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439화 (388/1,000)

00439  47. 1597년  =========================================================================

함대는 북쪽으로 계속 항진해 뉴칼레도니아, 누벨칼레도니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지리적으로 멜라네시아로 구별됐다. 흑인들이 사는 섬들이라는 뜻인데, 섬에 사는 주민들의 인종으로 구별하려 시도한 것은 결국 틀렸다고 봐야 했다.

여기서 북동쪽부터 동쪽까지 태평양에 널리 분포한 폴리네시아에는 하와이, 피지, 사모아, 통가 등 숱하게 많은 섬이 있었으나, 일일이 정복하거나 교역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흑진주가 어디서 나는지 아직 알아내지 못해서 나중에 탐사대를 폴리네시아 지역에 보내서 찾기로 했다.

함대는 아직 이름도 붙이지 못한 누벨칼레도니 주변을 측량만 하고 빠르게 지나갔다. 가까운 바누아투나 솔로몬제도, 나머지 멜라네시아 섬들은 김몽돌이나 임현석을 비롯한 탐사대원들이 할 일로 남겨두었다.

이틀 후 함대는 호주 북쪽 끝, 뉴기니 남해안 사이를 지나갔다. 뉴기니 동쪽 지역은 파푸아 식인종들 때문에 그냥 지나쳤고, 이민호는 섬 서쪽에 볼 일이 있었다.

이전에 측량을 마친 안전 해역을 이틀 동안 밤새 항해하고 난 새벽, 파푸아 섬의 서쪽 끝에 도달했다. 그리고 좁은 해협을 지나 탁 트인 바다에 이르자 지난 4년 동안 행방을 몰라 애타게 그리워하던 사람들을 드디어 만날 수 있었다.

“오호! 술루 해적들이 여기 다 모여 있었군.”

고산국 함대를 발견한 수십 척에 달하는 배들이 미칠 듯한 속도로 항구로 도주했다. 함대는 전투준비를 갖추며 천천히 해안 도시로 접근했다. 함대를 향해 접근하는 배는 단 한 척도 없었다.

배 수백 척이 정박 중인 해안 도시에서 아주 난리가 났다. 모든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우왕좌왕하고, 일부는 간단한 등짐만 진 채 산으로 올라갔다. 해적답지 않게 배 타고 바다로 도망갈 생각은 아예 포기했다.

“대단한 항해국가야. 기원전에 지중해 전역을 초토화시킨 해양민족도 전 민족을 하룻밤 사이에 옮기는 능력은 없었을 거야. 그 사이에 도시까지 건설했을 줄이야.”

“전하! 지금 즉시 공격해야 합니다. 술루 해적선에도 작지만 화포가 있습니다.”

“기다리시오, 함장! 해적선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소? 그리고 그런 작은 화포로는 우리 전선에 흠집 내기도 힘드오.”

그때 아라 공주가 이민호를 따라 군복을 입고 함교에 나왔다.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았으나 아라 공주에게 고산국 군복도 잘 어울렸다. 아라 공주는 참 예쁘게 잘 자라고 있었다.

“할마헤라 섬 기준으로 트르나테 반대 방향에 있어서 지금까지 술루 해적이 발견되지 않았었군요. 다른 나라 상선들이 이곳에 올 리가 없어요.”

“맞소. 유구국과 에스파냐 배들이 매년 테르나테와 암본을 몇 번이나 가는데도 가까운 이곳에는 올 이유가 없지요.”

“술루 해적들이 트르나테 쪽으로는 아예 안 가나 봐요. 아니면 트르나테 배로 위장했을지도 몰라요. 같은 회교도 국가니까요.”

술루 해적의 새로운 본거지인 파푸아 섬 북쪽 해안을 2차 태평양 탐사대가 측량했을 때 발견하고 아직 비밀에 붙여 두었다. 탐사대장은 술루 해적의 인구가 많이 줄어들었다고 보고했으나, 해안도시에 집이 가득하고 해적선은 수백 척이었다. 그래도 술루제도 홀로 섬에 있을 때보다는 성세가 많이 위축됐다.

“전하! 해적선 20여 척이 몰려나옵니다. 적대적 의사를 가진 해적선이 확실합니다.”

“공격하시오.”

수송선을 제외한 고산국 함대의 전선 12척 앞에 해적선 22척은 한 입 꺼리도 안 됐다. 첫 번째 일제사격에 21척이 가라앉았고, 표적 분배가 겹치는 바람에 운 좋게 살아남은 해적선이 도망가려고 선수를 돌리기도 전에 수면 상에서 분해되었다.

해전을 많이 치렀던 함교 요원들은 별 표정변화도 없는데, 오랜만에 해전을 구경한 아라 공주는 다시 감동에 휩싸인 모양이었다. 이민호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험! 험! 술루왕국이 이주하고 나서도 여전히 해적질로 먹고 산 모양이오. 새섬의 원주민들이 배에 민감했던 것은 그 동안 저들이 노략질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오.”

“맞아요. 해적질하다가 나라를 버리고 3천 리나 도망쳤으면서도 여전히 해적질을 업으로 삼았나 봐요.”

