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447화 (396/1,000)

00447  48. 북미 개척  =========================================================================

남포에서 사흘을 쉰 개척 함대는 다시 남쪽으로 항해했다. 남쪽으로 갈수록 기후가 온화해졌고, 다음 날 아침에 자욱한 안개 너머로 새 나하에 건설된 하얀 등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등대 아래는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고산국식 요새였다. 개척 함대의 목표는 새목포였으나 지나가는 길에 새 나하의 건설 현황을 살펴보기 위해 만 안에 진입했다.

현대라면 금문교가 놓여있을 해협을 지나고 악명 높은 형무소인 알카트레스 섬을 지나 새로 지은 선착장에 함선들이 차례로 들어섰다. 유구국 사람들이 잔뜩 몰려나와 함대를 환영했다. 도로를 닦고 집을 짓고 있던 명나라 노무자들도 일손을 놓고 항구로 몰려 나왔다.

만 건너편에서 농장을 개간하던 노무자들도, 정찰 나갔다 돌아온 기병중대도 작은 배를 타고 허겁지겁 노를 저어 왔다. 만 건너편에 여진족들이 말을 타고 해안선에 몰려나와 손을 흔들었다.

“고산국 국왕전하 천세!”

명나라 노무자들이 많은 탓에 ‘주상전하 만세’라는 구호는 나오지 않았다. 함대는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만 안쪽에 건설된 선착장에 접안했다. 호위병들과 취타대가 먼저 내리고, 이민호는 취타대의 연주에 맞춰 배에서 내렸다. 뜻밖의 사람이 개척민 대표로 이민호를 맞이했다.

“상풍 왕자가 와 있었네?”

“어서 오십시오, 전하. 제 백성들이 일하는 곳이니까 당연히 제가 있어야지요.”

이민호는 유구국을 병합하지 않더라도 새 나하에 이주한 유구국 백성들을 얼렁뚱땅 고산국 백성으로 받아들이려는 흑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이민호보다 훨씬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유구국 왕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자넨 훌륭한 지도자가 될 걸세.”

“황공하옵니다, 전하. 객관으로 드시지요.”

이민호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상풍 왕자의 안내에 따라 요새 동쪽, 선착장 서쪽의 객사로 향했다. 현재 객사 건물 몇 채가 완공됐거나 건축 중인데 2층짜리 건물 한 채는 온전히 고산국 별궁으로 사용할 것을 감안해 건축됐다. 이민호는 낭비라고 생각했으나 이 시대 기준으로 의전과 명분이 실리보다 앞서는 경우는 흔했다.

새 나하는 현대의 샌프란시스코보다 훨씬 넓은 지역이었다. 만을 중심으로 바다 건너 동쪽 오클랜드와 남쪽 산호세뿐만 아니라 동쪽 산 너머 새크라멘토와 중앙평원의 북부까지 모두 새 나하의 영역에 속했다.

“이 지역은 요새로 쓸 곳이고 오르막 내리막 천지인데 왜 여기만 몰려서 사나? 적함이 바다에서 대포를 쏘거나 상륙하면 민간인들이 피해를 볼 수도 있어. 바다 건너편에 집을 안 짓고 있군.”

“아직 새 나하 주변에 거주하는 원주민들과 협상 중입니다. 전투에 대비해 같은 연맹에 속한 원주민들이 무기를 들고 모여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주민들이 여진 기병을 두려워해서 전투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원주민들이 다 수렵, 채집민도 아니고 일부는 농사를 짓고 있어서 토지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물론 갖가지 곡식 종자와 철기를 나눠주는 유구국 사람들을 좋은 이웃으로 생각하면서도 언젠가 자기들이 이 지역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곡식과 가축, 영토 경계 조기 획정 등 원주민들이 요구하는 것이 지나치게 많았다. 가만히 듣던 이민호가 화를 냈다.

