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425화 (374/1,000)

00425  47. 1597년  =========================================================================

“우리 멍멍이는 왜 화났어?”

“저는 미리 골동품에 투자하지 못해서 골이 난 거여요. 이젠 늦었으니 투자는 안 할래요. 황상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던가요?”

자리에 앉은 이민호의 목에 매달리며 왕명명이 애교를 떨었다. 같은 키의 여자라도 왕명명의 몸은 근육으로 이뤄져 있어서 훨씬 무거웠다.

“인사차 들른 건데 별 것 있겠어? 사천 묘족 양응룡이 반란을 일으키면 진압해라는 것밖에 없어. 나머지는 저번에도 했던 절차야. 선물 바치고, 새로 개발한 기물이 있으면 마치 선생님이 학생 숙제 검사하듯이 황제가 살펴보는 게 다야.”

“황실에서 쓰겠다는 기물은 없죠?”

“응. 사람한테 시키는 게 더 편한가봐.”

“까르르~ 역시 그렇겠죠.”

이민호가 눈짓으로 왕명명이 명나라에 와서 알아낸 것이 있는지 물어봤다. 황제가 세금을 올리고 은광을 개발한다면서 환관들을 사방에 파견해, 이들이 끼치는 민폐가 말도 아니게 심했다. 명나라가 망한 것은 이들 환관 때문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환관들이 상세를 많이 걷는 바람에 다른 곳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쑤저우가 난리예요. 사대문을 막아 통행세를 받고 시장에서 상세를 따로 받아요. 면포나 비단을 짜는 곳을 찾아가서 직조기마다 세금을 부과했어요. 직조소 점주들이 파산하고 직업을 잃은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어요.”

강소성 쑤저우(蘇州)는 절강성 항저우에서 북쪽 100km 거리로, 두 도시 모두 교통의 요지로서 강남 각지의 물산이 집결하는 도시였다. 특히 소주는 풍부한 인력과 원료 공급을 바탕으로 성장하던 명나라의 공업도시였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아?”

“적당히 세금을 감해주는 대신 소요사태의 주동자라고 몇 명이 희생하겠죠. 이런 소요사태가 발생하면 항상 그런 식으로 해결해왔어요.”

소요사태를 막아야 하므로 환관들도 유화국면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으나, 노동자들이 일단 황명에 거역해 소요를 일으켰으니 처벌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이런 일이 생기면 양쪽의 파국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주동자도 아닌 사람 몇몇이 스스로 자원해서 반역죄 수괴라는 죄명으로 처형당했다. 다른 이들을 대신해 대표로 희생하는 사람들이 이 시기까지는 있었다.

“이 모양인데도 부자들의 사치는 여전하고?”

“그럼요. 올해도 전복과 해삼 가격을 5할 정도 올렸어요. 그런데도 은값이 떨어졌으니 가격을 더 올려야 한 대요. 홍삼은 가격을 두 배로 올리는 대신 기존 거래처에만 소량씩 넘기기로 했어요.”

현대 중국에서 오래된 건물의 벽을 해체할 때 벽 안에서 금과 은이 쏟아지는 경우가 흔했다. 부자들이 재산을 숨기는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부자들이 그 재산을 후손에게 넘기지 못하고 죽는 경우도 흔했다. 사치가 나라를 망치기도 하지만, 나라가 망할 것 같은 분위기가 감지될 때 위기의식을 느낀 부자들의 사치도 심해졌다.

“명나라 전체적으로 불황이라는데 멍멍이 너는 장사를 아주 쉽게 하는구나.”

“부자들은 항상 돈이 많아요. 황제는 부유한 사람에게서 받는 세금을 올리지 않고 생산 현장에 물리는 세금을 대폭 올렸어요. 세금 걷기 쉬우니까 그렇겠지만 생산이 심하게 위축되고 있어요.”

