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409화 (358/1,000)

00409  45. 1595년  =========================================================================

“가난한 지역이라서 아이들이 다른 지방으로 팔려간대요.”

“쯧쯧! 소년은 예니체리로 끌려가고 소녀는 노예로 팔려가는구나. 미래 세대가 빠져 나가면 그 지역 사람들에게 희망이 있나?”

예니체리는 명목상 오스만제국 술탄의 노예일 뿐 노예와 전혀 상관없었다. 그래서 마구잡이로 비 이슬람 노예 소년들을 사들이는 것이 아니라 관리가 마을마다 파견돼 철저한 선발 과정을 거쳤다. ‘인간 공물’이라는 인식 때문에 자식을 예니체리 선발에서 제외시키려고 숨기는 자들도 있었지만 오히려 출세를 노려 관리에게 뇌물을 주고 자식이 선발되게 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이제 부모님하고 편지 왕래가 돼?”

“저하고 아이샤는 전염병에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삼촌 댁에 갔다가 노예상인에게 팔린 거여요. 다른 아이들 몇몇은 부모와 연락이 닿아서 편지도 보내고 은도 조금 보내나 봐요.”

“그래? 잘 됐다. 그럼 고향에 돌아갈 수도 있겠네?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사람 있으면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서 배편을 알아봐줄게.”

그러나 파티마가 경악할 정도로 갈라티아 시녀들이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는 모양이었다. 자식이 가난한 집안을 위해 열심히 일하면서 돈을 부쳐주는 것과 달리, 일단 노예로 팔린 다음에는 사실상 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이 끊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누가요? 고향에 돌아가면 죽도록 고생만 할 텐데요. 그리고 중간에 해적이 많아서 위험해요. 아랍 해적도 무섭고 포르투갈 상선도 해적질은 기본으로 하는데요?”

김몽돌이 겪은 것처럼 인도양은 물론 이 시기 지중해도 해적선으로 들끓었다. 오스만제국의 무라트 3세가 후계자로 지명한 장남 메흐메트, 또는 메메트를 낳은 여인은 사피예 술탄인데 베네치아 출신으로서 지중해에서 투르크 해적에게 납치당했다가 하렘에 바쳐진 경우였다.

무라트 3세가 예상보다 일찍 죽고 메흐메트 3세가 올해 1월 중순에 순조롭게 술탄 칼리파에 즉위했다. 김몽돌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오스만제국 사람들이 고산국 함선에 우호적이라 하니 조만간 사신을 파견하기로 했다.

“쯧!”

“주인님께서는 저희들을 고향에 보낼 생각밖에 없는 것 같아요. 섭섭해요. 제발 쫓아내려고 하지 마세요.”

파티마가 이민호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새로 들어온 시녀들에게 과시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것 같아 이민호가 일부러 파티마의 볼에 입을 맞춰주었다.

“꺄악~ 호호!”

“너무 좋아하는구나.”

“요즘 뜸하셨잖아요. 후원에 가끔 놀러 오세요.”

“그래. 거기 온천이 있지? 언제 한 번 가보마.”

“약속했어요? 꼭이에요!”

약속이 지켜질 리는 없지만 파티마는 웃으며 돌아갔다. 파티마가 조금 슬퍼 보여 이민호도 가슴이 아팠다. 한 달에 한 번 정해진 날에 안을 때마다 파티마의 애틋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오만의 사신이 찾아왔다고요? 오스만이 아니라?”

“예. 일단 객사를 배정해 쉬게 했습니다. 대표단 세 명과 수행원 120여 명이 배 두 척을 타고 왔습니다. 내일 오전에 알현을 청한다고 합니다.”

예국 참판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이민호는 허둥지둥 오만에 대한 자료를 찾아봤다. 포르투갈이 오만의 해안도시 일부를 명목상 지배하고 있어서 오만에 대한 자료는 풍부한 편이었다. 포르투갈의 지배란 것이 군사적으로 압박한 다음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무역의 특권을 누리는 쪽이라서, 다른 나라에서 보기에는 정상적인 식민지배가 아니었다.

오만 주민은 남서 아라비아에서 이주한 카흐탄 족과 북서 아라비아에서 이주한 니자르 족의 후손들인데 천년 가까이 대립을 지속해서 지금도 걸핏하면 두 종족이 칼싸움을 벌였다. 정치적으로는 기존 왕권과 이맘의 종교권이 충돌하는 등 내부 사정이 꽤나 복잡한 편이었다.

다음 날 아침, 오만 사신들이 알현실에서 이민호에게 인사를 올렸다. 브루나이 공주 두나가 아랍어를 가르친 장교가 통역을 맡았다. 김몽돌이 지휘하는 탐사전대에도 아랍어 통역이 여러 명 근무했다.

