가능할까?”

“영어와 스페인어를 약간씩 구사하는 노인이 통역으로 나섰습니다.”

“좋아. 단정을 보내서, 아니 순양함을 보내서 태워오도록.”

이민호는 5천톤 급 거대한 배를 보내면 북미 원주민들이 알아서 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을 맞춰서 항구로 마중 나간 이민호는 예상이 잘못됐음을 알았다. 대추장이 순양함에 원주민 1000여 명을 다 태우고 온 것이다. 포우하탄 부족연명체에 전사가 2400명이라는데 그 절반 가까이를 데려온 대추장의 의도가 빤히 보였다.

“하마터면 순양함 하나 잃을 뻔했네. 함장도 그렇다. 적이 될 수도 있으니 적당히 태워야 할 것 아냐?”

“원주민들이 혹여 야비한 짓을 하더라도 약속은 잘 지키는 편입니다.”

순양함에서 대추장 와훈수나콕이 호위 전사들과 함께 내렸다. 천 명이 탔다더니 정말 꾸역꾸역 끝도 없이 쏟아졌다.

이민호는 대추장과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눴다. 머리에 뿔 장식을 한 대추장은 키가 굉장히 큰 편이어서 이 시대 기준으로 큰 키인 이민호보다 더 컸다.

“포우하탄 부족연맹체의 대추장은 고산국 국왕전하께 무릎을 꿇도록 하시오!”

이조 참판이 통역장교를 통해 원주민 대추장에게 권했다. 그러나 대추장은 고개를 빳빳이 치켜든 채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봤다. 대추장은 남에게 굽힐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참판! 괜히 싸움 붙일 생각하지 말고 잔칫상을 차리시오.”

대추장이 전사들을 잔뜩 데려온 것은 세를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세력 과시라면 이민호도 절대 빠지지 않았다. 대추장을 총독 관저가 아닌 별궁으로 초대한 다음 너른 잔디밭에 천막을 치고 대추장뿐만 아니라 천여 명에 달하는 전사들에게도 식사를 제공했다.

자기 앞에 놓인 음식을 다 먹지 못하면 사나이가 아니었다. 전사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억지로 고기를 뜯고 생선과 과일을 먹었다. 이 지역 원주민들은 다행히 단 음식을 좋아했다.

와훈수나콕은 럼주나 포도주보다 소주가 마음에 든 듯했다. 대추장이 연거푸 소주를 마시더니 혀 꼬부라진 소리로 뭐라 말해서 통역으로 나선 원주민 노인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전하가 통이 커서 마음에 든답니다. 키가 크고 부하가 많고 부자인 것도 마음에 든답니다. 그래서 전하를 사위로 삼고 싶답니다.”

“됐네.”

대추장 와훈수나콕은 나이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아마도 갓 30세나 됐을 정도였으니 장성한 딸이 있을 리도 없었다.

원주민들이 대추장부터 전사와 맨 밑바닥 심부름꾼까지 모두 낮술에 취해 나자빠졌다. 대추장을 사로잡거나 포우하탄 원주민 부족들을 정복하려면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일 수도 있었다.

============================ 작품 후기 ============================

1597년 말에 포카혼타스는 두 살 내지 네 살입니다. 연애는 없다고 봐야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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