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99 44. 내부 발전 =========================================================================
그 다음에는 고등교육과 학문 쪽을 주제로 다뤘다. 고산국에서 마카오 대학에 보내는 유학생 숫자를 점점 늘리다가 아예 왕도에 대학교를 세워 마카오에 온 유럽 학자들을 단체로 초빙했다. 마카오에 남아야 하는 선교사 교수들이 몇 명 빠졌지만, 아랍과 인도, 명나라 출신 학자들이 몇 명 추가됐다.
“마카오에 있던 학자들 대부분이 고산국으로 넘어왔어요. 이제는 우리가 배울 것보다는 우리가 그들에게 가르칠 것이 더 많아요. 에스파냐 상선을 타고 유럽에서 오는 학자들도 마카오는 아예 들르지도 않고 바로 왕도로 와요. 그래도 외국 학자들을 계속 지원하실 건가요?”
“물론이오. 교수로서 강의를 하거나 고산국 학술지에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학자들을 계속 지원할 것이오.”
순수 자연과학은 유럽보다 고산국에서 더 빨리 발전하고 있었다. 인문과학은 아직 고산국에서 배우는 수준이지만 수학, 물리, 화학, 생물학, 의학, 천문학은 확실히 앞서나갔다. 이민호가 공식이나 정리, 학설 등을 다 외우지는 못했지만 이미 배웠던 만큼 남들보다 훨씬 빨리 진리에 접근할 수 있었다.
항해학과 조선공학, 금속공학은 고산국이 독자적인 체계로 발전해나가 유럽과 수평 비교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고산국에서 만드는 선박과 칼 등 결과물이 더 우수하다는 것만은 확실히 인정받았다. 이민호는 몰랐지만 고산국에서 제조한 군용 도검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서 시험을 거친 후 전략 물자 취급을 받아 유럽 다른 나라에 수출하지 않았다.
지리학과 약간 다른 항해학은 입체적인 대권항로를 제시함으로써 우수성을 증명했다. 비슷한 위도 상의 두 지점을 연결하는 가장 짧은 항로는 지도에서 두 점을 연결하는 직선이 아니라, 두 지점을 지구 중심과 연결한 다음 그 면으로 지구를 이등분할 때의 원호였다. 지구는 구에 가까운 타원이라서 두 점이 접하는 가장 큰 원, 즉 대원 위에 있어야 실제로 가장 가까운 거리였다.
에스파냐의 마닐라 갈레온이 북태평양을 횡단하며 북위 38도 선상을 직선 항해하는데 반해 고산국의 탐사선은 그보다 고위도로 빙 돌아서 우회 항해함으로써 이것이 가장 짧은 거리임을 증명했다. 물론 마닐라 갈레온은 편서풍을 받아 항해해야 하는 범선이었고, 고산국 탐사선은 기범선이었기에 위도를 넘나드는 항해가 가능했다. 요코하마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지도상의 직선으로 연결한 항정선항로가 7591km인데 반해 알류산 열도 가까이 우회하는 대권항로는 7182km였다.
지질학은 고산국에서만 연구하는 비밀 학문이었다. 지구의 내핵과 외핵, 맨틀과 지각에 대한 지식을 처음 접하는 학생들은 지질학을 이기이원론 같은 형이상학적인 철학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지진과 화산 운운하면 그때부터 혼돈에 빠졌다. 고산국의 지질학은 실제 학문이었다.
바위를 화성암과 수성암 즉 퇴적암, 그리고 변성암으로 나누면 안 믿었고, 화산 분화구에 데려가고 화석을 증거로 내세워서야 절반쯤 믿었다. 지질학과 학생들을 지진 전문가나 자원탐사 전문가로 키워내려면 한참 걸릴 것 같았다.
“연구나 강의를 하는 유럽인 학자는 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이 배우러 오는 늙고 젊은 학생들이에요. 그래도 계속 공짜로 먹여주고 입혀주고 가르쳐줄 건가요? 현재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학생들 중심으로 천 명이 넘었고 앞으로 에스파냐 배가 한 척씩 올 때마다 500명 단위로 늘 거라고 했어요. 학자가 100명이고 학생이 9백 명이래요. 어째서 학생들을 받아들이는지 모르겠어요.”
요즘 이국적인 복장을 하고 돌아다니는 유럽 젊은이들을 왕도에서 쉽사리 찾아볼 수 있었다. 백성들과 시비가 붙을 때마다 유럽 귀족 청년이 결투하자고 설쳐서 조금 문제긴 하지만 대부분 교수나 경찰의 지시에 고분고분 잘 따르는 편이었다. 말 안 들으면 가차 없이 국외추방하거나 범죄를 저지르면 여지없이 탄광으로 보내기 때문이다.