“보병과 기병 1개 중대씩이 있잖아? 여진족 기병은 2천이 넘어. 원주민들과 항상 우호를 다질 필요는 없어. 개척민을 위협하면 그냥 쓸어버려서 확고한 우위를 알려줘.”

고산국 병력은 적지만 강하고, 유구국 병력도 꽤 있는 줄로 알고 있었다. 북미 원주민들이 작정하고 몰려오더라도 충분히 격퇴 가능했다. 오히려 여진족 기병이 주변 원주민 부족들을 휩쓸고 다닐 만한 전력이었다.

“군사력으로 압살하기보다는 가급적 함께 사는 방향으로 가려고 합니다. 원주민들도 전하의 백성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괜히 희생자가 나면 곤란해. 새 나하는 유구국의 영토니까 알아서 잘 하게나. 이곳을 기반으로 내륙으로 들어갈 내 백성들만 확실히 보호해주게.”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민호는 유구국에 너무 넓은 지역을 넘겨준 것 같다는 후회가 들었다. 직접 와 보니 새 나하는 기후도 좋고 교통의 요지인데다 농사지을 땅도 넓었다.

그러나 새 나하를 유구국에 넘긴 덕택에 유구국이 국력을 기울여 개척에 나서고 태평양을 횡단하는 위험한 해상운송에도 용감하게 나설 수 있었다. 직접 태평양을 건너보니 천 톤도 안 되는 유구국의 작은 범선으로 태평양을 횡단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가 또 있나? 표정이 왜 그래?”

“예. 지진이 무척 잦아서 문제입니다. 지진이 하루에 300번은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큰 석조건물을 짓기 곤란합니다.”

캘리포니아 남북에 걸쳐 북아메리카판과 태평양판이 맞붙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샌앤드리어스 단층이 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3천 명이나 죽었다. 대부분이 지진 직후 발생한 화재로 사망했다.

“지진이라. 그렇다면 큐슈에서 한 것처럼 기초 공사를 제대로 하는 수밖에 없지. 2층까지만 지으라고 해.”

“지진에 강한 목조 건물을 짓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지진에 의해 직접 죽는 사람은 의외로 적은 편이야. 지진이 나면 지붕이 무너지면서 몇 명 깔려 죽고 말지만 화재가 나면 수천 명 단위로 죽을 수도 있어.”

“그렇군요. 자재가 많이 소모되더라도 건물은 화재에 강한 석조나 철골조로 짓겠습니다. 기초공사를 단단히 하고 석조는 1층, 철골조는 2층으로 짓겠습니다.”

샌프란시스코나 LA뿐만 아니라 캘리포니아 전체가 지진 다발 지역이었다. 그러나 북미에서 캘리포니아만큼 살기 좋은 곳도 드물었고, 특히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한 샌프란시스코는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손꼽히는 지역이었다.

이민호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새 나하에 가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모자에 꽃을 꽂도록 하시오.’라는 어명은 차마 내리지 못했다.

오후에 새 나하의 건설 현장을 둘러봤다. 상인과 선원들 거주지가 세워지고 있는데 일부 2층 건물은 고산국의 연립주택을 닮았다.

“독신자용 숙소입니다. 아무래도 가족은 유구에 두고 선원들만 배에 타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식수와 전기가 공급되나?”

“물과 땔감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전기는 고산국과 바기오에만 있지 않습니까? 브루나이 유전에도 있군요. 전하께서 은혜를 베풀어 새 나하에 전기를 만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화재가 일어나지 않도록 차단을 잘했군. 근처에 물이 풍부한 계곡이 없으니 전기는 좀 더 생각해봐야겠어. 일단 원주민들하고 대립하는 문제부터 해결해. 동쪽 평원에 진출하면 그때 수력발전소를 만들어주지.”

“정말 감사합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요세미티 공원을 비롯한 시에라네바다 산맥이 200km 거리 내에 있으니 수력발전 입지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주변 원주민들과 관계를 개선하지 않으면 전기를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문제가 생겼다. 다들 예상하고 있었지만 원주민들과의 관계 개선이 개척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하온데, 전하! 북미 어딜 가나 원주민들이 이렇게 많이 삽니까?”

