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52 48. 북미 개척 =========================================================================
이틀 후 오전에 새인천을 출항한 함대는 오후에 새목포에 도착했다. 사주가 해안선을 따라 길게 발달해 자연적으로 형성된 만 안쪽의 잔잔한 곳에 항구로 쓸 만한 지형이 대규모로 형성된 곳이었다. 현대 미 해군의 군항 샌디에이고에는 대형 항공모함들이 줄줄이 정박한다.
처음으로 현대의 샌디에이고를 본 이민호는 몹시 흡족했다. 바다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해 만 입구에 해안 요새가 세워져 있고, 수비병들이 환영의 의미로 하얀 연기가 치솟는 예포를 발사했다. 요새 건너편에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현대적인 선착장에 함대가 줄줄이 정박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공국 좌랑 오랜만일세.”
현재 공국 간부들이 총동원돼서 북미를 개발하고 있었다. 파나마 운하를 건설한 공국 참의 외에도 무역항인 새인천은 공국 정랑, 군항인 새목포는 공국 좌랑이 맡았다. 북미 동해안에서도 공국 간부들이 일하고 있었다.
“일만 톤짜리 선박이 설마 만들어질까 싶었는데 이제 얼마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시하신 대로 일만 톤 선박 네 척씩 좌우에 동시에 정박할 수 있는 선착장 두 개를 완성하고 한 개를 건설 중입니다.”
“오천 톤이 아무래도 목선의 한계인 것 같네.”
“아리수 하구 조선소에서 작은 철선을 건조 중인 것을 보고 왔습니다. 예전에는 철판으로 배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을 믿지 않았었지요.”
공국 좌랑은 경상우수영에서 수군 진포의 선착장 건설과 관리를 맡았던 아전 출신이라 새로운 기술을 쉽게 받아들였다. 고산국에 오기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기중기와 삽차, 밀차를 사용하다 보니 자연스레 기계에 친숙해졌다. 배도 물 위에 떠 있는 나무 덩어리가 아니라 거대한 운반용 기계로 인식했다.
“일만 톤급 선박 60척이 동시에 정박할 수 있겠군.”
“24척 아니었습니까?”
“배를 옆으로만 대라는 법은 없으니까 말일세.”
“아하! 뱃머리를 앞으로 대면 더 많은 배가 정박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닻을 복수로 잘 운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닻을 내린 다음 배가 이동해서 닻줄을 당겨 고정시키고 하는 일은 선원들에게 꽤나 고된 작업이었다. 아직은 선착장에 여유가 있어서 측면으로 정박할 수 있겠지만 나중에 태평양 함대가 증강되면 세로로 정박해야 할 수도 있었다.
물론 태평양에서 북미 영토를 위협할 수 있는 나라는 에스파냐 하나뿐이었고, 영국이나 네덜란드는 잘해야 서너 척이 해적질하는 수준이었다. 이 시대 유럽 최강국 에스파냐와는 서로 필요에 의해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에스파냐 식민지들이 독립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이민호는 태평양을 장악하기 위해 미리 큰 군항을 마련해두었다.
“수병과 선원 주거지는 건설 중인가? 인원이 너무 부족하지?”
“다행히 주변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이 건설 노무자로 참가해서 일손 부족을 덜 수 있었습니다. 해군 수병과 상선 선원들이 살 집이 웬만한 양반가 저리 가라 할 정도입니다. 북미는 땅이 넓어서 정말 좋습니다.”
“남산골샌님들 초가집보다는 훨씬 낫구먼.”
고산국에서는 결혼만 하면 신분이 상승하는 느낌을 맛보게 된다는 말이 있었다. 부부가 맞벌이하지 않더라도 기본 소득만으로 훨씬 여유롭게 살 수 있었다. 아이까지 생기면 더 여유가 생겼고, 늙은 부모를 서로 모시려고 했다.
그런데 북미는 땅이 넓어서 집은 크게 짓지 못하더라도 마당은 마음껏 넓힐 수 있었다. 아이들이 뛰어놀면서 크기에는 고산국보다 북미가 훨씬 나았다.
“언제까지 머무르시겠습니까? 가급적 오래 계시면 좋겠습니다. 수병들을 집에 배치하면 여기서 살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 것입니다.”
“자신감이 넘칠만하군. 대단해. 하지만 내일 파나마로 출항할 걸세.”
“정말 아쉽습니다. 별궁으로 모시기 전에 해가 떠 있는 동안 거주지를 돌아봐주십시오.”
“좋지. 가세.”
공국 좌랑의 안내를 받아 마차를 타고 항구 뒤쪽 시내 거주지를 돌아보았다. 널찍널찍한 길 가에 크지는 않아도 방 두세 개짜리 예쁜 단층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앞마당은 넓고 뒷마당은 텃밭과 정원을 동시에 가꿀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그러나 집은 많아도 이곳에서 사는 사람은 아직 적었다.
“아니! 수병들 집이라면서 철골조 이층집에 마당에는 수영장이 있잖나?”
