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14 46. 1596년 =========================================================================
“안 됩니다! 에스파냐가 여러 곳에서 전쟁을 벌이면서도 아직 망하지 않은 것은 신대륙의 은광과 아시아 무역 덕분입니다. 특히 포토시 은광은 절대 양보할 수 없습니다. 부채 천만 냥 때문에 매년 600만 냥이 산출되는 은광을 넘길 수는 없습니다.”
상부(Alto) 페루, 즉 현대 볼리비아 지역인 포토시 은광은 1545년에 발견됐다. 신대륙에서 1570년부터 1630년까지 은 생산이 가장 활발했고 1590년이 그 정점이었다. 1591년부터 1600년까지 10년 동안 은 2700톤이 에스파냐로 향해서 10년 단위로는 이때가 가장 많았다. 이때 신대륙에서 에스파냐로 수출한 은의 65퍼센트가 볼리비아에서 산출됐으나, 포토시의 은 생산량이 지속적으로 감소해 18세기에는 멕시코의 은 생산량이 앞서게 됐다.
포토시 은광에서 250년 동안 은 4만여 톤을 생산했다. 포토시의 은이 에스파냐를 제국으로 만들고 근대 자본주의의 태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지만 강제노동에 동원된 원주민들 중 800만 명이 250년 동안 이 광산에서 사망했다. 원주민들의 노동력과 자원, 그리고 생명이 에스파냐의 번영을 위해 강제 이전된 것이다.
매년 남미 원주민 약 4만 명이 죽어가면서 생산한 은 200톤을 이민호는 옥 도자기나 비단, 모피를 팔아 간단히 얻고 있었다. 그러나 마닐라 갈레온에 실려 고산국으로 오는 은은 주로 멕시코 은광에서 생산한 것이며, 치치메카 부족들이 걸핏하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강제 노동은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광산주들은 높은 임금으로 원주민 자유노동자를 고용해야 했고, 이들은 나중에 전문 광부로서 멕시코 광업 발달에 기여했다.
“그럼 고산국에 줄 수 있는 것이 뭐요?”
“에스파냐는 넓은 영토 말고는 고산국에 넘길 만한 것이 없습니다.”
프랑스는 그나마 농작물이라도 외국에 팔 수 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말고는 이 시대에 외국에 판매할 만한 물건을 생산하는 나라가 거의 없었다. 벨기에 지역, 즉 플랑드르에 모직산업이 발전했고 영국은 플랑드르에 양모를 수출하는 입장이었다.
에스파냐는 나라 자체는 유럽에서 손꼽히는 부국이었지만 신대륙에서 매년 쏟아져 들어오는 은이 아니라면 내세울 게 전혀 없었다. 젊은이들이 바다로 나가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노력하는 포르투갈도 국내 산업은 전무했다.
이민호가 식량의 자급자족과 내수산업 발전을 위해 노력한 것과 달리 유럽 국가들은 왕실만 부유하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과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으나 이 시대는 왕실의 부유함만으로 국가의 힘을 따지기에는 국민경제의 규모가 너무 커졌다.
“영토요? 설마 신대륙 전체가 에스파냐의 영토라는 주장은 아니겠지요?”
“신대륙 전체가 에스파냐의 영토입니다. 교황 성하께서도 인정하신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해 확인됐습니다.”
사신이 별로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서 이민호는 밀고 당기기가 오래 끌 것 같지 않다고 판단했다.
이 시대에 포르투갈은 브라질 영토를 서쪽으로 맹렬하게 확장하며 개척 중이었다. 그러나 이때 포르투갈이 에스파냐와 같은 나라였기 때문에 브라질의 확장을 전혀 방해하지 않았다.
“영국과 네덜란드 해적들이 남미 서해안 도시를 약탈하고, 영국과 프랑스 사람들이 북미 동해안에서 원주민들과 모피 무역을 하고 있는데도 말이오?”
“사실 포르투갈과 맺은 조약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은 저희들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산국이 북미 서해안을 탐사하는 것을 알고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입니다.”
“안전한 항로를 개척하는 중일뿐이오.”
이민호는 속으로 뜨끔했다. 2차 태평양 탐사단이 북미 서해안을 탐사하다가 인디언들과 교섭하는 와중에 마닐라 갈레온 선단을 만난 적이 있었다. 바다에서 만난 양쪽 선단은 술과 음식을 교환하는 등 훈훈한 분위기에서 헤어졌으나, 탐사선단이 본국에 돌아와서는 이민호에게 심각하게 보고했었다. 에스파냐 선단도 마찬가지로 고산국이 북미 서해안에 진출한 것을 심각한 사안으로 여겼을 것이다.
