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450화 (399/1,000)

00450  48. 북미 개척  =========================================================================

“겨우 몇 달째인데 추장들이 스페인어도 잘하고 조선말, 그러니까 고산국 말도 잘하는 것 같소.”

“저희들 입장에서는 발음과 문법은 스페인어가, 문장과 단어는 고산국 말이 배우기 쉬운 편입니다.”

지금은 추장들이 스페인어를 사용하면서 통역을 통해 대화하고 있지만 북미 원주민들이 의외로 고산국 말도 쉽게 배웠다. 조만간 통역 없이도 조선말로 간단한 대화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원주민들이 주변 부족들과 부대끼며 살려면 수시로 다른 언어를 배워야 해서 스페인어든 조선말이든 외국어에 대한 심리적 부담감이 적었다. 대학 졸업까지 대략 10년 동안 영어를 배우고도 외국인 앞에서는 영어 울렁증이 생기는 현대 한국인들과 전혀 달랐다. 역시 외국어는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배우는 게 가장 확실했다.

물론 통바와 추마시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고산국 언어학자들이 원주민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연구했다. 고산국 사람이 통바와 추마시 말을 배우거나, 반대로 두 부족에게 조선말을 가르칠 교과서와 사전을 만들기 위한 기초 작업이었다.

“개척민들이 많이 와서 원주민들이 불안할 것이오. 그러나 결코 그대들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겠소. 만약 문제가 생기더라도 찬찬히 풀어가도록 합시다. 혹시 건의 사항이 있소?”

원주민들은 말 탄 기병들이 지축을 울리며 지나갈 때 놀라고, 총을 쏴서 새를 사냥할 때 기겁하고, 거대한 건설장비나 경운차가 굉음을 울리면서 움직일 때 혼비백산했다. 그러나 이 지역이 단기간에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자세히 살피고 있었다.

가끔 아파치나 나바호 족에게 약탈당하듯이 공물을 상납하면서 살던 원주민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든든한 동아줄을 잡은 셈이었다. 통바와 추마시 추장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저희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이 땅에서 살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선교사님과 신부님들 덕택에 마음의 안정도 얻었습니다. 그리고 철제 농기구를 많이 얻어서 부족민들이 아주 좋아하고 있습니다. 자그마한 욕심이라면 고산국 농민이 농사짓는 그 수도관, 그런 방식으로 농사를 짓고 싶습니다.”

“밭을 동그랗게 만들고 중간에 길 여러 개를 만드는 것은 간단한 일이오. 그 위에 물이 새는 수도관을 얹어서 말이 끌게 하면 되오. 원주민들이 원한다면 고산국에서 도와줄 것이오.”

“아아! 감사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도 일을 별로 안 하고 엄청나게 많은 곡식을 수확할 수 있겠군요.”

원주민들을 가만 놔두면 봄부터 가을까지 몇 명만 밭에서 일하고 대부분 부족민들은 흰머리 산에서 내려오지 않을 것 같았다. 새인천의 여름을 겪어보지 않은 이민호나 개척민들은 아직 잘 몰랐지만, 원주민들이 여름 내내 선선한 흰머리 산에서 사는 이유가 있었다.

“누가 그런 말을 했소?”

“신부님도 그렇고 고산국 농민도 밭 면적만 알면 수확량을 바로 계산하던데요. 100명이 일하던 밭에서 내년부터 두 명만 교대로 일하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왕께서 오신 덕택에 지상에서 천국처럼 보내게 됐습니다.”

“잠깐! 우리가 그렇게 농경지를 가꿔주면 앞으로 수확량의 절반을 세금으로 내야 하오.”

“어어? 어...... 절반을 내고도 충분히 남겠습니다. 100명이 일하던 밭에서 두 명이 아니라 네 명이 일하면 되겠군요. 배 타고 온 사람들은 아파치와 나바호의 강도질을 막을 능력이 있으신 것으로 압니다. 저희들을 지켜주실 수 있다면 그렇게 해주십시오.”

“뭐, 좋소. 아이들과 어른들을 불문하고 시급히 예방 접종부터 받읍시다.”

새인천에 거주하는 원주민 2개 부족 만여 명을 세금을 내는 정식 농민으로 편입했다. 원주민들의 농지까지 개량하려면 겨울 내내 바쁠 것 같았다.

