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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385화 (334/1,000)

00385  42. 남방 진출  =========================================================================

8월 15일 오전에 전선 12척을 비롯해 총 22척이 아리수 강 하구, 아리항에서 출항했다. 사관학교장 김학이 방학 중에도 왕도에 남아있던 생도들을 급히 불러 모아 전선에 나눠 태웠다.

이면과 이완만 데려가려다가 졸지에 50명이나 되는 사관생도들의 순항 훈련이 되어버렸다. 육군을 지원하려는 생도들도 있었으나 그들에게도 다른 나라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첫 날 저녁에는 바기오 서쪽 산토 토마스에서 정박하고, 다음 날 민다나오 섬 남쪽에 도달했다. 국왕좌승함만 마닐라에 잠깐 들러서 루이스 다스마리냐스 총독 가족과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비올레타를 여왕처럼 화려하게 꾸며서 다들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랐다. 총독 부인이 비올레타에게 생선살을 발라주는 장면이 눈물겨웠다.

좌승함이 마닐라를 출발할 때 관전을 명목으로 에스파냐 청년 귀족 두 명이 좌승함에 동승했다. 좌승함에 탑승한 사관생도가 열 명이었는데 스페인어를 배운 이면을 통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8월 17일 오후, 남북으로 최소한 200km가 넘는 섬 서쪽에 폭 10km 정도인 화산섬 두 개가 남북으로 이웃해 있는 곳 서쪽 바다에 도착했다. 남양의 섬 치고는 들락거리는 배가 꽤 많았다.

“좌표도 대충 맞고, 이국적인 배들이 들락거리는 걸로 봐서 테르나테 섬이 맞는 것 같습니다. 유구국 상인들이 넘겨준 해도에 따르면 저 너머는 할마헤라 섬입니다.”

“삼각돛으로 미루어 아랍 배 같소. 여기까지 오다니 대단하군요.”

함장이 가리키는 섬과 돛단배를 이민호도 확인했다. 망원경으로 살펴보니 터번을 쓴 선원들이 당황해서 이쪽을 가리키다가, 중년인이 호통을 치자 황급히 돛에 달라붙었다.

포르투갈이 말래카 해협에서 아랍 선박의 통행을 막고 있으므로 아랍 상선은 수마트라와 자바 섬 사이 순다 해협을 지나서 온 것으로 생각됐다. 아랍 상선은 고산국 함대를 해적선으로 착각했는지 둥그렇게 생긴 북쪽 화산섬으로 빠르게 도주했다.

“전하! 저 섬이 테르나테일 리가 없습니다. 제가 알기로 마닐라에서 남남동 방향으로 열흘 정도 거리입니다. 고산국 전선이 빠르다고 하나 아직 한참 더 가야할 것입니다.”

“뭐, 확인해보면 되겠지.”

에스파냐 귀족 청년들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비올레타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것으로 봐서 제대로 찾아온 것 같았다.

사실 아랍 상인이나 인도 상인,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상인을 잡고 물어봐도 육두구와 정향이 나는 정확한 섬의 위치를 절대 말해주지 않았다. 비올레타는 어렴풋이 들었을 뿐이라서 도움이 안 됐다. 함대는 유구국 상인들이 어설프게 만든 해도에 찍은 좌표를 따라 이곳까지 직행했다.

테르나테로 추정되는 섬으로 이동하기 전에 해가 질 시간이 돼서 그 북쪽 작은 섬의 해안에 정박했다. 작은 배를 타고 온 말레이계 사람들이 자루를 들고 와서 사라고 떠들어댔다. 해병이 살구 씨처럼 생긴 빨간 것과 검은 것을 견본품으로 받아왔다.

“이거 육두구 맞습니다! 빨간 껍질 부분이 메이스입니다.”

“역시 향이 은은하군요. 그런데 고남 근처에서 키운 게 더 나은 것 같소.”

이민호는 건국 초기부터 유구국 상인들을 통해 후추와 정향, 그리고 육두구 씨앗과 묘목을 구해 고산국에서 대량으로 키웠다. 적절한 생육 조건을 맞춰보기 위해 기후대 별로 여러 곳에 심었는데 어이없게도 몇 곳 빼고는 아무 곳에서나 잘 자랐다.

