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21 46. 1596년 =========================================================================
“예? 전화기를 이용해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신속하게 연락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다른 나라보다 본국이 경쟁력에서 앞서게 하는 요인들 중 하나입니다.”
“꼭 그럴 필요 있겠소? 나는 이것을 외국에 팔아먹을 생각도 하고 있는데요.”
“예에?”
이민호는 20세기 전후에 주로 군사용으로 이용된 전보를 생각했다. 먼 거리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일일이 전봇대를 세운 다음 전선을 연결하고 기껏 모스부호를 쳐서 짧은 문장을 주고받았다. 전깃줄을 연결하는 기둥에 전봇대나 전신주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였다.
그러나 이런 간단한 전보라도 당시에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에 큰 자금을 투자해 전보 체계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전보가 없으면 사람이 말 타고 직접 뛰어야 하는데 그 시간을 감안하면 돈을 써서 전봇대를 세우는 게 훨씬 나았다. 그리고 전화는 전보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전달할 수 있었다.
“아니 될 말씀입니다. 만약 다른 나라도 우리처럼 빠르게 보고나 정보 교환을 할 수 있게 된다면 국력을 몇 배로 키워주는 셈이 됩니다. 에스파냐가 비록 우호국이라 하나 절대 전화체계를 넘기면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전하. 오히려 에스파냐 상인들이 몰래 사간 전화기를 돌려받아야 합니다. 복제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전화기를 외국인에게 팔지 못하게 법으로 정해야 합니다.”
“지금 왕도에서만 해도 무수히 많은 외국인들이 전화를 사용하고 있소. 그들도 전화를 못 쓰게 해야 할까요?”
“그건 아닙니다만.”
전화기 수출을 법으로 금지한다 해도 현실적으로 과연 지켜질지 알 수 없었다. 지금도 수없이 많은 명나라 어선들이 고산국에 들러 각종 상품을 구입해갔다. 국제무역상으로 등록하면 연말에 이익을 정산해서 세금을 내야 하기에 이런 식으로 일 년에 한 번만 들러서 사실상 밀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외국인이 전화기를 못 살 리가 없었다. 에스파냐가 그랬던 것처럼 내국인을 통해 얼마든지 살 수 있었다. 어느 나라든 개인 이익을 위해 나라마저 팔아먹는 매국노가 생기는데, 그깟 전화기 한 대 팔아먹지 못할 리가 없었다.
“글쎄요. 에스파냐 사람들이 전화기를 뜯어봐도 복제는커녕 뭘 알아낼까 싶소. 송수화기를 분해하면 시커먼 숯 알갱이가 우수수 떨어지겠지요. 하지만 대신들이 그리 반대하니 외국에 판매를 하지 않겠소.”
대신들이 극력 반대해서 결국 전화기와 전화 교환 시스템을 에스파냐에 수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필리핀 총독이 정식으로 전화기 수입을 요청하지 않은 것은 그들도 전화기가 팔 만한 물건이 아니라고 애초부터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에스파냐 사람들도 처음에 말만 듣고는 전화기의 존재 자체를 믿지 않았다.
“전하! 전화기나 교환기를 만드는 기술을 가진 장인들이 외국에 나가지 못하도록 막아야 합니다. 천한 장인들이 요즘 며칠 휴가 받아서 명나라나 필리핀에 여행을 가는 게 유행이던데 당장 오늘부터 장인들에게 출국 금지를 시켜야 합니다. 국내에서 외국인도 만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월봉을 많이 받아서 외국여행을 간다니까 모든 장인들의 월봉을 절반 이하로 줄여야 합니다.”
“누굴 노예로 만들 일 있소? 아예 공장에 가둬두고 일을 시키지 그러시오?”
“그것도 좋은 방법, 아! 죄송합니다.”
