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38 47. 1597년 =========================================================================
남섬을 떠난 함대는 북쪽으로 항해해서 다음 날 멀리 북섬에서도 더욱 북쪽으로 치우친 곳에 도착했다. 지도를 확인하니 서쪽과 동쪽으로 바다를 접한 좁은 지협 지형이었다. 이민호가 지도를 보고 혹시 오클랜드가 있을 곳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곳에서도 역시나 함대가 해안에 접근하는 순간 원주민들이 해변으로 몰려 나왔다. 마치 상륙할 기회 자체를 안 주겠다는 의지의 표현 같았다. 그들 뒤에는 목책을 몇 겹이나 두른 요새처럼 생긴 거주지가 있고, 곳곳에 망루가 세워져 있었다. 가만히 원주민들의 체계적인 움직임을 살펴보니 아무래도 그 동안 동남아시아 선박들이 이 지역에서 해적질이라도 한 것이 아닐까 의심됐다.
그런데 다른 지역과 달리 이곳에서는 수백 명에 달하는 거구들이 와카를 추어 장엄한 장면을 연출했다. 그 사이 마을을 텅 비워두고 여자와 아이들까지 나와서 전사들 뒤에 서 있었다. 이들 입장에서는 마을 전체의 존망을 건 전쟁을 앞둔 순간이었다.
“우릴 보자마자 싸우겠다는 거야? 성질 같아서는 확 쓸어버리고 싶은데 말이야.”
함포를 쏴서 강제로 개항시키는 함포 외교라는 말이 이민호의 뇌리에 떠올랐다. 마오리 족이 뉴질랜드에 정착한 게 겨우 몇 백 년도 안 되는 주제에 당당히 주인 행세하는 것이 눈꼴 시렸다. 더 이상 참기 어렵다고 생각했을 때, 그리고 함교의 승조원들 모두가 이민호가 내릴 공격 명령을 기다릴 때 아라 공주가 나섰다.
“말이 안 통하니까 우리 뜻을 전할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해봤어요.”
“어떻게 말이오?”
“저들은 고구마를 재배하고 있어요. 아마 야생 기장도 재배할 거여요. 그리고 돼지를 풀어놓고 키우는 것을 봤어요.”
“그 사이에 고구마를 봤소?”
고구마가 이 시대에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이민호로서는 의문스러웠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유럽인들이 뉴질랜드에 들어오기 전부터 마오리 족은 고구마를 재배했고, 돼지고기와 함께 주식의 위치에 있었다.
아라 공주는 공주답게 전투 도중에도 이민호 품에 안겨서 벌벌 떨고만 있지 않았다. 어떻게든 마오리 족과 접촉하려는 이민호를 위해 그 방법을 고민했고, 그 결과가 주방에서 함교로 올라왔다.
아라 공주가 고구마와 따끈한 고구마튀김, 그리고 참기장 알곡과 기장떡을 한 접시씩 준비한 쟁반을 이민호에게 내밀었다. 한쪽 접시에는 냉동된 돼지고기를 단순히 해동만 해서 놓고, 다른 접시에는 돼지고기 수육과 마늘간장을 담기도 했다.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함교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흐음! 공주가 말씀하신 마오리 족의 음식과 재료만 비슷하고 조리법은 다를 것 같소.”
“맞아요, 전하. 일단 비슷하면서도 다른 음식을 대접해서 우리도 비슷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시켜야 해요.”
“맛은 훨씬 낫겠소. 그런데 이것은 다 뭐요?”
다른 쟁반에는 여러 가지 곡물 종자와 그 곡물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이 접시마다 담겨 있었다. 땅콩과 꿀땅콩, 쌀과 증류식 소주, 밀과 케이크로 쌍을 이뤘다.
이민호는 탐사대장 김몽돌을 좌승함 함교로 불러서 아라 공주에게 설명을 듣게 했다. 고개를 끄덕이던 김몽돌이 공주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한 다음 자신감을 되찾았다.
탐사대원들이 음식쟁반을 들고 단정에 올라 해안으로 향했다. 탐사대원들이 한 줄로 선 사이 김몽돌이 대여섯 걸음 앞으로 나서서 마오리 족 전사들을 손짓으로 불렀다. 어리둥절해서 서로 쳐다보던 전사들 중에서 세 명이 무기를 내려놓고 탐사대에 다가왔다.