이민호는 원주민들에 대한 예방 접종을 늦추고 있었다. 원주민들이 전염병에 죽어가길 원한 것이 아니라, 주사를 맞는 것에 반발이 심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원주민들도 정식으로 고산국 백성이 됐으니 예방 접종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하루씩 마을 단위로 돌아가면서 예방 주사를 맞으면 두려움도 줄어들 것으로 기대했다. 시원한 흰머리 산에서 놀겠다는 원주민들이 얄미워서 주사를 맞히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고산국 사람들이 키우는 양에서 양털을 조금 얻어서 부족 여자들이 이것을 짰습니다. 저희가 왕께 바치는 공물입니다.”

“뭘 이런 걸 다. 고맙소.”

추마시 추장이 특이한 문양이 들어간 양탄자를 바쳤다. 고정식 주거지인 움집이 아닌 이동식 주거지인 티피의 크기에 맞췄기 때문에 거실용 양탄자로 쓰기에는 다소 작았다. 양털이 모자랐는지, 아니면 직조기술의 한계인지 두께도 얇았다. 그러나 벽에 걸면 아주 훌륭한 장식품이 될 것 같았다.

“이거, 선교사가 보기에는 어떻소? 유럽의 태피스트리와 비슷한 것 같소.”

“원주민들의 세계관과 우상숭배 관념이 들어가 있어서 제가 보기에는 무척 거북합니다. 그래도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아주 좋을 것 같군요. 시뻘건 색을 많이 써서 분명 눈에 거슬리는 색감인데도 묘하게 인상에 남습니다.”

“이것을 유럽에 수출해볼까요? 조금만 더워도 흰머리 산에 올라가서 놀려는 추마시 족에게 노동의 기쁨을 가르쳐주고 싶소.”

“전하께서는 그저 백성들이 노는 꼴을 보기 싫은 것이군요. 그런데 고상한 척하는 유럽 귀족들이 원주민이 만든 조잡한 장식물을 설마 사겠습니까?”

회족의 복잡한 이슬람 문양이나 회칠한 벽에 어울리는 아이누 족의 단순한 문양도 괜찮았지만 추마시 족의 특이한 문양과 색감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옥 도자기와 나전칠기의 사례에서 증명됐듯이 이민호의 마음에 들었다면 유럽 귀족들에게도 충분히 통한다고 봐야 했다.

이민호는 추마시 부족 여자들에게 직조기와 함께 직조 기술자를 보내 직조 기술과 염색기술을 가르쳐줬다. 그리고 양탄자 하나에 은 닷 냥을 주기로 하고 왕궁 장식용으로 큰 양탄자 10여 장을 주문했다. 원주민들의 시간을 두고 이민호와 경쟁하는 예수회 선교사가 불만이 쌓인 것 같았으나 종교보다는 산업이 우선이었다. 물론 일요일에는 확실히 쉬게 해줬다.

다음 날 오전 특전대대 중대장이 이민호에게 급히 달려와 보고했다. 아파치와 나바호 부족들 중에서 일부가 새인천 동쪽 평원에 모여 전쟁 준비를 한다는 급보였다. 두 부족이 연합한 병력은 3천 정도라고 했다.

출전 준비를 하는데 잠시 후 푸에블로 원주민이 급히 달려와 아파치와 나바호가 연합해 새인천을 약탈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이민호는 여진족 기병 2천과 고산국 기병중대를 내보냈다. 이민호도 호위들과 함께 구경 나갔고, 여진족 기병 500과 특전 중대는 새인천 시가지 방어를 위해 남겨두었다.

여진족과 달리 기병중대는 고개를 넘을 때마다 주변을 샅샅이 수색해서 혹시나 매복이 있는지 확인했다. 여진족들은 어서 전투를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으나, 전체 지휘를 맡은 기병중대장은 콧방귀만 뀌었다.

첨병을 맡은 기병소대가 고갯길 좌우를 수색하는데 하늘을 뒤덮으며 화살이 날아왔다. 북미 원주민의 매복 공격이었다.

- 피비빅!

- 텅! 깡!

벌거벗은 나무가 듬성듬성 서 있는 숲 안쪽에서 화살과 돌도끼가 수십 개씩 날아왔다. 그러나 거리가 멀어 돌화살촉은 고산국 기병들이 입은 방탄복을 뚫지 못하고, 심지어 말 잔등에 씌운 천도 관통하지 못했다. 돌화살촉 중에서 가장 좋다는 흑요석 화살촉인데도 소용없었다.

