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40 47. 1597년 =========================================================================
함대는 향료제도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섬이며 이 지역에서 제국을 자처하는 테르나테 섬과, 바로 그 남쪽 티도레 섬을 들렀다. 이번에도 두 섬에서 선물을 바쳐서 마치 수금하러 들른 것 같았다. 테르나테 제국이 고산국에 매년 정기적으로 조공한다는 소문이 주변 지역에 확 퍼졌다.
어쨌든 향료제도 주변의 바다는 자연스럽게 고산국 손아귀로 굴러들어왔다. 향료제도에서 생산한 향신료를 교역상품 목록에서 제외한 이후 고산국이 향료제도 해역을 장악함으로써 딱히 경제적 이익을 얻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나라들이 고산국을 이 지역의 패자로 인정하면서 고산국과 유구국 상인들이 그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상인들은 안전과 안정적인 이익을 얻었고, 섬 주민들은 해적에게 약탈당하거나 노예로 전락할 걱정을 덜었다.
함대는 며칠 동안 서쪽으로 항해하며 자바 섬의 여러 무역 소국들을 방문했다. 수라바야와 마두라, 파당과 투반, 반제르마신, 칼리만탄, 수카다나 등이 도시국가 또는 작은 지역을 장악하고 무역에 의존하는 중소 국가들이었다. 자바 섬 중부 지방을 기반으로 한 마타람은 꾸준히 성장 중이었다.
함대는 자바 섬을 지나 수마트라 섬에 도착해 해안에 거주하는 말레이인들과 접촉했다. 이들은 말뚝을 세우고 위에 이엉으로 지붕을 엮은 간단한 집에 살았다. 논농사를 잘 짓고 계피를 재배해 외부 상인들에게 판매했다.
이민호는 호위대를 이끌고 잠시 내륙으로 들어가 미낭카바우 족, 말레이어로 파당 족의 생활을 살폈다. 이들은 말레이 족과 비슷한 종족으로서 커다란 사각형 구조물 안에서 살았다. 이슬람교를 믿지만 전형적인 모계사회로서, 남자들은 집이 없어 어머니 집에서 지내면서 가끔 아내의 집에 가서 지내는 식이었다.
“브루나이, 자바, 수마트라가 다 말이 통해요. 신기하지 않나요?”
“섬사람들이 비슷한 조상을 뒀겠지요.”
함대가 정박한 해안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라 공주가 말을 걸었다. 이민호가 뭔가 목적이 있어서 수마트라 원주민 마을을 방문한 것으로 생각한 것 같았다. 다 컸다고 주장하는 아라 공주는 이럴 때만 아직 어리다고 이민호와 같은 말을 탔다.
“이상하게 이 지역 사람들이 고산국 고산지대에 사는 원주민들하고 비슷하게 생긴 것 같아요. 말은 전혀 안 통하지만요.”
“지금은 서로 안 통하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말에도 공통점이 있을 것이오.”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은 말레이폴리네시아어파 말고도 다양한 어파가 있어서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의 광대한 지역에 널리 분포했다. 말레이어와 마오리어, 마다가스카르어는 전혀 다른 말 같아서 같은 어족이라고 하면 믿기 힘들었다.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비교해도 극단적으로 달라보였다. 작은 체구의 말레이인과 거대한 체격을 자랑하는 마오리, 통가, 피지 사람들하고 비교하기 어려웠다.
또한 그런 사람들이 고산국의 고산족들이 사용하는 언어나 혈통과 비슷하다고 하면 바보 소리 듣기 쉬웠다. 그러나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원향(原鄕)은 고산국 영역이 맞았다.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마오리어와 말레이어의 차이가 고산족 원주민 부족들의 언어 차이보다 더 적었다. 백인종과 황인종의 유전자 차이가, 흑인 부족들 사이의 유전자 차이보다 더 적은 것으로 아프리카가 인류의 고향으로 확인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물론 브루나이 공주와 마오리 와카를 추던 전사 사이에 대화는 안 통하지만, 러시아어와 이탈리아어가 안 통한다고 해서 같은 인도유럽어족이 아니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혹시 폐하께서 고산족 여러 부족들의 언어를 보존하려는 이유가 바로 그것인가요?”
“그것이라니요?”
고산족 원주민들 마을에 학교를 세울 때 현지 주민들을 교사로 뽑고 수업도 가급적 원주민 언어로 진행하려 했다. 고산족 원주민들 입장에서는 조선말이 외국어니까 당연한 조치였다. 국가통합이라는 면에서 대단히 부정적인 정책이었고 비효율의 극치라며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이민호는 고유어를 보호, 유지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은 고산족 원주민들이 조선말을 적당한 수준에서 구사하고 있었다. 젊은 원주민이 고산국 군에 입대해도 의사소통에 거의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비슷한 말을 사용하는 모든 지역의 종주권을 쥐려는 계획을 폐하께서 세우신 것 아니시냐고요. 마다가스카르에서 새섬까지 고산국이라니, 대단해요.”
