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392화 (341/1,000)

00392  44. 내부 발전  =========================================================================

44. 내부 발전

함대는 자바 섬까지만, 즉 자카르타와 스랑까지만 방문하고 브루나이를 거쳐서 돌아왔다. 수마트라와 말레이반도 쪽은 정치적 지형이 격변하는 중이라 고산국 함대가 방문할 경우 자칫 포르투갈이 진행하고 있는 전쟁에 휘말릴 것을 우려한 탓이었다.

말래카에 요새를 쌓은 포르투갈이 이슬람 상인들을 박해하고 세금을 올리는 바보짓을 하는 바람에 지금은 거의 이익을 내지 못하는 속빈 강정으로 변했다. 상업 중심지가 해협 양쪽 입구인 아체와 조호르 지역으로 급속히 이동해버린 것이다.

이민호가 왕도를 비운 사이 별다른 일은 생기지 않았다. 아기들은 잘 자랐으나 아빠인 이민호에게 데면데면해서 많이 섭섭했을 뿐이었다. 이민호가 유아용 장난감 여러 가지를 만들어서 아기들과 놀아주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나중에는 아빠가 아기와 놀아주는 것인지, 아기가 아빠와 놀아주는 것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호주 장영실 항 주변에 정착할 농민들을 모아 개척단을 구성해서 보냈다. 농경지를 개간하면 그 땅을 20년 동안 경작할 권리를 주기로 해서 조선에서 갓 이민 왔던 사람들이 가족 단위로 30여 호가 떠났다.

개척단에게 종자와 식량 등 지원을 많이 해주었다. 아직 몇 가지 기능밖에 없는 경운차를 한 대씩 딸려 보냈고, 수리할 기술자도 한 명을 보냈다. 최초 개척단을 보내고 돌아온 수송선장이 보고하길, 농민들이 텃밭 외에 밀밭과 보리밭 백만 평을 경작할 꿈에 부풀었다고 해서 이민호가 피식 웃었다.

이민호에게 1594년 가을과 겨울은 아기들 보는 재미로 빠르게 지나갔다. 왕도에도 아기 우는 소리가 진동해서 생동감 넘치는 도시로 변모했다. 시장에도 아기를 업고 다니는 젊은 엄마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드디어 상하수도 공사가 끝났고, 골목까지 도로 포장도 다 끝났으니 내일부터 도시 지역 유모차를 배포하시오.”

“안정감 있으면서도 가볍습니다. 꽤 단단하군요.”

이국 참판이 유모차와 유아용 보행기를 만지작거렸다. 이민호가 직접 디자인했으나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직접 두들겨서 만든 공국 참판은 아직도 불만이 많은 듯 매의 눈으로 유모차를 쏘아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미친 황소가 들이받더라도 찌그러지지 않게 만들려고 했었소.”

“아기의 안전을 생각하시는 전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만, 가끔 전하께서는 지나치신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유모차를 들거나 지고 옮겨야 하는 곳이 많아서 가볍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두꺼운 철봉을 가벼운 파이프로 교체했다.

농촌 지역 유모차는 농로와 밭두둑 대부분이 비포장도로임을 감안해 바퀴를 훨씬 크게 만들어 이미 배포를 끝냈다. 유모차와 보행기는 촌장이 관리하는 마을 공용 기물이었다.

“임신하면서부터 비용이 많이 들 테니 탄생 순간이 아니라 임신이 확인된 순간부터 태아에게 농지를 지급하면 안 되겠소?”

“유산이나 상상임신 같은 상황도 많습니다. 그래도 요즘 유아 사망률이 뚝 떨어져서 다행입니다.”

요즘 고산국에서 젊은 부부들이 아기를 무지막지하게 많이 낳고 있었다. 수입이 안정되고 여가 시간이 많은 반면 아직 유흥시설이 충분치 않아 젊은이들이 밤일 말고는 할 일이 별로 없는 탓이었다.