날아오는 돌도끼는 기병들이 총이나 기병도로 막아냈다. 미처 막아내지 못한 돌도끼에 맞은 말이 펄쩍 뛰어오르며 비명을 질렀으나 기수가 어루만지자 금방 안정을 되찾았다.

“온다! 좌우 경계! 사격!”

“끼야아아아~”

산맥을 넘어가는 고갯길이라 선선한데도 아파치는 웃통을 벗고 바지만 입은 채로 몰려왔다. 머리띠에 독수리 깃털을 꽂고 얼굴과 상체에 문신을 한 인상적인 모습의 아파치들이 돌도끼를 들고 기병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열 발 들이 탄창에서 쏟아 붓는 자동 보병총과 기병총에 줄줄이 쓰러질 뿐이었다.

“평원에 3천을 대기시켜놓고도 숲에 꽤 많이 들어와 있어요.”

“어제부터 미리 잠입했던 모양이야. 고개에서 매복공격하기 위해 일부러 척후나 푸에블로 전령을 통과시킨 것 같다.”

민영은 일단 이민호를 보호하기 위해 앞을 가렸다. 다른 호위들도 일제히 총을 빼들고 주변을 지켰다.

“와! 원주민의 전술 맞아요?”

“원주민들끼리 수천 년 동안 전쟁을 숱하게 했을 테니 이 정도는 기본이겠지.”

인디언 전쟁 중에 수우 족을 공격하던 커스터 중령의 제7 기병대는 리틀 빅혼에서 전멸에 가까운 큰 피해를 입었다. 포위 작전을 실시하기 위해 기병연대를 셋으로 나눠 공격하다가 오히려 줄줄이 각개격파 당했고 특히 커스터의 본대 210명은 포위 섬멸 당했다.

인디언을 우습게 본 기병대가 정찰도 제대로 하지 않고 숲으로 들어간 것이 잘못이었다. 예하 제대가 서로 연결되지 않은 것도 큰 잘못이었다. 기병대나 인디언이나 모두 비슷한 성능의 총을 무기로 사용했다지만 열 배나 되는 전사자를 낸 미국 기병대의 기념비적인 패배였다.

- 펑! 퍼벙!

아파치가 화승총을 사용하는 에스파냐 탐험대와 교전 경험이 있는지 총을 두려워하지 않고 저돌적인 공격을 반복했다. 그러나 고산국 기병은 에스파냐 탐험대보다 훨씬 강력했다. 유탄이 숲 사이에서 연속 터지자 숫자가 훨씬 많은 아파치들이 놀라 우왕좌왕했다.

- 두두두두두~

이때 뒤에서 관망하던 여진 기병이 나섰다. 만약 전투가 불리하게 돌아갔다면 여진 기병은 항상 그랬듯이 당연히 꽁무니를 뺐을 것이다. 그러나 포위당한 기병중대가 거의 피해 없이 아파치를 막아내자 여진족이 아파치의 측면으로 돌격을 시작했다.

고갯길 옆 숲이라고 하나 고산지대라 키 큰 나무도 드물고 낙엽이 져서 관측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여진 기병들은 말을 타고 달리면서 이미 구식이 된 단발 보병총 또는 활을 쏘아 북미 원주민들을 쓰러뜨렸다.

사격을 하면서 계속 기마 돌격한 여진족들이 드디어 아파치와 맞서게 됐다. 여진족들이 마상에서 날이 휘어진 기병도를 내리쳐 아파치들의 상체를 두 조각내버렸다. 아파치들이 활을 쏘고 돌도끼를 던지며 버텼으나 다 무시하고 돌진한 여진족이 탄 말발굽에 한꺼번에 짓밟혔다.

선두에서 돌격하는 여진 기병들은 두정갑을 입어서 피해가 적었다. 조선의 두정갑과 비슷한 두루마기형, 즉 포형 갑옷은 몽골이나 북방 유목민들이 선호하는 갑옷 형태였다. 속에 철판이나 가죽을 덧댄 두정갑이 흑요석 화살촉에 뚫릴 리가 없었다.