탐사대원들은 마오리 족 전사들의 체격이 워낙 커서 바짝 긴장했으나 전사들 앞에 음식 접시가 놓인 쟁반을 두고 다시 몇 걸음 떨어졌다. 해안의 수심이 깊어 좌승함도 해안에 바짝 붙여서 협상을 빙자한 음식박람회를 지켜봤다. 아라 공주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일단 첫 번째 쟁반에 담긴 음식은 같은 재료로 만들어서 쉽게 받아들일 거여요.”
“혹시 독이 든 음식인지 의심하지도 않는 것 같소.”
“독이 무서운 것을 알더라도 저들은 용감해야 하는 전사니까요.”
마오리 족 중에서 문신을 가장 많이 새긴 전사가 쟁반에 있는 음식을 하나씩 집어먹었다. 적일지 모르는 자들이 준 음식인데도 전혀 망설이지 않고 씩씩하게 잘 먹었다. 다른 전사들도 음식을 시식했다.
김몽돌이 마오리 족 여자 하나, 그리고 아이도 하나 불러서 음식을 나눠먹였다. 용감한 부족답게 여자도 용감하고 아이도 용감했으나, 보호받아야 할 자들이 나오는 것을 전사들이 안 좋게 여기는 것 같았다.
“와하! 쿠마라! 카파이 카이!”
기대 이상으로 전사들은 고구마튀김을 아주 좋아했다. 기장떡도 잘 먹었고, 김몽돌이 시범을 보인 것처럼 돼지고기 수육을 간장에 찍어 접시를 금방 다 비울 정도로 빨리 집어먹었다. 여자와 아이들은 전사들에게 고기접시를 빼앗겨 못 먹었다. 용감한 여자와 아이는 신분 차이가 커서 그런지 전사들에게 항의도 못했다.
마오리 족들이 만족스럽게 먹고 나자 탐사대원들이 새 쟁반을 들이밀었다. 문제는 마오리 족 전사들이 본 적이 없는 작물과, 그 작물로 만든 음식이라는 것이었다.
전사들이 소금과 설탕을 친 꿀땅콩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더니 잘 먹었다. 여자와 아이가 특히 좋아했다. 전사는 소주잔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다가 다른 전사들에게 얕잡히기 싫어서 눈을 질끈 감고 삼켰다. 그리고 카~ 소리를 내며 감탄했다. 이곳에도 술이 있는 모양인지 아주 좋아했다. 아이가 술을 마시다가 캑캑거리며 쏟아내자 어른 전사들이 큰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런데 전사가 케이크를 한 입 베어 먹다가 즉시 뱉어버렸다. 너무 달게 만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이가 먹어보더니 아주 좋아했다. 여자도 케이크를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꼽았다.
흡족해하는 마오리 족 사람들에게 김몽돌이 양을 끌고 갔다. 그리고 탐사대원이 양 꼬치가 담긴 큰 접시를 다섯 명 앞에 내놓았다. 양은 다 큰 암양이고 양 꼬치는 어린 양 고기로 만들고 누린내 나지 말라고 박하까지 곁들였으니 일종의 사기였다. 나중에 직접 양을 잡아서 먹을 때 마오리 족이 양 특유의 누린내를 좋아할지 싫어할지 알 수 없었다.
김몽돌이 박하 잎과 씨앗을 전사들에게 동시에 내민 다음 씨앗을 주변에 대충 뿌렸다. 나중에 고기 먹으면서 누린내가 싫다면 알아서 박하 잎을 뜯어먹으면 될 일이었다. 마오리 족들이 ‘카파이’ 또는 ‘아로하’를 연발하며 양 꼬치를 맛있게 다 먹었다. 아쉬운지 고기 기름이 남은 나무 꼬챙이도 쪽쪽 빨아먹었다.
다른 탐사대원이 가져온 것은 케밥처럼 위로 세운 것이었는데, 탐사대원이 직접 썰어서 마오리 족들에게 나눠줬다. 마오리 족 전사들은 고기보다는 칼에 더 눈길을 보냈다. 이들은 금속을 다루는 기술이 없어 고기를 자를 때 대나무 칼이나 돌칼을 쓰고 있었다.
“먹어. 먹으라고!”
김몽돌 소령이 몇 번이나 권하자 전사들이 겨우 양 고기 케밥에 손을 댔다. 고기 맛이 일단은 마음에 드는 모양인데 전사들의 눈길은 여전히 칼에 머물러 있었다. 덕택에 이번에는 여자와 아이도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잘 풀린 것 같지만 아무래도 쇠로 만든 칼을 먼저 쥐어 줘야할 것 같소. 전쟁에 쓰면 위험한데.”