“이 구역은 일반 수병의 집이 아닙니다. 최소한 상사는 돼야 입주 가능합니다. 장교는 대위부터 입주할 수 있습니다.”
마차를 타고 좀 더 들어간 주택가는 집이 전체적으로 크고 마당은 더 넓었다. 다 합해서 이백 채도 되지 않았는데 마치 미국 대도시 인근 고급 주택가를 보는 듯했다. 자가용 제트기가 이착륙할 활주로가 딸린 저택이 아니라면 대도시 교외의 고급 주택 가격은 싼 편이었다.
“그 정도 계급이면 결혼하고 나이도 있을 테니 이런 집이 필요하겠어. 정말 좋다. 그런데.”
이민호는 옆으로 지나쳐가는 마차를 보면서 고개가 계속 돌아갔다. 뭔가 잘못 본 것 같아 눈을 비비자 공국 좌랑이 설명해줬다.
“주택가와 항구를 왕복하는 공용마차입니다. 북미 원주민들을 마부로 채용해서 급료는 고산국의 반에 반인 한 달에 은 한 냥입니다. 그래도 보리나 옥수수 알곡 스무 가마에 해당해서 인기가 아주 좋습니다. 일손 부족도 이유지만 주변 원주민들과의 우호를 위해 원주민 채용을 늘리고 있습니다.”
“한 냥? 최저 임금은 두 냥이 아닌가?”
길가에 웃통을 벗은 북미 원주민들이 기다란 막대기를 들고 있어서 총이나 창인 줄 오해한 호위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새목포 시청에서 고용한 청소부와 정원사 즉 가로수 관리사였다. 원주민들이 새목포 시내 곳곳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공국 참의님과 협의를 했는데 일반 원주민들과 수입 차이가 너무 크게 나는 것도 안 좋다고 해서 임시로 결정했습니다. 임시 조치로 원주민을 고용하는 민간 회사에도 지급액을 동일하게 적용시키고 임금 차액은 은행에 예치시켰습니다. 전하께서 바로잡으시겠습니까?”
“일단 그대로 시행하게.”
몇 년 뒤부터 새 나하와 새인천, 남포 주변 농지에서 개간을 끝내고 곡물이 본격적으로 출하되면 식량 가격이 폭락할 가능성이 높았다. 동부도 계속 개척할 예정이므로 앞으로 식량은 넘쳐난다고 봐야 했다.
그러므로 북미에서는 은 한 냥으로도 한 가족이 충분히 생활할 수 있었다. 가난한 북미 원주민은 물론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유럽 이주민들에게 기본 소득을 지급할 때도 금액을 고민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원주민에게도 농지를 분배하거나 기본 소득을 나눠줘야 하는데 말일세.”
“전하의 고민을 이해하겠습니다. 월 두 냥이 아니라 반 냥만 주더라도 원주민들 중에서 일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선풍기나 냉장고 같은 비싼 문명의 이기를 살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게 문제야. 원주민들을 쉽게 백성으로 끌어들이려면 나눠주는 게 좋고, 일을 시키려면 적게 줄수록 좋겠지.”
생각해야 할 게 많았다. 골치가 너무 아파서 차라리 다른 사람을 왕 시키고 이민호는 이곳에서 편안히 눌러 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전하! 전하께서는 천국을 꿈꾸고 계십니다. 실로 허황된 꿈입니다. 그런데 그 천국이 이 지상에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저는 놀라곤 합니다.”
“아부하지 말게. 요즘 일이 너무 많아서 모든 곳에서 삐걱대고 있으니까.”
“북미 개척은 분명히 너무 서두른 감이 있습니다. 준비도 덜 되었고 어명을 수행하기에 버거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그렇게 계획을 세우셨을 때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저희들은 전하를 믿고 따르겠습니다. 일은 얼마든지 시켜주십시오. 전하께서 이 나라를 천국으로 만드시는 일에 제가 작으나마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행복합니다.”
현대 한국에서 대학생이었을 때 이민호는 학자금 대출 이자에 시달리고 밤늦게 아르바이트하느라 성적도 좋지 못했다. 당연히 부잣집 학생이 성적이 더 좋았다. 이민호는 사회에 진출하기 전부터 빈부격차를 느껴야 했다.
연구소에서 일할 때도 연봉이 적어서 서른 넘을 때까지 결혼은 꿈도 못 꿨다. 사실 일이 많아 연애할 시간도 없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일해도 자기 집은커녕 전세를 얻을 돈도 없어 단칸방 월세로 살았다.
삶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그렇게 힘들게 일해도 시간이 갈수록 힘겨워지고 미래가 나아질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다른 젊은 사람들도 대부분이 힘겹게 살았다. 젊은 세대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사는 게 이렇게 힘들다면 뭔가 사회 전체적으로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행복해서 좋겠어. 어쩌면 나는 지옥에서 왔을지도 몰라. 나는 그저 이 세상이 지옥이 되지 않게 하려고 몸부림치고 있을 뿐일세.”
“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니야. 자넨 좋겠다고.”