환관들이 부자들로부터 세금을 걷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 시대에 재산세 제도가 없다 보니 방법이 다를 뿐이었다. 환관이 광부들을 데리고 와서 부자 저택 마당에서 은광을 개발하는 시늉을 하면, 부자가 뇌물을 바쳐 무마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 뇌물이 정상적인 세금으로서 국고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내는 것이 훨씬 많아졌는데 조정의 국고는 여전히 텅텅 비어 지방관들에게 세금 징수를 독려했다.

“주인님은 명나라가 언제 망할 것 같아요?”

“모르지. 지금 당장 망해도 이상할 것 같지가 않아.”

“지금도 여기저기서 봉기하고 있어요.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군사들이 신나게 달려가서 잔인하게 진압한 다음 주변 지역을 철저히 약탈해요. 그럼 다음에는 더 큰 반란이 일어나요. 역시 내란이 일어나서 망하겠죠?”

“내란과 외환이 동시에 일어나기 쉽지 않을까?”

이민호는 명나라가 망하는 시기와 원인이 실제 역사와 달라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까지는 건주여진이 명나라를 집어삼킬 거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민호가 보기에도 몇 만 안 되는 건주여진은 아직 명나라에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이틀 후 박동량 등 조선의 동지사 일행을 함대에 태우고 한성으로 향했다. 다음 날 강화 교동도 남산포에 정박해 교동현감의 영접을 받았다. 교동도는 개펄이 넓어 매년 조금씩 바다를 간척해 논으로 만들어나가는 지역이었다.

“강화도에 배를 보냈으니 내일 아침 일찍 출항해 한강으로 들어가실 수 있을 겁니다. 객사로 모시겠습니다.”

명나라 고관이 교동도에 들른 경우는 극히 드물고 특히 동지사가 서해를 통해 조선에 귀국한 것은 처음이었다. 교동현감이 한겨울에 땀을 뻘뻘 흘리며 접대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민호는 뱃멀미로 고생한 동지사 일행과 호위들만 데리고 교동도에 상륙했다. 꾀죄죄한 옷을 입은 어촌의 아이들이 고산국 병사들이 입은 화려한 정복을 보면서 시끄럽게 떠들며 따라다녔다.

“아찌! 나도 고산국에 가서 병사가 되면 저런 옷 입을 수 있어요?”

“그럼! 병사만 되면 한 달에 은 다섯 냥씩 녹봉을 받아. 옷과 장비는 공짜로 받아.”

“우왕~ 정말요?”

이민호는 조선을 방문할 때마다 항상 영업적 마인드를 가지고 선전과 홍보에 열을 올렸다. 조선이 경기가 활황이라지만 이런 시골구석까지 경제적 혜택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시대든 살기 어려운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고, 그런 자들이 고산국으로 이민 행렬을 이어갔다.

그날 저녁 부모들이 철없는 아이들을 두들겨 패서 집집마다 애들 우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어민들이 심하게 마음이 흔들린 다음이었다.

“사실 교동도는 자그마한 섬이고 조기가 제철이 아니라서 귀한 분들께 대접할 게 별로 없습니다.”

“꽃게찜이라도 해주시오, 현감.”

“천한 음식이라도 괜찮을지요.”

“현지에서는 현지 음식을 먹어야지요. 동지사 일행도 있으니 기본은 갖춰야겠구려.”

이민호가 현감과 대화하는 중에 민영이 현감에게 은괴를 찔러주었다. 접대예산이 없어 쩔쩔 매던 현감이 민망하면서도 고맙게 받아들였다.

객사에서 연회를 벌이는데 제철도 아닌 꽃게찜이 무척 맛있었다. 감칠맛이 난다고 할까, 역시 해산물은 산지에서 먹어야 했다.

“천한 음식을 맛있게 드셔주시니 제 입장에서 무척 송구스럽습니다. 꽃게는 봄여름 산란기에 살이 차오를 때가 가장 맛있습니다. 여기 교동도에서 연평도까지 통발도 아니고 그물로 긁어도 가득 잡을 수 있습니다. 다른 지역 꽃게보다 맛있지만 다만 멀리까지 가져가서 파는 방법이 없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이거 장기적으로 수입하면 좋겠소. 고산국 왕도까지 살려서 못 가져가는 모양이지요?”