이민호는 저 마오리 부족이 주변 부족의 전사들을 다 잡아먹고 나머지 인원을 노예로 만들 경우 단기간에 마오리 왕국이 북섬에 성립될 가능성에 대해 고민했다. 지금처럼 마오리 족이 분산되어 있는 편이 앞으로 다루기에 좋았다. 아라 공주도 그것이 걱정이었다.
“가급적 나중에 주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조만간 유럽인들이 와서 화승총까지 넘길 것이오. 우리가 주는 게 낫겠소. 저 전사들 눈빛을 보시오. 식칼 하나에 영혼이라도 팔 것 같소.”
“그럼 식칼하고 주머니칼만 줘요. 무기를 주면 전쟁이 나서 부족 간 균형이 무너질 거여요.”
“휴우~ 저 자들은 막대기에 식칼을 달아서라도 무기로 쓰고 말 것이오.”
이민호와 아라 공주가 대화하는 사이 김몽돌과 전사가 코를 비비는 인사를 했다. 이런 인사법을 이민호가 미리 알려줘서 김몽돌이 당황하지는 않았으나, 거대한 체구가 접근하면 겁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박 중위! 탐사선에 물건 들고 상륙하라고 전해. 전사가 300명 정도 나와 있으니 300개씩.”
“주머니칼과 식칼, 밀림도는 300개씩, 쇠도끼와 쇠톱은 100개씩 준비하겠습니다.”
좌승함 항법사가 단정을 타고 탐사선으로 향했다. 탐사선에는 네그리토 위주의 멜라네시아 섬들과 교역하기 위해 식칼과 주머니칼 등의 재고가 많이 쌓여 있었다. 배타적인 원주민들이 다른 건 다 필요 없다고 해도 작은 칼들과 넓적한 정글도, 쇠도끼, 쇠톱은 아주 좋아했기 때문에 항상 대량으로 싣고 다녔다. 쇠도끼는 원주민들이 일하는 시간을 줄여 종교행사에 참가시키기 위해 선교사가 배포했다는 설까지 있었다.
김몽돌이 도구의 사용법을 마오리 족 전사들에게 가르쳐주었다. 쇠톱과 쇠도끼 사용 시범에 놀랐다가 정글도를 휘둘러 나뭇가지를 자르는 모습을 본 전사들은 당장 김몽돌을 덮쳐 빼앗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했다. 싸움이 나기 직전에 김몽돌이 전사 세 명에게 선물을 주고, 나머지 도구들도 포장해서 전사들 발치에 실어 날랐다.
드디어 처음으로 성공적인 접촉을 이뤄냈다. 마오리 족 전사들이 탐사대 일행을 마을로 초대했으나 이민호는 탐사대 전원을 함대로 불러들였다. 괜히 케밥을 자르면서 칼을 보여준 바람에 시간이 촉박하게 됐다.
“다른 부족들에게도 빨리 칼을 나눠줘요.”
“나하고 같은 생각이오. 하지만 방금 같은 짓을 여러 번 해야겠소.”
함대를 4개 전대로 나눠 급히 사방으로 보냈다. 새섬 북섬에서 방금과 같은 짓을 여러 번씩 해야 했다. 나눠준 종자를 제대로 키울 수 있을지, 양을 첫 날에 다 잡아먹을지 걱정이 많았지만 일단 여러 부족에 무기부터 나눠주고 봤다.
그런데 마오리 부족마다 와카를 추는 방법이 달라서 어느 부족은 따이아하를 발밑에 놓고 췄고, 어느 부족은 따이아하를 마치 검술이나 총검술하듯이 휘두르거나 찌르며 춤을 췄다. 나무로 만든 무기라지만 마오리 전사들이 붕붕~ 소리를 내며 휘두르는 따이아하에 제대로 맞으면 사람 머리가 한 방에 깨질 것 같은 위협을 느꼈다.
북섬에 와서 처음에 만난 부족이 가장 큰 규모였는지 전대마다 대충 다섯 부족씩 만났어도 원주민 철기 도구 세트를 2천 개도 소모하지 못했다. 평균적인 부족들의 규모는 전사가 100명이 안 된다는 결론이었다. 그나마 한 곳에서는 마오리 전사들과 싸움이 나서 기관총으로 몰살시키고 말았다.
