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35 47. 1597년 =========================================================================
“나는 해적만 없으면 상관없소. 전쟁에 개입할 의사도 없소.”
구스만 총독이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사실 필리핀 총독부와 민다나오 사이에서 진행되는 전쟁에 고산국이 개입할 권리도, 의무도 없었다. 보통은 마닐라에서 원정대가 조직돼 민다나오를 침공하는 식으로 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나라가 마닐라를 공격한다면 고산국은 자동적으로 에스파냐의 방어전을 도와주도록 조약이 맺어져 있었다. 이민호에게 에스파냐 식민지 마닐라의 존속 자체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거주하는 마카오와 함께 고산국의 무역 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높았다.
“해적은 저희가 막아보겠습니다만, 바닷가 사람들을 언제나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해적을 이유로 에스파냐가 계속해서 전쟁을 일으킬 것이오. 고산국과 유구국 상선이 민다나오 주변 해역을 통행하므로 이들에게 위협을 줄 수 있소. 마구인다나오에서는 해적 문제를 보다 더 심각하게 여겨야 하오.”
“감히 고산국과 유구국 상선을 약탈할 정도로 간 큰 해적은 없습니다. 혹시 폐하께서 해적들을 토벌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내가 술탄을 대신해서 장시간 민다나오에 함대를 체류시키면서 해적을 일일이 잡아줄 수는 없소. 내 입장에서는 차라리 일본처럼 해적을 키우고 있는 나라를 없애버리는 게 편하겠소. 장기적으로 그게 더 싸게 먹힌다오.”
보통은 해적을 국가 단위에서 묵인해줬기에 지속적인 활동이 가능했다. 이 시대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해적이나 유럽 여러 나라의 해적들도 대부분 국가의 비호 하에 활동했다. 당연히 해적들은 전리품 일부를 국가에 바쳤다.
그러나 민다나오에서는 술탄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이 꽤나 넓었다. 민다나오 섬 자체가 면적이 남한과 거의 맞먹고 들쭉날쭉한 지형 탓에 해안선도 길었다. 마구인다나오 왕국은 현재 민다나오 남부를 지배하는데 그쳤고, 북쪽 해안은 에스파냐의 지배력이 강화되는 중이었다. 민다나오 해적은 양측 세력의 지배력이 충돌하는 공백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다.
“황송하오나 지금 당장은 모든 해적들을 제어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왕국 입장에서는 에스파냐라면 모르겠지만 고산국과는 결코 척을 지고 싶지 않습니다. 폐하께 술탄의 공주들을 바칠 테니 저희들이 해적을 토벌할 시간을 좀 더 주십시오.”
공주들을 바치겠다는 말에 이민호가 화들짝 놀랐다. 더 이상 여자를 늘리고 싶지 않았다. 브루나이의 여섯 공주들을 한꺼번에 안을 때마다 이민호는 짐승 수컷이 된 기분이었다.
물론 매번 안을 때야 좋았지만 끝나고 나서 느끼는 피곤함과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일종의 현자 타임인데 이민호는 꽤나 심각하게 고민하게 됐다.
“만약 내게 공주들을 바치면 함대와 육군을 총동원해 당장 민다나오를 공격하겠소.”
“그렇다면 방금 제 발언을 취소하겠습니다. 하지만 마닐라와 브루나이에서 국왕폐하께 미인을 바친 이후에 고산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고 들었습니다. 어째서 저희들을 차별하십니까?”
브루나이 공주나 비올레타를 취한 일은 외교와 전혀 상관없었지만 민다나오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구스만 총독이 혀를 찼다.
“닥치시오! 그런 소리는 하지도 마시오.”
“그럼 어떻게 해야 폐하의 분노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든 시켜주십시오.”
말레이계 이슬람, 에스파냐 사람들이 모로 족이라 부르는 회교도들의 독특한 자살공격을 이민호는 결코 우습게 여기지 않았다. 머리를 빡빡 민 회교도 하나가 시장 같은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 나타나 칼 하나만 들고 죽을 때까지 다른 사람들을 무차별로 죽이는 방식이었다.
“내가 제안을 하나 하겠소. 왕비로 삼기에 적당한 미모와 교양을 갖춘 조선의 귀족 여인을 올해 안으로 민다나오에 보낼 테니, 술탄의 왕비로 맞이하시오.”
“예에?”