교육을 담당한 예국에서 외국 학생과 학자들을 관리해 주거지를 배정해주고 먹고 사는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에스파냐에서 모집해 보내준 유럽의 유명 학자들에게는 부족하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을 만큼 충분한 연구비를 지급해줬다. 학자의 조건에 못 미치는 학생의 경우 책값이나 배삯이 부족하면 일주일에 하루 이틀 공사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하루 몇 시간씩 식당에서 일해서 해결하곤 했다. 언어가 다른 유럽인들끼리 대화할 때 라틴어보다 고산국 언어, 즉 조선말이 가교 언어, 링구아 프랑카로 통용됐다.
“그 학생들이 유럽에 돌아가면 고산국을 어떻게 말하고 다니겠소? 장기적으로 국익에 큰 도움이 될 것이오.”
초기에 마카오에서 의대 교수를 하다가 고산국에서 의사 면허를 받고 유럽에 돌아간 선교사 2명은 실력으로 어느 나라에서나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최고로 꼽혔다. 유럽의 궁정 의사들이 조만간 고산국 유학생 출신으로 채워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유학 간 의사 유학생들이 의술을 펼친 게 고산국의 의학 수준 평가에 큰 역할을 했다.
내과와 외과는 유럽에서도 이미 독립 학과였지만 고산국에서 산부인과와 소아과, 치과를 독립시켰다. 치아교정술은 고산국에서 독보적으로 개발했다. 다만 국립대학 생화학과 정원은 아직 고산국 학생들로만 채웠다.
고산국에서 발명한 현미경을 통해 세균과 세포의 존재가 유럽에서도 인정받았다. 덕택에 유럽에서도 약학이 발전하고 공중위생이 급격히 향상됐다. 최초로 혈액형을 분류해 수혈로 인한 사고가 대폭 줄어들었다.
유전학도 어느 정도 공개했다. 멘델의 유전법칙은 고산국 농업연구소에서 발표해 곡식의 종자개량에 큰 도움을 주었다. 유전법칙은 유럽 곳곳에서 가축을 개량할 때 참조돼 비육우뿐만 아니라 용도에 따라 개와 염소 등의 품종 개량이 꾸준히 이루어졌다. 그 동안 경험으로 어렴풋이 알던 지식이 열성과 우성 유전자로 확실한 근거를 갖추자 품종 개량 시도가 질적으로 달라졌다. 대대로 주걱턱이었던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이 낳을 후손들이 앞으로도 주걱턱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확고한 지지를 받았다.
“앞으로 이민 신청을 하는 학생이나 학자가 많을 텐데 다 받아줘야 하는 건가요?”
“음. 혼혈이 되면 금방 언어를 잊어버릴 텐데, 국가별로 마을을 만들어줄 수 없겠소? 유럽 각국의 문화를 계속 유지하면 좋겠소.”
“유학생 대부분이 남학생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고산국에 여자가 남아돌아서 금방 결혼해서 정착하려 해요.”
유럽 유학생들에게 미의 기준이 동양인 여자로 잡혀버린 것 같았다. 고산국의 과학과 생활수준이 앞서다 보니 유럽을 아예 야만국 취급해버리는, 거의 민족반역자 수준의 유럽인 유학생들이 꽤나 많이 생겼다.
“그럼 외국인 유학생이 아니라 국내 대학생이군. 잘 됐소. 결혼해서 정착하면 내국인 대우를 해서 학비를 지원하시오.”
“건국 초기라서 우수 인력의 이민을 환영해야 하는 입장이에요. 하지만 유학생들이 대학 마치고 유럽으로 도망가면 어떡하죠?”
“가더라도 마누라는 꼭 데리고 가라고 하시오. 아이를 남겨두면 키워주겠다고 하시오.”
미국은 20세기 중후반에 제3세계 국민의 미국 이민을 제한하면서도 미국 내 유명 대학을 졸업한 유학생들을 미국에 남게 하려고 노력했다. 이민호도 이제는 미국의 정책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유학생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더라도 그 나라의 사회지도층이 되어 고산국에 우호적인 정책 결정을 하게 될 것으로 기대했다. 20세기 유럽 각국이 예전 식민지의 우수 학생들을 자국에 무료로, 심지어 학자금 지원까지 해줘가며 유학시킨 것도 마찬가지 목적이 있었다.
