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436화 (385/1,000)

00436  47. 1597년  =========================================================================

출항 첫 날 저녁에 팔라완 섬에 정박했다. 고산국 전선의 항속거리가 늘어나면서 팔라완 주둔군이 철수했어도 항구는 여전히 배와 선원들로 활기가 넘쳤다. 중단거리 민간 상선들은 아직도 외륜선이 다수라서 이곳 팔라완은 꼭 필요한 중간 기착지였기 때문이다. 항구에는 창고마다 건초가 가득 준비돼 있었다.

고산국 함대가, 그것도 국왕좌승함을 비롯한 제1 전단이 항구로 들어오자 선착장에 정박한 모든 상선에서 선원들이 갑판에 나와 만세를 불렀다. 항구 마을에서도 사람들이 몰려나와 함대의 입항을 열렬히 환영했다.

“전하께서는 어딜 가시든 인기가 좋으세요.”

“무겁소. 좀 내려오시오.”

아라 공주는 십대 후반이 됐어도 여전히 기회만 생기면 이민호의 목에 매달렸다. 아라 공주가 있으면 브루나이 공주들은 이민호 주변에 얼씬하지 못했다. 브루나이 목재회사가 잘 나가면서 한때 브루나이 공주들이 기고만장했으나 어느새 아라 공주가 휘어잡은 것 같았다. 다만 승조원들이 일하는 함교에서 이런 식으로 애정공세를 펼치니 이민호는 몹시 곤란했다.

“안 돼요! 브루나이 공주님들이 호시탐탐 전하를 노리고 있잖아요. 밤이라면 몰라도 낮에는 제가 전하를 차지할래요.”

“아라 공주는 올해 연치가 어떻게 되시오?”

“저 올 들어 열여섯, 아니 열일곱 됐어요. 조선식 나이로 열여덟이에요. 호호!”

아라 공주가 나이를 한두 살 정도 살짝 올린 것 같은데 상관없었다. 후궁들의 나이는 혜영이 모두 기록해두었고, 처음 동침할 날짜를 정해주는 사람도 혜영이었기 때문이다.

생일이 지나면서 나이를 먹는 대부분의 나라와 달리 새해가 되면서 한 살을 더 먹는 조선식은 예나 지금이나 드물었다. 과거에 중국에서도 나이를 세는 법이 조선과 같았다는데 확실한 근거는 이민호도 몰랐다.

“함장! 남사군도의 해도가 완성됐소?”

“작년에 완성된 해도를 갖고 있습니다, 전하.”

이번에 함대가 정박한 곳은 예전에 팔라완을 점령할 때 강습 상륙작전을 펼쳤던 남쪽이 아니라 수심이 깊은 북쪽이었다. 팔라완 섬이 가늘고 길게 생겼고 딱 중간 허리 정도가 양쪽으로 잘록해서 남쪽과 북쪽 모두 항구로 쓸 수 있었다.

“팔라완 서쪽에 섬이 정말 많은 것 같소.”

“수심이 얕은 사구가 많고 해저지형이 자주 변해서 탐사선들이 해도를 작성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이민호가 해도를 살펴보니 70여 개의 무인도와 암초들이 널리 어지럽게 퍼져 있었다. 이 모든 곳을 상세히 측량한 탐사대에게 이민호가 큰 상을 내린 기억이 났다.

“주변 국가에서 영유권을 주장한 사례가 있소?”

“원나라 때부터 중국의 영토라는 기록이 있고, 명나라 조정에서 발간하는 지도에도 매번 표기됐습니다. 그러나 여러 나라의 상선들이 가끔 지나가는 정도이며, 주변국 어선들도 정기 조업을 하기보다는 이따금 원정 조업을 했거나 풍랑을 만나 표류한 것에 불과합니다.”

현대에 남사군도 분쟁이 발생했을 때 주변국 모두가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가장 멀리 떨어진 중국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오래 전 진나라 때부터 중국 어선들이 조업을 했다는 기록을 찾고, 섬 주변 바다에 녹슨 옛날 동전을 뿌린 다음 다시 발굴하는 쇼를 펼치기도 했다.