이민호가 항상 하는 말이, 어떤 정책을 시행하기 전에 그 정책에 희생되는 백성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높은 자리에 있으면 역지사지가 생각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평소에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희생되는 사람들을 위한 보상에는 몹시 인색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일수록 자기들은 한 푼도 손해 보지 않으려 했다.
어쨌든 다음 개각 때 쫓아낼 각료가 방금 눈에 띄었다. 이민호는 국무회의가 끝나고 미카를 불러 그 발언을 한 참판의 뒷조사를 시켰다. 분명히 그 부서에 뭔가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예전에 한국에서 이공계 출신들이 졸업 후 몇 년 동안 외국에 취업하지 못하도록 국회에서 법안 발의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이공계 박사학위를 딴 선임연구원이 연봉 2400만원 받던 시대였다. 이민호는 국책연구기관에서 나이가 많아 호봉이 높다고 잘리는 박사들을 직접 눈으로 본 사람이었다. 그때는 아무 소리 못했지만 여기서는 이민호가 왕이었다.
“여러분! 우방국이라 해도 좋은 것이 있으면 이렇게 몰래 훔쳐가려고 합니다. 에스파냐 사람들은 총 같은 화약무기뿐만 아니라 향신료 종자도 훔치려고 했었지요. 우리도 앞으로 열심히 우리 것을 지키고, 남의 것을 훔치도록 합시다.”
“전하! 우리 것을 당연히 지켜야 하겠지만 우리가 외국에서 훔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가격을 모르는 사람에게 지나치게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것도 사실 훔치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다만 사정이 있으니 그게 가능했던 것뿐이지요.”
포르투갈 상인이 향료제도에서 산 향신료를 유럽에 가서 100배 넘는 가격에 판다 해도 훔쳤다고 할 수는 없었다. 지역별로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 것뿐이었다. 항해가 안전하지 않은 시대에 용감하게 향료제도와 유럽을 왕복한 포르투갈 상인들은 제몫을 받은 셈이었다.
그리고 고산국 남부에서 재배되는 향신료는 포르투갈과 유구국 상인들이 향료제도에서 싸게 사서 넘겨준 묘목이나 종자를 키운 것이었다. 에스파냐는 설마 그 비싼 걸 팔까 해서 고산국 것을 훔치려 했으나 실패했다. 에스파냐의 예상과 달리 향료제도의 술탄들은 다른 지역에서 재배가 불가능하다는 잘못된 확신을 갖고 있어서 향신료 종자나 묘목이 유출되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결국 시대가 흐르면서 잔지바르나 지중해 연안 등 여러 곳에서 향신료가 생산됐다.
석유는 고산국밖에 쓸 곳이 없으니 낮은 가격을 유지했다. 내연기관이 원래 역사보다 빨리 일반화되더라도, 고산국에서 사용하는 양이 늘더라도 북미 남부나 아랍 지역에서 석유가 펑펑 솟아날 테니 당분간 가격이 오를 일은 없었다.
브루나이 티크 원목은 벌목을 위한 초기 도로 개설 단계에서 큰 자본이 들기에 효용보다 훨씬 싼 가격이 유지되고 있었다. 다른 세력이 티크 원목을 벌목하고 싶어도 자본이 없으면 쉽게 시도하지 못하는 대규모 사업이라 판로가 많지 않아 싸다는 뜻이었다. 앞으로 수요가 늘어나면 목재회사가 가격을 올릴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거의 고산국에서만 사용하고 있었다.
“혹시 해달 모피 말씀이십니까? 서양인들이 해달의 산지를 모르는 동안에는 계속 높은 가격을 유지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전하! 해달 모피를 교역하는 원주민들에게 조금 더 많은 물품을 줘야겠습니다. 그리고 해달 산지가 고산국 영토라는 사실을 밝히고 외국인의 상륙을 금해야 합니다. 다만 외국에 영토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지도를 공개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해달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괜찮겠지만 물에 들어가 있는 동안 외국인들이 마구 잡으면 어떻게 합니까?”