민다나오에서 온 사신이 잠시 정신이 나간 동안 이민호가 구스만 총독과 눈길을 맞췄다. 총독은 불만스럽긴 하지만 민다나오에서 해적질을 막아준다면 구태여 민다나오 섬 전체를 점령할 의도가 없는 것 같았다. 사실 지난번 원정 실패 이후로 민다나오의 회교도 지역을 정복할 능력이 안 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나는 여러 왕국으로부터 여자를 받기만 했지 시집보낸 적은 한 번도 없었소. 내가 이번 일을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는지 이해가 가오?”
“그, 그런! 고산국의 진심을 충분히 알겠습니다. 술탄이 이미 늙었으니 후계자의 비로 정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왕비만 된다면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소. 앞으로 마구인다나오 왕국은 나의 사위 나라가 될 테니 안전은 충분히 보장될 것이오.”
“정말로 그렇습니다. 당장 돌아가서 국혼을 준비하겠습니다. 고산국과 좋은 관계를 맺을 절호의 기회이니 국혼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민다나오 사신은 늙은 술탄을 강제로 퇴위시켜서라도 성혼시키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사신의 반응을 살펴보니 후계자가 꽤나 괜찮은 젊은이인 것 같았다. 물론 후계자도 이미 기혼자였으니, 첫째 부인이 둘째 부인으로 밀려나게 될 것이다.
“폐하! 혹시 그 귀족 처녀의 나이가 몇 살인지요?”
“서력으로 1584년생이니 올해 열세 살이오.”
선조 임금이 원래 역사보다 일찍 죽는 바람에 많이 꼬여버렸다. 만력제도 오래 못 살 것 같았다. 이민호도 성인병을 주의하기로 결심했다.
“아직은 결혼 적령기인 것 같습니다.”
“어리다는 뜻이오?”
“적당히 많다는 뜻입니다. 더 늦기 전에 성혼을 서둘러야겠습니다.”
금색 옷을 입은 사신이 파란색 옷을 입은 사신과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이민호에게 물었다. 사신들이 선명한 원색 옷을 입어서 볼 때마다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이민호가 눈살을 찌푸려서 그 원인을 모르는 사신들이 겁을 먹는 상황이 초래됐다.
“폐하! 저희들은 무슬림인데 종교는 전혀 상관없습니까?”
“그대들이 진정한 무슬림이라면, 그래서 다른 종교에도 아량을 베풀고 있다면 전혀 신경 쓸 일이 없소. 왕비가 될 조선의 귀족 여자를 신께 이르는 길로 인도해주길 바라오.”
“황공하옵니다.”
뭔가를 얻기 위해서는 뭔가를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었다. 서소문에 사는 권력 지향적인 그 꼬마 숙녀는 왕비가 되기 위해 배워야 할 것이 아주 많았다. 마구인다나오 언어와 아랍어 문어를 배우고 꾸란을 거의 통째로 외워야 할 것이다.
민다나오 사신들은 이민호의 진심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구스만 총독 등과 함께 국경 문제를 협의했다. 에스파냐와 필리핀 총독부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은 일단 끝날 것 같았다.
“폐하께 감탄했습니다. 전쟁을 막기 위해 야만국에 조선의 귀족 여인을 시집보내실 생각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민다나오 사신들과 협상을 마친 구스만 총독이 이민호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러 왔다. 협상은 잘 풀린 것 같았다.
마닐라에서 보낸 상선이 민다나오와 술루제도를 무사히 지나면 더 이상 테르나테와 티도레 섬으로 가는데 문제가 없었다. 테르나테 제국도 테르나테 섬으로 향하는 외국 상선을 보호하는 일에 신경을 많이 써줬고, 오랜 경쟁자인 바로 남쪽 티도레 섬으로 향하는 상선도 보호해줬기 때문이다. 두 섬은 오랫동안 전쟁을 하면서도 테르나테 섬의 화산이 폭발하면 티도레 귀족들이 테르나테 왕족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해주는 등, 묘한 라이벌 관계였다.
“왕비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한 꼬마 숙녀가 있소. 그런데 다른 고등 종교가 확고히 뿌리 내린 지역에서 강압적인 선교는 위험하다는 생각입니다, 총독.”
“이슬람에서 유대교와 가톨릭을 형제 종교라고 포용하는 것은 압니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오랫동안 가톨릭을 구식 종교라고 은근히 무시했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심이 무슬림보다 약하다고 비웃는 것은 참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느님께 신앙심 경쟁을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경쟁을 할 수도 있지요.”
구스만 총독도 산티아고 기사단의 일원이라 종교 문제에서 양보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뜻밖의 발언을 했다.
“브루나이와 협정을 맺은 것과 똑같이 민다나오에서도 하기로 했습니다. 서로의 도시에 성전을 짓고 사제를 몇 명씩 보내 선교를 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이슬람에는 사제가 없습니다만, 성직자라고 부를 만한 사람들은 있지요.”