“예. 해동상단 상인들이 겨울에는 얼음에, 여름에는 톱밥에 보관해 조금 가져가는 정도입니다.”

고산국 주변이나 심지어 필리핀 같은 따뜻한 바다에서도 이곳과 같은 종류의 꽃게가 잡혔다. 그러나 이렇게 맛있지 않았고, 대량으로 잡히지도 않았다. 적절한 수심과 해저 토질 같은 해양 환경이 맞아야 하는 모양이었다.

“배에 바닷물을 담고 그 수조에 게를 싣고 가면 어떻겠소?”

“금방 죽을 것 같습니다.”

“물속에 공기를 만들어낼 수 있소.”

“그렇다면 며칠 살려서 옮길 수 있습니다.”

꽃게를 대량으로 운송하는 일은 해동상단과 어업연구소를 통해 차차 알아보기로 했다. 외국의 산물을 쉽게 수입하도록 만드는 일도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정치가들이 신경 써야 할 일들 중 하나였다.

“현감도 아시다시피 경기수영이 남양에 있어서 수도 한성으로 연결되는 한강을 지키기 어렵소. 아마 조선 조정에서는 조만간 이곳 교동도로 경기수영을 옮길 것이오.”

“이 작은 섬에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공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군대가 이동하면 보급이 가장 큰 문제였다. 현감은 자기 임기 중에 수영이 옮길 것도 아닌데 신경을 많이 썼다.

“한산도도 작은 섬이지만 삼도수군통제영이 들어섰지 않소? 만약 교동도가 조기와 꽃게 어업의 중심이 된다면 경기수영을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오.”

“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비변사에 건의해보겠습니다.”

교동현에서 조기와 꽃게 어업을 지원하면서 세금을 받으면 수영에 필요한 병참지원이 가능할 거라는 충고를 현감은 제대로 이해했다. 얼마 후에 교동도는 경기수영뿐만 아니라 경기도, 황해도, 충청수군까지 관할하는 삼도수군통어영이 들어서고, 교동현은 교동부로 승격한다. 경기수사가 삼도수군통어사 겸 경기수사 겸 교동부사가 된다.

“제독 총병관 대인! 저 고언백입니다. 기억하시죠?”

“오! 경기방어사 아니시오? 한성 탈환 때 이후로 처음 뵙는구려. 고 방어사는 이 섬에 살고 계시오?”

전 경기방어사 고언백이 아들 고덕준과 함께 객사로 찾아왔다. 현감과 좌수 등 양반들이 고언백의 등장에 대놓고 싫어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이민호는 함께 싸운 전우를 반갑게 맞이했다.

고언백은 향리 중의 한 직종인 공생(貢生) 출신이라 무과급제자라 해도 양반들에게 무시당하는 처지였다. 실제 역사에서 1599년 교동 현감 이억창이 고언백의 집에 부역을 부과하자 고언백이 현감을 두들겨 팼다는 경기 감사의 보고가 실록에 실려 있다. 그 외에 민전을 탈취하고 인명을 학살하며 세력을 믿고 횡포를 부렸다는 고발도 했다.

“내 옆자리에 앉으시오.”

“영광입니다, 대인.”

고언백은 임진년 말에 양주목사 겸 경기방어사로 승진하기 전에도 경기도 곳곳에서 여러 차례 승첩을 올렸다. 계사년 초 행주대첩 때는 한강 남쪽에서 병력 2천을 수시로 이동시키며 왜군의 주목을 끌었고, 그 직후 한성 탈환 때는 직접 한성에 주둔하기도 했다.

“지금은 벼슬에서 물러나셨소?”

“그렇습니다. 경기방어사로 있다가 대인 덕에 한성 탈환이라는 큰 전공을 세우고 몇 차례 영전했습지요. 지금은 전쟁이 끝나 물러났습니다.”

“교동은 참 좋은 곳 같소.”

“그래서 임해군께서도 교동에 계신 것 아니겠습니까?”

연회장이 갑자기 싸늘한 분위기로 돌변했다. 동지사 정사 박동량은 꽃게의 빨간 집게를 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민호가 눈치를 못 채고 고언백에게 물었다.

