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04 45. 1595년 =========================================================================
“첫 번째 사건을 봅시다. 식당에서 음식 주문을 열 번 넘게 바꾸다가 주인이 요리가 시작돼서 못 바꾼다고 하자 큰소리로 한 시간 동안 엉엉 울어? 이런 씨...... 아! 미안하오. 흥분했소.”
이민호가 기소장을 책상에 내려치고 잠시 심호흡을 하면서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 식당 다른 자리에 손님으로 있었다고 상상하자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옆에서 누가 계속 우는데 밥이 제대로 목구멍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
“식당 주인이 아니라 손님들이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같은 식당에 있던 손님들이 체하거나 소화불량에 걸렸다고 합니다.”
“이전에도 영업방해로 경범죄 전과가 있었군요. 증거 찾기 어려웠을 텐데 손님들이나 주변 식당 주인들이 증인으로 충분히 나서줬다는 뜻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왕도의 식당가에서는 아주 유명한 여자입니다. 국방연구소 사무원이라는 훌륭한 직업과 사안이 경미한 탓인지 경찰서에서 훈방 받은 기록이 두 번 더 있습니다.”
식당 안에서 여자가 엉엉 울면 새로 들어오던 손님들은 물론 있던 손님까지 죄다 나가기 마련이었다. 아니면 무슨 일이 있는 줄 알고 경찰에 신고해서 경찰이 몰려오면 다들 눈치 보면서 나가게 된다. 식당 주인이나 요리사가 말려도 계속 서글피 울 경우 주인이 연약한 여자를 윽박지르는 성질 나쁜 식당으로 소문나 조만간 문 닫게 되어 있었다.
“단순한 변덕 때문에 주문을 열 몇 번이나 바꾼 게 아닐 것이오. 남들을 괴롭히기 위함이지요. 정말 기발하군요. 남들을 괴롭히겠다는 고의가 분명히 있고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으니 벌을 내려야지요.”
“그렇다고 해도 사안이 워낙 경미해서 실형을 선고하기 어렵습니다. 경고하기 위해 집행유예를 선고한다면 얼마 못 가서 똑같은 일을 저지를 겁니다. 집행유예 기간 동안 재범을 저지르거나 이번에 실형을 선고할 경우 식당에서 울거나 주문을 바꿨다는 이유로 실형을 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게 됩니다.”
“정말 이 여자는 식당에서 주문을 바꾸거나 운 것밖에 없군요. 흔한 일이니 단순히 이것 때문에 죄를 주자는 것은 아니요. 타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을 응징해 앞으로 비슷한 일이 생기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이오.”
“전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만, 저희 법원이 식당 주인들에게 뇌물을 받았다거나, 사소한 일에 가혹한 형벌을 내린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될까 걱정입니다. 저희가 비난을 사는 건 두렵지 않으나 왕법의 지고함이 손상 받을까 두렵습니다.”
건국 초부터 고산국 법원은 형량을 가혹하게 내리기로 소문났다. 조선처럼 죄수를 참형에 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곤장을 치다 죽이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탄광에서 징역살이하는 것은 그 이상의 고통으로 평가받았다. 진폐증에 걸리지 않게 하려고 정화기를 쓰게 했는데 이것이 죄수에게 고통을 주기 위한 장치로 오해를 사기도 했다.
“그래서 이 사건의 재가를 내게 요청했군요. 그러나 타인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을 반복하는 죄질이 나쁜 범죄자입니다. 남들이 싫어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제재를 받기 전에는 계속 같은 짓을 반복할 것이오. 신고 되지 않고 넘어간 사례가 그보다 훨씬 많았겠지요. 이미 전과가 있으니 이번에 영업방해 상습범으로 징역을 선고하시오.”
“징역을 선고한다 해도 겨우 6개월이 최대한입니다.”
“바로 그거요. 탄광에 보내는 게 최선이오. 짧더라도 고생하겠지요. 다음에 비슷한 짓을 하면 형량이 더 길어진다고 경고하시오.”
고산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행형 기관인 탄광은 남녀 죄수가 완전히 분리돼 작업을 했다. 남자 죄수들은 갱도에서 탄을 캐고 여자 죄수들은 주로 탄을 분리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나 막장 인생들이 모여서 생활하는 곳이니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할지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간수로 근무하는 경찰관들은 2개월마다 교대 근무했고, 탄광에서 근무할 때 수당을 따로 받을 정도였다. 법원 직원 수가 적어서 경찰이 교도행정도 맡았다.
예나 지금이나 행형기관 근무는 보통 인간으로서 몹시 불쾌한 일이다. 남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 자체부터 심기 불편한 일인데 상대는 여차하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범죄자들이었다. 현대 미국의 일부 보안관 사무국에서는 신입 직원, 즉 보안관보의 경력을 무조건 교도소에서 시작시킨다.
“앞으로 비슷한 사건이 발생하면 조건이 갖춰지는 대로 실형을 선고해 탄광에 보내시오. 그런 자들 때문에 괜히 망하는 식당 주인은 무슨 잘못이고, 밥 먹으러 갔다가 체하게 된 사람은 무슨 날벼락이요? 법망을 교묘히 빠져 나가면서 남들을 불편하게 하는 자들이 벌을 받을까 두려워 그런 짓을 못하게 해야 하오.”