대표가 왜 세 명인가 했더니 종교지도자 이맘이 파견한 사신이 한 명, 두 부족에서 파견한 사신이 각각 한 명이었다. 두 부족에서 파견한 사신들은 외국 궁전에서까지 서로를 견제하며 신경전을 벌였다.

“술탄이 파견한 사신은 없소?”

“술탄은 실권이 없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한 국가의 정당한 대표가 보낸 사신이 없으면 대화하기 곤란하지 않겠소?”

“이맘이 오만의 모든 것을 관장합니다. 부족 내부의 일은 제외하고 말입니다.”

얼마 전에 이민호가 오만 술탄을 욕한 게 미안해졌다. 그러나 아직은 오만에서 술탄이 어느 정도 정치적 권력을 쥐고 있던 시기였다. 이맘에게 완전히 정권이 넘어가는 것은 앞으로 몇 십 년 후였지만, 이렇게 수시로 이맘과 술탄 사이에 힘의 중심이 오고 갔다.

“포르투갈은 오만을 속국은 아니지만 지배하고 있다고 주장했소. 포르투갈과의 관계는 어찌 설정할 것이오?”

“그들은 오만의 해안 항구 도시 사람들을 위압하며 강제적인 무역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오만 내륙지방은 온전히 이맘께서 통치하고 계십니다. 사실 보통 때 같았으면 배가 말래카에서 막혔겠지만 포르투갈이 고산국과 우방이라서 특별히 통항을 허락해준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포르투갈이 해안지방을 장악하고 있지만 내륙지방의 토호들은 전혀 영향력 아래에 두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니 나중에 포르투갈 세력이 오만에서 쉽게 쫓겨나게 됐다. 홍해와 페르시아 만에서 식민지배나 무역이 아니라 약탈 위주의 경영을 한 까닭에 아랍인들이 인식하기로 포르투갈은 해적이나 다름없었다.

“알겠소. 어찌 됐든 우호란 좋은 것이오. 그대들이 오만과 고산국 사이가 어떤 관계가 되는 것이 좋을지 제시해보시오.”

사신 세 명이 서로 얼굴을 바라보더니 대표 3인 중의 대표 격인 이맘의 사신이 먼저 이민호에게 고했다.

“저는 두 나라의 우호를 가로막는 문제를 먼저 짚어보고자 합니다. 고산국 국왕폐하께서는 노예 제도를 혐오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흑인 노예 일만 명과 백인 소녀들 100명을 구입하셨음에도 말입니다.”

“그렇소. 그래서 그들은 즉시 노예에서 해방됐소.”

“필요에 따라 노예를 구입하면서도 노예제도가 싫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노예상인들이 억울해 합니다.”

이민호는 마치 설득력 없는 주장을 하는 오타쿠가 된 기분이었다. 이민호가 마카오에서 노예를 산 것은 사실이었고, 필요에 의해 흑인 노예가 마카오에 들어올 때마다 노예상인에게 샀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노예상인에게 요청해서 추가로 구입한 적은 없었다. 물론 노예상인은 마카오에 흑인노예가 들어올 때마다 고산국에 통보했다.

“그래서 내가 위선적인 속물이라고 꾸짖는 것이오? 페루로 끌려갈 노예들을 구입해서 해방시켜준 다음 백성으로 받아들여 고산국에서 일자리를 준 것이오. 그럼 내가 노예상인들에게서 강제로 빼앗아 해방시켜줘야겠소?”

“그건 아닙니다만.”

분위기가 조금 불편하게 돌아갔다. 이맘이 종교지도자라 하나 현대 이란의 종교지도자들처럼 현실 정치인이나 다름없었다. 이맘이 보낸 대표는 노예제도의 존속을 원하는 것 같았다.

“다른 두 분도 말씀해보시오.”

눈치를 살피더니 두 부족 사신 중의 한 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부다비 섬을 고산국에서 차지한 것도 마음에 걸립니다. 어째서 오만을 지나 호르무즈 해협 안쪽, 페르시아 만 깊은 곳의 아무 쓸모없는 섬을 차지한 것입니까?”

“다들 아부다비가 쓸모없는 섬이라 하고 주인도 없다 해서 중간 기착지로 쓰려고 그 섬을 차지했소. 홍해 쪽 섬은 다들 주인이 있고 요새가 많아 항구를 임대하기도 쉽지 않았소.”

물론 석유 때문이지만 이 시대에 그런 말을 하면 믿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브루나이 유전에서 생산되는 석유만으로도 고산국이 사용할 양은 충분했으나 아라비아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북미대륙 서해안에 땅콩과 콩을 심듯이 인도양에서도 연료를 구할 방법이 필요했는데, 아무래도 바이오연료보다는 석유가 훨씬 효율적인 연료였으니 유전을 차지한 것이다. 그리고 수백 년 후 미래를 내다보면 당연히 아부다비를 차지해야 했다. 어차피 지금은 주인도 없는 무인도에 불과했다.