해달 모피를 원주민들에게서 너무 싸게 사서 대신들도 양심에 꺼렸다. 그리고 해달 모피가 워낙 비싸서 보호대책이 논의됐다. 해달 산지가 유럽인들에게 알려질 경우 짧은 시간에 멸종을 면치 못할 것 같다는 걱정도 했다.
그런데 조만간 유럽에서 영해에 대한 국제법적 논의가 있을 것 같은 움직임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해달 등 해양포유류를 멸종으로부터 지킬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해달 모피 독점무역을 가급적 오래 끌고 갈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품질이 조금 떨어지지만 따뜻한 캘리포니아 남부 해안에도 해달이 살고 있었다. 북미 대륙을 매입하면서 에스파냐와 국경을 정할 때 약간 무리해서 남쪽으로 끌어내린 이유는 해달 서식지 때문이었다. 물론 시간이 흘러 영토 확장이 어려워지는 시대에는 손바닥만 한 땅도 큰 가치를 가지게 되니 미리 욕심 부린 것도 있었다.
“여러 나라 학자들이 모이다 보니 유럽보다 빠르게 왕립대학교 법학대학에서 영해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소. 무역을 중시하는 국가는 영해를 인정하지 않거나 가급적 좁게 인정해 공해 폭을 넓히려 하며, 긴 해안선을 영토로 갖고 있거나 해양에서의 공격을 걱정하는 나라는 영해를 넓게 인정하려는 경향이 있소. 우리는 무역을 중시하지만 영해를 적당히 넓게 인정하는 쪽으로 합시다.”
“우리가 지킬 섬이 많긴 하지만, 해군력을 과시해서 외국에 영향력을 유지하려면 영해가 좁은 편이 낫습니다.”
“물론 그렇지요. 그러나 군함이 친선을 이유로 방문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댈 수 있소. 그리고 대포 사거리로 영해를 정한다면 우리가 다른 나라보다 훨씬 유리하지 않소?”
영해 문제는 17세기부터 논의가 오가다가 오래도록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겨우 18세기 말에 영해 폭이 1해상 레구아, 즉 3해리, 약 5.5km 정도로 정해졌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영해가 점점 넓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1960년대부터 영해 폭 12해리로 늘어났고 그 이전부터 배타적 경제수역 설정이 논의됐다.
이민호는 원래 역사와 달리 비교적 빠른 시기에 영해를 설정하고자 했다. 그러나 국제해양법은 물론 국제법마저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시기라서 수많은 나라들을 일일이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난감했다.
“한 나라에서 선포하면 다른 나라들도 줄줄이 따를 겁니다.”
“영국이 가장 문제가 될 것 같소.”
영국은 보통 영해 선포 자체를 반대했다. 무역 문제도 있지만 북해나 아이슬란드 근처의 대구 어장, 청어 어장 때문이었다. 아이슬란드와는 20세기 후반에 세 차례나 대구전쟁까지 했던 사이였다. 첫 번째는 아이슬란드가 영해를 4해리에서 12해리로 넓힌 것 때문에,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어업전관수역을 50해리로 선포한 때문이었다.
“주빈인 구스만 총독은 민다나오 섬 때문에 걱정이 많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민다나오 이슬람 왕국에서 해적질을 하는데 토벌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지요. 어떻게 생각하시오?”
이민호는 구스만 총독과 주로 유럽 정세나 오스만제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필리핀 주변에서 문제가 되는 곳은 민다나오밖에 없었다. 원래 역사에서는 술루 왕국, 브루나이, 네덜란드 등 다양한 위협세력이 있었다.
“군사적으로 어렵다면 외교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제가 민다나오에 가보겠습니다.”
“최 참판이요? 아니 될 말씀이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려고 그러시오?”
“젊은이가 희생당하는 것보다는 제가 죽는 게 낫습니다.”
최 참판이 비장한 각오로 이민호에게 고했다.
“최 참판.”