공국 좌랑의 안내를 받아 수력발전소와 저수지, 개간 중인 교외 농경지와 묘목을 심은 과수원을 돌아보았다. 황무지로 버려진 건조지대도 물을 끌어들이면 옥토로 변했다. 좌랑이 농지 문제로 원주민들과 충돌하지 않으면서 존경을 받은 이유였다.
오후에는 알현을 신청한 주변 원주민 부족 대표들을 시청에서 만나 인사를 받았다. 그림이 그려진 양탄자 같은 공물을 받고 철제 무기나 장신구 등의 선물을 나눠주었다. 대표들은 이구동성으로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했고, 이민호는 즉석에서 원주민들을 농업노동자로 고용해 일을 시키면서 농사와 목축을 가르치기로 결정했다.
해질녘에 시내 중심지에 위치한 별궁에 도착했다. 별궁은 하얀 기둥이 줄지어 서 있는 바로크식 2층 석조 건물을 본관으로 삼고 아직도 건축 중인 여러 부속 건물로 이루어졌다. 이민호가 북미 서해안에 있는 동안에는 대도시 예정지인 새인천보다 군항인 새목포에 주로 머무를 예정이라 이곳 별궁을 가장 크게 지었다.
“이곳이 마음에 들어?”
“하늘은 파랗고 기후는 늦가을에도 따스하고, 정말 살기 좋은 곳 같아요.”
서쪽 바다로 해가 내려앉는 낙조를 2층 테라스에서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좋으면 민영이를 여기 남겨두고 떠날까?”
“으앙!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동해안에도 이곳보다 좋은 곳이 있을 거야.”
“설마요. 그런데 이렇게 넓은 대륙이 정말로 주인님의 땅인가요? 진짜 고산국 영토인가요?”
“꿈이 아니야. 우린 땅 부자야.”
“아직은 땅만 넓어요. 원주민을 포함해도 사람이 너무 적어요.”
“아직은 그렇지.”
초등학교를 넓게 지어 학교 운동장에 전교생 수에 맞춰서 잔디가 깔린 축구장 16개, 야구장 20개를 지을 수도 있었다. 현대에도 지상 핵실험을 국내 영토에서 진행한 몇 안 되는 나라가 미국이었다. 그러나 고산국은 미국 영토뿐만 아니라 현대 캐나다까지 포함해서 두 배나 넓었다.
“그런데 지금 뭘 입었어?”
“청바지요. 요즘 농부나 목장 주인들이 입어요. 천이 튼튼하고 특히 말 탈 때 아주 편해요.”
청바지는 북미에 진출할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제작했다. 고산국에서도 노동자나 농민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평상복으로 흔히 입었다. 해군에서 수병들의 작업복으로 도입했고, 여름에는 반바지를 입었다. 처녀들이 청치마를 짧게 줄여 입고 거리에 나서면 허연 허벅지가 드러나 남자들이 걷지 못하고 청년들은 주저앉았다.
“왜 그리 줄여 입어? 몸매가 훤히 드러나서 민망하지 않아?”
“주인님이 봐주시면 좋죠. 헤헤!”
민영은 다리가 길어서 뭘 어떻게 입어도 보기에 좋았다. 이민호가 민영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손으로 만졌다. 그러나 청바지는 천이 두꺼워 맨살을 만지는 느낌이 전혀 나지 않았다. 이민호가 민영의 엉덩이를 찰싹 두들겼다.
“찰지구나!”
민영을 침대로 데려가 청바지를 벗겨봤는데 몸에 착 달라붙어서 보기보다 벗기는데 힘이 들었다. 오랜만에 민영과 신혼 기분을 냈다.
다음 날 오전에 파나마로 향했다. 새목포 남쪽의 가늘고 기다란 반도를 따라 함대가 남하하는 중에 바다에서 고래 떼와 자주 마주쳤다. 범고래 떼가 고래를 사냥하기 위해 추격하는 것도 잠시 지켜봤다.
“전에는 겨우 개복치하고 충돌하는 것도 걱정했는데 이제는 긴수염고래 떼를 만나도 걱정이 안 됩니다.”
“그때는 작은 배를 타고 빨빨거리며 잘만 쏘다녔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수심 측량도 제대로 안 하고 겁도 없이 싸돌아다녔던 것 같습니다.”
“다들 경험이 없었으니까. 우리가 아직도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새로 임명한 국왕좌승함 함장은 예전에 초기 외륜선 시절에 기함의 항해사를 역임했던 장교였다. 5년 전에 항법사였던 황 중위는 어느덧 소령으로 승진해서 이번에 좌승함에서 부장을 맡고 있었다. 그때 함장을 장가보낸 공으로 인사고과를 잘 받아 동기 중에서 승진이 가장 빠른 편이었다.
함대 지휘를 맡은 전단장은 따로 있었다. 지금은 깃발 신호 위주로 지령을 내렸으나 조만간 무선 통신이 가능할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이번 회도 역시 자료 하나도 안 찾고 썼습니다. 오전에 인터넷 기사님 오신다니까 리플은 저녁 때 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