현대에 아랍에미리트의 수도는 아부다비였다. 두바이가 건설 붐을 일으켜 아랍의 중심이 되고자 했으나 결국 석유 매장량의 차이가 승부를 갈랐다. 두바이는 아부다비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고산국 같은 강대한 나라라면, 그리고 이집트에 수에즈 운하를 건설하겠다면 당연히 홍해나 아덴 만 어느 곳, 그러니까 예멘의 아덴 항이나 소코트라 섬을 차지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오만의 뒤통수에 자리를 잡겠다고 하시니 약소국인 오만 입장에서는 몹시 불안합니다.”

“나는 오만의 영토에 전혀 관심이 없었소만, 그래서 해적선들을 동원해 고산국 탐사선을 여러 번 공격한 것이오?”

“저희들이 시켰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만.”

“그럼 페르시아가 시켰겠소?”

사신들은 잠시 묵묵부답이었다. 오만의 부족장들이 해적들에게 고산국 탐사선에 설탕이 가득하다는 정보를 흘려서 공격하게 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이민호가 똑바로 앉아 대표들을 쏘아봤다.

“나는 오만이 상당히 거슬린다오. 방금 사신이 말씀하셨듯이 오만 자체가 고산국에게 중요한 항로 가까이 위치하면서, 해적선 다수가 오만에서 출항하고 있소. 그리고 잔지바르의 노예무역도 거슬리오.”

“지난 수백 년 동안 해온 일입니다. 노예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고, 파는 사람들이 있으니 노예무역이 존속해온 것 아니겠습니까?”

“오만 사람들이 노예로 팔려가 강제노동에 시달려봐야 노예제도가 나쁘다는 것을 실감할 것 같소.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 함대를 보내 싹 쓸어버리고 싶소. 오만이고 잔지바르고 말이오. 해안에서 10레구아 내륙까지는 고산국이 언제든 마음대로 파괴할 수 있음을 명심하시오.”

사신들이 겁에 질렸다. 나중에 알아보니 신기하게도 오만 사신들이 고산국의 군사제도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고산국 해군이 징병제가 아니라 정규 직업군으로 유지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이것은 중요한 차이였다. 다른 나라는 해군이 원정을 떠나기 위해서는 필요한 배를 건조하고 선원과 병사를 징발해 훈련시켜야 한다. 어마어마한 자금이 필요한 반면 함대의 질을 보장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고산국은 봉급을 받는 직업군인들이 그 동안 전투를 수행한 경험이 고스란히 쌓이고 있었다.

“폐하! 고산국의 군선도 아닌 소형 탐사선 세 척이 해적선 수십 척을 손쉽게 격파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인도양을 삶의 터전으로 삼는 저희 오만 입장에서는 오스만제국도 아니고 무굴제국이나 페르시아도 아닌 고산국과 친하게 지내는 편이 좋습니다.”

“그렇지만 손해를 보기는 싫다?”

“그렇습니다. 저희도 해적을 키우고 싶겠습니까? 운영비도 많이 들고 기회만 생기면 반역을 저지르는 놈들입니다. 노예무역에서도 사실 큰 이익이 나지 않습니다만, 그 외에 무역할 상품이라곤 유향밖에 없습니다.”

오만은 21만 평방킬로미터나 되는 그럭저럭 넓은 국토에 비해 강도 없고 나무도 없고 온통 사막뿐이었다. 어쩌다 하나 있는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도시가 생기고 오아시스 농업을 지을 수 있으나 근근이 먹고살아가기에도 부족했다. 북부 해안 지방 일부가 산으로 둘러싸여 일 년 중 아주 조금 내리는 비에 의지해 농경이 겨우 가능할 뿐이었다.

그래서 오만은 기원전부터 인도양을 무대로 한 무역 중심의 산업 구조를 유지했다. 7세기 이전에 오만을 차지했던 페르시아 상인, 그 이후의 오만에 유입된 아랍 상인들은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향신료 무역에 크게 기여했다. 신드바드의 고향이 바로 오만이었다. 사막에 낙타를 타고 다니는 대상이 아닌 바다를 통해 교역을 한 아라비아 상인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예멘은 홍해 입구를 가로막고 있어 지리적으로 오만보다 더 중요한 위치였다. 그러나 오스만제국이 간접적으로 지배하고 있으며 동부 지역에서 농사를 지어 인구도 오만보다 몇 배나 많은 지역이었다. 고산국 입장에서는 예멘을 함부로 하기도 어렵고, 중립만 지켜준다면 전혀 불만이 없었다.

============================ 작품 후기 ============================

늦게 올렸습니다.

크리스마스 잘 쉬셨는지요. 늦었지만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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