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46 48. 북미 개척 =========================================================================
“평지 위주로 철도를 깔되 처음부터 복선으로 공사를 해야겠소. 전봇대는 철로를 따라서 세우면 쉬울 것이오.”
“예. 전봇대나 철도 침목으로 사용할 만한 나무가 많다니까 그나마 다행이에요. 하온데 전하. 저도 북미에 가고 싶어요.”
“아라 공주는 본국에 남아서 큰일을 해야 하오. 공주만큼 무역을 잘하는 사람도 없소. 공사용 자재를 파나마와 북미로 운송하는 문제도 공주 덕택에 해결할 수 있었소. 만약 공주가 없었다면 북미에 진출할 꿈도 못 꿨을 거요.”
“그럼 저는 전하를 그리워하며 밤마다 울어야 하나요?”
아라 공주가 이민호의 품에 안겨서 울었다. 이민호가 아라 공주의 투정을 받아주었다.
“멀다 해도 겨우 석 달이오. 몇 년 후에 초기 개척이 일단락되면 편안하게 함께 갑시다. 서해안 새의주부터 동해안 북쪽 끝 새함흥까지 아라 공주와 함께 여행을 할 것이오.”
“신혼여행 같아요.”
아라 공주가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나 아라 공주는 북미 대륙을 돌아볼 권리가 있었다. 파나마 운하와 새 나하를 건설하는데 소모되는 건설자재와 장비의 양이 장난이 아니었다. 당연히 공주의 업무량은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미성년자 노동은 아동학대죄에 해당하나 이 시대에 그런 것을 따지는 사람은 이민호 한 사람밖에 없었다. 산업혁명 시대에 성인들이 저임금 노동에 혹사당하니 생활비가 부족해 아이들마저 위험한 노동에 내몰릴 수밖에 없었고, 의무교육은 공허한 구호로 전락하고 말았다.
고산국에서도 가끔 부모에 의한 일종의 학대 수단으로서 아동 노동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 아이들은 성인이 될 때까지 학교에 다니고 공부보다는 뛰어놀기에 바빴다. 게다가 어렸을 때부터 잘 먹인 덕택에 부모세대와 신장 및 체격 차이가 엄청나게 벌어졌다. 조선과 달리 공무원이나 학자가 그다지 존경받지 않는 고산국에서는 학업에 대한 학부모의 압력이 상대적으로 약했다.
그러나 일단 학교를 졸업하면 놀기 좋아하는 젊은이들도 많이 달라졌다. 기술자가 되려는 남녀 젊은이들이 가장 열심이었고 대학교에 입학한 학생들도 엄청난 공부 양에 시달렸다. 농민은 많은 수입에 비해 개인 시간이 적다는 단점이 부각됐으나 이 시대에 가장 일반적으로 선택하는 직업이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잘해주시오. 북미에 가 있는 동안 오직 아라 공주만 믿고 있겠소.”
“무역과 자재 운송은 걱정 마세요.”
왕복하는데 한 달이 소모되고, 나머지 두 달 동안 북미 서해안과 파나마, 동해안을 돌아보는 것이 이번 북미 순행의 계획이었다. 현대 기준으로는 끔찍하게 많이 걸리지만 에스파냐나 포르투갈이 보기에는 어처구니없이 빠른 이동 속도였다.
몇 달 동안 계속해서 유구국 사람들, 복건 노무자, 여진족 순서대로 북미로 보냈다. 이제 초기 고산국 개척민들과 함께 이민호가 출항할 차례였다. 이순신에게는 언제 침략자로 돌변할지 모를 네덜란드 상선단에 주의를 기울여줄 것을 단단히 당부했다.
10월이 되어 이민호가 북미로 출발하기 직전에 감동이 2연대와 함께 돌아왔다. 2연대가 양응룡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결정적인 전공을 세웠다는데 다행히 사상자는 거의 없었다.
파주 토관 양응룡은 몇 년 전부터 반란과 항복을 반복하면서 점령지를 넓히다가 올해 초에 본격적인 반란에 들어갔다. 명나라 군대는 5월까지 자그마치 20만을 동원해 양응룡이 똬리를 틀고 들어앉은 귀주성 쭌이(尊義)의 북쪽 해룡돈(海龍囤)을 공격했다.
양응룡은 단순한 명나라 세습 지휘사 벼슬에 불과한 토관이 아니었다. 파주의 양 씨는 당나라 때부터 파주에서 700년간 대대로 그 지역을 다스린 실세였고, 사천과 귀주에 거주하는 묘족들의 왕이나 다름없었다.
“감동이 수고했다. 명군이 20만이나 동원됐다며?”
“사실이긴 합니다만, 솔직히 자그마한 성에 20만이나 투입한 게 말이나 됩니까? 도착해보니 명군이 애들 놀이처럼 교대로 우르르 성벽으로 몰려갔다가 잠시 함성만 지르고는 다시 우르르 물러나는 식으로 놀고 있었습니다.”
“명군은 보바이의 난 때나 평양성 전투에서도 보통 그렇게 싸웠지.”
좋게 말해서 차륜전이었다. 공격부대의 체력을 감안한 교체투입이라지만 옆에서 구경하고 있자면 좀 어이가 없어.