일단 낳기만 하면 아기 몫으로 농지가 생길 뿐만 아니라 그 어머니도 양육비를 지급받으므로 아기 낳기를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고산국에서는 다른 일을 안 하고 아기만 돌봐도 조선이나 명나라의 하급 관원보다 더 많은 수입을 얻었다. 그래서 원래 다섯 명 낳을 만한 가정에서 열 명을 낳는 추세로 다들 열심히 낳았다.

다른 지역과 달리 고산국에서는 그 아기들이 모두 고스란히 살아남아 무럭무럭 성장한다는 것이 무서운 일이었다. 높은 수준의 공중위생과 예방접종 덕택에 유아생존율이 동 시대 다른 나라에 비해 무척 높았다. 건너뛰기 연년생으로 5년 동안 넷을 낳은 젊은 부부가 직업을 포기하고 육아에만 매달리는 광경을 고산국에서는 흔히 볼 수 있었다. 가구 소득을 합산하면 충분히 먹고 살았다.

“전하. 농지를 배분함으로써 각종 문제점이 꾸준히 발생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소작하는 농민과 소유주의 갈등입니다. 농지마다 수입이 일정치 않아 항상 분란이 생길 소지가 큽니다.”

“처음부터 예상했던 일이오. 해결책은 준비해왔소?”

“국가에서 비농민이 소유한 농지 전체를 환수해서 돈으로 나눠주는 것입니다. 지금도 농촌마을마다 일정 비율로 국영지가 있으므로 사유지를 국영지로 편입하고 소유주에게는 같은 금액을 나눠주면 됩니다.”

물론 모든 세대가 자기들이 더 많이 받아야 할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서로 합의해서 정하라고 하면 절대 못 정한다.

그래서 모든 백성이 일률적으로 똑같이 받기로 했다. 부랴부랴 국영은행이 설립됐고 지역마다 지점이 생겼다. 저축 이자율은 0퍼센트였고 농민에 대해서만 대출업무를 시작했으며 이자가 아닌 수수료가 1년 기준 1퍼센트로 정해졌다.

“농산물 유통과정을 보강해서 그렇게 합시다. 그럼 백성들이 얼마나 받게 되겠소?”

“지금까지는 보통 일 년에 쌀 30석과 콩, 참깨, 각종 채소를 받았습니다. 매달 은 두 냥씩 주고 시장에서 사먹으라고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조금 줄어들었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일부 있겠지만 돈이 편할 겁니다.”

은 두 냥이면 은이 약간 함유된 백동화로 200푼이었다. 백동화 1푼으로 왕도의 깨끗한 식당에서 고기와 생선이 포함된 고급스런 가정식 백반 수준의 식사 한 끼를 사먹을 수 있었다. 쌀과 반찬을 사서 집에서 밥을 해먹지 않고 매끼 밖에서 사먹더라도 돈이 반 이상 남았다.

다른 수입이 없는 학생이라도 교육비와 의료비가 들어가지 않으므로 여유 있게 생활이 가능했다. 직업이 없는 아이들과 여자, 노인들에게 고산국은 그저 천국이었다. 가족으로 결합할 경우 경제적 여유는 더 늘어났다.

다만 고산국에서 가부장의 권위는 전혀 인정받기 어려워졌다. 자식들을 습관적으로 두들겨 패는 아버지나 의붓자식을 학대하는 계모는 설 자리를 잃었다. 아이들이 언제든 가출해서 고아원이나 학교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노인들은 국왕이 가정파괴범이라는 소리까지 하고 있었다. 부모가 아이들을 잘 대해주지 못하면 가계소득이 줄어드는 구조라서 아이들 버릇 나빠진다는 우려를 어른들이 많이 했다.

쌀 등 현물이 아닌 현금으로 기본 소득이 지급된다면 그런 경향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 틀림없었다. 성인 나이인 16세 이전에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게 막는 법이 있었으나 시행하기 어려워서 유명무실해질 지경이었다. 현재 고산국의 대표적인 사회문제였다.

