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24 47. 1597년 =========================================================================
다음 날 아침 일찍 황제가 불러서 부랴부랴 황궁에 입궁했다. 정문인 오문에 문 세 개가 있는데 부마도위도 종실이라 서문으로 출입해야 했다. 이민호와 여자 호위들을 제복으로 알아본 명나라 관료, 태감, 위사들이 분분이 비켜섰다.
이민호 일행은 정전으로서 나중에 태화전으로 개칭되는 황극전이 아니라, 한참 안쪽으로 들어가 편전인 건청궁에 입궁했다. 뻘건 벽으로 둘러치고 황금색이 되다 만 누런 기왓장으로 전각이 뒤덮여 있는 곳이었다.
“어젯밤에 황태후 마마께서 불렀단 말이지?”
“예! 첫째 황자마마도 뵙고 인사 올렸습니다. 쿨럭! 켁! 켁!”
“아무리 어마마마라지만 천한 궁녀 출신이라서 그런지 역시 행동거지가 천박하단 말이야.”
장남 주상락의 어머니가 천한 신분인 궁녀 출신이라서 황태자 책봉을 반대한다는 사람이 만력제였다. 그러나 만력제의 어머니 자성 황태후 역시 궁녀 출신이었다. 그리고 만력제는 황태후 앞에서 대놓고 그런 말을 하기도 했다. 패드립 겸 자학 개그였다.
만력제는 어제 이민호가 황태후와 주상락 왕자를 만난 일을 훤히 알고 있었다. 심지어 바로 얼마 전에 주상아가 임신한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이른바 십만여 명의 환관과 궁녀들에게 봉사를 받고 아편에 절어 살면서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는 황제는 최소한 국내외 정보는 확실히 틀어쥐고 있었다. 명나라에서 제대로 일하는 부서는 동창과 금의위밖에 없는 것 같았다.
“폐하! 창문 좀 열어도 되겠습니까? 황공하오나 도저히 못 참겠습니다.”
환관과 위사들을 따라 27개나 되는 건청궁 침실 중 하나로 들어갔더니 황제가 피운 아편 연기로 넓은 침실이 완전히 너구리 굴 수준이었다. 보통 담배연기로 가득 찬 곳이라면 참고 버티겠지만 아편 연기에는 구역질나는 기운이 들어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아편을 피우지 말라고 권했겠지만, 만력제는 몸 이곳저곳이 아픈 사람이라 말리지 못했다. 황제라서 못 말린 것도 있었다.
“풋! 자네에게도 약한 면이 있었군. 춥지만 어쩔 수 없지. 창문 열어.”
위사가 창문을 열자 찬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북경의 메마른 추위는 이민호가 적응하기 어려웠지만 아편 연기에 토할 것 같은 때보다 훨씬 나았다.
“자네는 아편은 물론 담배도 안 피우나 보군. 서역에서 좋은 게 들어왔는데 자랑도 못하겠어.”
“안 피웁니다.”
“그래. 오래 살고 싶으면 피우지 말게. 임신한 상아를 위해서라도.”
“다음에 뵐 때는 외손주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북경에 오면서 황제에 의한 암살 가능성을 전혀 우려하지 않았다. 고산국은 명목상 명나라 남동쪽과 바다를 지키는 보루였으며, 이민호는 황제에게 쓸모가 많은 사위였다. 보바이의 난을 진압하고 일본을 정벌함으로써 황제의 위엄을 드높였고, 아편 외에 필요한 사치품은 무엇이든 구해주었다. 북경 제일의 부자들도 구하기 어렵다는 해달 모피를 열 장이나 황제에게 바친 것도 이민호였다.
“상락이 같은 그런 멍청이를 쓸데없이 왜 만났나? 애비 앞에서 말 한 마디도 못 꺼내는 겁쟁이라네.”
“곧 황태자로 책봉되실 분이니 제후국의 왕인 저로서는 마땅히 인사를 올려야지요.”
“상락이 황태자가 될지 안 될지 어떻게 알아?”
“적장자가 없으면 적자, 적자가 없으면 장자 순이 종법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배웠습니다.”
황제가 몹시 불만스런 표정이었다. 그렇다고 이민호에게 직접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게 답답해서 이민호가 제안했다.
“주상락 황자가 마음에 안 드신다면 폐하께서 정식으로 다른 황자를 황태자로 책봉하십시오. 만조백관들은 황제폐하의 어지를 따를 것입니다.”
“험! 험! 그러고 싶지만 여태껏 태정을 해오다가 유독 책봉문제에서 혼자서 밀어붙이는 것은 곤란해. 만조백관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상순이를 황태자로 책봉하자고 주청해야 충성스럽다고 할 수 있어. 우리 상순이를 만나보면 자네도 마음에 쏙 들 거야. 얼마나 귀엽고 똑똑하다고.”
