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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434화 (383/1,000)

00434  47. 1597년  =========================================================================

“지금까지는 유구국과 고산국의 특별관계를 감안해 유구국에서 이민을 받아들이지 않았어. 그런데 북미를 개발할 때는 수시로 국적 문제가 제기될 거야.”

만약 고산국에서 유구국 백성들의 이민을 허용해 항해 경험이 풍부한 선원들을 개인 단위로 흡수했다면 유구국은 벌써 멸망당하고도 남았다. 이민호가 유구국을 남겨둔 것은 유능한 항해자들을 배출해내는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국내 생산만으로 먹고 살기 어려운 유구국 백성들은 필사적으로 배를 타고 나라 바깥으로 나가야 했다. 그러면서도 왜구처럼 노략질하지 않고, 명나라 화교들처럼 아예 나라 바깥에 눌러앉지 않으면서도 상인으로서 살아남았다.

“백성들이 원하는 대로, 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유구국 백성들 일부가 국적을 이탈하는 것을 더 이상 막지 못한다는 말일세.”

“이해하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배를 타고 나간 백성들을 통제하기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누구든 태어날 곳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좋은 나라에서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백성을 다른 나라에 빼앗긴다면 빼앗긴 나라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런!”

이민호도 상풍 왕자의 발언에 전적으로 공감하긴 하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으로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이럴 때 보통 애국심, 충성심, 민족 어쩌고 하면서 이탈하는 백성을 막아야 하지 않나?”

“이민을 막으려고 고민할 그 시간에 차라리 더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저렇게 자신감 넘치는 지배자가 얼마나 있을까 싶었다. 당장 이민호만 해도 다른 나라로 이민 가겠다는 사람을 고깝게 볼 것만 같았다.

명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해외 이민을 적대시해서, 마닐라에서 에스파냐 군인들이 중국인 수만 명을 학살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영토에서 벗어나면 명나라 사람이 아니라 혈통만 중국인일 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해적이 돼서 명나라 해안을 약탈할까 두려워했고, 1570년대의 리마홍 등 실제로 그런 사례가 많았다.

“백성들이 좋아할 말만 골라서 하는군. 하지만 그런 말은 다른 나라 국왕 앞에서는 하지 말게.”

“백성들을 억눌러 못 움직이게 하고, 백성들을 잘 살게 만들기보다는 백성들을 속이거나 세뇌하는 쉬운 방법을 쓰는 지배자들에게는 그런 말 못합니다.”

“백성들이 잘 살게 만드는 일이 결코 쉬운 게 아니야. 그리고 웬만한 지배자들은 백성들이 잘 살게 되면 지배자의 말을 안 듣게 된다고 믿지.”

“일본이나 명나라 통치자들이 그런 식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죽을 똥 살 똥 해야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지배계급의 말을 잘 듣는다고 믿습니다.”

덕천가강은 후세에게 백성들이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하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농민들은 굶어 죽을 것 같으면 반란을 일으키고, 배가 부르면 정치에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원래 역사에서 에도시대 일본은 경제적으로 발전한 것 같으면서도, 백성들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은 항상 아슬아슬하게 살아오면서 흉년이 들 때마다 딸을 유곽에 팔아야 했다. 16세기와 달리 17세기에는 기후 변화로 인해 대규모 기근이 잦았고 식인 사건도 자주 벌어졌다. 막부에서 의도적으로 백성들이 못 살게 만들지 않더라도 17세기 일본 백성들은 충분히 못 살았다.

상풍 왕자와 함께 바닷가에 가서 가두리 양식장을 살펴봤다. 유구국에서는 고산국처럼 철망과 마닐라 삼을 이용한 튼튼한 그물로 바다 한가운데에 양식장을 만들지 않고, 지형지물을 이용해 물목을 그물로 막는 식으로 양식장을 운영했다. 태풍이 자주 지나가는 지역이라 그런 식으로 해야 양식장이 쓸려가지 않을 것 같았다.

“인공수정을 시켜서 치어를 부화시키나?”

“예. 고산국에서 운영하는 양식장을 직접 보기 전에는 말도 안 되는 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쉽게 따라할 수 있었습니다.”

창조보다 모방이 훨씬 쉬운 이유였다. 물론 이민호도 창조한 건 아니었지만, 다른 나라에서 쉽게 배워서 따라할 수 있는 사례를 보여줬다.

“잘하고 있어. 이렇게 해준다면 앞으로도 유구국은 안심이야.”

“다른 나라 통치자 같았으면 제 목숨을 노렸을 겁니다.”

