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19 46. 1596년 =========================================================================
“육군과 해군이 있으면 공군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
“날아다니며 싸우는 공군을 만든다고요? 이런 허름한 것이 전쟁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차라리 커다란 풍선이 낫겠습니다. 숙부님이 주도해서 거대한 풍선을 날리는 시험도 많이 했잖습니까? 아주 쓸 만하던데요.”
비행선도 전장에서 아주 유용한 무기가 될 수 있었다. 고공을 비행하면서 폭격도 가능하고, 특히 상공에 비행선 하나 띄워놓으면 정찰을 많이 보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속도가 워낙 느려 먼 지역까지 끌고 갈 생각을 하면 너무 갑갑했다. 운 좋게 브루나이 유전의 천연가스층에서 구했지만 원래 헬륨이 그리 쉽게 구할 수 있는 물질도 아니고 가격도 비쌌다. 수소를 넣으면 폭발 위험이 컸다.
“면이 너 이 날틀을 우습게 보는데, 기관에 회전날개를 달면 아주 멀리 날아가겠다는 생각은 안 들어?”
“어? 그거 국방연구소에서 시험하는 것 봤습니다. 작은 장난감이 아니었습니까? 제법 오래 날다가 연료가 떨어졌는지 추락해서 박살난 것을 봤습니다. 날틀을 타고 높이 날다 추락하면 죽겠죠?”
“그때에 대비해서 낙하산이 필요해.”
이면이 넘어올 듯 말 듯했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쌓여온 상식이란 게 있었다. 비행기는 물론 행글라이더도 위험한 물건이라고 느낀 듯했다.
“동력을 단 비행기가 5년 이내에 첫 비행을 하고 여러 가지 시험을 거칠 거야. 물론 초반에는 사고 위험도 높아. 그래도 계속 비행기 제작을 추진하면 앞으로 아마 10년 후쯤에 공군이 창설될 것 같다.”
“비행기로 전투도 가능합니까?”
“처음 만든 비행기로 전투를 하기 어려울 테니 수송선처럼 수송기를 먼저 만들어야겠지. 하지만 언젠가는 비행기에서 적함을 향해 폭탄을 떨어뜨리고, 지상을 향해 기관총을 쏘는 날이 올 거야.”
이면이 아주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이때 더 강력한 미끼를 던질 순간이었다.
“면아! 지금 육군 사령관은 계복, 해군 총함장은 형님이시잖아?”
“아버지시지요.”
“공군 사령관은 비행기 조종사들 중에서 뽑을 거야. 그렇게 되면 초대 공군 사령관은 누가 될 것 같아?”
“접니다! 첫 번째 공군 사령관은 반드시 저를 시켜주십시오. 타겠습니다. 다리몽둥이가 부러지고 해골이 깨지더라도 반드시 타겠습니다.”
새로운 것과 처음, 속도, 지리적으로 높은 곳, 명예. 젊은이들은 편하고 귀한 것보다는 이런 비물질적인 것들을 좋아했고, 이민호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본격적인 비행 전에 이면과 산악부원들이 행글라이더를 타고 언덕 위에서 뛰어다녔다. 행글라이더를 매달고 달리다가 펄쩍 뛰어 대여섯 걸음 날다가 다시 착륙하면서 비행 감각을 익혔다. 행글라이더 제작에 참가한 장인들은 불안해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숙부님! 준비됐습니다. 그런데 다치면 어떡하죠?”
“저기 아래에 마차가 보이지? 의사와 간호사가 대기하고 있어. 안심해! 떨어져도 사탕수수 밭에 떨어질 텐데 설마 크게 다치겠어?”
방풍고글을 올린 이면이 침을 꿀꺽 삼킨 다음 단단히 각오를 다졌다. 산악부원들과 차례로 눈을 마주치더니 이면이 행글라이더를 등에 지고 언덕을 향해 달려갔다.
이면이 낭떠러지 위에서 펄쩍 뛰어 올랐고, 뒤이어 산악부 동료들이 차례로 허공에 다이빙했다. 낭떠러지 바로 앞에서 멈추는 생도는 다행히 없었다.
