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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415화 (364/1,000)

00415  46. 1596년  =========================================================================

원래 역사에서 건주여진은 여진족을 통합한 다음 조선을 침공하고 이자성의 난에 의해 멸망한 명나라를 집어 삼킨다. 그러나 동해국을 속국으로 삼은 이상 건주여진은 이미 이민호의 손아귀 안에 들어 있었다. 그리고 건주여진은 이민호가 명나라에 동원할 수 있는 선택권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만약 명나라가 망하면 주변국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줄 것이오. 명나라 인구가 좀 많아야지요.”

“고산국이 명나라에 가까우니 걱정되시겠습니다. 망국의 유민들이 자칫 해적으로 돌변해 고산국을 한꺼번에 들이칠까 걱정입니다.”

“그래서 해군을 키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힘으로 막아야지요.”

백성에 대한 명나라 조정의 통제가 느슨해져 적당한 인원이 고산국에 유입되는 것은 이민호 입장에서 바람직한 일이었다. 고산국에서 몇 년 동안 꾸준히 일한 임노동자들이라면 그 성실함만으로 충분히 백성으로 받아들일 만했다. 그러나 통제가 완전히 무너질 경우 한꺼번에 수백 만 명 단위로 고산국에 들이닥친다면 사실상 고산국도 함께 멸망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현대 브루나이에서 석유 수입을 독점한 술탄이 국민들에게 직장과 집을 마련해주고 각종 복지혜택과 함께 수시로 돈을 나눠주었다. 이것을 노리고 무슬림도 아니고 돼지고기를 좋아하는 중국인들이 벌떼처럼 이민을 신청했다가 브루나이 이민당국으로부터 거절당했다. 이렇게 해서 브루나이 거주 인구의 2할이 무국적 영구 거주자인 중국인이었다.

“폐하! 이 지도를 보십시오. 폭이 좁은 파나마에서도 가장 좁은 지협이면서 고지대에 가툰 호수가 있는 곳입니다.”

“오! 겨우 4레구아, 1레구아라니. 예상보다 공사구간이 훨씬 좁군요.”

“복제본이 멕시코에 있으니 원본 지도는 폐하께 바치겠습니다.”

“고맙소. 이 지도를 잘 활용하겠소.”

파나마 운하가 건설될 지형은 전체 길이가 82km나 되지만 고지대에 호수가 있으므로 태평양 방면으로 20km, 대서양 방면으로 5km만 파면 대양 2개를 연결할 수 있었다. 물론 호수까지 고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갑문을 건설해야 하는 문제가 생기지만, 이미 네덜란드에서도 갑문을 활용하고 있고 고산국에는 갑문과 수문 같은 기계장치를 움직일 기관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큰 문제는 아니었다.

“폐하! 파나마 운하 건설에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공사기간을 2년 정도 예상했는데 지도를 보니 1년 이내에 가능하겠소. 물론 고산국에서 물자와 장비를 옮긴 다음 이야기요.”

“허허! 이러다간 멕시코 부왕령보다 페루 부왕령의 발전이 빨라지겠습니다.”

배로 남미 대륙 남단을 돌아가는데 꽤나 문제가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폭풍 등 기상상태도 나빠서 해난사고의 위험도 높았다. 그래서 남미에서 생산한 은도 해로와 육로를 통해 산타크루스로 옮겨져 서인도제도를 통과해 본국으로 향했다. 괜히 카리브 해에 해적들이 몰려든 것이 아니었다.

이번 파나마 운하 건설은 에스파냐 국왕부터 신대륙에서 일하는 상인과 모험가들까지 모두 비상한 관심을 쏟는 사업이었다.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면 가장 큰 이득을 얻는 국가도 당연히 에스파냐였다.

“페하! 인력은 주변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을 부역 명목으로 끌어 모으겠습니다. 10만 정도 동원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호수 양쪽 합해서 3만 정도면 교대 투입할 것을 감안해도 충분할 것 같소. 자금을 내가 낼 테니 부역을 시키지 말고 임금을 주어 고용하시오. 8월 초부터 시작할 테니 사신이 미리 가서 준비를 해주시오.”

포토시 은광에서 원주민들에게 부역을 시킬 때는 추첨으로 7년에 한 번 뽑히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인원이 부족해지면서 시간 간격이 점점 줄어들었다. 은광에 도착하면 4개월 동안 갱도에서 일하고 2개월은 제련장에서 일했다. 그러나 거주지에서 은광까지 왕복하는데 2개월에서 4개월까지 걸리니 거의 1년을 소모했다.

은광 노역이 워낙 고되기 때문에 다시 2, 3개 조로 나눠 교대로 은광에 투입됐다. 일할 때도 하루 갱도에서 일하면 이틀은 쉬어야 했다. 부역이라 해도 임금을 줬는데 자유노동자의 절반 수준이라 식량을 지고 가거나 쉬는 날에 일해서 식량을 구하는 식이었다. 이러니 매년 4만 명 가까이 죽어갔다.

“헉! 저는 내년 봄에 돌아갈 각오를 했습니다만.”