“아니야. 똑똑한 경쟁자를 제거하기보다는 말이 통하는 이웃이 좋아. 자네의 치세가 기대되네.”

임진왜란 때 상풍 왕자가 덤벙거린 것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국왕이나 차기 국왕이나 똑똑한 사람들이었다.

“무술은 다 가르쳐주고 있나? 내 말은,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무기를 사용하는 무술을 수련하는 것을 금했냐는 말일세.”

“예전 같으면 반란이 일어날까봐 무기 사용 자체를 못하게 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품을 지키는 일이 더 급합니다.”

유구국이 자그마한 섬나라라지만 세 나라로 나뉘어져 있었다. 중산국 위주로 통합한 이후 각지에서 수시로 반란이 일어날 우려가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 가라데는 맨손 무술로서 비밀리에 전승됐다. 그러나 지금은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무기술을 포함해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다.

사로잡은 호랑이와 모피를 실은 배들을 고북에 보내고 다시 돌아올 때까지 이민호는 슈리 성에서 빈둥거리면서 지냈다. 왕궁에 돌아가면 붙잡혀서 다시 못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라 공주가 낮이나 밤이나 이민호의 목에 매달려 지낸다는 것이었다. 어느새 가슴과 엉덩이가 부풀어 오른 아라 공주의 유혹을 초인적인 인내로 견뎌내고 있었다. 유혹의 과실은 아라 공주의 시녀들이 따먹게 됐다.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시녀가 더 필요해요, 전하.”

“궁녀라면 상관없소.”

“아무한테나 중요한 일을 맡길 수는 없잖아요?”

아라 공주는 아나, 아마, 아야 같은 신분이 높은 시녀를 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민호에게 부담이 가중된다는 뜻이었다. 주저하는 이유를 알아챈 아라 공주가 이민호를 안심시켰다.

“아지는 겨우 열세 살인데 벌써부터 설탕 상회를 운영할 정도예요. 상회의 신용이 에스파냐 상인들에게 정평이 났어요.”

“오호! 열세 살이라.”

예전에는 어리다면 일단 거부감부터 들었는데 이제는 당장 안을 필요 없다는 이유로 더 낫게 생각됐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고스란히 이민호의 하렘 구성원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딱 한 명이라면 허락하겠소.”

“고마워요, 전하.”

아라 공주가 또 다시 이민호의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아라 공주를 일찍 재운 이민호는 또 다시 시녀들을 못 살게 굴었다. 아야는 아기와 함께 고산국 궁성에 남아 있었고, 아나의 건강한 몸과 아마의 후덕한 몸이 제물이 되었다. 물론 밤일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장 다음 날부터 아지라는 꼬마 숙녀가 고산국 왕실 일행에 합류했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이민호를 바라보는 아지는 조선말은 물론 스페인어도 능숙하게 구사했다. 유구국의 다급했던 사정이 인재를 억지로 만들어낸 것 같았다.

수송선들이 돌아오자 함대는 유구국 백성들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오랜 만에 필리핀에 가보기로 했다.

루손 섬 북부는 그 사이 몰라보게 달라져, 특히 바기오 남쪽의 팡가시난 지역은 온통 논밭으로 일구어졌다. 경작지 중간에 제발 숲을 남겨두라고 몇 번이나 반복했는데 안 듣다가, 홍수와 가뭄으로 피해를 받은 후부터 말을 듣는 편이었다.

바기오의 자그마한 궁전은 이민호가 순행할 때마다 비어 있었다. 총독은 다른 거처를 사용하고 궁전은 국왕 전용이 되었다. 이민호는 여송 총독에게 간단히 보고를 받았다.

“일로코스 지방이나 카가얀 협곡지역은 계획대로 개간이 진척되고 있습니다. 경작지가 넓어지면서 식량 작물과 상품 작물을 모두 재배할 수 있어서 이 지역 주민들의 소득이 많이 늘었습니다.”

일로코스는 북부 루손 섬의 서부, 카가얀 협곡은 동부였다. 상품 작물은 주로 사탕수수를 선택해 재배했는데 기후가 좋아 고산국보다 생산성이 높았다. 고산국에서 사탕수수 재배를 줄이는 결단을 내린 것은 이 지역을 믿었기에 가능했다.

“팡가시난 지역은 논농사에 적합한 지역이지만 거의 매년 홍수와 가뭄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열 자나 길게 자라는 이 지역 벼 덕택에 홍수는 그럭저럭 버티지만 가뭄에는 말라붙어버립니다.”

