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20 46. 1596년 =========================================================================
연회는 계속 진행됐다. 상석의 원형 테이블에 앉은 이민호와 두 총독 부부는 비올레타가 통역해주는 가운데 대화를 이어갔다. 식사가 끝나고 차를 마시며 대화하다가, 어느덧 본격적으로 술잔이 돌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유럽 악기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라요. 아름다운 음악이에요. 고산국의 진취적 기상과 품격이 느껴지는군요.”
“과찬이십니다, 부인.”
신구 총독들은 관료이면서도 전쟁에 몇 번 참가한 전사처럼 듬직한 몸집인 반면 총독 부인들은 고상한 중년 여인들이었다. 유럽 귀족 사회에 이상적인 상식이 풍부하고 교양이 넘치는 부인들이라 젊은이들에게 존경을 받을 만했다. 다스마리냐스 부인은 이제 더 이상 이민호에게 중국어를 쓰지 않았다.
서양 현악기들이 아직 원형만 만들어지고 발전 중이라 이민호가 아는 곡을 제대로 옮길 수 없었다. 서양 고전음악 중에서 유명한 곡은 대충 기억하고 있었지만 이 시대에 인기를 끌 만한 요소가 부족해 악보에 기록만 해두었다.
궁성 연회장에서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은 이민호가 기억하는 한국 가요가 몇 곡, 팝송이 몇 곡, 그리고 군가 몇 곡이었다. 얼마 전에 서양음악을 전공한 작곡가와 협의해서 약간 편곡해서 악단에게 연습시켰다. 지금 나오는 음악의 실체를 알면 까무러치겠지만 이민호밖에 모르니 상관없었다.
그러나 악단은 방문국인 에스파냐 음악도 연주해야 했다. 분위기가 바뀌며 이번에는 바스 당스 같은 이민호가 잘 모르는 유럽의 고전 춤곡이 흘러 나왔다. 대화를 나누던 청춘 남녀들이 쌍쌍이 손을 잡고 춤을 추고, 부끄러워하는 처녀는 그 아버지나 어머니가 나가서 추고 오라고 권했다. 조선과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어이쿠! 이거 잘못하면 국제결혼을 많이 하겠군요.”
“설마 폐하께서 순혈주의를 선호하시는 것은 아니시죠?”
“무슨 말씀을! 여기 비올레타도 의용공주도 처음 만날 때는 다 외국인이었습니다, 부인.”
할리우드 영화에 배 나온 주정뱅이가 많이 출연해서 그렇지 히스패닉이라고 다 그런 몸매는 아니었다. 에스파냐 귀족 청년들은 마치 현대 어느 스페인 축구클럽 선수들을 모아놓은 것처럼 다들 잘 생겼다.
에스파냐 귀족 처녀들 중에서도 비올레타처럼 아름다운 여성들이 눈에 띄었다. 다만 조선 출신 고산국 청년들이 백인 처녀들의 아름다움을 몰라볼 뿐이었다. 얼마 안 되는 에스파냐 처녀가 춤을 신청하면 고산국 청년들은 어색해하면서도 같이 추는 정도에 그치고, 적극성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부끄럼을 많이 타는 것도 아니었다.
고산국은 초등학교 때부터 남녀 짝꿍을 같은 책상에 앉히면서 남녀칠세부동석은 전혀 통하지 않는 말이었다. 어렸을 때 고산국으로 이민 와서 성장한 처녀들도 처음 보는 외국 청년들이 춤을 신청하면 거리끼지 않고 나가서 즐겁게 놀았다.
외국 손님들 중에 젊은 남성이 많고, 고산국 관료들의 딸들만으로 부족해 비번 중인 전화국 교환원들을 급히 불러 모아 숫자를 맞췄다. 왕립의상실에서 짧은 시간에 연회복을 맞추고 재단하는 사이에 미용실에서 공주처럼 꾸며주니 교환원들이 몹시 좋아했다.
일인당 최소 다섯 냥짜리 미용과 열 냥짜리 연회복에 보석장식도 많이 달았다. 보석장식은 반납하기로 했지만 교환원들은 공짜 미용에 공짜 연회복을 얻은 외에 추가 일당까지 받았다.
“이번에 두 나라 젊은이들이 많이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어머! 저 분은 예국 참판님의 따님 아니신가요?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청년들의 춤 신청이 끊이지 않는군요.”
“그, 그렇군요.”
다재다능한 최 선생은 초, 중등학교 교과과정을 만드는 사람이기도 해서 기본적인 외국 춤은 다 출줄 알았다. 그리고 외교관의 딸이라서 그런지 어느 누구 앞에서도 미소를 지으며 호감을 샀다.
“폐하! 고산국 인구가 어느 정도 되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몇 달 전에 300만 갓 넘었고 지난 달 기준으로 316만 정도입니다.”