“전쟁을 끝내려는 의욕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참으려 해도 명군 장수들이 하는 짓이 하도 짜증이 나서 대포를 쏴서 한쪽 성벽을 무너뜨려버렸습니다. 명나라 장수들이 몰려와서 어째서 적의 성벽을 무너뜨렸느냐고 항의하더군요.”
“항의하다니, 무슨 소리야?”
해룡돈은 당나라와 송나라 때 파주의 주청 소재지였던 쭌이 북쪽 도로변의 산등성이를 이은 토성으로, 성벽 길이가 5km쯤 되고 성 바깥에도 곳곳에 보루를 쌓아 방어력을 보충하는 형식의 성이었다. 명나라 군대가 9로를 통해 집결한 다음 공격하는 중에 2연대가 뒤늦게 도착했었다.
“적을 성 안에 몰아넣고 포위한 채로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적의 사기가 떨어질 텐데, 그 전에 성벽을 무너뜨렸으니 위기의식을 느낀 적이 성 바깥으로 몰려나올 것이란 이야깁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싸우기 싫어하는 명나라 장수들 입장에서는 말이야.”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성벽 길이가 5km나 된다면 너무 길어서 웬만한 병력으로는 성벽을 제대로 지키기 어렵다. 그리고 토성이라면 높지도 않고 경사가 가파르지 않아서 사다리만 걸치고도 성벽에 쉽게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명군은 함락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고 반란군이 항복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환관인 감관이 제가 군략을 그르쳤다고 참수하느니 어쩌느니 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흘만 시간을 달라고 해서 다음 날 입성해서 점령해버렸습니다. 반란군이 항복하고 나니 뭐 얻을 게 있나 하고 명군이 우르르 몰려오더군요. 2연대는 포로도 잡지 않고 바로 빠져 나왔습니다.”
“남의 나라 장수를 왜 멋대로 참수하느니 마느니 하는 거야? 명군 지휘체계에 포함되지도 않았는데.”
이민호가 참가했다면 명목상 명군을 아우르는 전체 지휘권을 행사하겠지만 보통은 명군의 체면을 생각해서 지휘권을 독립시켜줬다. 이번에는 감동이 지휘관이라 독자적인 지휘체계를 형성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전공을 명군 장수들이 나눠가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돌아왔습니다.”
“잘했다. 병사들 푹 쉬게 하고 전공에 대한 포상을 해줘라. 은 3만 냥을 보내줄 테니 열 냥씩 기본적으로 주고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차등 지급해.”
명나라 군대는 명군 나름대로의 전략이 있었다. 이민호도 충분히 이해했다. 그러나 어떤 이유가 있든 이런 식으로 반란 진압을 몇 달씩 길게 끈다면 조정에 재정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고맙습니다, 도련님. 그런데 명나라가 큰 나라라지만 이런 식으로 낭비가 심하면 국가가 유지될 수 있겠습니까? 제 생각 같아서는 도저히 몇 년 못 버틸 것 같습니다.”
“내 계산으로는 명나라는 벌써 몇 년 전에 망했어야 했어. 그래도 대국이니까 어떻게든 버티는 모양이야.”
대신에 백성들의 없는 재산을 쥐어짜서 억지로 세금을 내게 해서 국가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업은 물론 농업 생산력마저 떨어진 지금은 도저히 정상적인 경제의 흐름이 아니었다.
고구마가 원래 역사보다 훨씬 빨리 황하 유역으로 퍼져 나갔다. 기존 농작물 생산량으로는 명나라 백성들의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였다.
전쟁이 없더라도 과도하게 들어가는 군비와 백성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세금으로 인해 명나라 경제가 마비되다시피 했지만 황궁 깊숙이 보물이 잔뜩 숨어 있었다. 만약 제대로 된 황제가 즉위한다면 명나라의 수명을 몇 십 년 더 연장할 수 있겠지만, 만력제나 그의 후계자들 면면을 제대로 안다면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차라리 일찍 무너지는 편이 명나라 백성들에게 복이겠습니다.”
“감동이 네 말에 충분히 공감하겠는데, 다른 데서는 절대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라. 고산국의 명목상 종주국이 대명 제국 아니냐?”
“제가 뭐 어린앱니까?”
“풋!”
“웃지 마세요! 생각해보면 도련님이 황제를 하시는 편이 훨씬 낫겠습니다.”
“오! 감동이 아부가 많이 늘었네? 이렇게 대역죄인이 되는구나.”
“쳇! 사실이 그렇잖아요. 어? 상방검 뽑지 마세요, 도련님!”
만력 삼정의 하나라는 양응룡의 반란이 진압됐다. 보바이의 난과 임진왜란에 이어 명군이 대규모 원정을 보낸 세 곳 모두 이민호가 보낸 고산국 군대가 끝장냈다.
명군은 엄청난 군비를 쓰면서도 제대로 싸움도 못했다. 고산국 군대와 비교하면서 명나라에서 군제 개혁에 대한 요구가 커졌으나 황제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다만 고산국 보병총보다 훨씬 화려하고 제작비가 세 배나 드는 화승총이 개발됐다. 물론 성능은 보병총을 따라가지 못했다.