“난다아아~”
“나도 난다아!”
이면과 산악부원 다섯 명이 차례로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목이 터져라 외쳤다. 오랜 준비 끝에 드디어 사람이 하늘을 날게 되자 이민호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으아아아~”
그러나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여섯 명이 차례로 사탕수수 밭으로 추락했다. 좌우로 비틀거리거나 하는 것도 없이 그대로 줄줄이 내려 꽂혀서 이민호는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 장인들이 비명을 지르고, 언덕 아래에서 대기 중인 구급대원들이 사탕수수 밭으로 급히 뛰어 들어갔다.
첫 비행 장소를 사탕수수 밭 주변으로 정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사망자가 한 명도 안 나온 것이다. 하지만 여섯 명 모두 병원 신세를 지고, 이민호는 이순신에게 붙들려서 혼쭐이 났다. 이순신이 조선에 돌아가겠다고 협박해서 이민호가 이순신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는 추태를 연출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워낙 건강해서 뼈가 금방 붙었다. 조사 결과 지난번에 탑승자들이 첫 비행에 너무 놀라 조종간을 꽉 잡고 있기만 해서 실패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래서 대형 풍동 실험실을 만들어 조종 연습을 오랫동안 시켰다.
사관학교 산악부에서 비행부가 독립해 나왔다. 호기심에 비행부 부실을 기웃거리는 생도들이 많았으나, 선뜻 용기를 내서 입부하는 생도는 흔하지 않았다.
8월 중순, 이민호는 필리핀의 전임 총독과 신임 총독을 고산국 궁궐로 초빙했다. 궁궐을 방문한 전 총독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와 신임 총독 프란시스코 데 테요 데 구스만(Francisco de Tello de Guzmán)을 위해 이민호가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총독들만 부부 동반으로 초청했는데 마닐라에 거주하는 에스파냐 귀족들과 장교들, 상인들 다수가 함께 방문해 왕도가 시끌벅적했다.
에스파냐는 고산국 상품을 구매해주는 고객일 뿐만 아니라, 엄청난 양의 은을 매년 고산국과 명나라에 가져다주는 나라였다. 고산국에는 완벽히 통제된 부를, 명나라에는 시중에 은의 과잉을 가져다주는 공급자였다.
그러니 에스파냐 사람들을 위해 연회 한 번에 은 일만 냥쯤 쓰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남편들과 함께 온 부인들과 자녀들에게 각종 선물도 돌렸다. 기차부터 시작해 선풍기와 냉장고, 가로등까지, 고산국 왕도의 발전상에 눈을 휘둥그레 떴던 사람들은 값비싼 선물에 더 놀랐다.
현재 명나라의 금은 교환비율은 1대 8로 치솟았다. 공급량은 비슷한데 명나라 내부의 은 수요가 급감한 탓이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상인과 손님으로 들끓던 명나라 대부분 지방의 시장에서 사람도, 상품도 사라졌다.
“국왕폐하! 내게 용감한 에스파냐 병사 5천 명만 있으면 늙어빠진 명나라 따위는 한 달 이내에 가뿐히 정복할 수 있소!”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 입에 술 한 잔이 들어가더니 호기롭게 큰소리를 쳐댔다. 총독으로 있을 때는 무게를 잡더니 자리에서 벗어나 홀가분해지자 원래 성격이 드러난 것에 불과했다.
이민호가 장인에게 맞장구 쳤다. 이민호 왼쪽에 비올레타가, 그 왼쪽에 다스마리냐스 전 총독이 앉아 있었다.
“예. 당연하지요. 마닐라에 병력이 적어서 안타깝습니다.”
“광둥에 상륙하기만 하면 베이징으로 진격해서 명나라 황제의 목을 따서, 악!”
이민호 오른쪽에 주상아 공주가 있는데도 헛소리하다가 비올레타와 그 어머니에게 양쪽에서 동시에 꼬집혔다. 원래는 에스파냐 병사 25명만 있으면 명나라 전체를 정복할 수 있다고 큰소리 뻥뻥 치던 사람이었으니, 술에 취했어도 그 동안 많이 현실적으로 변한 셈이었다.