“전혀 아니요. 조상이 같건 언어가 비슷하건 이미 옛날 일일 뿐이오. 그런 주장은 마치 한자를 사용하는 모든 국가는 명나라의 속국이라는 소리와 같소.”
현대 중국에서 한자문화권을 두고 그런 주장이 있었다. 중국이 강성해졌을 때 언젠가 수복해야 할 조상의 영토에서 한국과 베트남이 빠지지 않았다. 동양의 전통적인 조공체계를 종주국과 속국이라며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것도 한국인 혐한 친일파나 중화주의자나 다를 바가 없었다.
“언어가 달라도 고산국이 사실상 종주국이 맞아요. 만약 이 지역들을 군사력으로 정복하려 했다면 원주민들의 저항을 받아 불가능했을 거여요. 원나라도, 명나라도 해내지 못한 일이거든요. 하지만 전하께서는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이 지역의 패권을 쥐셨어요.”
“글쎄요. 여러 나라와 협력하는 것이지 지배하거나 패권을 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저 많은 나라들을 직접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피곤하겠소?”
“그런 일은 신하들에게 맡기면 되죠. 전하께서는 오연하게 군림하시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별로 즐거운 일은 아닐 것 같소.”
아라 공주가 자꾸 이민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둘 다 방탄복을 입은 상태에서는 전혀 감흥이 없었다.
다시 배를 타고 출항했다. 현재 수마트라 동쪽은 조호르 술탄국이, 서쪽은 아체 술탄국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마을에 병력을 파견해서 직접 지배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느슨하게 통치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민호는 함대를 이끌고 말래카 해협 남동쪽 입구를 장악한 조호르 술탄국의 수도, 조호르를 방문했다. 현대 싱가포르 섬 북쪽, 수로 안쪽에 위치한 도시였다. 사실 포르투갈이 점령한 말래카 항에 가는 길에 말래카 해협에서 잠시 정박한 것뿐이었다.
먼저 조호르 술탄국에서 황급히 사신을 보내왔다. 뒤이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체 사신이 탄 배가 현재 교전 중인 적국이라 할 수 있는 조호르 항구에 다짜고짜 진입했다. 그러나 고산국 함대에 가까워진 이상 조호르의 군선들이 아체 사신선을 막지 못했다.
“현재 포르투갈이 장악하고 있는 믈라카, 또는 말래카는 저희 조호르 술탄국의 조상 나라인 말래카의 수도입니다. 지난 100년 동안 불구대천의 원수로 싸워온 포르투갈 세력을 이 지역에서 몰아내주십시오. 그리고 아체 술탄국이 저희 조호르의 영토를 자꾸 침공합니다. 이들을 꾸짖어서 고향에서 조용히 살도록 해주십시오.”
“고에게 그런 힘이 있을 리가 없지 않소?”
조호르 술탄국 사신은 요구하는 것도 많았다. 그렇다고 조호르가 고산국의 속국으로 신속(臣屬)한 것도 아니었다. 상인 국가의 사신들은 일단 요구부터 많이 하고 보는 것 같았다.
“포르투갈은 고산국의 속국이 아닙니까?”
“유럽에 있는 나라가 속국일 리가 없지요. 다만 포르투갈 상인들이 거주하는 마카오와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오. 실망했소?”
“아! 아닙니다. 얼굴 표정에서 드러났다면 제 실책입니다. 고산국의 아라 왕비님과 브루나이 공주님들께서 여러 모로 조호르를 돌봐주고 계시는데 제가 과한 청을 한 것 같습니다.”
국왕좌승함의 집무실에서 임시로 책상을 치우고 궁궐의 대전처럼 옥좌를 놓고 이민호가 앉아 있었다. 아라 공주는 마치 젊은 애첩처럼 피부가 많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이민호의 무릎에 앉아 있었다.
“아라 왕비라. 사신께서는 아라 왕비를 직접 본 적은 없지요?”
“그렇습니다, 폐하. 하오나 아라 왕비님은 자애로운 어머니 같은 분이십니다. 조호르의 술탄과 백성들은 아라 왕비님께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아라 공주가 고개를 돌리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아라 왕비는 조호르와 아체, 포르투갈이 평화롭게 지내길 바란다고 몇 번이나 강조하지 않았소?”
