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412화 (361/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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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1596년

1월 초에 자야카르타에서 고산국에 돌아온 이민호는 아프리카에 흑인 병사들을 보내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흑인 병사들은 귀향에 대비해 집짓기와 식수 정화 등 여러 가지 기술을 배우고 농사짓는 법도 완벽하게 익혔다. 흑인 병사들 일부는 범선을 운영하는 해군으로 전환돼 짧은 기간에 집중 훈련을 받았다.

흑인 병사들은 고산국에서 재배하는 오곡 외에도 자야카르타에서 구한 카사바와 사구 같은 대용식 재배법을 익혔다. 카사바는 고구마와 감자 중간 정도의 전분이 많은 구근이며 사구는 빵나무라 불리는 전분이 풍부한 식물이었다.

“건국 초에는 무역보다는 식량 자급자족이 우선이야. 괜히 욕심내서 주변 부족들 정복하러 다니지 말고 일단 생존 기반부터 닦아.”

“잘 안다, 국왕! 국왕은 먹을 것을 충분히 생산해서 주변에 나눠주면서 세력을 불렸다. 그럼 싸울 필요가 줄어든다. 무척 인상 깊었다.”

“그래. 모든 것을 싸움으로 해결하려 하지 마. 가만히 있어도 싸움은 얼마든지 생길 테니까 구태여 먼저 일으킬 필요가 없어. 므부투 너도 권력을 탐하는 인간들 사이에서 고생 좀 하겠다.”

“사람들은 서로 상처 주고 상처 받고 하면서 사는 거지. 그런 것 때문에 실망할 나이는 지났어.”

“그래, 그래. 널 처음 보는 사람들은 60대로 알더라.”

국왕 내정자라 하면 이상하지만 므부투는 여러 부족 출신 흑인 병사들을 이끌 구심점이었다. 그는 조직을 잘 이끌면서 개인적인 역량을 키우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므부투는 스와힐리어와 아랍어, 포르투갈어를 집중적으로 배웠다. 전투 능력이야 처음부터 알아줬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았으나 정치는 전혀 다른 분야였다.

“힘들 때일수록 호위병들을 잘 다독여. 힘들어지면 그 동안 믿었던 호위병들이 널 암살하거나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으니 특히 조심해.”

“동료끼리 서로 믿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될 것 같다.”

“아니, 나머지 병사들은 서로 믿어야 하는데 너는 부하들을 믿으면 안 돼. 물론 네가 부하들을 신뢰하는 척해야겠지만 말이야.”

“국왕은 나에게 너무 안 좋은 것만 가르쳐주는 것 같다.”

“걱정되니까 하는 소리다. 경험자 말은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이민호는 므부투의 호위병들과 주요 지휘관들을 모아, 만약 므부투 신상에 문제가 생기면 흑인 연대와 인연을 끊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아프리카로 돌아간 다음에는 무조건 므부투를 통해서만 지원하겠다고 거듭 약속했다. 므부트가 잘못 되면 흑인 연대는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겠다고 재삼 강조했으니 반역을 일으킬 가능성은 줄어들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미래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3월에 모든 준비가 끝나고 전선 20여 척과 수송선 30여 척이 출항했다. 짐을 가득 실은 범선 30척도 뒤따랐다. 보름간의 항해 끝에 아프리카 동해안 잔지바르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고산국 국왕폐하! 흑인 병사들이 무척 늠름합니다.”

잔지바르의 주인인 아랍 상인들이 바짝 긴장한 채 대군을 맞이했다. 지금은 아니라지만 얼마 전까지 흑인들을 팔아치우는 노예상을 했으니 흑인 병사들에게 보복을 당할 수도 있다는 걱정에 다들 몸을 사렸다.