제법 잘 싸우는 아파치 전사도 있었다. 아파치 전사의 가슴 근육이 꿈틀거린 순간 여진 기병의 복부가 긴 창에 꿰였다. 다른 여진 기병이 칼을 내리치자 그 전사는 슬쩍 몸을 피하면서 돌도끼로 여진 기병의 머리를 찍었다. 그러나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여진 기병들이 총격을 가하는 순간 그 전사는 허무하게 쓰러지고 말았다. 이것이 가장 그럴듯한 저항이었다.

아파치들은 계속 물러서다가 결국은 등을 보인 채 달아났다. 전사의 혼 운운하던 아파치들로서는 보기 드문 완패를 당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일방적인 학살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오르막이든 절벽이든 상관없이 여진 기병들이 쫓아가 하나도 남김없이 쳐 죽였다.

“기병에게 등을 보이면 안 돼요.”

“응. 여진족과 북미 원주민들이 비슷하게 보이는데, 어때?”

“아니에요! 여진족이 훨씬 문명인이에요. 비슷한 가죽옷을 입더라도 무두질한 수준이 아예 달라요. 주인님은 그것도 몰라요?”

“음. 그렇구나.”

민영이 흥분해서 열심히 여진족의 문화적 우위를 강조했다. 그러나 이민호가 보기에는 둘 다 비슷했다. 현대에서도 첨단 과학기술을 접한 이민호에게는 심지어 조선이나 명나라도 여진족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런 이민호에게 누가 누굴 야만인으로 무시하는 사람들이 더 웃겼다. 조선과 명나라는 조만간 야만인이라고 무시했던 여진족에게 크게 당할 것이다.

“바로 평원으로 내려간다!”

전투가 일단락되자 기병 중대장이 여진족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2천여 기병들이 내리막길을 빠른 속도로 내려갔다.

이민호는 또 다른 매복이 있을까 걱정했지만 아파치 2천여 명이 죽어가는 동안 구원하러 오지 않았다면 없다고 봐야 했다. 그리고 기병 중대장이 첨병과 첨병분대를 운용하면서 적의 매복에 대비했다.

평원에는 아파치와 나바호 연합 세력 3천여 명이 무기를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이들은 멀리 고갯길에서 이루어지는 전투를 지켜보면서, 일단 매복이 성공했으므로 결과를 낙관했다. 그러나 고갯길에서 떼를 지어 내려오는 것은 아파치가 아니라 말에 탄 기병이었다.

고산국과 싸우기로 결정한 3천여 원주민들이 큰 충격을 받아 술렁거렸다.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고산국과 평화롭게 지내기로 결정한 아파치와 나바호 5천여 전사들이 따로 티피를 세운 채 대기하고 있었다.

기병 중대장이 선두에 서서 달렸다. 고산국 기병 중대를 중심으로 여진족 기병들이 초승달 모양 진형을 갖추고 원주민 전사 집단을 향해 돌격했다.

“일단 대화를 나누자! 평화!”

아파치와 나바호의 연합 전사단을 이끄는 전투 추장은 여러 명이었다. 그 중에서 대전사 겸 전투 추장이 앞에 나와서 양 팔을 벌리고 스페인어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기병 중대장은 이민호에게서 명령을 받았으므로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쓸어버려!”

- 타타타타탕! 펑!

아파치와 나바호 족 전사들은 대부분이 돌창과 돌도끼로 무장하고 멕시코에서 수입한 쇠창은 몇 개 없었다. 아파치가 가진 활의 사정거리도 안 됐을 때 기병들이 총탄을 퍼부었다. 유탄이 원주민 대열에 날아들 때마다 큰 폭발이 일어나고 못해도 열 명씩 그 폭발에 휘말렸다.

이민호가 예전에 봤던 서부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던 아파치 인디언은 말 타고 총을 쐈지만 그건 19세기 말 이야기였다. 이 시대에는 북미 원주민에게 아직 총도 없고 말도 없었다. 아파치는 총을 쏘는 여진 기병에게 대항할 수단이 없었다. 그리고 여긴 탁 트인 평원, 기병의 전장이었다.

“그마안! 커헉!”

대전사 겸 전투 추장이 총탄에 맞고 쓰러진 순간 아파치와 나바호 전사들이 일제히 흩어져 도망쳤다. 그러나 너른 평원에서 기병보다 빨리 뛸 수 있는 원주민 전사는 없었다. 자꾸 고개를 돌리면서 뛰던 원주민 전사들이 여진족이 휘두른 기병도에 맞아 하나둘씩 쓰러졌다.

============================ 작품 후기 ============================

내용이 이어질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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