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402화 (351/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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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1595년

1595년 1월, 을미년 신년이 되었다. 따뜻한 고산국이고 음력 1월이라서 벌써 한겨울이 다 지나간 것 같았다. 신년을 맞아 첫 날에 널따란 정전에서 문무백관들로부터 세배를 받았다. 정전이나 알현실을 사용하지 않은지 오래 된 것 같았다.

세배는 해가 바뀌어 서로 인사하는 것을 뜻했다. 이민호가 양반다리로 앉아있는 사이 신하들이 땅바닥에 무릎 꿇고 엎드려 절을 하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품계에 따라 절하는 각도가 달라졌지만 이민호도 분명히 신하들에게 허리를 숙였다.

이민호는 그 전에 아기를 낳은 후궁들을 데리고 부친 이응화를 찾아뵙고 절을 올렸다. 부친은 해군 전단장에게 배정된 넓은 사택에서 젊은 간호사하고 잘 지내는 것 같았다. 어쩌면 조만간 동생을 보게 될지도 몰랐지만, 워낙 손이 귀한 집안이라 그럴 가능성은 적었다.

“벌써 2남 2녀라니. 민호야! 아범아. 너무 고맙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열심히 해라. 이거 장가 간 아들한테 하는 말투가 아닌데.”

“뭘 열심히 해요?”

“네가 생각한 바로 그거. 우리 며느님들에게도 내 부탁함세.”

“어휴!”

부친 이응화는 계사년 겨울을 보내고도 물에 빠져 죽지 않았다. 팔자를 고쳐버렸으니 앞으로 엄청나게 장수할 것 같았다. 그리고 팔자에도 없는 자손을 많이 얻어 몹시 기뻐하는 것 같아 이민호도 즐거웠다.

“아버님은 계속 해군에 계실 건가요?”

“왜? 커가는 젊은 장교들을 위해 이 늙은이가 자리를 비켜주랴?”

“하고 싶으면 계속하세요. 해상근무가 힘드시면 육상에서만 근무하시는 방법도 있으니까 말씀드리는 거죠.”

“평시에 전단장이 바다에 나갈 일은 별로 없다. 2, 3척 편대나 잘해야 전대 단위로 출동 보내니까. 아범아! 어디서 전쟁 난다는 소식 없는가? 혹시 해적이라도 안 나타났어?”

집하고 해군본부에서 가만히 있으니 몸이 근질근질해서 못 견디겠다고 투덜거렸지만 부친은 집이 좋은 것 같았다. 사택에 들인 간호사가 부친의 건강을 잘 챙겨줘서 예전보다 오히려 쌩쌩했다.

“평화가 좋은 거여요. 운동이나 꾸준히 하세요.”

“뜀박질은 매일 아침에 한다. 그렇다고 젊은 애들 사이에 끼어 축구나 배구 같은 격렬한 운동을 할 수도 없고 말이야. 부부가 함께 할 가벼운 운동은 없을까?”

“침대에서요? 그건 가볍지 않은 운동에 속합니다.”

“바깥에서!”

부부가 바깥에서 운동을 할 수도 있겠지만 민망하지 않을 운동이 뭐가 있을까 하고 이민호는 한참 고민했다. 그 날 오후 왕립 목공소에 가서 나무로 틀과 손잡이를 만들고 그물을 가로 세로로 얽어 라켓을 만들었다. 그리고 작은 공에 깃털을 달아 셔틀콕을 만들었다.

배드민턴은 이렇게 이응화 부부가 마당에서 가볍게 즐기는 놀이에서 시작됐다. 이름을 안 지어줬더니 깃털 공놀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새해 첫 주를 쉬면서 보내고 그 다음 며칠 동안 중앙부처 몇 군데와 왕도인 고북 시청을 순시해서 각 부처의 시정계획을 보고 받았다. 집무실에서 보고서만 받는 게 편하지만 관리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쇼를 이런 식으로 해줘야 했다. 신문을 통해 연두교서도 발표했다.

