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444화 (393/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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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북미 개척

1597년 여름에 역법을 태양태음력에서 그레고리우스력으로 바꿨다. 보통 새해 첫 날을 기준으로 새 역법을 도입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본격적으로 북미에 진출해야 하므로 파나마 운하 개통 전인 7월 1일에 바꾸기로 했다. 새 달력을 무료로 배포하면서 고산국에 정말 다양한 민족이 관련됐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윤달을 자주 넣어야 하는 음력보다는 양력이 훨씬 편리했다. 그러나 명나라나 조선과 거래해야 하는 상인들은 꽤나 큰 혼란에 빠졌다. 어업과 항해에서는 그 전에도 두 가지 역법을 모두 사용하기에 큰 문제는 없었고, 예전부터 24절기에 맞춰 농사를 짓던 농민들은 역법 개정을 환영했다. 그러나 설날과 제사는 지금까지 하던 대로 음력으로 지냈다.

새 역법 시행을 강제하는 법을 만들지 않고 백성들이 알아서 선택하도록 했다. 양력과 음력이라는 표시만 확실히 하면 상관없었다.

기본 도량형으로 미터법을 채택했다. 왕립대학교에 재직하는 서양인 천문학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지구 반지름의 6400분의 1을 1킬로미터로 정했다. 지구 중심에서 적도까지 6378km, 북극까지 정확히 6357km였지만 아직 북극을 확인한 것도 아니라서 대충 넘어갔다. 실제 역사에서 파리 기준으로 적도에서 북극까지의 거리의 천만분의 1을 1미터로 삼았다. 즉 적도에서 북극까지의 거리를 10000km로 잡은 것이지만 역시나 대충 넘어갔다.

1파운드가 소수점 다섯 자리인 453.59237그램으로 정해진 것은 이민호가 개입한 흔적이었다. 기온 4도에서 가로 세로 높이 10cm의 그릇에 물을 담아 1리터라 하고 그 무게를 1kg으로 삼았다.

실생활이나 산업현장에서 척관법이나 야드파운드법을 사용하는 것은 내버려두고 단지 기준만 미터법으로 정했다. 같은 단위라도 포목이나 건축에서 차이가 있었는데 미터법을 기준으로 삼아 분야마다 확실한 차이가 있음을 밝혔다.

“그런데 왜 우리가 신체검사를 받아야 하나요?”

“인체의 변화는 질병이 발생했다는 신호가 될 수 있으니까 중요해.”

“주인님은 가장 중요한 가슴둘레를 재시고요?”

“그럼. 왕자, 공주들의 건강과도 직결되니까.”

후궁들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줄을 서고 이민호가 줄자를 들고 서 있었다. 혜영이 항의하고 혜진이 부끄러워해서 시간이 걸렸으나 나머지 100여 명은 큰 문제없이 잴 수 있었다. 후궁들의 키와 몸무게는 여진족 호위들이 쟀다.

줄 세워놓고 보니 후궁들이 참 많았다. 왕립여학교에 다니는 어린애들 빼고도 성년이 넘었는데도 아직 안지 못한 후궁들이 절반 이상이었다. 대표적으로 혜진이 있었고, 일본에서 보낸 히메 대여섯 명, 그리고 백인 궁녀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여의사와 간호사들이 후궁들의 건강 검진을 맡았다. 다들 워낙 건강해서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브루나이 공주들이 비만과 고혈압의 위험이 살짝 있었으나 아직은 위험한 단계가 아니었다. 이민호도 브루나이 공주들은 적당히 통통한 편이 보기에도 좋아서 내버려뒀다.

“궁성에 거주하는 성인 여성들의 평균 신장은 163cm, 몸무게는, 음. 비밀. 가슴둘레는, 역시 비밀이다. 규칙적인 식사와 꾸준한 운동을 통해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도록.”

어렸을 때부터 잘 먹여서 그런지 후궁들이 조선이나 다른 나라 평균 여성들보다 월등히 크고 무거웠다. 브루나이 공주들은 키가 작은 주제에 몸무게가 참 많이 나가서 평균 체중 증가에 기여했다. 여진 호위들은 꾸준한 운동을 하고 백인 궁녀들은 후원의 정원사를 겸해서 특히 균형 잡힌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다.

백금으로 만든 1미터원기는 궁성 남문 밖에 세워놓고 시장과 무역항에 플라스틱으로 표준 원기를 전시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자와 줄자를 보급하고 저울도 미터법과 다른 도량형에 따라 이중으로 무게 단위를 표시했다. 자에 표시된 눈금은 하나는 센티미터, 다른 하나는 인치 또는 치로 해서 편리한 대로 사용하도록 했다.

쌀 한 섬은 180리터로서 무게를 재니 144kg 정도가 나왔다. 3으로 나눠 한 가마에 48kg이었다. 사람들이 대충 무게를 재는 것 같았는데 의외로 정확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무게 단위는 보통 600그램이 한 근이었으나 종류마다 중량이 달랐는데 그램으로 추가 표시해서 오해 여지를 줄였다. 즉 같은 한 근이라도 고기와 약재는 600그램, 과일과 채소는 375그램, 이런 식이었다. 나중에는 구별하기 귀찮아서 미터법을 쓰게 될 것으로 기대됐다.