“열심히 일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저런 위험한 세력은 용납할 수 없소.”

“하오나 전하! 여자와 아이들은 부디 살려주세요.”

“음. 알겠소. 노예로 팔지도 않을 것이오. 그러나 다른 지역으로 모두 이주시키겠소.”

이민호는 술루왕국 백성들을 어디로 옮기면 좋을까 잠시 고민했다. 북미나 호주에서도 풍요로운 땅은 안 되고, 저들을 호주 북부나 서부 황무지로 이전시켜 양이나 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산국에서는 양고기를 거의 안 먹지만, 수마트라와 자바, 브루나이가 이슬람 지역이라 양고기 수요는 얼마든지 있었다.

아라 공주와 대화하는데 왕궁의 성문이 열렸다. 화려한 마차가 한 대 빠져 나오고, 근위병인 듯한 기병들이 그 마차를 에워싸고 달렸다. 마차는 산길을 향해 속도를 올렸다.

“함장! 마차 진행로 전면에 5인치 함포 한 발 발사하시오.”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51포! 사격 임무다.”

함장이 전화로 함수에 위치한 5인치 포탑을 불러 목표를 지시했다. 잠시 후에 좌승함에 큰 진동이 오면서 함교 앞이 잠깐 연기로 뒤덮였다.

- 콰앙~

먼 거리에서 포탄이 터져서 폭음이 메아리처럼 길게 이어졌다. 아마도 술루왕국의 술탄이 탔을 마차가 정지하고, 호위기병들이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충성심도 없고 의리도 없는 놈들!”

호위병들을 욕하다가 이민호가 입을 다물었다. 이민호도 어느새 지배자 입장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게 된 것 같아 씁쓸했다. 남들은 술탄의 호위병을 마음껏 욕하더라도 국왕인 이민호가 그래선 안 된다고 반성했다. 술탄이 평소에 잘못했으니 호위병들이 버리고 도망갔다고 봐야 했다.

“마차가 방향을 돌려 부두로 내려옵니다. 어명을 내려주십시오.”

“기다리시오. 그리고 지금은 어명이 아니라 군령이오.”

“전하께서 내리시는 명령은 언제나 어명이십니다.”

좌승함 함장을 잘못 뽑은 것이 아닌지 이민호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상관의 뜻을 어겨가면서까지 아부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기 때문이다. 아부하는 것도, 멍청한 짓도 명예로운 좌승함 함장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함장이 자기주장이 강한 것은 마오리 족과 탐사대가 대면할 때 사격명령을 즉각 수행하지 않은 것으로 이미 눈치 챘다. 하지만 이건 좀 아닌 것 같았다.

총함장 이순신은 부하 장수들이 자기주장이 강한 것을 좋아했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나 삼도수군통제사 직을 수행할 때 젊은 하급 군관이라도 자기 의견을 분명히 피력할 기회를 주었다. 운주당에서는 아무리 신분이 낮은 사람이라도 와서 고할 수 있게 했다. 난중일기에도 일개 서리, 아전, 수군, 천민들이 한 말과, 그들의 이름까지 기록돼 있었다.

그러나 군인은 명령을 받으면 법에 어긋나지 않는 한 그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 아군의 생명이 다급한 상황에서 상관과 다른 전술적 판단을 하더라도 일단 접어놓고 명령을 수행해야 했다. 이순신도 해전을 진행하는 다급한 상황에서는 수하 장수들에게 명령 복종을 강요했다.

함대가 선착장 바로 앞에 도착한 것과, 술탄이 탔을 화려한 마차가 도착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거대한 5인치 함포가 마차를 겨누고 해병들이 주변 사람들을 향해 보병총을 조준하자, 부두에는 온통 배를 버리고 도망치는 사람들뿐이었다.

마차 문이 열리고 터번을 쓴 사람이 내렸다. 화려한 복장과 시중 드는 사람들로 보아 술탄이 확실한 것 같았다. 술탄은 국왕좌승함을 향해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체포해오시오.”

“제가 직접 체포해오겠습니다.”

함장이 흥분했는지 숨을 거칠게 쉬면서 배에서 내렸다. 함장은 이렇게라도 전공을 세우고 싶은 모양이었다. 다음에 이민호가 바다에 나올 때 좌승함 함장은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라고 이민호는 생각했다.

“고산국 국왕폐하! 기체 후 일향만강하시옵니까?”

“인사는 집어치우고. 요즘도 해적질하고 다니나?”

술탄이 꽁꽁 묶여서 함교로 끌려왔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민호에게 절부터 했다. 웃기게도 술탄은 조선말 통역을 데리고 왔다. 나중에 통역에게 물어보니 유구국에서 3년 동안 조선말을 배웠다고 한다.

“송구하오나 폐하께서 영향력을 미치는 지역에는 얼씬도 안 하고 있사옵니다.”

“남동쪽에 체구 큰 원주민들 마을을 공격한 게 술루 해적 맞지?”