“읽을 테니 들어보시오. ‘우천시에는 하천에 우수가 과다 유입되어 수위가 급상승하여 익사 위험이 있사오니 출입을 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시청 동쪽 냇가에 있는 게시판이오. 시장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정확한 법률 용어를 사용한 나무랄 데 없는 경고문 같습니다.”

고북 시청에서 공무원들을 모아놓고 이민호가 국왕으로서 이른바 ‘교시(敎示)’와 현장지도를 하고 있었다. 마치 북한의 지배자가 내리는 교시 같아서 기분 나빴으나 이민호는 왕이니 교시라는 말을 쓰는 게 맞았다.

“경고문의 대상이 누구요?”

“개울에서 놀다가 익사 사고 위험이 높은 어린아이들입니다. 그래서 한글로 쓴 것 같습니다.”

“한글로 썼다 해서 아이들이 이해할 거라 생각하시오?”

“그래서 뜻을 명확히 전달할 수 있는 한자 교육이 어렸을 때부터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당장 한글 교육을 그만 두거나 조금만 가르치고 한자를 고산국의 기본 문자로 삼아야 한다고 건의하는 바입니다.”

시장의 앞뒤가 안 맞는 소리에 이민호가 소리를 지르려다가 꾹 참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으나 이 시대에는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특히 고산국에 몇 안 되는 조선 문과 합격자 출신은 한자 사용 능력이 특권이나 다름없으니 어떻게든 한자를 지키려고 발악했다.

“조선에서 한자 교육을 하지요?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한자를 배우는 줄 아시오?”

“아마 2할도 안 될 겁니다. 농민은 한자를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조선처럼 한자로 썼다 칩시다. 조선처럼 아이들에게 한자교육도 했다 칩시다. 경고문을 한자로 쓴다면 여덟이나 아홉 살 먹은 아이들이 그것을 읽고 이해할 수 있겠소? 아이들이 다 퇴계 선생이나 율곡 선생의 어릴 때 같은 줄 아시오? 시장은 그 나이에 저런 말을 이해했소?”

어린아이라도 한자를 배우면 읽을 수는 있었다. 뜻을 외울 수도 있었다. 사서삼경을 어린 나이에 통째로 외우는 신동도 간혹 나왔다. 그러나 뜻을 이해하길 바라는 것은 과욕이었다.

“아마 한자의 음과 훈을 안다 해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겁니다. 법률용어란 정확한 반면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성인도 이해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래서 식자층이 정치를 해야 하는 법입니다.”

“자! 게시판의 목적이 뭐요?”

“백성들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대답은 잘 하는구려. 그럼 게시판 목적에 맞게 최선을 다해 백성에게 알리시오. 어린아이들도 알아듣기 쉽게.”

“예!”

대답은 참 잘했다. 그래서 이민호는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위에 우천시에 운운 하는 것은 실제로 21세기 서울의 어느 개울 진입로에 서 있는 표지판 내용이었다.

“길가에 가로수를 심으면 뭐하오? 뿌리 주변을 시멘트로 죄다 덮어서 1년도 못 돼서 말려 죽여 버리는데. 나무밑동을 철망으로 감싸거나 벽돌로 둘러서 돌 틈으로 물이 스며들게 해야 한다고 시방서에 분명히 적시되지 않았소?”

“죄송합니다. 워낙 바빠서 확인을 못했습니다.”

“국왕인 나보다 바쁘단 말이오? 왕궁에서 나올 때마다 나무가 말라 죽어가는 게 눈에 보이는데, 시장은 도대체 근무시간에 어디에 있었단 말이오?”

고북 시장이 중앙부처로 옮기기 위해 참판과 참의들의 집무실이나 집에 들락거리고, 심지어 뇌물을 뿌린다는 소문이 있었다. 참판들이 뇌물을 돌려주고 쉬쉬해서 망정이지, 자칫 중앙부처까지 썩어빠지게 만들 뻔했다. 위생사 면허와 가게 인허가 과정에서 뇌물을 받은 것도 여러 건 적발됐다. 시장이 회계 업무를 제대로 몰라 예산에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한 대신 뇌물은 꼼꼼하게 챙겼다.

