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98 44. 내부 발전 =========================================================================
서양 범선들이 떠난 다음 상관에서 왕궁으로 노예들이 들어왔다. 두아르테가 이민호에게 바친 여자 노예들이었다. 잔지바르에서는 흑인 노예만 거래될 테니 아랍 어느 지역에도 노예시장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 위치는 차차 알아보기로 했다.
꾀죄죄한 아이들 50여 명이 겁에 질린 채 몸을 떨고 있었다. 궁궐 여기저기서 시녀들이 고개를 내밀어 구경했다.
“파티마! 뭐해? 동생들 왔다. 따뜻한 물에 씻기고 죽을 조금씩 여러 번 먹여.”
“어머나! 불쌍한 것들! 하지만 운도 좋지.”
파티마와 아이샤 자매가 달려 나오더니 갈라티아 말로 여자 노예들을 시녀 숙소로 안내했다. 갈라티아 말을 알아들은 어린 노예들의 얼굴이 활짝 펴지면서 파티마를 따랐다. 이들은 이제부터 노예가 아니었다. 후원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파티마가 이민호에게 소리를 질렀다.
“주인님! 제 친구들 37명이 아직 처녀예요! 애들이 크기 전에 다 안아줄 수 있죠?”
“시끄러! 쟤들은 학교 마친 다음에 독립시킬 거야. 나 혼자 감당 못해.”
“흐응~ 과연 그럴까요?”
이민호가 말한 대로 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파티마 등 갈라티아 노예들에게도 분명히 선택권을 줬지만 다들 궁궐에 남았다.
“이것은 산업용 전열기를 약하게 만든 전기난로입니다. 오징어 말리는 거나 사람 말리는 거나 따뜻하게 하는 게 기본이니까요.”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지만 처음부터 가정용으로 개발된 것도 있고 산업용을 가정용으로 변환시키는 경우도 많았다. 고산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미 성능과 안정성이 입증된 산업용 전기제품을 간단한 설계변경을 통해 가정용으로 만들 수 있었다.
“틀렸소. 오징어는 그저 바짝 말려야 하지만 사람은 어느 정도 습도가 필요하오. 물을 데워 수증기를 발생시키는 가습기를 다시오. 주전자에 든 물을 데울 정도로 간단한 전열장치도 다시오.”
“너무 복잡해지면 잦은 고장이 일어납니다.”
“두세 개 따로 만드는 것보다는 하나가 낫소. 누전으로 인한 화재 가능성도 줄어들 것이오.”
고산국은 강수량이 많고 동고서저의 지형인데 일부 급경사 지역에서 풍부한 수력자원을 활용할 수 있었다. 수력발전소 서너 개를 연결하면 왕도 같은 도시에서도 가로등은 물론 가정마다 형광등을 사용할 수 있었다.
산업시설인 방직방적 공장, 견직물 공장, 왕궁 지하 화약공장, 그리고 도요에서 전기를 많이 사용했다. 제염 공장과 전기로 제철소는 가끔 전기 수요가 적은 밤에만 가동됐다. 이것은 국영 또는 왕립 산업시설이고, 전기를 많이 사용하는 민영 산업시설은 양계장이나 목장 같은 곳이었다.
가정용은 아직까지는 전등 몇 개를 사용하는 것이 전부였다. 전기를 사용하는 제품으로 선풍기와 냉장고가 개발됐지만 아직 왕궁과 전선에서만 사용하고 있었다. 전기난로를 개발하게 된 것은 며칠 전 한파가 몰아닥쳐 왕도에서 다섯 명이나 얼어 죽었기 때문이다.
“영상 10도에서도 사람이 얼어 죽을 줄 몰랐소. 음. 얼어 죽는 건 아니고 저체온증으로 죽은 것이겠군요.”