이민호가 생각하기로 아마도 원나라가 자바 섬에 원정을 갔을 때 배를 타고 지나가면서 영토로 편입했다고 상부에 보고만 한 듯했다. 그러나 이것은 자바 원정에 실패한 원정군의 공적을 세우기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했고, 이후 전혀 영토로서 관리하지 못했다.

건국 초부터 해양 영토에 신경을 쓴 이민호는 광저우에 가까운 동사군도에서 인산염을 채취하고 등대를 세웠다. 해남도 남동쪽 서사군도에도 상륙해서 섬마다 태극기를 꽂아두고 영토 표지석을 설치했다.

그리고 섬에서 가까운 명나라와 안남 같은 주변국들에도 통보해서 새로운 영토 취득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남사군도에 대해서는 섣불리 영토 주장을 하기 어려웠다.

“확실한 기록이 남은 안남과 명나라가 걸리는구려. 정확히는 안남이 아닌 참파라서 큰 걱정은 없겠소. 그런데 원나라 원정군이 개념 없이 영토에 편입한 것을 명나라가 기록과 지도만 그대로 계승해버렸소.”

“중국인들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이곳에 찾아온 적이 없습니다. 남사군도는 이제 고산국 영토입니다. 고산국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겁니다.”

해로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함장은 이 해역에서 남사군도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명나라 상대로 외교를 해야 함을 알고 벌써부터 피곤해졌다.

“전하! 왕명명 언니를 통해서 명나라 관료들을 상대로 공작을 펼치세요. 일만 냥 정도만 뿌리면 친절한 명나라 탐관오리들이 남사군도에 대한 명나라의 모든 기록을 말끔히 지워줄 거여요.”

“기록이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판이라 쉽지 않소.”

“그럼 다음 신년에 황제나 황태후께 재롱 좀 떠세요. 사위 좋다는 게 뭐여요?”

“끄응!”

이민호는 황제에게 선물 좀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위정자가 아주 자그마한 영토라도 포기하는 그 순간부터 거대한 비판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았다. 다른 경제적 이익이라면 몰라도 영토 문제는 정치적으로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성탄절에 주상아 공주님하고 왕자 아기님하고 같이 황제폐하를 찾아뵈세요. 네?”

“아무래도 그래야겠소. 아주 자그마한 영토에 불과하지만 미래를 위해서요.”

아기를 생각한다면 추운 신년보다는 음력 8월인 황제 탄생일에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기가 돌은 물론 100일도 안 넘기고 여행을 하는 것도 문제였다. 궁성에 돌아가서 이야기해보기로 했다.

“전쟁을 하면 간단할 텐데요. 그렇죠?”

“목소리 낮추고 참람한 말씀은 꺼내지도 마시오.”

“죄송해요.”

남사군도를 차지하고 지키는 전쟁이라면 당연히 고산국이 명나라 함대를 상대로 압도적으로 승리하겠지만, 문제는 명나라가 열 받아서 고산국 본토를 친다면 매우 불안해질 우려가 있었다. 그래도 결국은 고산국 함대가 성공적으로 바다를 막아내겠지만 무역을 하면서 얻는 이익도 모두 사라진다고 봐야 했다.

아라 공주가 풀이 죽어서 이민호가 다독여줘야 했다. 여자들은 섭섭한 경우를 당하면 평생 기억하며 노년에 남편을 고달프게 만든다고 들었다. 이민호는 침실로 돌아와 아라 공주와 진하게 키스하며 기분전환을 시켜주었다.

다음 날 브루나이 왕도 서쪽 세리아에 도착했다. 여긴 올 때마다 매번 크게 발전해서 자주 왔다고 자부하는 이민호도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일단 해안 사주 안쪽에 선착장을 확장하고 앞바다를 방파제로 가로막았다. 그리고 선착장 주변 수심이 낮아질 것을 우려해 아예 준설선 한 척이 떠서 매일 같이 토사를 퍼냈다.