“오늘은 전화기라는 것을 시연하겠소. 전기를 통해 말을 멀리까지 전달하는 장치요. 아래 큰 쪽이 송화기, 약간 작은 쪽이 수화기라 하오. 이렇게 송화기에 대고 말을 하고, 수화기를 귀에 댄 채로 상대편 말을 들으시오.”
국무회의에서 발명품 시연회를 가진 적이 드물어 대신들이 비상한 관심 속에 전화기를 주시했다. 이민호가 변리사 공부할 때 1876년 그래함 벨이 발명한 초기 전화기를 유심히 살펴봐둔 덕에 전화기 정도는 간단히 만들 수 있었다. 영구자석과 코일, 진동판과 탄소알갱이, 전지로 이루어진 아주 간단한 전화기였다.
트랜지스터를 이용한 저주파발진기가 발명되기 전이라 단추 누르는 방식은 아직 불가능했고, 그 이전의 공전식 다이얼 전화기는 아직 개발 중이었다. 이민호는 전화기보다는 중계기를 만드느라 시간을 훨씬 더 많이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전기회로의 접점을 여는 제어에 한계가 있어서 전화기가 100개를 넘어가면 더 이상 연결할 수 없었다. 다이얼식 전화기 개발은 여기서 중단됐고, 아무래도 당분간은 교환원을 두어야 할 것 같았다.
“상대방 전화기는 성벽에 있소. 창밖에 저기 보이오?”
“예. 병사들이 칠판을 세워두고 있습니다.”
“일단 신호를 보내고, 그래. 국왕이다. 잠시 대기하라. 호국 참판! 1부터 1000 사이의 숫자 아무 거나 불러보시오.”
“예? 예. 561입니다. 올해 예산 적자가 561만 냥으로 예상됩니다.”
“알았소.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561이다. 오, 육, 일. 맞아. 숫자를 칠판에 적어라. 자! 보시오.”
성벽에 세워진 칠판에 561이라는 숫자가 커다랗게 써졌다. 그러나 나이가 많은 참판들은 도무지 믿지 않는 눈치였다.
“호판께서 통화를 해보겠소? 여보세요, 라고 상대를 부르시오.”
“여보세요? 헉!”
호국 참판이 수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정신을 차린 참판이 잠시 듣고 있었다.
“나 국왕전하 아니다. 호국 참판이다. 들리나?”
- 예! 호국 참판님! 저는 궁성 호위대 공칠성 중사입니다.
“칠판에 귀관의 이름을 적어라.”
- 공! 칠! 성! 이름을 적었습니다!
멀어서 가물가물했지만 칠판에 쓴 글씨는 공칠성이 맞았다. 망원경을 빌려줘서 호국 참판이 확실히 알아봤다.
“다른 분들도 대화를 해보시오. 혜영이 통화해볼래?”
혜영에 이어 참판들이 차례로 통화했다. 다들 얼떨떨했지만 이제야 겨우 믿는 눈치였다. 계복의 눈이 초롱초롱 반짝였다.
“도련님! 통화 도달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전화선이 닿는 거리만큼. 대략 100리 거리마다 중계국에서 전기 신호를 증폭해야 할 거다.”
“군사적으로 엄청난 변화가 올 것입니다. 사령부와 예하 부대에 전화선을 연결하면 그 즉시 명령을 내릴 수 있겠습니다. 앞으로 전선들이 작전할 때면 전화선을 연결한 상태로 일정 거리 내에서 기동해야겠군요.”
명령 전달 체계가 가장 절실히 필요한 곳이 함대이긴 했다. 그러나 전선들이 전화선을 치렁치렁 연결한 상태에서 함대가 움직이는 것을 상상하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선 없이도 통화가 가능하도록 연구 중이다.”
“말도 안 돼요. 전깃줄 없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공기 중으로요? 헤헤! 도련님이 신기한 것을 많이 만들었지만 그런 것은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담에 보여줄게.”
현대 문명을 접해보지 못한 사람에게 물건을 직접 보여주기 전에 믿으라고 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괜히 계복을 바보로 만들기 싫어 그쯤에서 그만 두었다.
자동 중계기가 완성되기 전까지 임시로 수동 중계기를 설치하기로 했다. 교환원이 먼저 전화를 받아 원하는 곳에 전화선을 연결해주는 식이었다. 이 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궁궐 경비와 국왕 호위 관련해서 전화 보고체계가 완성됐다. 구한말 대한제국 황궁에서 이런 식으로 연결했다고 들었다. 군부대 유선전화도 오래 전에는 교환원을 통했다.