10월 5일에 함대와 수송선단을 이끌고 이민호가 직접 북미 서해안으로 향했다. 배수량이 두 배로 늘어난 커다란 배는 여전히 목선이었다. 그러나 용골과 늑골은 철재라서 수압과 자체 무게를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철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많이 사라져서 조만간 배수량이 더 확장된 철선을 만들 예정이었다.
순양함이라 이름 붙인 5천 톤짜리 군함은 예전에 국왕좌승함으로 쓰던 전선보다 두 배 이상 크기였다. 수송선도 대형화돼서 10여 척만으로도 필요한 장비와 자재, 원료와 물자를 가득 실을 수 있었다.
“배가 엄청나게 커요.”
“파도는 그 이상으로 높다는 게 문제야.”
거대한 파도를 타고 끝없이 올라가다가 까마득하게 내려앉는 동안 이민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민영은 어느새 적응해서 잘 돌아다녔지만 이민호는 아직도 골치가 지끈지끈 아팠다. 심각한 멀미 증세였다.
시간이 흘러 북태평양을 지나면서 노란 국물을 하루 종일 토해 내고, 이틀 정도 드러눕고 나서야 대양 항해에 적응됐다. 전단장은 함대가 흩어지지 않도록 하는 일에 신경을 가장 많이 썼고, 매일 아침은 밤새 흩어졌던 함대를 다시 모으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천신만고 끝에 10월 중순에 북미 서해안 남포에 도착했다. 태평양 탐사대는 전선보다 더 작은 배로도 일 년에 몇 번씩 항해에 나섰으니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남포는 현대 미국의 시애틀과 캐나다의 밴쿠버, 그리고 그 둘로 갈라지기 직전의 빅토리아를 모두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이미 잎을 떨어뜨린 침엽수 삼림이 끝없이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졌다. 그 깊은 숲에서 불곰이 아니라 드래곤이 나오더라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파도가 잔잔한 남포 만에서 이틀 동안 몸을 추스르고 낙오된 배들을 기다렸다. 한 척은 풍랑에 가라앉지 않았나 싶었는데 다행히 만신창이가 된 채 마지막으로 남포에 들어왔다. 그 수송선의 기관 수리를 위해 하루를 더 보내야 했다.
그 사이 이민호는 낚시를 하고 일부는 정찰 겸 사냥으로 시간을 보냈다. 특전대대 요원들이 커다란 뿔이 달린 사슴 몇 마리를 잡아왔는데 고기 외에 녹용을 이민호에게 바쳤다. 이민호는 사슴뿔을 당연히 판매용 약재로 생각했으나 민영이 녹용을 다려주어 눈물을 머금고 마셨다.
휴식 마지막 날 북미 원주민들이 카누에 모피를 잔뜩 싣고 와서 교역을 원했다. 이쪽이 숫자가 많다 보니 원주민들이 위험한 시도는 아예 하지 못했다. 깃털로 장식한 모피 옷을 입은 추장 두 명이 나서서 대화를 시도했다.
“대화가 통하지 않으니 좀 답답하네. 작은 가죽은 비버 같은데?”
북미 북동부는 물론 북서부 삼림지대에도 비버가 많이 살았다. 18세기에 영국인들이 갖가지 모자를 만들 때 주요 재료로 사용한 모피 또는 가죽이었다. 그러나 북미 원주민들이 쉽게 잡을 수 있는 동물은 아니었다.
원주민들에게 비버 사냥용으로 화승총을 줄까말까 고민하던 이민호는 주지 않기로 결정했다. 모피에 욕심을 내다가 자칫 원주민들의 세력 균형이 무너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숲에서는 라이플과 화승총이라는 무기 성능의 차이가 승패에 큰 영향을 못 미쳤다. 그래서 언제든 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 북미 원주민에게 화승총을 주는 바보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유럽 모피상들을 막아내려면 결국 화승총을 원주민들에게 내줄 수밖에 없었다.
“필요한 게 손칼, 쇠도끼, 쇠로 만든 화살촉 되도록 많이, 바늘과 실, 천 등등. 많기도 하다. 모피 몇 장으로 이것들을 다 달라고? 욕심이 너무 많아.”
원주민들과 처음 교역하던 탐사대는 우호 증진을 위해 모피를 비싸게 사줬을지 몰라도, 원주민들과 장기적인 교역을 원하는 이민호는 정상적인 가격에 거래를 원했다. 원주민들이 화를 내면서 한때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했으나 결국 이민호가 제시한 교환 비율을 받아들였다. 다른 원주민들에게 비싸게 넘길 테니 이 원주민들 입장에서도 결코 손해가 아니었다.
새의주, 현대 앵커리지에서 활동하던 태평양 탐사대가 남포로 들어왔다. 탐사대는 가죽과 모피를 넘기고 식량과 연료, 철제 도구를 받아갔다. 늦가을이라 북미 원주민들이 모피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교역하는 중이라 했다. 태평양 탐사대는 어느덧 선박 건조비 등을 다 뽑고 이제는 흑자를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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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