여러 가지 작물의 종자와 양 몇 마리, 철제 도구 등 귀한 선물을 받은 마오리 전사들도 당연히 고산국 함대에 합당한 선물을 주었다. 다만 마오리 전사들이 판단하기에 동등한 가치의 선물이었다.
고산국 탐사대의 선물을 흡족하게 여긴 부자 부족들은 장식이 잘 된 따이아하나 키위 깃털로 만든 망토를 선물로 줬고, 가난한 부족들은 고구마로 쌓은 작은 언덕과 철제 도구를 받은 전사 수만큼 돼지 수십 마리를 주는 식이었다. 이민호가 보기에는 나무 곤봉이나 키위 망토보다는 차라리 가난한 부족들이 준 돼지 몇 십 마리가 훨씬 가치가 있었다.
모자라는 돼지 대신에 새 종류를 많이 받았는데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새라는 모아는 이미 멸종한 것 같았다. ‘카카포’라는 닭만 한 앵무새, ‘타카헤’라는 뜸부기 비슷한 새 몇 마리를 산 채로 받았다. 마오리 부족 사람들을 따라다니는 애완용 키위를 몇 마리 봤는데 길조로 취급돼서 그런지 탐사대에 넘겨주지 않았다. 고구마는 너무 많아서 형식적으로 한 가마만 받고 나머지는 원주민들에게 돌려주었다.
이민호는 뉴질랜드에 온 김에 큰다래와 참다래, 즉 키위와 골드 키위를 식재하고 싶었으나 제대로 된 과실이 열리려면 인공 수분을 시켜줘야 하고 꽃을 솎아주거나 전지를 해야 하는 문제 때문에 포기하고 말았다. 키위의 원산지는 의외로 중국 남부라서, 광저우에 입항했던 고산국 건국 초기부터 재배해서 흔히 먹는 과일이었다. 대신 조선 재래종 다래 묘목을 원주민들 몰래 심어놓았다.
교역을 마친 다음 함대는 남섬은 아예 포기하고 북쪽으로 향했다. 일단 북섬의 여러 부족들과 친교를 다져놓았으니 다음에 올 탐사대들이 보다 쉽게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전하! 예수회 선교사가 호주 원주민들을 교화하고 싶어 해요.”
“호주는 괜찮소. 아직 새섬에는 보내지 마시오. 원주민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는 셈이니.”
예수회는 교역 말고도 고산국과 에스파냐, 그리고 포르투갈을 단단히 연결해주는 조직이었다. 예수회가 교육과 교역 분야에서 기여하는 바가 많은 만큼 이민호는 종교에 관심 없었어도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동에 대한 지원은 확실히 해주었다.
비록 무역특구라서 가능했다지만 광저우와 여수에 천주교회를 세울 때 명나라 황제와 조선 국왕을 설득해 직접적으로 돕기도 했다. 그 일로 231대 교황 클레멘스 8세가 감사의 뜻을 전하는 친서를 보내왔다. 클레멘스 8세 교황은 전대의 단명한 교황들과 달리 오랫동안 재위하면서 교회를 개혁하고 유럽평화와 빈민 구제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 시기 아시아의 이슬람교와 불교, 힌두교는 다른 나라에 적극적으로 선교하려는 의지가 없는 분위기라서 확장된 영토가 있다는 식으로 통보만 해주었다. 의외로 일본 신교가 해외 포교에 적극적이었지만 아직 해외 신자 확보에 성공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고민호 신을 모시는 신사는 해외 포교를 할 때마다 공개적으로 웃음거리만 됐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어째서 새섬에 그렇게 신경을 쓰세요? 농업과 목축이라면 땅 넓은 호주가 있잖아요. 새섬이 식인종이 살고 있는 땅이라고 소문나면 개척민들도 안 가려고 할 거여요.”
“어업기지로 쓰려고 하오. 새섬은 선원들에게 좋은 휴양지가 될 것이오.”
고산국 본토에서 무지막지하게 멀지만 남태평양의 어족 자원을 관할하기에는 뉴질랜드가 좋은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뉴질랜드는 남극에도 가까웠다.
작은 새우와 비슷한 크릴을 바다에서 끝없이 퍼올 수 있는 곳이 남극해였다. 17세기 초부터 세계가 본격적인 소빙기에 들어가므로 크릴이 미칠 듯이 번식할 것으로 예상됐다. 최소한 100년 이내에 어획량이 줄어들 염려가 없는 크릴은 양식장 사료로 쓸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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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하지만 자료 수집할 게 많아서 8시간 동안 밥도 못 먹고 썼습니다. ㅜ.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