“상대편 지역에서 선교를 하는 분들은 참으로 진실한 신앙인이겠군요.”
이민호가 자기도 모르게 성호를 그었다. 그 모습을 본 구스만 총독이 몹시 만족스러워했다.
이민호는 구스만 총독을 만난 참에 필리핀에서 철광석과 석탄을 더 많이 수입하는 협상을 했다. 고산국에서 대량으로 수입하는 바람에 단기간이지만 필리핀에서 농업보다 광업이 더 활발했다.
유구국 상선들이 철광석과 석탄을 필리핀에서 고산국으로 열심히 실어 날랐다. 탄광에서 일하는 말레이계 노동자들을 위해 분진 마스크를 무료로 보냈으나 에스파냐 감독관이 감시하지 않는 틈을 타 마스크를 벗는 것 같았다.
이민호가 바기오 행궁에 있는 동안 필리핀 북부 지역의 라자와 술탄들이 몰려와 여러 가지 선물을 바쳤다. 이민호도 값을 쳐서 하사품을 내려주었다. 여자를 받지 않는 이민호를 오해했는지 잘 생긴 소년을 바친 경우도 있었으나, 이민호가 화를 낸 다음부터 사람을 공물로 바치는 일이 아예 사라졌다.
마을끼리 전쟁을 그치고 농토가 확장돼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토호들이 자식 교육에 대한 욕구가 강해졌다. 이민호는 고산국으로 유학생들을 받아주는 동시에 예전부터 추진했던 학교를 세우는 일도 점검했다. 초등, 중등 교육이 원주민 토호들 주도하게 잘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아직 대학을 세우기에는 교수 자원 부족으로 무리였다.
“아지는 원주민 교육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원주민들을 공장 같은 곳에서 제대로 부려먹으려면 적당히 교육시키는 편이 좋겠어요. 가끔 특출하게 뛰어난 원주민은 대학교육을 시키고 좋은 직업을 줘서 성공한 원주민 상으로 만드는 것도 좋을 거여요.”
아지는 지배계급으로서 교육의 용도를 먼저 생각했다. 원래 유구국의 방계 왕족 출신이며, 이민호의 후궁인 아라 공주의 시녀라면 고산국에서도 이미 지배계급에 편입됐다고 할 수 있었다.
“계속해봐.”
“만약 전하께서 원주민 교육을 지금 이상으로 확대하면 토호들이 자기들의 정치적 기반을 무너뜨릴 의도로 오해할지도 몰라요.”
“나는 그렇게 하려고 하는데? 바기오에도 대학을 세울 거야.”
루손 섬 북쪽 지역을 고산국의 완전한 영토로 편입하지 않았다. 전쟁 때 소집된 말레이계 원주민 병사들은 군인이 아닌 용병 자격으로 참전했다.
루손 북부지방 땅이 국왕의 소유가 아니므로 고산국과 달리 원주민들에게 기본 소득을 분배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도 세금을 받으므로 의료와 교육은 무료였다. 물론 의료와 교육은 고산국에 비해 수준이 낮은 편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말레이계 원주민들도 성적만 된다면 대학도 무료로 다니게 하려고 했다.
“토호 계급을 무너뜨리고 국왕전하 앞에서 모두가 평등한 신민이 되게 하려는 건가요? 장기적으로는 위험할 수 있어요. 왕립대학에서 번역 출간한 서양 책들 중에서 위험한 사상이 많아요.”
“왕한테 위험한 사상이라 해도 모든 사람에게 위험한 것은 아닐 거야. 권력이 분산되는 것은 역사의 발전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유럽에서는 귀족들에게 분산됐던 권력이 국왕 일인에게 집중되는 경향도 있어요. 물론 그 반대 흐름도 있지만요.”
어린 나이에 사서오경을 외웠다는 조선과 중국의 천재들보다 열세 살 상인 아지가 훨씬 똑똑한 것 같았다. 이민호는 유구국 왕족들의 교육체계도 언제 한 번 뜯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민호가 기대했던 유대인들은 뜻밖에 교육계나 상계에서나 아직까지 조용했다. 마치 태풍 전야 같아서 이민호가 불안감을 느낄 정도였으나, 유대인 젊은이들이 대학교육을 받으면서 지난 수백 년 동안 뒤쳐진 간격을 맹렬하게 따라잡는 기간으로 활용하는 것 같았다. 유대인들이 보석 세공은 아주 잘했다.
그 사이에 브루나이 공주들이 바기오에 도착했다. 이제 브루나이로 떠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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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지역은 대충 한꺼번에 몰아서 묘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