인구 자체가 나라에 따라서는 국가기밀일 수도 있지만 고산국은 변동이 워낙 심해서 숨길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기준에 따라 들쭉날쭉해서 이민호도 인구통계표를 볼 때마다 골치를 썩였다.
올해 최초로 인구 증가분 중에 이민자보다 출생자가 더 많아졌다. 사망률이 워낙 낮고 지금도 조선에서 꾸준히 인구가 유입돼 인구증가율이 연 15퍼센트에 달했다. 동해국, 아이누 섬, 사할린 인구는 각각 몇 십 만 수준이었고 큐슈, 북 필리핀까지 다 합하면 순 고산국 인구의 두 배로 늘어났다.
“예? 설마 인구를 매달 정확히 파악하십니까?”
“예. 행정기관들이 단계별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인구가 너무 적죠?”
“무슨 말씀이십니까? 단 몇 년 만에 몇 배로 불리셨습니다. 물론 조선에서 유입된 인구가 많겠지만 조만간 조선보다 인구가 더 많아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설마요. 하하! 그런데 유럽 각국은 인구가 어느 정도 됩니까?”
구스만 총독이 잠시 움찔하더니 털어놓기로 작정했다. 에스파냐 입장에서는 고산국이 가장 믿을 만한 우방인데다, 함부로 남의 나라를 침략하지 않는다는 신뢰가 쌓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고산국이 작정하고 필리핀이나 중남미를 공격하면 에스파냐는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고산국의 강함은 에스파냐 병사들이 더 잘 알고 있어서, 고산국과 전쟁하느니 도망가는 게 살아남는 길이었다.
“흑사병으로 대폭 줄었던 유럽 인구가 이번 세기에는 많이 늘어 예전 인구를 거의 회복했습니다. 에스파냐는 식민지 인구 빼고, 200만에 못 미치는 포르투갈도 빼고 850만 정도입니다. 영국은 400만 정도라고 들었습니다. 프랑스가 30년 전에 2천만이 넘어서 지금은 그보다 더 많을 겁니다.”
“오오! 프랑스 인구가 대단하군요.”
영국 인구는 백년전쟁이 끝날 즈음인 15세기 중엽에 220만까지 줄었다가 1530년에 300만을 넘어섰다. 프랑스는 유럽의 곡창이므로 예전부터 인구가 많은 곳이었다. 요즘도 계속 숲을 줄여 밭을 개간하는 추세라 식량 생산이 늘고, 그래서 앞으로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도 있었다. 현재 식량을 외국에 수출하는 거의 유일한 유럽 국가가 프랑스였다.
이민호는 영국 인구가 의외로 적어서 놀랐다. 영국은 그 적은 인구로 100년 전쟁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분발했으나, 결국 섬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17세기 전반기까지는 유럽 인구가 늘어나고 곡물과 공업 생산량도 꾸준히 늘어난다. 그러나 1630년대에 가면 경지 면적 확대에 한계가 오면서 지력이 감퇴해 특히 프랑스와 에스파냐에서 곡물 생산량이 오히려 줄어들고 인구가 정체 또는 감소하는 시기가 온다.
현재 남미와 북미는 유럽인들이 가져온 전염병 때문에 인구가 확 줄어드는 시기였다. 학자에 따라 북미 인구를 50만에서 200만으로 추산하면서, 유럽인들이 도착한 다음부터 급격히 질병이 퍼지면서 10분의 1로 줄어들었다고 봤다. 아프리카 인구는 정체되거나 감소되는 추세라서 계속 1억 남짓, 인도는 꾸준히 1억에서 1억 5천만 사이였다.
“이집트에 흑사병이 돈다는데 유럽은 어떻습니까?”
“일부 도시에 흑사병이 돌면서 이탈리아 몇몇 도시가 심각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파리는 더 지저분한 도시인데도 동양의 성자라는 칭호를 받은 고산국 의사들이 지켜냈습니다.”
“오오! 큰일을 해주었군요.”
의사 면허를 갓 딴 유학생들을 의학을 배우라고 유럽에 보냈더니 기여한 것이 더 많았다. 덕택에 더 많은 유럽 출신 유학생들이 고산국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지동설을 주창한 갈릴레이와 코페르니쿠스가 활동할 시기가 아직 몇 십 년 남았는데도 대서양과 태평양을 건너와서 그런지 유럽인 유학생들이 의외로 지동설을 잘 받아들였다.
“폐하! 민다나오 말씀입니다.”
“예. 말씀해 보십시오.”
구스만 총독이 남미 원주민들은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데 아시아는 전혀 다르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남미는 아즈텍 황제를 비롯한 정치체계 대신 에스파냐 정복자들이 들어가 기존 행정조직을 그대로 유지한 경우였다. 부역을 동원할 때 에스파냐 병사들이 원주민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끌어오는 게 아니라, 원주민들의 자체 행정조직에서 마을마다 인력을 배분하고 집결시켜 은광으로 보내는 식이었다.