수은온도계를 만들 때 물이 어는 온도를 0도, 끓는 온도를 100도로 잡았다. 고산국은 평지에서 얼음이 어는 경우가 드물고 고산지대는 기압이 낮아 조선 내륙지방까지 가져가서 0도 기준점을 잡아야 했다.
“창문만 닫고 잤어도 얼어 죽을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두 명은 술 취해서 길바닥에서 자다가 그런 변을 당한 게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왕도에서도 취사용이 아닌 난방용 장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 어서 전기난로를 만들어 보급해야겠소.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만듭시다.”
“어떤 것입니까?”
장인 대표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기술자들은 일이 고되더라도 새로운 물건을 만들 때는 신이 났다. 그리고 이곳 연구소에서는 개발만 하고, 생산은 따로 공장에서 맡았다. 단순 반복 생산을 이곳 연구소 인력이 맡아서 할 수는 없었다.
“전기밥솥은 밥과 죽을 만드는 전기솥이오. 적정한 온도와 조리시간을 맞춰야 하오.”
“조리가 끝나면 전기 공급을 끊는 식으로 만들어야겠군요. 금속식 온도계와 시계장치가 필요하겠습니다.”
“그 외의 전기 조리기구도 필요하겠소. 기름에 튀기거나, 뭘 끓여서 먹거나. 눈으로 보면서 조리할 수 있게 뚜껑은 강화유리로 만드는 게 낫겠소. 일정 이상 압력이 되면 작은 구멍으로 증기가 빠져 나가게 만듭시다.”
“그런 전열기기는 간단히 만들 수 있습니다. 누전되지 않도록 방수에 특히 신경을 써야겠군요. 뚜껑은 유리공장 장인과 협의해보겠습니다.”
선풍기와 냉장고 제작에 참여했던 장인들이라 필요한 요소가 뭔지 재깍재깍 파악해냈다. 절연이 필요한 곳은 플라스틱을 사용하기로 했다.
“현재 전선에서 쓰는 냉장고를 조금만 고치면 음식점이나 어물전에서 사용할 대형 냉장고로 만들 수 있겠소. 가정용으로 작은 냉장고도 만듭시다.”
“성인 부부 2인과 아이 3인의 5인 가족용을 기본으로 하고 독신자용으로 작은 것도 필요하겠습니다. 세 가지 규격으로 일단 만들겠습니다.”
연립주택에서 요리를 잘 못하는 남성 독신자가 간단히 밥을 해먹을 수 있게 주방기구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전자제품 가격이 비싸면 팔릴 리가 없었다. 완성도와 더불어 생산성에 주안점을 두기로 했다.
“김치냉장고가 따로 필요할 것 같소. 기후가 따뜻한 고산국에서 김장을 하면 여차하면 쉬어버린다오. 그래서 조선에서 김장을 해서 사먹는 경우가 많더군요. 조선에서 김치를 사오는 것은 상관없지만 고산국이 따뜻한 곳이라 장기보관에 문제가 있소.”
“오래 보관하려면 땅에 독을 파묻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치를 보관할 온도 조건이 따로 있을 테니 김치냉장고도 따로 만들겠습니다.”
이민호의 기억으로 김치냉장고는 꽤나 나중에 발매가 됐었다. 김치가 쉬지 않게 보관하는 특정 조건이 있는 것 같았으나 이민호는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김치냉장고는 장기적으로 시험을 한 다음에 발매하기로 했다.
“판매가격은 얼마나 되겠소?”
“가정용 냉장고는 큰 것이 석 냥, 전기밥솥과 선풍기는 두 냥, 조리기와 전기난로는 한 냥이면 유통비용까지 충분할 겁니다. 대량 생산하면 가격이 점점 내려갈 것으로 기대됩니다.”
“무지막지하게 비싸군요. 그래도 가족이 많은 가정은 한꺼번에 사겠고, 독신자는 한 달에 하나씩 살 수 있을 것 같소.”