수동 중계기가 완성되면 조만간 통신사를 만들어 시 단위마다 전화국을 세우고 유무선 통신과 라디오 방송까지 관장시킬 계획이었다. 그리고 전선 내부에 가장 먼저 전화기를 설치했다. 함교에서 포탑 4곳, 기관실, 함미의 예비 조타실, 관측실, 전단장실 등을 연결시켰다. 중계기가 따로 없이 일대일 직통전화 방식이었다. 가장 신참 장교가 통신장교로 배치돼 전화기를 관리하도록 했다.
“주인님~ 국영 통신회사를 만드실 거죠? 처음부터 국영으로 해요. 네?”
“초기 시설 투자가 많을 텐데 괜찮겠어?”
혜영이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이민호에게 아양을 떨었다. 외국인 학생들 때문에 정부예산이 많이 나간다고 날카롭게 따지던 혜영이 표변한 것은 돈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아잉~ 처음부터 투자해야 성공하면 이익금을 나눠받죠. 60만 호에 한 대씩, 직장에도 한 대씩 설치하면 100만 대. 전화기 팔면서 한 냥 받고 전화기 설치할 때 한 냥, 일 년에 사용료로 한 냥씩 받으면 300만 냥! 매년 고정적으로 백만 냥!”
“이봐! 너무 비싸면 사람들이 전화 가입을 못해. 그리고 전화기 만들 공장도 아직 안 정했는데?”
“이렇게 편한 물건이 생겼는데 전화 가입을 왜 안 하겠어요? 전화기 공장도 처음부터 국영으로 해요.”
매년 예산에 쪼들리던 혜영이 급기야 돈독이 잔뜩 올랐다. 비올레타가 술과 담배 공장 등 알짜배기 사업체를 의료분야에 빼간 다음 더더욱 초조한 마음이었다. 이민호도 본 궤도에 오른 사업체를 적당히 정부에 넘겨주기로 했다.
“세금이 모자라는 모양이구나. 호주가 개발되면 지금보다 훨씬 많이 받게 될 거야. 곡물가가 폭락할까 두렵다.”
“지금도 전쟁만 없으면 돼요! 제발 전쟁 좀 일으키지 말아요. 아니면 앞으로 주인님 돈으로 전쟁을 하란 말이에요! 특히 포탄 값이 그게 뭐여요?”
“알았어. 미안. 그래도 나라를 위해서 전쟁했지 내가 언제 개인적인 복수를 하거나 사리사욕을 채웠나?”
큐슈의 땅에서 난 세금은 정부로 흘러갔고 금광도 국영화했다. 일본과 전쟁을 해서 이민호가 개인적으로 얻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일본 다이묘들이 귀족 처녀 천 명을 바치긴 했으나 이민호는 처녀들이 제 살 길을 마련해주고 바로 풀어주었다.
“그럼 군대 유지는 국비로 하더라도, 원정 비용은 주인님 돈으로 해결해요. 더 이상 못 참아요!”
“알았어. 조선소를 국영으로 넘기려고 했는데 안 넘겨도 되겠군.”
“아잉~ 왜 그러세요? 주세요~”
“하는 꼴 봐서.”
결국 알짜배기 사업체인 왕립 조선소도 국영으로 넘겼다. 작은 어선은 민간 조선소에서 건조하고 전선과 수송선, 대형 상선은 지금까지 왕립 조선소 두 곳에서 건조했다. 포르투갈과 유구국 상인들에게 근해용 외륜선 여러 척을 판매한 곳도 왕립 조선소였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상인들은 고산국 상선의 선형을 이해하지 못했다. 선체 길이와 폭의 비율, 즉 장폭비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장폭비가 적어야 안정성이 높아진다고 여겼지만, 고산국 상선은 안정적이면서도 속도가 빨랐다.
이 시대 유럽의 범선들은 앞뒤가 뭉툭한 선형이었다. 유럽 조선 기술자들이 과학적으로 발전된 유선형이라고 주장하는 배는 물고기의 모양을 본 따 앞이 뭉툭하고 뒤가 뾰족한 편이었다. 이에 반해 고산국 배는 앞이 뾰족하고 뒤가 뭉툭해서 물고기와 정반대 선형이었다.
그런데도 고산국 상선이 기관을 끄고 돛만으로 항해할 때도 유럽 범선보다 속도가 훨씬 빨랐다. 고산국 상선이 돛으로만 항해한다 해도 19세기 후반 클리퍼처럼 고산국에서 런던까지 90일 이내에 도착할 수 있었다. 클리퍼 중에서 가장 유명한 커티 삭은 런던에서 시드니까지 73일 만에 주파했다.
============================ 작품 후기 ============================
19세기 말 수준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늦게 올리니 늦게 자고, 또 다시 늦게 올리게 됩니다. ㅜ.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