그러나 흑인 병사들은 몇 년 전 잔지바르에서 노예로 있으면서 학대당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내색하지 않았다. 앞으로 잔지바르의 아랍 상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했고, 아프리카 본토에 도착하면 훨씬 더 큰 위험이 닥쳐올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문제 때문에 흑인들 1만여 명 중에서 2천여 명이 고산국에 남기로 결정했다. 이미 고산국에 정착해 편하게 살고 있는데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가 모험을 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렇다고 남은 자들이 겁쟁인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탐사선에 소속된 모험가도 있고 고산국 군에 아직 1개 대대 정도 군인으로 남아있었다.

“상인들이 협조해줘서 고맙소. 여기 므부투는 아프리카 황제가 될 사람이오. 앞으로 이 사람을 도와주시오. 그럼 약속대로 북쪽 펨바 섬을 후추 산지로 만들어주겠소.”

“최선을 다해 황제폐하를 도와드리겠습니다, 국왕폐하.”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법이었다. 노예무역을 폐지한 이후에도 잔지바르 섬을 계속 무역항으로 유지하려면 뭔가 사고 팔 상품이 있어야 했다. 인도네시아에서도 한참 동쪽에 위치한 향료제도는 너무 멀었고, 후추 산지인 인도는 너무 위험했다. 그런데 잔지바르가 무역항으로서 후추 산지를 겸한다면 앞으로도 발전 가능성이 컸다.

하루를 쉬고 다음 날 아침 바다 건너 현대의 바가모요 해안에 상륙했다. 건조한 지역이긴 하나 숲이 무성하고 북쪽에 수량이 풍부한 강이, 남쪽에 사주가 길게 뻗은 천연적인 항구가 있는 곳이었다. 수송선에서 짐을 내리는 사이 범선 30척은 이곳에 정박했다. 이제부터 범선들의 모항은 바로 이곳이었다.

기병대대가 가장 먼저 상륙해 사방으로 퍼져 나가 정찰활동을 수행했다. 그 사이 보병들이 부대별로 상륙한 즉시 선착장과 거주지를 건설했다. 이 지역에 요새나 성곽은 만들 필요가 없었다. 그 대신 야생동물의 습격에 대비해 외곽에 경계 초소를 세우기로 했다. 왕궁은 아직 꿈도 못 꾸고 므부투도 다른 병사들과 똑같은 크기에 회의실만 추가된 집에서 살기로 했다.

젊은 흑인 여자들이 병사들 숫자만큼 있어서 여자를 지키는 일이 지금 당장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여자들이 어린아이를 아직 많이 낳지 않았다. 그 동안 귀향이라는 큰일을 앞두고 있어서 아기를 낳아 키우기가 불안했는지 신기하게도 여자들이 임신과 출산을 거의 하지 않았다.

“국왕! 이제 다시 보기 어렵구나. 그 동안 우리에게 잘 대해줘서 고맙다. 앞으로 몇 년 더 신세를 지겠지만 하루빨리 자립하도록 노력하겠다.”

“그래. 고생 좀 해라.”

“아프리카 남단을 우리가 지켜야 하는데 언제 거기에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괜찮아. 천천히 진행해. 생존이 우선임을 명심해라.”

“알았다. 정말 고맙다.”

므부투가 이민호에게 큰절을 올렸다. 고산국에 있을 때는 항상 이민호에게 땍땍거리던 놈이 철이 들었다.

“연락이 아주 끊기는 것은 아니니까 영원히 작별하는 건 아니야. 수송선 편으로 편지 좀 제대로 해.”

“곤란한 일이 생기면 물어보겠다. 물론 모든 문제는 우리가 직접 해결하겠다.”

“그래. 우리는 우방이니까 필요할 때는 언제든 도와주마.”

흑인 병사들에게 고산국에서 사용하는 3인치 야포와 함포는 주지 않았지만 조선 지자천통 몇 문을 넘겨주었고 화약도 충분했다. 유럽 세력을 상대할 것이 아니라면 보병총과 기병총만으로 다른 부족의 침략을 물리칠 정도로 충분히 무장했다. 사실 화력은 다른 부족이나 심지어 유럽 세력에 비해서도 압도적이었다.

이민호는 다시 좌승함에 올랐다. 선착장까지 따라온 므부투가 고산국 함대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이민호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골칫덩이 녀석들을 잘 해결했다. 이제 평생 볼 일이 없을 거야.”