인구가 국력이듯이 고산국에서는 기본 소득 때문에 식구가 많을수록 풍요롭게 살 수 있었다. 그래서 학교 졸업하고 취직하자마자 다들 일찍 결혼하는 추세였다. 냉장고와 선풍기는 소형 전동기를 만드는 비용 때문에 생산원가가 올라갔다. 현재는 전선에 탑재되는 대형 기관의 생산가격도 많이 떨어졌다.
“판매할 때 푼 단위까지 정합시다. 아! 전기제품 판매가에 전기요금을 2년 치 정도 포함시킵시다. 냉장고는 5년에 한 냥, 나머지는 사용연한 5년을 잡고 반냥이면 충분하겠소. 가정용 조명 정도야 무료로 사용하게 해줬지만 앞으로는 가정에서도 부담해야겠지요.”
“예. 언젠가 수력발전으로 모자라게 될 날이 올 겁니다. 석탄보다 석유가 훨씬 싸니 석유로 화력발전을 하시겠습니까?”
“원유를 분해하고 남는 것으로 해야겠지요. 찌꺼기 외에도 휘발유와 중유 같으면 사용처가 적어서 벌써부터 보관에 문제가 생기고 있소.”
브루나이 유전 덕택에 여러 모로 고산국의 발전이 빨라졌다. 거의 공짜로 원유를 퍼 와서 경유를 뺀 나머지를 화력발전 연료로 쓰면 석탄보다 훨씬 싸게 먹힐 것으로 예상됐다. 그리고 앞으로는 공장에서 전기가 다량 필요하면 자체 발전기를 갖추는 식으로 유도하기로 했다.
아직 수익이 없어 국영으로 전환하지 못한 왕립 전기회사가 수력발전소 건설과 관리, 전력망 시설공사를 맡고 있었다. 전기 공사를 하다가 감전사고가 벌써 두 건이나 발생해 한 명이 죽었다. 항상 그렇듯 아무리 규칙을 지키라고 해도 덤벙거리다가 실수로 안전사고가 발생했다.
“혹시 민간 회사에서 이런 전기제품을 만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전기요금을 부과하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기술 특허를 내세워 민간 회사에서 못 만들게 막는 방법도 있습니다.”
“기술 특허료도 받고, 안전 검사를 받게 하면서 판매 대수에 따라 전기요금을 징수해야지요. 장기적으로는 전기사용량을 알 수 있도록 집집마다 계량기를 달아야겠소. 하지만 지역 수력발전량 이내에서 전기 소비가 이루어지는 동안에는 요금을 따로 받을 필요가 없소. 수력발전소 건설비와 유지비는 당분간 내가 감당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지방자치체에 관리 책임을 넘기겠소. 전자제품에 포함된 전기요금은 지자체에 이관해야겠지요.”
자연에서 싸게 생산되는 수력전기는 그 지역 주민들이 우선적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계곡을 가득 채운 물에서 생산하는 전기이므로 그 지역 주민들이 공유해야지, 사유화한다는 것이 더 이상했다.
국력을 기울여 수출산업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면 몰라도, 고산국은 대부분의 상품에서 다른 나라보다 가격 경쟁력이 압도적이었다. 판매원가에 전기요금을 반영하면 되므로 산업시설에서 싼 수력전기를 쓰든 비싼 화력전기를 쓰든 큰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해 이익을 얻는 자라면 국가나 지자체의 전기 운영능력에 부담을 주지 않고 자기가 사용할 동력을 자기가 직접 마련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었다. 국영 또는 왕립 회사에서 사용하는 동력도 전기사용량 증가 추세를 봐서 차차 독립적으로 동력을 마련하도록 계획을 잡았다. 상인이나 장인에 의해 도자기 공장과 유리제품 공장이 우후죽순으로 생겨서 여기서 사용할 기관과 석유를 민간에 판매할 채비도 갖췄다.