“에스파냐는 남미를 빠른 속도로 개척 중입니다. 반면에 북미를 실질적으로 점유하지 않은 상태에서 영토라고 우기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신대륙을 탐험하고 식민지로 선점할 권리는 분명히 우리 에스파냐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 권리의 일부를 고산국에 넘기겠다는 뜻입니다. 천만 냥을 갚지 않는 대가로 북미 전체를 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북미 전체라. 그게 천만 냥의 가치가 있느냐가 문제요. 다른 나라에서 전혀 인정하지 않는 권리가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겠소?”
은 천만 냥이면 은 300톤이 약간 넘었다. 마닐라 갈레온이 매년 아시아 무역자금으로 사용하는 금액인 200톤보다 더 많았다. 200톤은 이 시기에 신대륙 은광 중에서 가장 생산량이 많은 포토시의 연간 은 생산량에 해당했다.
어마어마한 양이지만 현대의 미국과 캐나다를 포함한 북미 전체를 매입하는 가격이라면 당연히 싸게 느껴졌다. 그러나 영토가 확정되지 않은 이 시기에는 다만 가능성일 뿐이었다.
“폐하! 그렇다면 그 권리를 고산국에 넘긴 다음, 고산국이 다른 나라와 경쟁할 경우 에스파냐가 적극적으로 고산국을 지지하겠습니다. 유럽에서 강대국인 에스파냐의 힘을 무시할 나라는 없습니다.”
“에스파냐를 무시할 나라는 없지만 어쩔 수 없이 에스파냐와 전쟁을 하는 나라는 지금도 많아요. 이익이 있다면 그 나라는 에스파냐와 싸울 수도 있는 모험을 할 것이오. 신대륙도 마찬가지요.”
“북미를 넘기되, 유럽 다른 나라가 북미를 침범해서 전쟁이 발생할 경우 에스파냐는 항상 고산국의 편에 서서 참전하겠습니다.”
원하는 답이 드디어 사신의 입을 통해 나왔다. 에스파냐는 중남미만으로도 이미 벅찬 지경이라 북미를 개척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조만간 유럽에서 벌떼처럼 달려들 시기라서 북미의 현실적 가치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고산국에는 힘이 남아돌았다.
“북미와 에스파냐의 보장이라. 그건 마음에 드오. 허나 앞으로 유럽인들이 계속 대서양을 건너 북미 동해안에 상륙할 것이오. 북미 동해안까지 고산국 해군이 가는데 오래 걸릴 테니 북미를 제대로 확보할 수 있을지 의문이오. 그래서 파나마에 어서 운하가 건설돼야 한다고 생각하오.”
“아시다시피 에스파냐에서는 지난 1530년대부터 운하 건설 계획을 세웠으나 자금을 준비할 때마다 전쟁이 일어나 못 만들었습니다. 고산국 국왕폐하께서 제안해주셔서 본격적으로 입지 선정을 하고 있습니다만, 갑작스런 국가파산 때문에 지금은 곤란합니다. 몇 년 더 기다려주십시오.”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운하가 파나마에서만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니카라과 호수를 이용해, 또는 멕시코 테우안테펙 지협에 운하 건설 가능했다. 현대 니카라과에서 400억 달러를 들여 2014년부터 286km 길이의 운하를 건설한다고 발표했고, 중국 기업에 운하 건설권을 주면서 100년 동안 운영권을 맡기기로 했다.
“그렇다면 일괄적으로 해결합시다. 북미를 우리에게 주고, 파나마 운하 건설권도 우리에게 주시오. 에스파냐가 공동으로 건설하면 좋겠지만 기다리다 세월이 다 가겠소.”
“파나마도 에스파냐의 영토이므로 건설권을 넘기더라도 운영권은 공동으로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민호가 슬쩍 넘어가려고 했는데 사신이 운하 운영권에 대해 분명히 지적했다. 이 시대에 파나마 운하를 이용할 선박은 많지 않겠지만, 한 번 만들어놓기만 하면 오랜 세월 통행권 수익만으로 큰돈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산국 입장에서는 파나마 운하가 전략적인 교통로였다. 수에즈 운하가 개통된다 해도 아시아에서 북미 동해안으로 가려면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는 편이 가장 시간이 적게 들었다.
“파나마 지역은 에스파냐의 영토니까 분명히 권리가 있소. 그러나 건설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면서 수익만 바랄 수는 없을 것이오. 운하 운영비를 제외한 수익의 3분의 2는 고산국, 3분의 1은 멕시코 부왕령이 나눠 가집시다.”
이민호는 어쩔 수 없이 에스파냐와 운영 수익을 나누기로 했다. 그래도 자금은 고산국에서 모두 투자하므로 더 많은 수익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스파냐 사신도 수긍했다.
“더 이상 욕심 부릴 수가 없겠군요. 그렇게 알겠습니다.”
“다만 운영은 에스파냐에서 하시오. 우리는 직원 한두 명만 파견하겠소.”
“그럼 감사하지요.”