열 살 갓 넘은 애가 똑똑해봤자 얼마나 똑똑할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어미인 정 귀비가 시키는 대로 황제에게 애교를 떨었을 것이라고 이민호는 생각했다. 어린애가 사서삼경을 줄줄이 외웠다는 이야기는 정치가라면 하도 많이 들어서 신기하지도 않겠지만, 만약 황제가 총애하는 귀비의 자식이 그랬다면 전혀 달라보였을 것이다.
정 귀비는 황제에게 총애를 받는 동안 어떻게든 자기 아들 주상순을 황태자로 책봉시키려고 노력했다. 정 귀비는 후계 문제와 태창제 사망에 관련된 여러 의혹 사건에 줄줄이 연루됐고, 끝내 자결하게 된다.
“어차피 똑같은 황제폐하의 핏줄인데 황자님들이 달라봐야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폐하의 핏줄을 타고 난 의용 공주는 똑똑하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은덕을 베풀어 고산국 백성들이 어머니처럼 따르고 있습니다. 능력도 중요하지만 덕이 있어야 백성들이 따르는 법입니다. 마치 황제폐하처럼 말씀입니다.”
“내가 덕이 좀 있지. 무위의 도로 다스려도 백성들이 나를 따르고 태평성대가 이어지지 않나?”
“어떤 의미로든 폐하께선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황제는 인의 장막에 가로막힌 것이 아니라, 좋은 이야기만 듣는 사람이었다. 태정 이후 만력제가 조회에 전혀 안 나온 것은 아니었다. 1615년 정격안, 즉 장차라는 벌목꾼이 자경궁에 난입한 황태자 시해 미수 사건 때 장차의 배후로 지목된 정 귀비와 황태자 주상락을 함께 데리고 조회에 등장해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없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 황제 얼굴을 처음 본 대학사를 비롯한 고관대작들이 오줌을 질질 싸거나 기절했고, 이 기회에 국사를 주청하려던 신하는 금의위 위사들에게 두들겨 맞고 쫓겨났다. 물론 그 뒤로는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조회에 등장하지 않았다.
“전화기라는 것을 사용한다면서?”
“예. 멀리 있는 사람을 급히 불러서 일을 부려먹으려고 만들었습니다. 100리 떨어진 곳까지 구리선을 연결해 사람의 말을 즉시 전달할 수 있습니다.”
국무회의에서 외국에 수출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는데 잘하면 명나라 황궁에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민호는 어떻게든 전화의 장점을 강조하려고 했다.
“흐음. 그런데 만약 짐이 전화를 했는데, 전화를 받는 신하가 무릎을 꿇고 있는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나?”
“지금 기술로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아! 환관을 미리 보내서 확인하는 수가 있겠습니다.”
“급하면 보내기 어렵지. 차라리 환관을 보내 불러오는 게 낫겠군. 전등이란 것은 뭔가?”
황제는 군사용이나 긴급 연락용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저 황제가 신하들을 부려먹을 생각만 했다.
“전등은 밤에 불을 환히 밝히는 것입니다. 동력은 쏟아지는 계곡 물로 물레방아를 돌려 만듭니다. 브루나이에서 나는 시커먼 석유라는 것을 태워서 동력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흐음. 횃불이나 등을 키고 끄면서 순찰하는 역할도 겸하는데, 전기는 그렇게 하지 못하겠군.”
“그런 면은 있습니다만, 몹시 밝게 할 수 있습니다.”
황제가 고산국의 문물을 예의주시하는 것도 신기했고, 별 희한한 이유로 팔릴 것 같지 않는 것도 웃겼다. 진상품으로 바친 자전거는 황제가 그 육중한 몸매로 탈 수가 없어 나중에 곡예단에게 넘어갔다.
“파주 선위사 양응룡 있지 않나?”
“아! 사천에 묘족 출신 지휘사 말씀이십니까? 몇 년 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항복해서 용서를 받았다기에 의아하던 참이었습니다.”
“주애공도 묘족을 부려봐서 잘 알 거야. 주인을 물어뜯는 놈들이지.”
“맞습니다. 일본을 정벌할 때 소규모 병력을 고용했는데 무슨 요구가 그리 많은지 짜증날 정도였습니다.”
“남해도에서 사는 묘족은 그나마 나아. 그러나 사천에 모여든 묘족들은 효경의 족속들이라네.”
효경(梟獍)은 어미를 잡아먹는 짐승들을 뜻했다. 묘족들에게 해준 것이 아무 것도 없는 황제가 보기에 반란을 일으키는 자들은 은혜를 모르는 배신자들이었다.