“예, 전하!”
최 참판이 나이답지 않게 마치 칭찬해주길 기다리는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민호가 속으로 많이 웃었다.
“대신이 외국에서 외교임무 수 중에 죽으면 우리는 국력을 기울여 그 나라에 보복을 해야 하오. 만약 그런 상황을 노리고 필리핀 총독부나 민다나오의 다른 세력이 장난질을 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오? 괜히 참판이 갈 필요가 없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민다나오와 접촉해서 외교 책임자를 예국이나 마닐라로 부르시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최 참판이 몹시 섭섭한 듯했으나 이민호의 말이 맞아 수긍하고 말았다. 최 참판은 머나먼 오스만제국에도 직접 가고 때가 되면 조선이나 명나라에 가서 우호를 다졌다. 예국 참판 하나는 참 잘 고른 것 같다고 이민호는 생각했다.
고산국이 조선의 속국에서 벗어난 지 오래됐으니 6국을 승격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에서 Y2K 문제를 대하던 1990년대 초반과 비슷했다. 빨리 시작할수록 비용이 적게 드나, 당장 비용을 쓰기 싫어서 연기하는 것이 습관화돼버렸다. 참판들이 승진시켜달라고 먼저 요구할 수 없어 이민호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나, 귀찮아서 자꾸 미루고 있었다.
“다음은 사소한 문제긴 하나, 여러 부처와 협의할 문제라서 이 자리에서 제기하겠습니다. 학생들의 수학여행 문제입니다.”
교육을 담당한 부서가 예국이라서 최 참판이 계속 발언했다.
“전하께서는 학생들이 책과 교실에만 머물지 말고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현장에서 직접 보고 체험하는 교육을 지시하셨습니다. 그래서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이나 가두리 양식장, 또는 철공소에서 직접 일을 배우는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학여행 기간이 대체로 같은 달에 겹치다 보니 산업 현장에 한꺼번에 몰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잠깐! 수학여행 기간 중에 학생들에게 일을 시켰단 말이오?”
“그것이 수학여행의 의미 아니겠습니까? 매 산업 현장마다 겨우 한나절에 불과하지만 학생들은 아주 좋아합니다. 역시 다른 산업 분야보다는 제철소 같은 대단위 공장 쪽이 인기가 좋습니다.”
이민호가 머리를 짚었다. 별 생각 없이 지시한 것이 실제 현장에서는 상당히 왜곡돼서 시행되고 있었다.
학생들이 학업기간 중에 틈을 내서 먼 고장에 가서 신나게 놀게 하라고 수학여행을 지시한 건데, 최 참판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현장실습으로 오해했다. 제철소에 간 학생들은 제철 과정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들은 다음 수레에 철광석과 석탄을 싣고 나르며 반나절을 보낸다고 최 참판이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중학교 6학년 2학기에 현장 실습 과정이 있지 않소? 산업 현장 방문은 실무 책임자의 설명 위주로 이틀, 나머지 사흘은 무조건 관광지에서 마음껏 놀게 하시오.”
“어명이시니 따르겠습니다. 산업 현장 방문이 겹치는 문제도 자연히 해결되겠습니다. 다만 학부모들이 항의할까 걱정됩니다.”
예국 참판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학부모 입장에서 학교에서 하나라도 더 가르치길 원하지, 학생이 신나게 노는 꼴을 고운 눈으로 봐줄 리가 없었다.
“학부모도 한때 청소년이었소. 자기들도 그 시절에 놀 땐 놀았으면서, 개구리 올챙잇적 생각을 못해요.”
이민호가 일침을 놓았다. 학생 때 공부 못한 부모가, 또는 성적이 나쁜 부모가 자식이 놀지 못하고 책상에 붙어 있게 한다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고산국에 사는 백성들이 다 그렇듯 대부분 학부모가 조선에서 교육을 거의 못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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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는 일단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라고, 여러분 모두 언제나 행복하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