“하오나 아체와 포르투갈이 자꾸 저희 영토를 침범합니다. 싸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체와 포르투갈은 조호르가 먼저 침공해서 방어전만 했다고 하는데 말이오.”
“거짓말입니다! 저희는 단지 옛 영토를 수복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만약 몽골이 옛 땅을 전부 수복하겠다고 하면 코미디였다. 애초에 정복했던 남의 영토를 다시 되찾겠다는 것은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하겠다는 조호르 같은 나라의 국토 회복 노력을 제지할 적당한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
이번에는 아체 술탄국의 사신이 이민호에게 고했다. 적지를 무턱대고 드나드는 용감한 사신이었다.
“폐하! 아체 다루살람 왕국의 술탄께서 폐하를 영접하고자 오고 있습니다. 저희 아체는 반역자 조호르와 외부 침략자 포르투갈을 몰아내주길 폐하께 요청합니다.”
“아체는 오스만제국의 속국 아니오? 어째서 고에게 청하는 것이오?”
“비록 투르크 용병들을 보내서 도와줬다고는 하지만 아체가 오스만에게 정식으로 신속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종주국으로서 충분한 자격을 가진 고산국의 국왕폐하를 접하게 됐으니 고산국에 신속하겠습니다.”
현재 말래카 해협이라는 좁은 수로 하나를 두고 아체와 조호르, 포르투갈, 이렇게 세 나라가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벌써 거의 100년이 다 되어가도록 참 열심히들 싸웠다.
포르투갈은 해협 중간의 말래카 항을 정복하기 전에, 아시아의 무역이 항구 하나에 집중되어 있으니 이곳만 점령하면 아시아의 무역을 포르투갈이 독점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다. 그러나 1511년 인도 고아에서 출항한 배 17척 또는 18척과 병력 1200명을 투입해 말래카를 점령하고 나서, 아시아 무역망이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을 지켜봤을 뿐이었다. 또한 그 항구도시를 점령한 직후 힌두교도와 중국인 노동자들은 살려주고 이슬람교도들을 모조리 학살하거나 노예로 팔아버렸으니 주변의 이슬람 주민들로부터 협력을 받는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포르투갈 점령자들은 그 후에 입항하는 이슬람 상인들에게 과다한 세금을 부과해서 항구에서 쫓아내는 바보짓을 반복했다. 결국 이슬람 세력에 의해 말래카를 대체할 만한 무역항이 주변 여러 곳에 세워지고, 당연히 포르투갈이 이 지역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게 된 요인이 되었다.
상업왕국인 조호르와 아체는 말래카해협의 남동쪽 출구와 북서쪽 출구에 항구를 세운 다음 상품 관세를 대폭 낮추고 항구 입항세를 줄이는 식으로 상인들을 유인하면서 세를 불려나갔다. 그래서 포르투갈은 아체와 조호르의 반복된 공격을 막아내느라 막대한 군비를 지출하면서도 제대로 된 수익을 올리지 못했다.
어찌어찌 하다 보니 고산국 국왕좌승함에 조호르 술탄과 아체 술탄이 한 자리에 모였다. 포르투갈령 말래카의 산티아고 요새 수비군 사령관도 이민호를 만나러 왔다.
이 지역에서 거의 100년 동안 싸운 세 나라의 지배자들이 모이자 좌승함 집무실이 전쟁 직전 분위기로 숨 가쁘게 돌아갔다. 그러나 두 나라가 협력해서 나머지 하나를 협공하거나, 협상 테이블에 앉은 적도 많아서 불온한 일이 생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조용히 하시오. 이야기를 들어보시오.”
“예, 폐하!”
술탄 두 명과 사령관은 저마다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으나 꾹 참고 대답했다. 이들은 서로 쏴죽이거나 칼을 뽑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민호의 체면을 충분히 세워준 셈이었다.
“세 나라는 서로 싸울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계속 싸우다간 다른 나라에 잡아먹히고 맙니다.”
“예.”
세 나라가 계속 싸움으로써 어부지리를 취할 만한 다른 나라의 후보는 버마, 무굴제국, 자바 섬의 마타람, 요즘 급성장 중인 브루나이 등을 거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나라는 고산국이었다. 수송선들을 빼고 전선 12척만으로도 세 나라의 함대 전부를 한 시간 내에 격멸할 수 있는 가공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고산국이 이 해협에 욕심을 낼 이유는 없습니다.”
“휴우~”
“다만 해협에서 고산국과 협력국들의 상선이 통행할 때 안전이 보장되지 못할 경우, 고산국 해군이 군사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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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내용이 이어질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