“사유지인 경작지에서만 나오는 것이 그 정도입니다. 인구가 늘어난다 해도 당분간은 국영지에서 보충이 가능합니다. 만약 호주가 잘 개척된다면 기본 소득은 앞으로 더욱 늘어날 수 있습니다.”

“호주를 빼더라도 아직 본토 경작지만으로도 너덧 배 정도 인구를 더 수용할 여유가 있군요. 인구가 적어서 좋은 건지 종잡을 수 없구려.”

지금도 자발적 실업자가 꽤 높은 비율이었다.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으니 술이나 먹고 놀러 다니는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특히 아이들이 몇 명 있으면 충분한 수입이 생기기에 하는 일 없이 놀아도 괜찮았다. 국가 입장에서는 백성이 있는 자체만으로도 좋은 점이 많아 내버려뒀다.

일부 남자들은 매일 밖에 나가 술 취해서 놀다가 집에 들어오면 애나 마누라를 패는 재미로 살았다. 그리고 탄광으로 끌려갔다. 사이코패스들이 모인 탄광은 겉으로는 평온했으나 실제 생활은 생지옥이었다.

“하오나 인구는 국가의 힘입니다. 이민 오겠다는 묘족만 더 수용해도 급한 인구는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묘족을 호주에 개척민으로 보내도 됩니다. 그럼 묘족이 생산해서 고산국 백성들이 소득을 더 받는 구조가 됩니다.”

“착취네요. 그런 식이면 앞으로 호주의 묘족들이 따로 독립하겠다는 소리가 당연히 나올 겁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이민호는 처음에 묘족을 적극 활용하려고 했었다. 나라를 갖지 못하고 수천 년 동안 계속해서 한족에게 밀려난 묘족을 불쌍히 여겼고, 그들과 협력할 생각을 한때 했었다,

그러나 묘족들이 과도한 욕심을 부린데다, 호주에 대거 이민을 보낼 경우 자칫 독립을 추구할 가능성이 있어서 고민이 많았다. 괜히 죽 쒀서 개 주거나, 분리 독립운동을 억제하려고 거의 빈손인 묘족을 학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은 일단 큐슈나 필리핀 쪽으로 보내시오. 국가 건설에 기여한 것이 있어야 권리를 주지요. 차라리 앞으로 고산국에서 태어날 아기들에게 그 권리를 여유롭게 주는 게 낫겠소.”

고산국 본토 백성이 된다는 것은 확실히 대단한 특권이었다. 조선인들만 여전히 바로 고산국 본토 백성이 될 수 있었고, 그 외에는 길이 막혔다. 일본인은 전쟁 직후부터, 중국인은 명나라의 백성 통제 정책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명나라는 해외 이주민을 국가반역자 취급하기 때문에 명나라와 전쟁을 각오하지 않으면 백성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이민호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많은 외국 인구를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병국 참판! 묘족 연대는 훈련이 잘 되고 있습니까?”

“예. 대대별로 창설을 마치고 3연대 각 대대로부터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풋!”

병국 참판이 보고하자 회의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3연대 흑인 병사들은 부리부리한 눈알을 굴리며 묘족 훈련병들을 세차게 굴렸다. 중국 남부지방에서 나름대로 거칠고 억세다는 평판을 듣는 묘족 전사들이었지만 숙련된 흑인 병사들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 신세였다.

일본과의 전쟁이 끝나면서 조선군 출신으로 편성된 5연대는 본부를 고산국에 두고 대대별로 두 달씩 큐슈에 교환 주둔하는 중이었다. 큐슈에 정착한 여진족 기병연대도 은근슬쩍 4연대로 편입됐다.

3연대가 아프리카로 떠날 것에 대비해 고산국에서는 한창 병력 충원 중이었다. 묘족은 가족 전체가 필리핀이나 큐슈로 이주한 경우에 한해 입대가 허가됐고, 6연대를 구성했다.