그런데 조사 중에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시장이 참판과 참의들을 만난 시간을 합해보니 거의 근무시간에 접근한다는 사실이었다. 참판이나 참의 입장에서는 일주일에 겨우 한나절 만나는 셈이었지만, 시장은 일주일 내내 일하는 시간이 거의 없이 윗사람들만 만나고 다닌 셈이었다.

“국왕이 이런 사소한 것을 지적한다고 기분 나쁜 사람도 있을 것이오. 그러나 매사에 이런 식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소. 고북 시청은 지금까지 중앙부처에서 시킨 일 외에 스스로 알아서 백성들을 위해서 한 일이 단 하나도 없소.”

“일이 너무 바빠서...... 농민들보다 훨씬 적게 벌기 때문에 부하 직원들을 다그치기도 어렵습니다.”

“그럼 그런 직원들에게 관리를 관두고 농민을 하라고 하세요. 돈도 많이 벌고 좋겠네요. 농민들이 버는 것만 생각하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 진짜로 모르는 거요?”

농민들이 공무원들보다 보통 두 배는 버는데, 노동 강도가 서너 배 이상 높았다. 조선에서 소작하던 농지보다 훨씬 넓은 농지를 경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름에 수확을 끝내고 흐뭇하게 웃은 농민이 그 다음 눈물을 흘리는 것은 쉴 새 없이 다시 2기작을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시장을 파면하겠다. 그리고 뇌물수수죄와 독직 혐의로 기소한다.”

“헉! 살려주십시오! 제가 조금 부패하더라도 유능하면 되지 않습니까?”

“부패하면 반드시 무능하지. 유능함을 증명할 시간이 없으니까. 시장은 내 인내의 한계를 넘었다. 부패가 확산돼 국가 전체에 악영향을 끼치기 전에 처단하겠다.”

시장이 미리 대기 중인 경찰들에게 포승줄에 묶인 채 끌려갔다. 이민호가 공무원들을 향해 일갈했다.

“관둘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서 관둬.”

일이 힘들어서 관두고 싶어 하는 시청 관리들이 절반을 넘었다. 그러나 관리들은 국왕에게 직접 기소될까봐 무서워서 자리를 뜨지 못했다.

관리들의 일이 힘들다는 것도 이민호가 보기에는 비효율의 극치였다. 인력은 충분했으나 쓸데없는 면피용, 또는 상부 보고용 서류 작업이 지나치게 많을 뿐이었다. 그것도 제대로 된 것을 못 봤다. 업무가 제대로 정착되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시장의 잘못을 바로 잡거나 고발해야 할 부시장은 직무태만으로 3개월 동안 감봉 2할, 감사는 3개월 정직에 처한다. 이 정도로 그친 것을 고맙게 생각해.”

“감사합니다, 전하.”

고북 시장은 조선에서 현령을 지냈던 관리 출신이었다. 고산국에서 이 정도 고위 관료를 했던 경험을 가진 사람은 드물었다. 그래서 더더욱 중앙부처 참판으로 올라서려 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조선에서 서리나 아전을 했던 자가 참판이나 참의인데 현령을 역임했던 자기는 겨우 그 아래 등급인 시장을 하는 것을 참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인재가 부족한 고산국에서 고북 시장의 파면은 인재 풀에 큰 손상을 끼쳤다. 고을 수령을 역임했던 자가 조선에서 고산국으로 이민 오는 경우도 확 줄어들 것이 분명했다. 대학을 나온 젊은 인재들이 크려면 아직 한참 멀어서 이민호는 몹시 답답했다.