“그럼 사신은 우리 탐사대와 함께 보름 후에 출발하시오. 이제 동맹이나 다름없는 우방이니까 우리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지 않겠소?”

“감사합니다. 저는 이해 못할 일투성이나 폐하께서 어련히 알아서 해주실 줄로 믿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준비를 해야 합니까?”

“고산국의 토목 전문가들과 협의해봐야겠으나 공사용 도로와 건설 노무자들 숙소, 그리고 노무자들의 식량을 보충할 감자밭과 옥수수 밭이 우선이겠소.”

원주민들에게 감자와 옥수수만 먹이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원주민들의 주식이 옥수수와 부패 방지 처리를 한 감자인데 고산국에서 옥수수가 기피 작물이라 많이 가져올 수 없는 탓이었다.

굶다가 질병 저항력이 떨어져서 죽지 않도록 원주민들에게 최대한 잘 먹이기로 했다. 이민호는 섬라 군에 보급하던 실력을 발휘해 파나마에서 닭을 대량으로 키워서 노동자들에게 공급할까 고민했다.

“그 준비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특히 감자밭은 아주 넓게 짓고 저장창고도 하나 갖추겠습니다.”

“그것도 돈이 드는 일이오. 출발할 때 가져가도록 하시오. 그런데 일하는 사람이 수만 명일 테니 식량창고를 많이 짓는 게 좋지 않겠소?”

“밭에서 바로바로 수확하면 됩니다.”

“아하! 창고보다 땅에서 더 싱싱하게 저장하겠군요.”

이민호가 은 십만 냥을 바로 그 자리에서 내줘서 세바스티앙 비스카이노가 몹시 감동했다. 북미 영토 구매대금과 운하 건설권을 부채탕감과 상품으로 때웠으니 이민호가 현금을 낸 것은 이것이 유일했다. 원주민들에게 일 년 동안 임금을 줄 것도 예상했다.

“돈 페드로! 유럽에서 면직산업은 주로 이탈리아에서 이루어지나요?”

“예전에는 베네치아에서 주로 면직물을 생산했습니다만, 지금은 남독일 여러 도시에서 더 많이 생산합니다. 베네치아는 이집트와 시리아 등에서 면화를 수입해 독일에 공급하는 일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13세기까지 아마포 생산이 주를 이루었던 독일에서는 14세기부터 면과 아마포를 섞은 바르헨트라는 저렴한 혼방직물을 생산해 유럽 각국에 수출했다. 면직물 산업이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베네치아는 수입 관세를 올려야했으며, 그렇지 않아도 베네치아에 비해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던 카탈루냐의 면직물 산업은 파산했다. 30년 전쟁 직전 아우크스부르크와 그 주변에서 장인과 도제 3천 명이 연간 40만 필의 바르헨트를 생산했다.

“일조량이 많은 이집트와 시리아의 면화 품질이 아주 우수하겠구려.”

“그렇습니다. 특히 이집트 면화가 최고 품질입니다. 그러나 고산국에서 생산한 면직물의 품질이 더 좋고 가격도 쌉니다. 고산국 면직물이 유럽에 대량 수출될 경우 남독일에서 면직물 생산에 주력하는 60개 도시가 2년 내에 파산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억! 조심해야겠구려. 하마터면 생산을 대폭 늘릴 뻔했소.”

“좋은 상품을 싸게 파는데 누가 뭐라겠습니까? 나중에 중요한 순간에 에스파냐를 도와주십시오. 고산국의 면직물과 모직물은 유럽에서 대단히 강력한 무기입니다.”

“하하! 직업을 잃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플 것 같소.”

노련한 상인답게 페드로 역시 수출상품의 전략화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 시대에 면직물은 독일, 모직물은 영국과 플랑드르, 비단은 프랑스, 모피는 러시아에게 비수와 같은 상품이었다.

여진 지역에서 생산한 모피를 유럽 상인들에게 판매한 이후 발트 해와 북유럽에서 러시아의 활동력이 뚝 떨어졌다고 한다. 너무 싸게 팔아도 문제였으나 손해 보는 것은 아니라서 기존 거래 방식을 유지하기로 했다.

에스파냐 사신이 특별 탐사대와 함께 멕시코로 돌아간 즉시 태평양 탐사대를 두 배로 증강했다. 그리고 북미 서해안의 지상 탐험을 본격적으로 시켰다. 현대의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산디에고를 특히 자세히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탐사대와 교역하는 북미 원주민들은 총을 팔라고 강하게 요구했다. 원주민들 간의 세력 균형이 무너질까봐 판매를 거부하면서 우호를 다지기가 쉽지 않았다. 대부분 협상을 통해 해결했으나 전투도 몇 번 일어났다. 겨우 1, 2년 사이에 북미 원주민들이 야생마를 길들여 타고 다녀서 수적 우세를 앞세운 원주민들과의 전투가 불리한 적도 있었다.