“혹시 반란을 일으킬 기운이 돌고 있다면 선제적으로 진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애공 자네가 진압을 해줄 의향은 없나? 선부 말고 다른 곳에서는 병력을 빼기 곤란해서 말일세. 요즘 몽골도, 여진족도 조용히 지내는 법이 없다네.”
입궁하면서 황제에게 바칠 선물을 태감에게 전해줬는데, 이때 환관들이 선물 상자를 들고 줄줄이 들어왔다. 황제는 이민호와 대화를 하면서 선물 상자를 하나씩 뜯어봤다. 같은 모피 옷이라도 남성용보다는 여성용 옷을 보고 황제가 흐뭇한 미소를 지어 이민호는 소름이 끼쳤다.
이민호는 황제와 후궁들에게는 주로 비싼 물건을 바치고, 조정에는 주로 은을 전달했다. 고산국이 명나라와의 무역에서 엄청난 흑자를 얻고 있지만, 이렇게 황제와 조정에 뇌물을 바치니 아무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진압해드리고 싶지만 바닷가라면 몰라도 내륙 깊이 들어가는 원정은 자신 없습니다.”
“여진 기병 2만도 있고, 여러 보병연대가 있잖나? 흑인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낸 것 같더군.”
명나라 황제라는 사람이 고산국의 군사 현황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고산국에 명나라 출신 백성이 꽤 있고 여전히 국적을 유지하는 상인 거주자들도 많아 웬만한 군사기밀은 숨기기 어려웠다.
“반란이 일어나서 진압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 같으면 제게 조칙을 내려주십시오. 마땅히 도와드려야지요.”
“주애공 자네 덕분에 항상 든든하다네.”
“그 동안 제가 폐하께 은혜를 입은 게 훨씬 많습니다.”
“앞으로도 잘 지내보세.”
“앞으로도 황상께 신세를 지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민호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앞으로 50년 안에 고산국이 명나라의 힘을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선조 임금처럼 만력제도 역사와 달리 그리 오래 살 것 같지 않았다. 그 동안 몸에 살이 많이 붙었고 등이 심하게 굽었다. 예전에 악어를 진상했을 때 봤던 가짜 황제처럼 자바 헛 같은 몸매가 됐다.
“민영이 불안했어?”
“예. 주인님이 어떻게 잘못 될까봐 황궁에 오기 싫어요.”
그러나 황궁 안에서의 일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민호는 내각 대학사를 만나기 위해 남쪽으로 걸었다.
“깜빡했는데 황제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가 무기를 갖고 있게 하더라? 황제가 허락했을까?”
“권총이 무기라는 사실은 금의위 위사들이나 장번내관들이 알고 있던 눈치였어요. 그리고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을 거여요.”
“그럼 왜 압류하지 않았지?”
“권총이 무기인 줄 모르는 자들은 침전 바깥에 있었고, 아는 자들은 황제 옆에 있었으니까요. 우리가 이미 침전에 들어와 버렸으니 황제에게 책임지기 싫었겠죠.”
이민호나 민영이 허리에 찬 권총을 뽑아서 쐈으면 황제는 죽은 목숨이었다. 물론 이민호 입장에서야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지만, 황제 경호 체계에 문제가 생긴 것은 분명했다.
이민호는 황궁 안에서 내각 대학사와 각부 상서, 시랑들을 만났다. 국익을 지키기 위해 이민호에게 호통을 치는 애국자는 하나도 남지 않았고, 뇌물을 한 푼이라도 더 받기 위해 살살 아부하는 소인들만 남았다. 이민호는 몹시 유쾌해져서 원래 계획보다 은을 더 많이 뿌렸다.
그 사이 예국 참판은 환관들이 수장을 맡은 부서들을 돌면서 뇌물을 돌렸다. 태감들이 예국 참판을 돌아가신 조상님 모시듯이 깍듯하게 모셨다.
이민호가 오후에 옥하관으로 돌아왔다. 공무역을 맡은 왕명명이 난간에 앉아있는데 입이 댓발이나 나와 있었다.
“우리 멍멍이 기분 나쁜 일 있어?”
“주인님~”
왕명명이 폴짝 뛰어 이민호에게 안겼다. 가슴에 얼굴이 파묻히면서 숨이 막힐 것 같아 얼른 왕명명을 떼어 냈다.
“북경 시장 여러 곳을 돌아봤는데 유리창 빼고는 거의 망했어요,”
“유리창?”
“골동품 상가 말이에요. 혹시나 해서 가봤더니 거기만 활황이에요. 다른 장사가 안 되면서부터 골동품 가격이 미친 듯이 치솟고 있어요. 당연히 투자용이죠.”
“명나라가 망하려나?”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나라의 흥망성쇠를 파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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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