“전 총독께서 이렇게 쾌활하신 분인 줄 몰랐어요.”
스페인어를 충분히 알아듣는 주상아 공주는 화를 내지 않고 살포시 웃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명나라 황도를 방문해보지 않겠느냐고 스페인어로 물었다. 전 총독이 깜짝 놀라 손사래 쳤다.
“아, 하하! 죄송합니다, 공주 전하. 그 사이에 스페인어가 많이 느셨군요. 제 딸년을 보살펴주셔서 항상 고맙습니다.”
다스마리냐스 전 총독이 땀을 뻘뻘 흘렸다. 큰소리 칠 장소를 잘못 고른 바람에 술이 확 깬 것 같았다.
“폐하! 혹시 오해하실지 몰라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스마리냐스 총독은 캄보디아와 민다나오 원정에 실패해서 해임된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마닐라에 도착하고 나서야 민다나오 원정이 실패한 것을 알았을 정도입니다. 제가 마닐라에 온 것은 정기적인 인사이동에 불과합니다.”
“그래요? 잘 알겠소. 훌륭한 분이 새 총독으로 와서 안심이오.”
프란시스코 테요 구스만 신임 총독은 메디나-시도니아 공작 가문인 구스만 가문의 일원이었지만 먼 방계였다. 세비야에서 태어나고 산티아고 기사단의 기사였으며 얼마 전까지 인도 무역원의 재무관으로 일했다. 국왕의 임명장이 1595년 양력 11월 26일 자로 돼 있으니 민다나오 원정 실패로 총독이 교체된 것은 확실히 아니었다.
“제가 마닐라에 도착한 직후에 파나마 운하 건설단이 출발했다고 들었습니다. 어서 운하가 개통돼 고산국이 북미 동해안을 통제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유럽인들이 북미 동해안에 자주 나타난다지요?”
“그렇습니다. 개별적으로 모피 교역에 종사하는 자들도 있으나, 우리 에스파냐 수송선을 노리는 해적들이 태반입니다.”
영국은 1580년대부터 북미 동해안에 꾸준히 식민 개척지 건설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이주자들은 굶어죽거나 얼어 죽거나 맞아죽거나 영국으로 되돌아갔다.
1607년 체사피크 만에 방책을 쌓은 제임스타운이 실질적으로 최초의 영국 식민지였다. 그러나 매년 꾸준히 버지니아에 개척민을 보내도 굶어 죽고 말라리아에 걸려 죽고 북미 원주민에게 맞아 죽어 개척민 숫자가 도대체 늘지 않았다. 추장 포와탄의 딸 포카혼타스가 화형당할 뻔한 백인 남자를 구해주고 다른 백인 남자와 결혼해 영국으로 간 것도 이곳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버지니아 식민지는 담배 농사를 대규모로 지어 유럽에 수출해서 국제 담배가격 폭락 전까지 수십 년 동안 먹고 살게 되었다. 그 사이 북쪽 매사추세츠에 청교도들이 도착해 적막한 신앙공동체를 형성했다. 그 중간, 현대의 뉴욕을 비롯한 펜실베이니아와 뉴저지 지역은 네덜란드 이주민들과 서유럽, 북유럽의 다양한 인종들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살아가게 된다.
“해적은 북미 동해안에 큰 위협이니 에스파냐와 합동으로 서인도제도에 웅거한 해적들을 소탕했으면 합니다.”
“폐하! 바로 그것이 저희가 원하는 바입니다. 어서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면 좋겠습니다.”
“아직 건설 초반입니다. 더 기다리시지요. 하하!”
그러나 10월부터 고산국 전선 3척이 파나마 지협을 넘어가 서인도제도를 휘젓는다. 그 사실을 한참 뒤에 파악한 필리핀 총독부는 기뻐하면서도 심한 충격에 빠진다. 아직 몇 달 뒤에 일어날 일이었다.