7월 5일 복건 순무 서조괴(徐兆魁)가 북경에서 출발한 환관과 함께 황제의 칙서를 받들고 궁성을 방문했다. 칙서 내용은 양응룡이 사천에서 반란을 일으켜 귀주와 운남까지 진동하고 있으니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이었다.

사실 말이 명령이지 권고나 다름없었다. 병력을 파견해 반란 진압에 도움을 줄 경우 고산국에 줄 특혜가 칙서에 나열됐다. 그러나 예전처럼 은이나 교역 상품에 대한 관세 인하가 아니라 지명과 면적이 잔뜩 기재돼 있었다.

“황상폐하께서는 은이나 재물을 하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복건성의 토지를 넘겨주시겠다는 것입니까? 전비 대신으로요?”

“토지를 넘겨드리는 것은 아니고, 주애공께서 복건성에서 차를 재배하시므로 그 차밭을 넓혀도 좋다는 뜻입니다.”

복건 순무 서조괴는 지금까지 이민호와 몇 번 만난 사이였다. 고산국이나 이민호에게 무척 협조적이면서도 대국의 체면을 세우려고 최대한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현재 차밭은 아니고 개간해서 차밭은 조성해서 경작하라는 어지로군요. 재배하기에 적당한 위치인지, 땅이 비옥한지 그런 것은 직접 사람을 보내서 확인해야겠군요.”

“민망하지만 조정에 예산이 바닥난 지 오래입니다. 혜량해주십시오.”

“전비로 충분하지 않겠지만 황명을 받들어야겠지요.”

사실 전비로 쓰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유럽에서 차를 마시는 문화가 확산돼 그렇지 않아도 복건성에서 땅을 좀 구할 수 있을까 알아보던 참이었다. 아열대의 고산지대, 그러니까 일조량은 많되 기온은 적당히 낮은 지역이 차 재배에 적지였다.

현재 유럽에서 향신료가 가장 비싸지만 차와 설탕도 말도 못하게 비쌌다. 이제는 망해버린 예전의 일본 다이묘들처럼 소박함을 과시하기 위해 큰돈을 들이는 것이 아니라, 유럽 귀족들은 대놓고 사치를 과시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쏟아 부었다.

“칙서에는 1개 보병연대와, 반란군 근거지에 산악지형이 많으니 지휘관은 과감한 감불 장군보다는 신중한 감동 장군이 낫겠다고 하셨습니다. 하하! 황상께서 지휘관까지 지명하셨군요. 과연 폐하께서는 무리에도 밝으십니다.”

“고산국에 사정이 있다면 다른 장군을 임명하셔도 폐하께서는 크게 개의치 않으실 것입니다.”

“아닙니다. 황상께서 그렇게 판단하셨다면 그게 맞겠지요.”

명나라가 정벌군 지휘관 임명에 개입한다면 일종의 내정간섭이라 서조괴가 땀을 뻘뻘 흘렸다. 그러나 이민호는 쿨하게 넘어가기로 했다.

서조괴에게 몇 가지 물어봤다. 반란에 가담한 묘족이 5만에 달한다고 했다. 그리고 남방에서 사천 방면으로 진군할 명군은 광서총병 동원진(童元鎭)이 지휘한다고 했다. 감동은 동원진 총병의 지휘를 받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지휘권을 갖게 됐다.

“언제 출발하실 수 있겠습니까?”

“장기간 원정이라 준비해야 할 것이 많으니 닷새 후에 보내겠소.”

“흐익! 그렇게 빨리 출발합니까?”

서조괴가 놀라든 말든 7월 10일에 반란 진압 병력을 사천에 보냈다. 1개 보병연대를 감동이 이끌고 갔으니 아무리 묘족이 험한 산에 웅거하고 있다 해도 전쟁은 금방 끝날 것 같았다. 사실 사천까지 가는 시간이 더 많이 걸렸다.

북미 개척을 앞둔 시기에 사천으로 파병을 보낸 것은 황제가 남사군도 영유권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해줬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여러 가지 특혜 중의 하나로서 베푼 것이었지만 이민호는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안 되겠다 싶어서 미끼를 덥석 물었다. 양응룡의 반란에 대한 광서와 해남도 묘족들의 반응이 여전히 신통찮다는 것도 파병을 서두른 이유였다.

항상 바쁜 와중에도 이민호는 출산 직후이거나 임신한 후궁들을 위해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썼다. 매일 방문하고 하루에 한 번씩 건강검진은 기본이고 심리적 안정을 위한 분위기 조성에 애썼다. 유럽과 조선, 명나라에서 수입한 그림을 벽에 걸고 음악회도 개최했다. 일종의 태교가 되었다.