“7연대는 잘 돌아가나요? 앞으로는 이들을 원정에 주로 활용하고자 합니다.”

포르투갈 고아 총독부의 도움을 받아 인도 북부 고산지대 주민들을 20년 장기 고용하기로 하고 먼저 1개 대대 규모의 용병들과 계약했다. 다들 강인한 전사들이었으나 현대의 구르카 용병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이 시기에 구르카는 도시 이름이지 부족 이름이 아니었으며, 인도에서 이주한 라지푸트 족과 선주민인 네와르 족의 혼혈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네팔이라는 나라 이름도 아직 없고 네팔은 골짜기 이름에 불과했다. 카트만두는 구르카 족이 아니라 자나자티스라는 원주민들의 도시였다.

“특히 산악지역에서 체력과 지구력이 강하며 용기가 대단합니다. 다만 총보다는 뭉툭한 짧은 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 사람들 생활을 잘 보살펴줘야 합니다. 용병들의 월봉이 겨우 두 냥인데 벵골 태수 녀석이 중간에서 한 냥을 뜯어먹습니다.”

고산국 백성이라면 기본 소득 월 2냥에 신병 월봉이 3냥이고 근속기간에 따라 계속 늘어나는데 구르카 용병들은 그 절반 수입도 안 됐다. 그런데도 이들은 수입 2냥을 모두 고향에 보내고, 휴일에도 외출하는 대신 병영에 남았다. 휴가비를 따로 지급해도 역시나 한 푼도 쓰지 않고 모두 저축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구르카 용병들의 수입을 모은 은과 가족에게 부치는 편지를 들고 고향에 전하러 가는 사람을 벵골 태수가 매번 붙잡았다. 그리고 통행세로 절반을 뜯어내고 있었다. 은 한 냥으로도 구르카 용병들의 가족이 한 달 동안 충분히 생활할 수 있었고, 오히려 훨씬 부유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용병들의 수입 절반을 뜯어가는 벵골 태수의 횡포는 용납이 되지 않았다.

“어서 고아 총독이 벵골 태수를 공격했으면 좋겠소.”

“월 500냥에 눈이 멀어서 나라를 망하게 만들겠군요. 하지만 인도가 서양 제국의 손에 넘어가게 내버려둬선 안 됩니다.”

“그게 문제요. 물론 포르투갈이 인도 전체를 정복할 역량은 없겠지만, 벵골은 매우 큰 지역이며 인구가 많소. 이곳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울 수도 있소.”

1757년 밀무역을 하던 영국 동인도회사를 쫓아낸 벵골 태수 시라지 웃다울라는 프랑스와 연합해 영국과 싸웠으나 부하 장군들이 영국에 매수당해 태수가 처형당한다. 이로써 인도가 본격적인 식민시대에 접어들었다. 이를 플라시 전투라 한다.

이 전투는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때까지 인도는 면직물을 수출하느라 그 동안 원면을 수출하지 않았는데, 그 이후 영국에 원면을 수출하고 면직물 수입국으로 전락했다. 영국은 면직물 수출을 늘리면서 생산 소요를 맞추기 위해 본격적인 산업혁명에 들어가고, 원면 생산지를 늘리기 위해 이집트를 정복한다. 또한 미국 남부를 면화재배지로 개편해 흑인 노예를 대량 수입한다.

동양에서 면직물은 큰돈이 되지 않았다. 고산국에서 대량 생산하긴 하지만 국내 소요가 대부분이었고 수출은 미미했다. 그러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상인들이 교역 때마다 일정 수량을 가져가는 것으로 미루어 유럽의 면직물보다 확실히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다. 고산국에서 면직물을 잡고 있는 한 영국의 산업혁명은 불가능하거나 많이 늦춰질 것이다.

============================ 작품 후기 ============================

회의장면이 다음 회까지만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