“임해군이 교동에 계시오? 연회에 모시고 오지 그러셨소?”

“임해군은 위리안치 중이라서 말입니다. 하하!”

“저런요!”

고언백의 말에 따르면 현재 교동별장이 병사들을 지휘해 임해군이 유배 중인 집 주변에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다고 했다. 임해군은 평소에도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재물을 빼앗다가 백성들에게 욕을 많이 먹은 인물이었다. 광해군 즉위 직후 사병을 양성한다는 이유로 체포돼 진도에 유배 갔다가 현재는 교동으로 옮겨졌다.

워낙 인심을 잃어서 사형에 처해도 충분했을 텐데 광해군은 아직도 임해군을 사사시키지 않았다. 지금도 홍문관을 비롯한 삼사에서는 임해군을 죽이라는 진언이 끊이지 않고, 전국적으로 상소가 올라와도 광해군이 필사적으로 가로막았다. 임해군이 아무리 욕을 먹는다 해도 동생인 광해군 입장에서 형을 죽이기도 어려웠다.

“전에 대인께서 임해군을 만나시지 않았습니까? 드디어 약속을 지킬 때가 왔습니다.”

“무슨 약속이요?”

이민호가 어리둥절했다. 임진왜란 중에 행재소가 위치한 정주에서 임해군과 순화군을 만났던 것을 이민호는 뒤늦게 기억해냈다. 그런데 임해군과 순화군이 이민호에게 욕을 퍼부어서, 반대로 선조 임금을 통해 창피를 단단히 준 것만 기억났지 뭔가 약속을 한 기억은 없었다.

고언백이 목소리를 낮춰서 이민호에게 말했다.

“임해군께서 제게 밀지를 내리시길, 고산국 주애공께서 교동도에 오셔서 주군을 탈출시킨 다음 고산국으로 모실 거라고 했습니다. 과연 주애공 대인께서 약속을 잊지 않고 오셨군요.”

“예? 나는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소. 한강에 진입하기 전에 강화부의 허가를 기다리려고 교동도에 정박한 것뿐이오. 고 방어사는 그런 황당한 말을 믿었단 말이오?”

그러나 고언백은 이민호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주애공은 그 약속을 지켜서 주군인 임해군 전하께 고산국을 바치도록 하시오. 주군께서 주애공을 개국공신으로 예우할 것이오.”

“뭐요?”

“어허! 어명을 듣지 않고 뭐하는 게요? 당장 엎드려 어명을 받드시오! 그리고 고산국 병사들을 동원해 교동도 전체를 장악하시오. 뭐하시오? 어서요!”

고언백이 이제는 아예 대놓고 하대를 했다. 임해군이 어떻게 구슬려 놓았기에, 임해군이 고산국 왕이 되면 고언백이 이민호보다 더 높은 직책을 차지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민호가 교동 현감에게 고개를 돌렸다. 현감은 어이가 없는지 콧방귀를 뀌고 있었다.

“주애공 대인! 죄송합니다. 위에 보고는 올렸으나 워낙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해서 제재도 가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도 아주 조금 주애공 대인을 의심한 것이 사실입니다.”

“내가 뭐하러 임해군에게 고산국을 바치겠소? 비록 내가 인망이 없고 나라를 다스릴 재주가 부족하다 하나 나라를 망치고 싶지 않소. 임해군 같은 사람이 덜 된 자에게 나라를 맡길 리도 없지 않소?”

“바로 그렇습니다. 여봐라! 이 자들을 당장 밖으로 내치거라!”

나장들이 들어와 고언백 부자를 끌고 객사에서 나갔다. 이민호는 골치가 아팠다. 제멋대로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까지 심각한 정신병자들도 드물 것 같았다.

“어? 이건 아닌데. 주애공 대인! 주군 말씀을 들으셔야죠!”

고언백이 나장들에게 끌려가면서 애절하게 부르짖었다. 고언백도 임해군과 비슷한 사람이라 임해군의 허풍에 쉽게 넘어간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많이 늦었습니다.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