주상아 공주는 건강한 공주를 낳았고 비올레타는 임신 중이라서 이민호는 매일 같이 두 사람의 방에 들렀다. 처음에는 기뻐하다가 나중에는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민호는 줄기차게 드나들었다. 주상아 공주의 품에 안긴 자그마한 아기가 조그만 입을 벌려 하품을 하고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공주가 엄마를 닮아 커서 대단한 미인이 되겠소.”

“죄송해요. 아빠를 닮은 씩씩한 왕자 아기씨를 낳았으면 더 좋았겠어요.”

“다음에 또 낳으면 되지 않소? 고산국의 국시가 아기를 많이 낳자는 것이니 공주도 앞으로 대여섯은 더 낳아야지요.”

겨우 20대 중반이면서 나이 많다고 서러워하는 주상아를 아기 공주와 함께 안아주었다. 주상아 공주는 비슷한 나이의 여성들에 비해 동안인 편이었다. 이민호에게 시집오기 전부터 건강체였고 산후조리에도 신경을 써서 빨리 늙을 걱정은 없을 것 같았다.

고산국은 건국 초기부터 인구가 적어 어려움이 많았던 탓에 국시(國是)도 아예 ‘아기를 많이 낳자’로 정했다. 아기와 어린이,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보호는 국가적으로 확실히 해줬다. 유아용 백신 접종뿐만 아니라 각종 수당을 지급했고, 심지어 왕이 아기들이나 아이들 장난감을 만들어 배급하기도 했다.

홀아비 예국 참판이 국시를 따르라는 주변 관료들의 압박에 못 이겨 새장가를 가더니 늦게 자식을 봤다. 최 선생이 꽤나 충격을 받았는지 집에서 나와 독립해서 살았다.

이민호의 부친 이응화도 늘그막에 손주들보다 어린 딸을 얻었다. 이민호에게 여동생이 생기면서 어쩔 수 없이 부친에게 상왕 직첩을 올리고 여동생에게 공주 칭호를 주었다.

민다나오 섬의 마구인다나오 술탄국에서 세자와 사신들을 고산국으로 보냈다. 이미 임시 관청으로 혼례청을 구성한 고산국에서는 회교도 세자와 명목상 고산국 공주인 조선 귀족 여성의 혼인식을 준비했다.

신랑의 사주단자를 보내는 납채는 이미 끝났고 납폐는 일가친척은 물론 집에서 일하는 노비들까지 비단 한 필씩 받을 정도로 충분히 해줬다. 주례를 맡은 예국 참의가 민다나오 세자와 함께 조선 한성으로 향했다.

괜히 남의 결혼식 중신 서면서 결혼식에만 은 10만 냥 정도 쓰게 생겼다. 신부 지참금과 선물까지 합하면 다 합해서 30만 냥이 들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고산국 후궁으로 들임으로써 예상되는 불행에 비해 훨씬 싸게 여겨졌다.

민다나오의 마구인다나오 술탄국은 완전한 해적 왕국인 술루왕국 옆에 있으면서 대체로 협력관계였다. 마구인다나오 술탄국 자체로도 함선을 보유하고 비사야나 루손 섬에 병력을 파견할 능력은 있으나, 진짜 해적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다.

비슷한 예를 들자면 일본과 왜구 사이의 관계 정도였다. 그러니까 해적 하나 하나를 상대하려면 엄청 피곤해지지만 마구인다나오 술탄국에 압력을 넣으면 쉽게 해적을 사라지게 만들 수 있었다. 서소문의 꼬마 아가씨를 민다나오에 보내는 것은 해적을 제어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

“이제 보니까 주인님은 정식으로는 한 번도 결혼을 안 했어요.”

“그런가? 큰 상관없잖아?”

이민호는 혜영을 껴안고 지난 일들을 훑어봤다. 여자가 워낙 많아서 예외가 있는 것 같기도 한데 기억나지 않았다. 주상아 공주는 물론 비올레타도 정식 혼례를 치르지 않았다.

“혹시 늦게라도 결혼식을 하고 싶어?”

“아뇨. 아랫사람들 보기에 민망할 것 같아요.”

“하고 싶긴 한가봐?”

“됐어요!”

십 년 넘게 같이 살아오다 보니 그런 문제는 별로 신경 써주지 못했다. 이민호는 혜영에게 하얀 웨딩드레스라도 입혀주고 싶었다.

“의외로 여진족들이 열성적으로 배우고 있어요. 말이 비슷해서 그런지 조선말과 한글은 금방 배웠고 농업과 목축은 기본이 있으니 쉽게 배우는 편이에요.”

“응. 가족 단위로 가서 잘 됐어.”

동해국 여진족 일부와 일본 정벌에 동원됐던 여진 기병들이 가족을 꾸린 후 이번에 북미행을 택했다. 추위에 강한 여진족도 기후가 점점 추워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탓에 예상보다 숫자가 늘어났다. 현재 여진족들은 북미로 출발하기 전에 고산국에 와서 교육과 군사훈련을 받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직접 가야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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