“바기오 동쪽에 강이 여러 개 있지요? 그 중에 적당한 협곡을 틀어막아서 보를 만드시오. 수력발전소를 세워 광산에 전기를 공급해도 좋겠지요.”

“아그노 강 상류를 막으면 어마어마한 호수가 만들어질 것 같습니다. 바기오 전체에 전등을 켜도 남아돌 것입니다. 다만......”

총독이 눈치를 보기에 이민호가 기탄없이 말하라고 했다. 총독이 한참 망설이더니 충언이랍시고 조심스럽게 고했다.

“다만 대규모 토목공사를 하는 것은 망국의 징조라고 배웠습니다. 건설비용이 많이 들 것입니다.”

“그 정도는 결코 대규모가 아니오. 그리고 경작지를 가뭄과 홍수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은 요순시대부터 내려온 국가적 중요 사업이오. 이번에 가져온 중장비와 복건성 임노동자들을 잘 활용하시오.”

“예, 전하.”

북미의 댐들이 대공황을 타개하기 위한 뉴딜 정책을 진행하면서 억지로 지어졌기에 시원스레 댐을 폭파시켜 원상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홍수와 가뭄을 방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댐이었다.

이민호는 댐 옆에 어도를 만들 생각을 했다. 보통은 어도를 설치해도 물고기가 제대로 올라가지 못한다. 그리고 이 시대에 생태계를 고려하면서 대규모 개발을 진행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민호는 장난삼아 물고기 승강기를 만들기로 했다. 어도를 타고 올라오는 물고기를 커다란 수조에 퍼서 풍부한 전력을 이용해 댐 위로 퍼 올리는 장치였다.

“하오나 파나마 운하를 파고 있으며 북미에 도시를 만들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조선에서 양회를 제대로 공급할 수 있을지요?”

“양회는 충분히 공급하고도 남아요. 절대 걱정하지 마시오.”

시멘트의 주요 재료인 석회석은 세계적으로 산출량이 풍부한 광물이었다. 조선 말고도 일본이나 베트남, 시암에서도 대량으로 구할 수 있고, 심지어 파나마에 가까운 멕시코에도 석회석이 풍부히 매장돼 있었다. 그러나 시멘트 제조법을 다른 나라에 가르쳐주지 않으려고 멕시코에 시멘트 공장을 세우지 않은 것뿐이었다.

이민호가 바기오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마닐라에서 전령을 급파했다. 민다나오에서 보낸 사신이 마닐라에 도착해 이민호를 알현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기 때문이다.

이민호는 전선을 마닐라로 보내 민다나오 사신들을 바기오로 데려오게 했다. 덤으로 필리핀 총독 프란시스코 데 테요 데 구스만도 같은 배를 타고 따라왔다. 이민호를 중심으로 민다나오 사신들과 필리핀 총독부 사람들이 팽팽히 대치했다.

“멀리 서양에서 온 자들이 다짜고짜 필리핀이라는 지역을 설정해서 다 자기들 영토라고 주장한 것이 문제의 근원입니다. 저희들이 조상 대대로 살아온 민다나오도 당연히 자기들 땅이라고 수차례 군대를 보내니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민다나오는 필리핀의 다른 지역과 많이 다르지요.”

술루 왕국 사람들처럼 머리에 터번 비슷한 것을 두른 민다나오 사신들과 이야기가 의외로 잘 통했다. 에스파냐가 동남아시아에 오지 않았더라면 민다나오 사람들과 싸울 일도 없었을 것이다. 통역관에게서 귓속말로 대화 내용을 전달받은 구스만 총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폐하! 민다나오의 일부 해안가 주민들이 다른 섬에서 해적질을 하는 모양이지만 과장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에스파냐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슬람을 혐오해서 벌이는 종교전쟁 측면이 있습니다.”

“흠. 그런 면이 있겠구려.”

지금까지 필리핀 총독부가 벌인 전쟁을 놓고 보면, 브루나이와 술루 왕국, 민다나오로서 모두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지역이었다. 점령해봤자 경제적으로 크게 도움이 안 되고 몇 번이나 실패했는데도 계속 원정을 보내는 것을 보면 경제적 요인보다는 종교적 동인이 더 컸다고 볼 수 있었다.

“고산국 국왕폐하께서 해적질을 몹시 혐오하시는 것을 저희도 이해합니다. 폐하께서 일본을 징치해서 일본이 결국 망한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저희 술탄도 폐하를 두려워하고 계십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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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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