“예. 형량을 정할 때 범죄자보다는 피해자를 우선 고려하겠습니다.”
그 여자가 탄광으로 이송되고 나서 국방연구소에서 큰 소란이 일어났다. 여사무원은 노총각이 많은 국방연구소 장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사소한 경범죄로 법원에서 실형을 때려버리자 폭동이 일어날 분위기였다. 당장 몇 가지 연구과제가 진행이 막혀버렸다.
그러나 노총각 장인들이 분분히 날뛰는 도중 그 여자와 결혼 약속을 잡은 노총각 장인이 다섯 명이나 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신접살림을 준비하기 위한 자금을 그 여자가 요구해 거금을 받아 흥청망청 낭비했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장인 네 명은 민사재판을 통해 재산의 절반 이하를 돌려받았다. 그러나 숫총각 한 명은 여자가 불쌍하다는 이유로 여자에게 줬던 은 100냥을 돌려받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매주 탄광에 면회를 가는 순애보를 써나갔다. 물론 여자는 전혀 고마워하지 않았다. 순진한 후배가 우롱당하는 것을 보다 못한 선배 장인이 미녀 처제를 소개해줘서 숫총각이 장가들게 됐다는 훈훈한 미담이 전해졌다.
“다음 사건은 흔히 구멍가게라고 하는 잡화점 주인 문제입니다. 아이들이 과자를 사러 오거나 어머니 심부름으로 뭘 사러 왔을 때, 순진한 아이에게서 돈을 먼저 받은 다음 물건 값을 못 받았다고 우기는 사람입니다.”
역시 이번에도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였다. 세상에는 사소한 푼돈에 집착하는 사람들도 많고, 장사하다 보면 일단 돈을 받고 보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나쁜 소문이 동네에 퍼지면 장사에 지장을 받으니 아무리 욕심쟁이라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절대 해서는 안 될 비합리적인 행위였다.
그런데 그 아이에 대해서는 크나큰 심리적 공격이 된다. 만약 아이가 화를 내며 항의하면 건방지게 어른에게 감히 대든다는 이유로 폭력을 휘두를 기회도 얻게 된다. 고산국에서는 타인에게 사적 처벌을 가할 수 없었으나 조선에서 인생 대부분을 살았던 사람들은 어른이 어린애를 적당한 체벌과 함께 나무라는 일을 못 본 척 넘기는 경우가 흔했다.
“상대가 누구든 그건 경제적 사기입니다. 사기죄가 민사 외에 형사로 형량이 정해져 있지요?”
“예, 전하. 금액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런 푼돈은 악질적인 경우에 한해 최대 징역 2년입니다.”
“그 전에도 비슷한 일로 걸렸겠죠? 2건 이상이면 상습범이니 5년을 때리시오.”
“겨우 과자 값을 갈취했다는 죄목으로 징역 5년을 선고하면 누구든 과하다고 여길 겁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민호는 가차 없었다. 배고파서 빵을 훔친다면 훈방에 처할 수 있어도 약한 아이의 잔돈푼을 빼앗는 행위는 용서할 수 없었다.
사실 고산국에서는 배고파서 빵을 훔칠 일이란 생겨날 수가 없었다. 지능이 낮은 사람이 사기를 당해 기본 소득을 못 받았다거나 부모에게 학대를 당하고 있다거나 기타 뭔가 크게 잘못 됐다는 증거였다.
절도 사건이 생기면 경찰에서 피의자가 외국인이나 불법체류자인지 가장 먼저 확인했다. 복건이나 광동 임노동자가 아니라면 외국인이나 불법체류자는 칙사 대접을 받으며 정식 이민을 하라고 회유를 당했다. 이런 식으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유학생들 일부가 사소한 범죄로 잡혔다가 정식 이민했다. 돈이 많은데도 도둑질하는 버릇이 있다면 두 번째까지는 벌금을 물고 세 번째부터는 실형을 살았다.
“푼돈을 빼앗긴 아이 입장에서 얼마나 억울할지 생각해보셨소? 어머니한테 솔직히 말했는데도 아이가 거짓말했다고 얻어맞는 경우는 생각해보셨소? 장사꾼에게 돈 빼앗겨, 엄마한테 거짓말했다고 얻어맞아, 나중에는 식구들에게 거짓말쟁이라고 성장기 내내 구박받게 될지도 모르오. 그 아이가 자살하거나 성격이 비뚤어지면 누가 책임을 지겠소?”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만, 사실 저도 어렸을 때 비슷하게 그런 억울한 경우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엿장수가 고철만 받고 엿을 안 주고 가버렸지요. 40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화가 납니다.”
“맞소. 나도 당해봐서 그 아이의 심정을 아오. 그 아이가 이 세상을 얼마나 더럽게 보겠소? 그 아이 눈에 어른들이 얼마나 우습게 보이겠소? 최악의 경우 그 아이들이 쉽게 범죄의 길로 빠지게 될 수 있어요. 그런 자들을 용서해주면 이 세상에 악이 널리 퍼질 수 있어요. 사회와 국가를 무너뜨릴 위험분자요.”