“혹시 멕시코와 남미 은광에 아프리카 노예를 많이 투입합니까? 남미 원주민들 체력이 약하다고 불만이 많아서 흑인 노예를 투입한다더군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멕시코 은광들은 치치메카의 나와즈 부족들 때문에 부역을 못 시키고 원주민 자유노동자를 고용해 지금은 서로가 만족하고 있습니다. 남미 포토시는 광산이 너무 높은 위치에 있어서 그런지 흑인 노예들이 맥을 못 춥니다. 흑인 노예는 아마 브라질 쪽에서 많이 구입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이민호가 다시 생각해보니 남미에서 브라질을 빼면 흑인 인구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리오 카니발에 헐벗고 등장하는 수많은 흑인 무희들 때문에 남미 전체에 흑인이 많은 줄로 착각했다. 물론 서인도제도에는 플랜테이션 농업에 종사하는 흑인들이 많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현대에도 볼리비아에서 축구경기를 하면 인종을 불문하고 다른 나라 선수들은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메시가 토하고 앙헬 디마리아가 산소호흡기를 요청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의 축구 강국들이 볼리비아 원정만 가면 걸핏하면 패하는 곳이니 고산지대에 적응하지 못하면 그 강인한 흑인이라 해도 별다를 건 없었다.
그러나 시대가 좀 더 지나면 브라질 외의 남미 지역에도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많이 들어왔다. 신대륙 원주민들이 백인들이 옮긴 질병에 약해서 더 많이 죽어나가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북미에서도 대규모 면화농업을 위해 본격적으로 흑인 노예를 수입했다.
“멕시코에도 흑인 노예가 있긴 있습니다만, 그다지 많은 편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포르투갈이나 좀 꾸짖어주시지요.”
“노예제도라는 게 좀 혐오스러워서 말입니다.”
어차피 나둬도 겨우 250년 지나면 노예무역은 망한다. 노예로 인해 고산국의 명예에 먹칠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고산국은 흑인들과 연합한 상태였다.
그러나 므부투가 이끄는 흑인 왕국이 언제 아프리카 서해안에 도달해 노예시장을 폐쇄할지 지금으로서는 기약이 없었다. 며칠 전 므부투가 상륙지인 잔지바르 건너편에 기반을 다지고 첫 수확물인 카사바를 고산국에 보내왔다. 주변 부족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편지에 구구절절이 고산국에서 살 때가 좋았다고 우는 소리를 했다. 이민호는 너무 고소해서 편지를 열 번이나 읽었다.
“폐하! 오스만제국이 수에즈 운하 개설에 동의한 것은 뜻밖이었습니다. 아마도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 때문이겠지요.”
“예. 바그다드가 수시로 주인이 바뀌니까요.”
페르시아에는 사파비 왕조가 세워져 현재 아바스 1세라는 걸출한 군주가 다스리고 있었다. 바로 이 왕조가 오스만제국의 동쪽 라이벌이었고, 서쪽 라이벌은 물론 에스파냐였다. 에스파냐가 영국과 네덜란드, 프랑스를 비롯해 온갖 나라와 관계가 안 좋은 것처럼, 오스만제국도 페르시아와 에스파냐를 동시에 상대하면서 다른 소수민족들도 신경 써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오스만제국 입장에서는 서쪽 유럽을 신경 쓰면 동쪽 바그다드가 털렸고, 바그다드를 탈환하면 서쪽 영토가 위험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페르시아도 마찬가지였다. 페르시아가 바그다드를 점령하면 동쪽에서 우즈베키스탄이 쳐들어왔고, 우즈베키스탄을 막으면 바그다드를 오스만제국에게 빼앗겼다.
보통 때는 오스만제국이 주로 유럽에 신경을 쓰고, 사파비 왕조는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에 집중하느라 그 어느 쪽도 바그다드 주변 지역을 꾸준히 지킬 수가 없었다. 이런 과정이 끝없이 계속되면서 바그다드 주변 정세가 매우 불안정했다. 오스만제국 입장에서는 바그다드와 페르시아 만을 통한 무역이 불안해지면서 홍해와 수에즈 쪽으로 시선을 돌린 것 같다는 것이 구스만 총독과 이민호의 공통된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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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기기관보다 제트기관을 먼저 만들었듯이 주인공은 자기가 만들기 쉬운 것부터 만듭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