“헉! 아, 아닙니다. 저희들은...... 후우! 이 마당에 폐하를 속일 이유가 있겠습니까? 아마도 저희 술루 백성들이 해적질한 것이 맞을 겁니다. 폐하께서 개척 중이신 호주를 빼고 동쪽과 남쪽의 모든 섬들을 노략질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이곳에서 농사짓는 백성들은 걸핏하면 파푸아 식인종들에게 납치를 당해서 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땅도 넓고 배도 많은데 어째서 해적질을 하는 거야? 무역을 해도 되고 농사를 지어도 충분히 먹고 살 것 같은데. 식인종들이 왕국을 건설한 것도 아닐 텐데, 들어오는 길목에 병력만 조금 세워놓으면 간단히 막을 수 있잖아?”

“물론 병력을 동원하면 식인종의 침입을 막을 수야 있습니다만, 그럼 해적질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해적질은 저희 왕가에서 대대로 내려온 숭고한 가업 같은 일이라 차마 저의 대에서 버리기 어렵습니다.”

“그럼 죽어! 나는 해적을 용납할 수 없다.”

FSM교의 교리에 따르면 해적이 줄어들면서 지구온난화가 심각해진다. 이민호는 해적들을 떼죽음시킴으로써 몇 년 뒤부터 다가올 소빙기를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상상을 했다.

“해적을 그만 두겠습니다. 해적선 대부분을 어선으로, 큰 배는 무역선으로 사용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곳 땅을 일궈 농사를 짓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그걸 어떻게 믿나? 술탄을 그냥 죽여 버리는 것이 편할 것 같은데?”

“마차 밑판에 황금을 숨겨 놓았습니다. 대략 10만 냥이 조금 넘는 그것을 모두 폐하께 바치겠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황금 3톤 남짓으로 술탄의 죄를 용서할 수는 없었다. 이민호의 표정을 읽었는지 술탄이 다급하게 고했다.

“궁성 지하실에 황금 20만 냥이 더 있습니다! 은은 백만 냥 이상이 있습니다. 다른 보물도 모두 폐하께 바치겠습니다!”

“음. 그렇다면 믿어볼까, 말까?”

이민호가 고민하는데 아라 공주가 거들었다. 눈치가 확실히 빠른 여자였다.

“전하! 술탄이 여기서 죽으면 술루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해적이 더욱 창궐할 것입니다. 술탄을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만약 거짓말한 것이 판명되면 다시 잡아들여 목을 베면 됩니다. 태평양과 인도양이 모두 전하의 것인데 술탄이 감히 어디로 도망갈 수 있겠습니까?”

“흠! 아라 공주의 말을 안 믿고 누구 말을 믿을 수 있겠소?”

허옇게 변했던 술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해병과 기병들이 마차와 궁성에서 황금을 비롯한 보물을 옮기는 사이 술탄의 얼굴이 똥색으로 변했다.

“요즘 어디를 노략질했다고 했지?”

“여기서 동쪽과 남쪽의 모든 섬입니다.”

“그럼 해도가 있겠지?”

“드, 드리겠습니다.”

이 시대 지리 정보는 곧 돈이었다. 아직 이 시대까지는 이슬람 국가에서 제작하는 지도가 서양에서 제작한 지도보다 신뢰도가 높았다. 최소한 지도 구석 바다에 드래곤은 안 그리기 때문이다. 지도가 입수된다면 앞으로 태평양 탐사전대가 훨씬 편하게 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혹시 흑진주가 나는 섬이 어디인지 아나?”

“타이티입니다. 흑엽조개에서 흑진주가 납니다.”

“오오! 거기까지 간단 말인가?”

“아닙니다. 너무 멀어서 최소한 세 단계의 교역을 거쳐 바누아투에 옵니다. 저희도 바누아투에서 사서 다른 상인들에게 넘기고 있습니다.”

앞으로 태평양 탐사대가 태평양을 일주할 때마다 무조건 타이티를 들러서 흑진주를 매입해야 할 것 같았다. 흑엽조개는 태평양이나 인도양에서도 적도 인근에만, 브루나이부터 호주 북부 해안까지 서식 가능했다.

흑엽조개를 구해서 양식 흑진주를 생산하든지, 아니면 온대 바다에서 서식하는 키조개를 이용해 흑진주를 생산해야 할 것 같았다. 흑진주는 희소성이 있기 때문에 일반 진주보다 비싼 것이 보통이었다.

“좋다. 술탄은 앞으로 3개월에 한 번씩 고산국 궁성에 직접 입조하라!”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명을 받자옵니다.”

이민호는 개털이 된 술탄을 쫓아 보냈다. 술루왕국의 항해술을 감안했을 때 술탄은 아마도 일 년 중 절반 이상을 바다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

“전하께서 기분이 좋으신 것 같아요.”

“당연하지 않소? 가장 즐거운 일이 산적이나 해적의 보물을 빼앗거나 훔치는 것이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이 생각났다. 강력한 함대는 이민호에게 돌문을 여는 암호나 다름없었다. 깡패 짓도 이렇게 가끔 하면 재미있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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