“아니. 이 지역하고 남쪽에만 많아. 북쪽이나 동쪽으로 가면 거의 없어. 이곳이 살기 좋은 곳이니까 원주민들도 많이 살겠지?”

“그렇군요. 넓고 비옥한 땅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원주민들도 불만이 없도록 잘 먹이겠습니다.”

“자신감이 넘치네? 동쪽 산 너머 중앙평원을 정찰해본 모양이군.”

새 나하에서 동쪽으로 100km쯤 가면 거기서부터 남북으로 700km에 폭이 50km에 달하는 센트럴 밸리, 중앙평원에 접하게 된다. 수량이 풍부한 강과 지류가 널려 있어서 농사짓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얼마나 넓은지 상풍 왕자가 한 말로 정리됐다.

“동쪽 평원에 정찰대를 보내 측량을 해봤습니다. 지평선을 말을 타고 몇 번이나 넘어야 했다더군요. 고산국 본토와 조선의 모든 논밭을 합한 면적보다 더 넓은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대단하지.”

“전하께서 유구국에 하사하신 중앙평원의 북쪽 절반은 마르지 않는 커다란 강과 지류가 흐르는 옥토입니다. 햇빛은 강하고 기후는 온화합니다. 토질은 황토에 다공성이라 영양이 풍부하면서도 배수가 잘 됩니다. 농사짓기에 최고의 옥토라고 합니다.”

“정말 좋겠다. 잘 가꿔봐.”

새크라멘토 강이 북쪽 평원에 흐르고 있으므로 농업용수 공급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시에라네바다 산맥 고지대에 쌓인 눈이 초여름까지 서서히 녹으면서 강이 마를 날이 없기 때문이다. 걸핏하면 가뭄이 드는 북부 대평원지대보다 농사짓기에는 훨씬 나았다.

현대 한국의 경지 면적은 2012년 기준으로 173만 헥타르인데 1헥타르는 1만 제곱미터에 해당한다. 새 나하 동쪽에서 경작 가능한 면적은 그 두 배 이상이었다. 이 시대 조선과 고산국, 큐슈의 농지를 합한 면적보다 넓었고, 기후와 토질은 훨씬 좋았다.

“황송하게도 고산국 개척민에게 배정될 남쪽 평원은 강이 적어서 농사짓기에 불편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는 것을 알고 북쪽 평원을 유구국에 넘긴 것이니 미안해할 것 없어. 우린 남쪽 강에서 물을 끌어가면 되겠지. 걱정 마.”

“이 평원에서 쌀과 밀을 재배하면 유구국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아돌 것 같습니다. 남는 땅에 뭘 재배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러나 상풍 왕자가 중앙평원의 생산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했다. 과수나 목화 농사를 안 하고 순수하게 곡물 농사만 지으면 세계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지역이 중앙평원이었다.

“채소와 과일도 키워봐. 아! 포도! 건포도와 포도주를 만드는 거야. 고산국 땅과 남북으로 나뉠 경계선 주변에 포도를 재배하면 좋을 거야. 수운이든 육운이든 여기가 제일 교통이 좋을 테니까.”

미국에서 생산되는 와인의 80퍼센트가 캘리포니아에서 생산되는데 그 중 대부분이 중앙평원에서 난다. 와인의 품질은 기후와 품종, 제조법 등에서 많은 차이가 날 수 있었다.

“포도주요? 전하께서는 술을 즐기시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만.”

“교역 품목으로 포도주만큼 좋은 게 없거든. 유럽에 팔 생각을 해. 포도주 만드는 법은 농업연구소에 물어봐.”

“사탕수수는 재배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까?”