“그렇게 생각하니 몹시 위험한 자로군요. 하오나 가게 주인이 아이에게 따귀라도 때려서 폭행으로 얽어 넣는다면 모르겠지만, 단순히 과자 값 갈취만 했다면 5년은 과한 것 같습니다. 좀 줄여서 3년은 어떻겠습니까? 일반인은 과자 값만 생각할 것입니다.”
“3년이요? 부족하지만 법관의 판단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시오. 뻥튀기 값과 유리구슬 값을 갈취한 죄로 징역 3년. 신문에 대대적으로 실어야겠소. 학교에서 아이들에게도 교육시켜야겠소. 힘 센 놈이 쉽게 생각하고 친구 것을 빼앗는 경우도 확 줄어들겠지요.”
고산국의 형벌이 가혹하다는 오명을 쓰더라도 할 수 없었다. 이것은 정의에 관계된 문제이니 결코 양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고산국의 법원은 범죄자에게 개전의 정 같은 반성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반성한다 해서 형량을 줄여주지도 않았다. 형기를 잘 보냈다는 이유로 모범수에 대한 감형 제도도 없었다. 범죄자들은 수형생활을 마친 후 법이 무서워 범죄를 자제하거나, 욕망에 져서 다시 범죄를 반복할 뿐이라는 사실을 이민호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마을의 폐쇄성과 관련된 성범죄 두 건이 동시에 사안으로 올라왔다. 하나는 마을 청년들 17명이 옆 마을 처녀를 협박해가며 여섯 달 넘게 장기적으로 윤간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사건이 밝혀진 다음 피고인이 된 청년들의 부모들이 옆 마을 피해자 마을에 가서 난동을 피운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성범죄자의 부모들이 그 분노를 자식이 아닌 피해자 여자에게 쏟는 일은 흔한 일입니다. 가끔 피해자가 세상으로부터 숨기 위해 고소를 취하하는 경우가 흔하므로 바로 그것을 노리기 위해 강하게 압박을 합니다. 아니면 강제로 합의를 유도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피해자는 사건이 끝난 뒤에도 범죄자나 그 부모들 때문에 평생 고통을 받게 됩니다.”
“성범죄를 전담할 여자 경찰이 필요하다고 저번에 말하지 않았소?”
“예. 어명에 따라 나이를 가리지 않고 여경을 채용해 교육을 받게 한 다음 현업에 배치했습니다. 그러나 여경들도 조선에서 인생 대부분을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여경이 오히려 피해자의 행실을 꾸짖거나 합의, 고소취하를 종용한다는 말이오? 보살피는 게 아니라?”
“그렇습니다. 그래서 웬만한 경우가 아니면 면식범에 의한 성범죄는 1심 공판이 유지되기도 어렵습니다.”
한숨이 나왔다. 현대 한국에서도 그런 경우가 흔한데 조선과 인적 구성이 다를 바 없는 고산국이니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할 것이 빤했다.
그러나 똑같은 강간범이라도 전혀 다른 지방의 모르는 사람, 혹은 성격이 개차반이라 마을에서 내놓은 망나니들이 강간죄를 저지르는 경우에는 가차 없이 처벌을 받았다. 오히려 마을 사람들에 의한 사적 처벌인 사형(私刑)이 더 무서울 수도 있었다.
“도대체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요?”
“전하께서 내리신 어지를 기본으로 삼기는 했으나, 교육 시키는 사람이나 받는 여경들이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희 법관들이 보기에도 지나치게 여성을 위하는 것 같습니다.”
여권운동가 일부가 페미나치가 되어 모든 남자들을 범죄자 취급하거나 헛소리를 자랑스럽게 늘어놓기도 하는 현대 한국과 달리 이 시대에 남녀평등은 참으로 요원한 이야기였다. 조선에서 거의 평생을 살아왔던 고산국 사람들에게 남녀노소 모든 사람의 평등을 강요한다 해서 한두 세대에 고쳐지기는 어려웠고, 그 뜻을 제대로 이해도 못했다. 그나마 고산국은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일반적이라서 여성에 대한 대우가 훨씬 나아진 편이었다.
그리고 어느 시대든 농촌은 폐쇄적인 공동체 사회라 현대 산업사회에서도 매우 특이한 환경이 조성됐다. 일본의 옛 농촌마을에서 여성들이 동네 청년들에 의해 성적으로 통제됐듯이, 조선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 심지어 소년의 성인식 때 동네 청년들에게 집단으로 비역질을 당하는 수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상황도 이렇게 작은 마을에서는 전통으로 자리 잡는 경우가 있었다.
현대라고 해서 크게 달라진 것도 아니었다. 위 집단강간 사례는 현대 한국의 지역사회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 외에도 귀농을 하는 가정에게 마을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과도한 돈을 요구하고, 응하지 않으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정착을 어렵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름다운 미풍양속이라고 절대로 말할 수 없는 이기적이고 불합리한 횡포가 이렇게 작은 마을에서 행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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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질 예정입니다.
내용이 불쾌하더라도 참으시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