4차 탐사대가 알류산 열도와 알래스카에서 접촉하던 원주민들을 이누이트와 유픽 족으로 구분했다. 이누이트는 에스키모로 알려진 원주민으로서 신대륙 원주민들과 혈연적으로 친연관계였고, 유픽 족은 같은 황인종이라도 유전적으로 다른 인종이었다. 그래서 언어가 많이 달랐다.

같은 부족이라도 지역별로 방언 차가 심했다. 시베리아에서 알류산 열도를 거쳐 알래스카에 퍼져 사는 사람들이 방언의 연속대를 형성했다. 탐사대원들은 원주민이 사용하는 단어를 수집할 때마다 수집한 지역도 명기해야 했다.

“전하! 여러 나라의 이해가 걸려 있어서 쉽지 않았습니다.”

“수고하셨소, 최 참판.”

예국 참판이 오스만제국의 수도 이스탄불, 이 시대 오스만제국의 공식 명칭 콘스탄티니예와 이집트의 카이로를 방문하고 돌아왔다. 이스탄불은 활발했고 카이로는 몇 번 반복적으로 유행한 전염병에 인구가 확 줄어들어 묘지 같은 분위기였다고 했다. 카이로 외에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몇몇 지역에 페스트가 확산되고 있었다.

“오스만 사람들이 최 참판의 복장을 이상하게 보지 않았소?”

“제 옷보다는 수행 병사들의 복장을 더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예국 참판은 젊은 관리들과 달리 아직도 상투를 틀고 바깥에서는 갓을 쓰고 다녔다. 명나라와 조선이 이미 고산국의 외교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지 오래였으나 최 참판이 방문할 때 두 나라에 책 잡힐까봐 일부러 상투를 유지했다. 고산국이 봄부터 가을까지 너무 더워서 예국 참판도 머리를 짧게 깎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최 선생에게 얼핏 들었다.

예국 참판의 수행원으로 따라간 관리들과 병사들은 대부분 머리를 짧게 치고 근대 유럽 제국주의 시대와 비슷한 원색의 화려한 복장과 군복을 입었다. 그러나 예국 참판이 사모관대를 하고 바퀴 달린 수레에 단정히 타고 있으면 누가 더 높은 사람인지 명백히 구별됐다. 예국 참판이 옛 복장을 고집하는 것은 신구의 조화 외에 그런 효과를 노리기도 했다.

“이스탄불에서는 술탄 칼리파를 직접 알현했습니다. 황제와 대화를 해보니 고산국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오스만제국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소.”

“황공하옵니다. 준비기간이 부족했음을 인정하겠습니다.”

“아니요. 그 동안 예국이 워낙 바빴으니까요. 이집트는 어땠소?”

오스만제국에서는 아시아의 바다를 장악한 다음 맹렬한 기세로 인도양으로 진출하고 있는 고산국에 대해 당연히 관심을 가질 만했다. 오히려 부족한 인원으로 인도와 동남아시아에 더해 오스만제국과 이집트 국내사정까지 파악해야 하는 예국 관리들이 고생했다.

“투르크 족인 재정관과 백인 예니체리 사령관은 수에즈 운하 건설에 찬성하고 맘루크 출신인 이집트 총독은 명백히 반대하고 있습니다. 총독은 반대 사유를 밝히길 꺼리더군요.”

“대충 이해는 가오. 급한 건 아니니 이집트를 천천히 설득해나갑시다.”

총독은 이집트에 대한 오스만의 지배가 강화될 것을 우려해 운하 건설에 반대했다. 이민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알아보니 역시 이집트 총독이 반대한 이유는 뇌물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윽!”

“그래서 양탄자와 비단, 옥 도자기 등을 총독의 저택에 선물로 바쳤습니다. 다음 날 저를 부른 총독이 몹시 기뻐하면서 수에즈 운하 건설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숙원사업이라고 합니다.”

“이런!”

대규모 토목 사업에서 돈과 뇌물이 오고가는 것은 태생적인 특성 같았다. 정치인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필요 없는 토목 사업을 일부러 만들기까지 했다. 지난번에 ‘우천시......’ 운운한 경고문이 붙은 개천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공사를 벌이지 않은 날보다 공사를 하는 날이 더 많았다.

“다만 이집트는 나일강 계곡이나 삼각주, 오아시스에서 3모작이 가능한 지역이라 건설 인력을 빼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구도 300만 이하로 줄어들어 부역이든 임노동자든 노무자를 구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집트 인구가 300만이 안 된다고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말기에 800만이라던 이집트 인구가 근세에 들어서서 흑사병과 경제적 쇠퇴로 인해 꾸준히 인구가 줄어들었다.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공격한 당시에는 더 줄어들어 250만을 기록했다. 지금도 고산국보다 인구가 적었다.

“오스만에 패배하고 인도양 무역을 포르투갈에게 내준 탓입니다. 이집트가 한때 부유함으로 명성을 날렸지만 지금은 변방에 불과합니다.”

“경제적 쇠퇴가 단기간에 인구를 확 줄이는구려.”

============================ 작품 후기 ============================

운하영웅전설 ㅡ.ㅡ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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