“여기 손수건 있어요.”

“쳇!”

민영이 부축해줘서 통로에 부딪치지 않고 집무실까지 올 수 있었다. 이민호는 흑인 병사들과 작별하면서 울었다는 사실이 창피해서 함교로 가지 못했다.

함대는 마다가스카르로 향했다. 5, 6세기에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정착한 섬이었으나 나중에 이주해 들어온 흑인들과 혼혈이 진행돼 탐사전대 김몽돌 소령은 주민들을 그냥 흑인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주요 인종인 메리나 족은 이주한 지 아직 얼마 안 돼 혼혈은 거의 진행되지 않은 동남아시아 인종 그대로였다.

고산국 함대는 58만 평방킬로미터나 되는 본섬이 아니라 중간 기착지로 많이 쓰이는 코모로 섬에 먼저 도착했다. 마다가스카르처럼 오스트로네시아 어족이 먼저 6세기부터 거주했다는데 지금은 흑인과 아랍인들이 다수를 이루어 살고 있었다.

“항구에 사람들이 몰려나오고 있습니다.”

“성대한 환영이군.”

코모로 섬에도 아랍 상인들이 자주 들러서 그런지 섬 바깥소식이 막히지 않았다. 주민들은 50척이나 되는 고산국 함대를 보고도 전혀 겁을 내지 않았다.

함대에서 수송선 두 척을 보내 항구에서 주민들과 교역을 했다. 팜유를 대량으로 사고 비단과 설탕, 소금을 판매했다. 주민들이 화승총을 팔아달라고 간청해서 금을 받고 화승총 100정과 화약 몇 통을 넘겼다. 수송선들이 항구를 떠나려 하자 주민들이 자주 들러달라고 요청했다.

다음 날에는 마요트 섬에 들렀다. 마찬가지로 교역을 하는데 땅은 비옥하고 산호초가 섬 주위를 둘러싸고 있어서 물고기도 풍부한 편이었다. 여기서는 식량을 사고 역시 설탕과 소금, 그리고 화승총과 화약을 판매했다. 주민들이 스와힐리어를 사용해서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다.

“주인님! 왜 별로 필요도 없는 교역을 하세요?”

“인도양 항로 중간에 있는 섬들이라서 나중에 유럽 국가의 식민지로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민희가 육아를 위해 궁성에 남은 동안 여전히 민영 혼자서 이민호를 수행했다. 민영은 아기를 낳지 못해 안달하는 성격은 아니었고, 이민호를 따라다니는 것을 즐거워했다. 배를 타면 세상 구경은 실컷 할 수 있었다.

“유럽 배들이 계속 몰려올 텐데 그때마다 쫓아내야겠군요.”

“그렇지. 요새를 쌓으면 항로가 위협받거든. 참 신경 많이 쓰인다.”

유럽 배들이 오더라도 교역만 하면 좋을 텐데 만약 요새를 쌓고 대포를 배치하면 고산국에서도 대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식민지를 건설하면 요새 건설이 당연히 뒤따르니 인도양의 섬들이 유럽의 식민지가 되는 것도 막아야 했다.

화승총은 아퀘부스보다 머스킷에 가까웠다. 유럽인들이 현재 사용하는 것보다 성능 면에서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민호는 원주민들이 머스킷만으로 유럽인들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을 것으로 믿지는 않았다. 화약 무기를 적당한 가격에 판매함으로써 서로 간에 신뢰를 구축하기 위한 거래였다.

이민호가 말을 타고 달리면서 소리를 질렀다. 말 30여 마리가 달리고 그 중심에 거대한 새 한 마리가 빠른 속도로 달렸다. 타조를 약간 닮았으나 훨씬 거대한 새였다.

“그물 던져! 발차기 조심해!”

기병들이 키가 3미터나 되는 거대한 코끼리새 옆을 지나가며 그물을 던졌다. 코끼리새가 발로 걷어차려 했으나 눈치 빠른 전마가 잽싸게 속도를 높여서 아슬아슬하게 발길질을 피했다.