세바스티앙 비스카이노가 이게 웬 떡이냐 싶은 표정이었다. 운영도 큰 권리였으나, 이민호는 머나먼 파나마에 상주 직원을 많이 파견할 자신이 없었다.
사신은 꽤나 즐거운 표정이었다. 어떻게 보면 파나마 운하를 이용해 고산국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실이긴 했지만 언젠가 중남미 여러 나라, 특히 콜롬비아가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하는 시기에 파나마 지역을 고산국이 장악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북미와 멕시코의 경계는 어디요? 이 자리에서 영토 경계를 확실히 밝힙시다.”
“저희가 요즘 리오그란데 강을 넘어 탐사대를 지상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북미 서해안의 해상 탐사는 제가 맡고 있는데 북위 23도에서 북위 30도에 이르는 긴 반도를 측량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바하 칼르포르니아를 뜻했다.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남쪽으로 길게 내려온 가느다란 반도였다.
“그럼 대서양 방면 동쪽부터 중간까지는 리오그란데 강을 경계로, 중간부터 서쪽 태평양은 북위 30도를 기준으로 나눕시다. 사실 그 북쪽 해안선은 고산국 탐사대가 이미 측량을 마쳤소. 지도를 보여드리리까?”
“아아! 북미 서해안이 이렇게 생겼군요.”
이민호가 서랍에서 지도를 꺼내 아주 잠깐 보여줬다. 태평양전도였는데 일본과 사할린, 캄차카 반도, 알류산 열도, 현대 알래스카와 캐나다 서해안, 그리고 미국 서해안까지 정밀하게 그려진 지도였다. 캄차카 반도와 알류산 열도 북쪽은 아직 미탐사구역으로 남았다.
“하지만 이미 리오그란데 강을 너머까지 탐사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에스파냐의 영토로 인정해주셔야 합니다.”
“탐사했다고 당연히 영토가 되는 것은 아니요. 하지만 우방국인 에스파냐가 손해를 보게 할 수는 없지요. 100만 냥에 해당하는 상품을 선물로 드리겠소. 특제 양탄자도 몇 장 드리지요.”
“와우! 폐하께서 참으로 통이 크십니다.”
결국 천백만 냥으로 북미 대륙을 사고 파나마 운하 건설권을 얻었다. 오스만제국에서 외교가 진행되는 속도로 봐서 수에즈 운하보다 파나마 운하가 더 빨리 건설될 것 같았다.
“그런데 요즘 명나라의 은 가격이 빠른 속도로 하락하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물건 가격이 폭등하는 줄 알았는데 금 결제 기준으로는 거의 그대로였고 은 기준 가격만 폭등했습니다.”
협상을 마치고 편하게 대화하는데 페드로가 물었다. 이민호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고 있었다. 세바스티앙 비스카이노는 혼자서 돌아가는 선풍기에 놀랐다가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조만간 은의 가치가 요동칠 시기였다. 얼마 전까지 명나라는 에스파냐의 갈레온 무역에서 천만 냥 이하, 일본에서 6백만 냥, 포르투갈과 인도, 기타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를 합해 대략 천만 냥의 은을 매년 입수하고 있었다. 이 시기 명나라가 세계 은의 블랙홀이라는 평가가 맞았다.
명나라 영토 서부에서도 페르시아 등에서 매년 많은 양의 은이 유입되고 있었고, 반대로 여진족 지역에는 매년 몇 만 냥 정도 유출되는 수준이었다. 조선은 일본에서 유입된 은과 조선에서 생산한 인삼을 명나라에 수출하고 그 합한 금액을 비단과 서적 등으로 수입하는 수준이었다.
명나라는 세금을 은으로 받는 일조편법 시행 이후 은 수요가 폭등하는 바람에 은의 가치도 국제기준보다 두 배로 올라갔다. 그러나 지금은 백성들이 세금도 못 낼 지경이었고 상업이 마비되다시피 해서 명나라에서 은 가치가 폭락하고 있었다.
황제는 은을 더 많이 갖기 위한 욕심에 백성들을 최대한 쥐어짜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새로 은을 얻을 때마다 현재 가지고 있는 은의 가치를 대폭 떨어뜨리는 모순된 상황에 처했다. 금 기준으로 보면 은을 걷을수록 황제의 재산 총액이 축소되고 있는 것이 명백했으나, 이미 은에 눈이 어두워진 황제는 명나라 백성들 전체를 불황의 구렁텅이로 몰아갔다.
“맞소. 명나라 황제의 욕심이 끝이 없는 탓이오.”
“명나라가 혼란에 빠지면 타타르가 명나라를 침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페드로는 오랫동안 명나라와 거래를 해왔으므로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페드로가 말한 타타르는 몽골이 아니라 여진이었다.
============================ 작품 후기 ============================
논문 여러 편을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