유전도 꽤나 확장됐다. 원유 생산량을 늘리면서 본격적으로 무게추가 달린 채굴기가 제작돼 효율적으로 원유를 퍼냈다. 분별증류탑도 큰 것으로 바꿔서 호주에서 사용할 경유와 등유는 이곳에서 직접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폐하! 폐하를 알현하고자 말을 타고 쉴 새 없이 달려왔습니다!”

브루나이 술탄 사이풀 리잘의 말이 사실인 듯 술탄이 내리자마자 말이 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50대 술탄이 이민호에게 마치 수하처럼 굽실거려서 보기에 안 좋았다. 어찌 됐든 술탄은 이민호의 장인 겸 손위처남이었다.

“왕성에 계시면 제가 어련히 알현하려고요.”

“그래도 폐하께서 하루는 여기서 머무르실 것 아닙니까? 하루라도 아쉬워서 그렇지요.”

이민호와 술탄은 객관으로 옮겨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고, 공주들도 오랜만에 보는 오빠,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와 반갑게 인사했다. 이슬람 하렘이라도 아랍 지역과 달리 이 지역에서는 가족 간의 끈끈한 정이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네나가 어서 건강한 왕자를 순산하면 좋겠습니다.”

“하하! 우량아를 낳을 것 같습니다.”

술탄을 보니 공주들이 살이 찐 것은 영락없이 체질이었다. 술탄이 예전에는 깡마른 중년이나 초로의 노인 같은 인상이었으나, 브루나이에서 다시 권력을 쥐고 나라가 잘 굴러가면서 살이 후덕하게 붙은 것 같았다.

“영토를 다 회복했다고 들었습니다. 경하 드립니다.”

“이 모두가 국왕폐하 덕분입니다. 공주들도 고생 많았다.”

“헤헷!”

술탄은 목재회사로부터 나오는 세금과 유전을 통해 얻는 수익을 이용해 군사력을 강화한 다음 브루나이 남부를 모두 점령했다. 벌목이 진행되면서 산악지역에서 사는 소수민족들도 점차 술탄에게 복속해왔다.

술탄이 보기에는 친척 귀족들에게 시집가기 싫어서, 또는 외국 남자에 홀려 가출한 것이나 다름없는 공주들이 복덩이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이민호는 석유와 항로 안전을 위해 브루나이를 지원해준 것이니, 술탄이 오해를 단단히 한 셈이었다.

“자바나 다른 섬들과 우호관계를 맺었습니까?”

“그럼요. 저는 황송하게도 고산국 국왕폐하의 장인입니다. 자바 섬에는 마타람 왕국을 비롯해 무수하게 많은 무역 소국들이 있는데 모두가 브루나이에 조공을 합니다. 아체 다루살람 왕국과 조호르 술탄국과도 원만한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테르나테 제국은 브루나이 상인들에게 여러 가지 특혜를 베풀고 있습니다.”

고산국왕의 장인이 이 지역에서는 큰 벼슬이 됐다. 포르투갈이 말래카를 장악한 이후 아체와 조호르는 혼인관계를 통한 연합과 반목을 반복해서 지금은 다시 예전의 전시체제로 돌아섰다. 말래카 해협 주변에서 100년 가까이 삼국시대가 펼쳐지고 있었고, 조만간 끌날 기색이 안 보였다.

둘 다 인도네시아 지역의 군사강국 겸 무역 강국으로서 포르투갈을 포함해 셋이 팽팽히 맞서는 시기라서 브루나이를 끌어들이기 위해 술탄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브루나이의 국력이 회복됐기에 이런 국제관계가 가능했다.

“술탄께서 원기가 왕성하신 것 같아 저도 즐겁습니다.”

“앞으로 석 달 동안 폐하를 위해 브루나이 전국을 안내하겠소이다. 기간은 얼마든지 연장하셔도 됩니다.”

“죄송하게도 제가 멀리 가야 할 곳이 많아서 그렇게 시간을 내지 못합니다.”

“정말 아쉽습니다. 예쁘게 자라고 있는 제 증손녀들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만,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릴까 싶어 차마 용기를 내지 못하겠습니다.”

“여섯 공주들만으로도 충분하고도 넘칩니다.”