“기온이 더 높은 동해안이나 남해안에서 사탕수수를 대량 재배해서 설탕 외에도 럼주를 만들 계획이야. 그러니 서해안에서는 사탕수수를 대량 재배할 필요가 없어. 싸구려 럼주를 유럽에 대량으로 가져가서 팔려면 동해안에서 재배하는 게 운송비가 적게 들겠지?”

“휴우! 다행입니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떤 작물을 재배할지 의논해야겠군. 자급자족할 거라면 상관없는데 상품작물은 우리끼리 경쟁하지 않도록 해.”

“예. 전하만 믿습니다.”

상품 작물로서 사탕수수와 담배, 밀은 동해안에서 주로 경작하고 쌀과 포도는 서해안 중앙평원에서 주로 경작하기로 했다. 경작법과 양조 작업에 대해서는 고산국 농업연구소 북미 분소가 유구국 개척민들을 많이 도와주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새 나하를 떠나 저녁에 새인천, 현대 지명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다. 새인천에서도 새 나하와 마찬가지로 여진족과 명나라 노무자들이 항구로 몰려나와 대대적인 환영을 했다.

개척민들이 내리고 장비를 하역하는 사이 이민호는 건설 책임자를 만났다. 새인천 건설은 젊은 건축기사 출신인 공국 정랑이 맡고 있었다.

“중앙평원에 비해 건조한 편이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새인천은 장기적으로 농업지대가 아닌 상업지대로 계획됐기에 건조한 편이 낫습니다.”

“여기도 지진이 많이 일어나지?”

“예. 그래서 소방대와 소방마차를 상시 운용하고 있습니다. 수도관이 파열될 경우 화재 진압이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곳에 물을 보관하거나, 바닷물을 끌어들여 화재 진압에 사용하려고 합니다.”

새 개척지이기도 해서 안전을 그 무엇보다 중시했다. 백성을 위협하는 것은 원주민뿐만이 아니라 자연재해도 있었다.

“죄송하오나 급히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이미 도착한 특전대대에서 주변 원주민들과 친교를 다져 놓았다. 멀리까지 정찰을 하고 온 소대장이 특이한 보고를 했다.

“방금 북쪽을 정찰하고 왔는데 북쪽 120km 거리의 평원에서 석유가 산출되는 것 같습니다.”

“이 지역에서 석유가 나온다고?”

“예. 원주민들이 검은 물이 흐르는 지옥에 대해 불평하는 것을 듣고 가서 확인했습니다. 브루나이의 원유와 비슷한 물질이 틀림없습니다.”

소대장이 견본으로 떠온 원유를 받아든 이민호가 어리둥절했다. 장기적인 북미 개발 계획에서는 텍사스 남동 해안에서 10년 동안 원유를 탐사하려고 했다. 그런데 캘리포니아에서 나온다면 남부와 서부 철도가 개통되기 전부터 사용할 수 있으니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이민호는 잘 몰랐지만 석유가 나온 곳은 중앙평원 남쪽, 현대 지명으로 컨 강의 북쪽 황야, 베이커즈필드의 오일데일이었다. 캘리포니아 초원이나 황야에 소규모 유전이 꽤 많아서 파소 로블레스 같은 경우 포도밭과 석유 채굴기가 뒤엉켜 있었다.

유전은 로스앤젤레스 교외와 남부 분지에서도 종종 발견됐으나 나중 일이었다. 원유가 밖으로 새는 유전은 드문 편이었다. 석유가 휘발성이 있어서 원유 매장지 위쪽이 완벽하게 덮이지 않은 유전은 시간이 흐르면 모두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너무 잘 풀려서 얼떨떨하다. 사실이라면 소대장과 소대 전원 일계급 특진이다. 석유 기술자들과 함께 가서 채굴 가능성을 확인해보도록 해.”

이민호는 입이 찢어질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현재 대형 수송선 10여 척이 쉬지 않고 태평양을 돌면서 석유 수송을 전담하고 있었다. 이제 이 배들을 다른 용도로 전용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여유가 많이 생길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에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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