그러나 민다나오는 술탄부터 정치 및 행정조직은 물론 군사조직까지 다 살아있었다. 마구인다나오 왕조가 존속하는 한 민다나오 원주민들이 에스파냐 정복자들에게 머리를 숙일 일은 없었다. 기존 지배층이 사라진 마닐라 주변 말레이계 필리핀 사람들은 에스파냐 정복자들에게 순응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민다나오 원주민들이 신봉하는 이슬람교는 기독교 못지않은 고등종교였다. 혹시나 에스파냐가 민다나오를 정복하더라도 이미 경건한 이슬람교도가 된 원주민들을 제대로 통치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 거친 섬 따위 정복해봤자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곳 해적들이 비사야 제도나 심지어 루손까지 올라와 해변 마을을 노략질하며 사람들을 잡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향료제도로 향하는 에스파냐 상인들을 납치해 몸값을 받아내려 합니다.”
“본거지를 치려고 해도 어렵겠지요?”
“그렇습니다, 폐하. 그래서 어렵게 원정군을 구성해 민다나오 서쪽 강 하류를 통해 들여보내도 지류가 마치 나무줄기처럼 무수히 갈라져 있어 적의 수도에 이르기 어렵습니다. 현지인을 고용하더라도 자기가 사는 지역이 아니면 제대로 안내하지 못합니다.”
구스만 총독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고산국에게 군사적 지원을 바라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이민호도 딱히 도움 줄 방법이 없었다.
“바닷가 도시라면 몰라도 강 상류로 들어가야 한다면 고산국 해군도 큰 도움이 되지 않겠구려.”
“끄응! 정말 입 안에 든 가시입니다. 역대 총독부가 교역으로 얻은 이익을 모조리 쏟아 붓고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21세기 미군도 못해낸 일인데 겨우 마닐라 주변을 장악하고 있던 에스파냐 총독부가 민다나오를 정복하기란 요원했다. 오히려 민다나오로부터 루손과 비사야 제도 등 에스파냐 점령지가 수백 년 동안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민다나오 북부는 마구인다나오 왕조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해 에스파냐가 꾸준히 공략해 19세기 중반에는 이슬람 왕조를 남부로 밀어내게 된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연회는 성황리에 끝났다. 처음 보는 외국인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어려울 텐데 서로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다들 흥겹게 보냈다. 젊은이들을 놀게 해주고 늙은이나 고위층은 식탁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식이었으나 분위기가 흥겨워서 다들 즐거워했다.
에스파냐 손님들은 사흘 동안 머무르다 돌아갔다. 기차도 타보고 온천도 즐기고 여러 가지 음식을 맛본 다음 갖가지 물건을 사갔다. 돌아갈 때는 역시나 고산국 연락선을 타고 갔다.
에스파냐 사람들이 마닐라로 돌아간 다음 날 바로 국무회의가 열렸다. 연회 참가자 전원이 제출한 보고서를 검토한 미카가 요약해서 보고했다.
“에스파냐는 전화기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전화기? 주빈석에서는 전화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 나왔어. 전화 교환원들이 예쁘게 차려 입어서 귀족 청년들이 접근한 건데,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아냐?”
“그 전부터 마닐라에서 우리 백성들을 내세워 전화기 여러 대를 사갔습니다. 전화기만으로 통화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 다음부터 전화국에 대한 정보 수집 활동을 벌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번에 마침 연회장에 전화국 교환원들이 등장하면서 인기가 폭발했습니다.”
“흐음. 마닐라 총독부도 조국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군.”
시사하는 게 많았다. 전화 교환은 육체노동이 아니고 선을 연결할 때 꼼꼼함이 필요한 일이라 주로 여성을 고용했다. 현대에는 전화번호 안내나 민원접수가 진상 고객들을 상대해야 하는 감정 노동에 속하겠지만 20세기 중후반까지 전화 교환하는 일이 절대적 약자인 을이라고 할 수 없었다. 고산국에서는 오히려 첨단 직종에 근무하는 앞서가는 신세대 여성이었다. 자부심이 넘치는 직종이었지만 비밀유지를 위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 보안의식은 희박한 편이었다.
“전하! 전화기는 최첨단 통신 기기에 속하므로 전화 통신 자체를 국가기밀로 지정해야 합니다. 다른 나라에서 함부로 그 비밀에 접근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왜요?”
이민호는 괜히 대신들의 반응을 한 번 떠봤다. 전화기를 포함한 통신 업무는 전기, 수도업과 함께 공국에 속하게 했다. 전화기를 개통할 때 가설공사가 필요하듯 다들 공사가 필요한 업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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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쓰기가 어려워지네요. 또 늦게 올렸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