민다나오 사신들에게 했던 말이 어느새 이 지역에 소문이 다 퍼진 모양이었다. 다른 술탄국이나 무역 소국들이 고산국에 왕녀를 바칠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그런 소문이 돌아서 이민호는 잘 됐다 싶었다.

고산국이 번영하면서 가장 큰 혜택을 본 나라는 유구국도 아니고 조선도 아닌, 바로 브루나이였다. 예전에 강성했을 때도 해변 마을들을 어설프게 형식적으로 지배하던 것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확실하게 브루나이 전 지역을 장악하며 세금을 받아내고 징병이 가능할 정도로 발전했다.

세월이 흘러 인구가 더 불어나면 자바나 수마트라, 말레이 반도에 기반을 둔 나라들을 제치고 브루나이가 이 지역의 강대국으로 발돋움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상황을 예상한 주변 나라들에서 미리부터 브루나이와 우호관계를 맺은 것이지, 반드시 이민호의 장인이라서 아부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음 날은 브루나이 궁성에서 열린 연회에 참가했고 그 다음 날은 벌목 현장을 직접 순시했다. 벌목꾼과 농부들이 열렬히 환영하는 가운데 이민호는 티크 원목의 재생산이 가능함을 확인했다. 꾸준한 묘목 식재로 인해 오히려 20~30년 후에는 훨씬 많은 원목 생산이 예상됐다.

짧은 일정을 마치고 호주로 향했다. 장영실 항은 정문부가 기반을 잘 닦아놓았다. 문인 출신이면서도 병법에 밝아 원주민들이 기습 공격해올 것에 대비해 바다뿐 아니라 육지 쪽에도 작은 보루를 쌓아 놓았다. 원주민들이 끝도 없이 몰려와 교역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술 때문인 것 같았다.

새여수도 들르고 새부산에 며칠 정박하며 초기 정착민들을 격려했다. 건설용 중장비가 호주 남동부의 농지 개간에 참가하자 농민 1인당 백만 평씩 경작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이민호는 양 목축도 하고 과일도 키우며 여유 있게 살라고 개척민들에게 조언을 해줬다.

발견 당시부터 호주 전체가 왕토로 귀속됐다. 그래서 경작지 소유권이 농민에게 분배된 것이 아니라 경작권만 매년 갱신하는 식이라서 앞으로 호주 인구가 늘어나기 전에 실컷 만석꾼 기분을 내라고 허락해줬다.

“백만 평을 경작하는 게 사실이냐고요? 물론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가 올해는 삼백만 평을 경작할 권리가 있습니다. 경운차를 몰고 농사를 지어도 감당을 못합니다. 들판에서 수확한 곡식을 창고로 운반하는 일만 해도 거의 일 년이 걸립니다. 씨 뿌리고 수확해서 옮기는 일이 제가 하는 일의 전부입니다. 땅이 워낙 넓으니 홍수나 가뭄은 사소한 문제에 불과합니다.”

개척민들이 기자들 앞에서 잘난 척했다. 화가가 지평선이 펼쳐진 농경지를 배경으로 개척민들이 일하는 모습을 열심히 그렸다. 함대가 고산국에 돌아가면 신문에 소개될 기사 인터뷰 중이었다.

신문을 본 고산국 농민들이 호주에 가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들썩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민호가 기사에 개입해 개척민의 발언인 것처럼 슬쩍 두 마디를 끼워 넣었다.

“호주는 아무 것도 아니랍니다. 북미는 호주보다 두 배나 넓고 땅도 훨씬 기름지다고 들었습니다.”

땅에 집착하는 농민들의 가슴을 뒤흔드는 발언이었다. 고산국에 돌아가서 신문이 발간된 다음 농민들의 이주 신청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북미에는 아직 초기 정착촌도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 호주에서 몇 년 일하다가 북미로 가는 것을 이부에서 농민들에게 권했다. 호주에서 논농사를 할 만한 지역은 넓지 않았으나, 경운차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 농민들이 밭농사를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 작품 후기 ============================

이 시대에 남사군도라니... 쓰다 보면 자꾸 늘어나는군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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