“전하! 황공하오나 시장이 궐위 상태면 시정 업무가 마비됩니다. 유능하고 깨끗한 중앙부처 관리를 화급히 시장으로 임명해주시옵소서.”

“그 동안 부시장이 시장 도장을 갖고 결재하지 않았소? 하던 짓 계속하시오. 오늘부터 부시장이 시장이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별로 기뻐하지 않는구려. 어쨌든 두고 보겠소. 감봉 중이라도 시장의 월봉이 30냥이오. 거의 천석꾼이란 말이오. 옛날 조선에 있을 때처럼 생활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부패행위를 했다는 핑계를 댔다가는 목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오.”

“명심하겠사옵니다.”

부시장으로 있다가 새로 시장이 된 자는 조선에서 고을 아전 출신이었다. 부패라면 고을 수령보다 더한 직종이 아전이라서 이민호는 조금 걱정됐으나 시킬 사람이 없었다.

정옥남을 불러오려다가 아직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아서 포기했다. 정옥남은 나이가 들어도 도무지 늙지를 않았다.

정옥남은 해남도에서 아주 행복하게 지내는 것 같았다. 옥남이 그저 말로만 덥다고 불만을 표시하기에 겨울에 동해국이나 아이누 섬으로 보내버리려다가 남양진주가 나올 때까지만 참기로 했다. 옥남이 일은 아주 잘했다.

한족과 려족, 묘족이 긴장 속에서나마 균형을 갖추면서 평화가 지속됐다. 해남도가 고산국과 유구국 상선들의 중간 기착지 역할은 훌륭하게 수행했으나 서양 상인들이 찾아올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주변 광서성이나 안남과 교역을 하면서 꾸준히 부를 키워나갔다.

쌀과 기장 등 곡식은 해남도 주민들이 먹고도 남을 정도가 됐고 천연 진주와 해삼도 꾸준히 채취하고 있었다. 사탕수수와 향신료 종류는 내부 소비량을 제외하곤 전원 고산국으로 보냈다.

여기서 생긴 은으로 옥남이 해남도에서 여러 가지 사업을 펼칠 수 있었다. 고산국과 필리핀에서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사업을 지켜보다가 해남도에 맞는 것만 골라서 시행했다. 결과는 인구 증가로 나타났다. 려족이 열심히 낳고 외지에서 한족과 묘족의 유입이 이어졌다.

옥남은 고산국 군대의 전력 증강을 위해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옥남이 남권의 달인 진 사부를 설득해 고산국에서 무예 총사부를 지내게 한 것이다. 실전부대는 물론 신병훈련소와 사관학교에서도 요즘 한창 무술을 배우고 있었다.

진 사부의 손자 진원빈은 큐슈와 필리핀까지 돌아다니며 고산국 파병 군대에 무예를 전수했다. 아라 공주가 유구국에도 무예를 전수해달라고 요청해서 진원빈을 보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진 사부가 묘족을 지독히 싫어해서 왕명명이 고향에서 무술 사범을 데려와 묘족과 특수전대대 군인들에게 가르쳤다. 이 무술도 꽤나 실전적이라서, 진 사부가 가르치는 남권과 좋은 대련 상대가 되었다.

지역별로 분화되고 있는 조선의 맨손 무술 수박, 나중에 태껸이 되는 무술은 고산국에 이주한 조선 사람들도 많이 알고 있었다. 여기서 발기술을 많이 가져와 세 가지를 뒤섞었다. 그리고 이민호가 종합격투기 TV 프로그램을 통해 구경했던 몇 가지 타격기와 관절기를 접목해 전혀 다른 실전무술을 창안해 나가고 있었다.

아직은 이것저것 뒤섞거나 하나를 기반으로 다른 무예의 기술을 추가한 잡탕에 불과해 한 가지만 수련한 자에 비해 오히려 약했다. 그러나 수련이 깊어지면서 세 가지가 진정으로 합해진다면 아주 특이한 무술이 나올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기본 소득과 무료의료 외에 고산국 자체에 복지행정이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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