고산국 왕도 고북에는 상수도와 하수도가 완전히 갖춰졌다. 그러나 왕궁을 빼곤 화장실 문제가 남아 있었다. 현대 한국처럼 정화조로 흘려보내서 시간을 들여 하수 처리하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대소변은 퇴비를 만드는 주요 재료였고 농업생산력 향상을 위해 중요한 자원이었다. 농민들이 다른 동네에 갈 일이 있을 때 휴대용 요강에 똥오줌을 받아와 자기 밭에 뿌리는 경우도 흔했다. 양계장에서 닭고기와 달걀이 아니라 닭똥 비료를 팔아서 수지를 맞춘다는 이야기도 나돌았다.
단독주택은 집집마다 변소가 본채와 따로 떨어져 있었다. 3층 연립 주택이나 관공서도 변소가 별채에 따로 있었다. 땅을 깊이 파서 방수처리를 하고 적당한 양이 쌓이면 농민들이 돈을 내고 수거해갔다.
시간이 흐르자 남의 변소를 돈을 주고 퍼가서 농민에게 파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건더기나 국물을 도로에 줄줄 흘리는 문제가 생겼다. 결국 위생사 면허제를 시행하고 나무통을 싣는 분뇨 수레를 없애고 철제 위생수레를 보급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문제까지 국왕이 해결해야 하나요?”
“답답해서 그렇지. 다들 냄새 나는 걸 꾹 참고 있더라. 맨발로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애들도 많은데 더러운 걸 흘리면 안 되잖아.”
국무회의에서 이국 참판에게서 처음 보고를 받은 혜영이 이민호에게 몹시 화를 냈다. 사실 국왕이 직접 처리하기에는 체면이 서지 않는 사안이었다. 왕이 이런 사소한 문제까지 신경 쓴다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았다.
“주인님은 너무 깔끔한 것을 좋아하세요.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어느 정도 불편은 감수해요.”
“위생 문제잖아. 전염병이 돌 수 있다고. 아직 모든 병에 대한 약이나 치료법이 확실히 나와 있지 않은 동안에는 아주 심각한 문제야.”
“어휴! 알았어요. 저희들이 조금 더 신경을 쓸 게요. 여러분 들으셨죠? 국왕전하께서는 이토록 공중위생에 신경을 쓰십니다. 전국 방방곡곡을 더욱 깨끗하게 만들어 백성들이 병마에 신음하지 않도록 우리가 더욱 열심히 일을 합시다.”
덕택에 도로에서 일정 거리마다 공중변소가 만들어지고 길가는 사람들이 손을 씻고 물을 마실 간이수도가 설치됐다. 축사에서 흘러나온 오물이 상수원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특히 유의했다.
“그런데 회와 복 요리는 아직 시기상조인가요? 몰래 먹는 사례가 있다고 들었어요.”
“회는 냉동, 냉장시설이 좀 더 확실한 성능을 증명한 다음에 허가하면 좋겠습니다. 어민들이 현지에서 회를 먹는 건 저희들도 아는데, 기생충에 감염되기 쉬울 것입니다.”
대신들이 말은 해놓고도 자신이 없어 이민호 얼굴만 쳐다봤다.
“가두리 양식장에서 대량으로 키우는 물고기는 병에 걸리기 쉽소. 그렇다고 약품을 풀면 사람 몸에 안 좋소. 그러니 해결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당분간 익혀서 먹는 게 좋소. 더운 지역에서는 더더욱 조심하는 게 낫소. 복 요리는 아직 위험해서 안 되오. 명나라에서 사람들이 숱하게 죽어가면서 실험하고 있으니 안전이 보장된 다음 도입하시오.”
광저우와 항저우에서 복 요리가 인기가 좋았다. 그러나 품종에 따라 내장과 알집 외에도 독소가 스며들어 먹다 죽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확실히 안전한 요리법이 나오기 전에는 고산국에서 복 요리를 금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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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늦었습니다. 항상 그렇듯이 ㅜ.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