마다가스카르 섬에 살다 16세기 혹은 17세기에 멸종했다는 코끼리새는 아직 남부 지방에 많이 살고 있었다. 유럽인들이 마다가스카르에 도착하고도 한참 지나 멸종했으니 아직은 살아있는 개체가 많을 때였다.

이민호가 말을 몰아 그물에 갇혀 작은 날개를 퍼덕거리는 코끼리새에게 접근했다. 크기는 엄청났으나 날개가 거의 퇴화돼 타조보다 작았다. 그러나 다리는 어마어마하게 두꺼워 코끼리새라는 이름이 붙을 만했다.

“도련님! 이거 재미있는데요? 더 잡죠.”

“얘들도 고향에서 살아야지. 다섯 마리 잡았지? 이제 그만 잡자.”

“한 마리만 더 잡으면 안 될까요? 깃털 모양으로 봐서 암놈 세 마리 수놈 두 마리입니다. 수놈 한 마리만 더 잡아요.”

“그래. 한 마리만 더 잡아라. 다치면 안 된다?”

“그럼요. 이제 익숙해졌습니다.”

코끼리새는 거대한 알을 낳는다는데 숲에 숨겨놓았는지 구경도 못해봤다. 날지 못하는 코끼리새는 도도새와 모아가 그렇듯 인간이 멸종시켰다. 멸종하기 전에 이렇게 몇 마리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동물원에서 번식이 가능하지 않다면 적당한 섬을 구해 풀어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수가 늘어나면 다시 고향 섬에 보낼 계획이었다.

감불이 코끼리새를 포획하는 사이 이민호는 메리나족 사신들 쪽으로 말을 몰았다. 중부 고원을 장악하고 왕국을 세운 메리나 족은 말로만 듣던 말을 타고 달리는 고산국 기병들의 위세에 잔뜩 위축돼 있었다. 이민호가 일부러 사신들이 보는 앞에서 코끼리새를 잡도록 했었다.

“그, 그러니까 평화롭게 교역을 하는 편이 좋습니다. 침략하면 나쁜 사람입니다.”

“그래, 그래. 앞으로 자주 무역을 하자. 어느 항구로 가면 좋겠나?”

메리나 족은 오스트로네시아 어족인 말라가시어를 사용하나 마요트 섬과 교역을 하므로 스와힐리어도 잘 통했다. 이들은 마다가스카르에 이주한지 겨우 100년도 안 되는 부족이니 아직은 토박이 원주민이라 할 수도 없었다.

“수도인 안타나나리보가 중부 고원지대에 있으므로 동해안 중간 정도의 어느 항구라도 좋습니다. 그런데 저희 왕궁에 가서 국왕폐하를 알현하고 회담을 하시지 않겠습니까?”

“미안하지만 바빠서 말이야. 나중에 정식으로 사신을 보낼게.”

“모처럼 오셨는데 만나 뵙지 못하게 된다면 국왕폐하께서 섭섭해 하실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선물을 드리지. 화승총 200정이야. 이 정도면 유럽인이 쳐들어와도 충분히 지키겠지?”

“우아! 물론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 전에 포르투갈 상인들이 화약무기 판매금지령을 어기고 메리나족에게 몇 정 판 것 같았다. 16세기 중반에 다네가시마에서 화승총 2정을 팔면서 워낙 대박을 쳐서 포르투갈 상인들은 기회만 있으면 원주민에게 화승총을 팔려고 했다.

화승총을 구하면 일본처럼 어렵게 복제해서 내전이나 외국 침략에 써먹는 나라도 있고, 처음에는 시큰둥했다가 조총에 혼쭐이 난 다음 열심히 복제한 조선 같은 나라도 있었다. 그러나 적도 이남에서 화승총을 복제 생산할 정도로 기술력이 뛰어난 나라는 별로 없었다.

============================ 작품 후기 ============================

흑인 정착, 운하 2개 건설, 북미 등등 할 일이 많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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