후추는 고산국 왕도의 시장에서 대량으로 거래됐고, 일부는 조선과 일본, 명나라로 수출됐다. 육두구는 아직 판매용 상품은 출시하지 않고 왕실과 군대에서만 향신료로 사용하고 있었다. 고산국 짬밥에서 생선과 고기 요리에 육두구 가루를 살짝 쳐서 은은한 향기가 났다. 병사들은 그저 싸구려 조미료인 줄 아는 정도였으니 유럽 귀족들이 들으면 기겁할 일이었다. 정향은 고산국에서 판매하는 담배 중에서 한 종류에 조금 넣어 특이한 풍미를 냈다. 정향은 카레에도 조금 섞었는데 적정한 양을 정하기까지 혜진 밑에 있던 시녀들이 아주 고생했다.

“외국 군함이 명백한데도 물건을 팔겠다고 접근하다니, 용기가 가상하오. 함장! 웬만하면 두 자루만 사주시오.”

“행상이 가격을 너무 세게 부릅니다. 저까짓 양념이 한 자루에 은 열 냥이나 되다니, 우리를 우습게 보는 것이 분명합니다.”

“무척 싸게 파는 게 맞소. 테르나테의 술탄 몰래 파는 밀무역이겠지요.”

“함 운영 경비로 사겠습니다.”

“내탕금으로 되사줄 테니 걱정 말고 사시오.”

함장이 몹시 아까워하며 육두구와 메이스를 한 자루씩 샀다. 작은 배를 몰고 온 행상들이 은을 받은 다음 신이 나서 돌아갔다. 그 비싼 육두구를 키워봤자 술탄에게 세금으로 다 뜯기고 나면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할 정도일 것이다.

“이게 유럽에 가서 팔면 어마어마한 금액이 된다 이거지. 생도들! 기념품으로 하나씩 가져.”

이민호와 사관생도들이 까만 씨앗, 빨간 씨앗을 갖고 노는 것을 에스파냐 청년들이 멍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에스파냐 상인들이 테르나테나 티도레의 술탄에게 모욕을 당해가면서 비싸게 사는 향신료를 이민호는 힘 안 들이고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싸게 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리핀 총독부에서 혼신의 힘을 기울인 원정이 두 번이나 실패했는데 반해 고산국 함대는 아주 간단히 이틀 만에 테르나테까지 직행했으니 자괴감을 느낄 만했다.

“전하께서는 테르나테를 정복하실 겁니까? 그럼 약속이 다르지 않습니까?”

“이봐! 나는 그저 유명한 향신료 산지를 구경하러 온 것뿐이야.”

에스파냐 청년이 쭈뼛쭈뼛하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민호에게 부탁했다.

“그럼 테르나테를 정복해서 필리핀 총독부에 넘겨주십시오.”

“내가 왜? 그리고 테르나테를 마닐라에 넘겨준다고 해서 이 먼 곳을 제대로 관리나 할 수 있겠어? 포르투갈 모험가들이 요새를 세웠는데도 전투 한 번에 쫓겨난 곳이야. 섬이 작다고 만만하게 봐서는 절대 안 돼.”

테르나테와 그 남쪽 티도레 섬은 폭이 10km밖에 안 되는 작은 섬이며, 화산섬이라 인구 대부분이 해안에만 몰려 살았다. 그러나 당당하게 두 섬 모두 왕국이 세워졌다. 그 동쪽, 남북의 폭이 300km가 넘는 할마헤라 섬보다 오히려 이 작은 섬들에 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향신료 무역을 통해서 부를 쌓고 백성들을 키워낸 섬들이라 이렇게 많은 인구를 유지할 수 있었다. 말래카와 브루나이는 이곳 향료제도에서 향신료를 수입해 인도나 아랍 상인들에게 팔면서 성장한 중개무역지에 불과했다.

테르나테의 술탄을 작은 섬마을의 추장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술탄의 영향력은 서쪽 500km에 위치한 술라웨시부터 동쪽 500km 거리의 뉴기니까지 미쳤다. 해양을 포함한 면적으로만 따지면 제국이라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광대한 영토와 영해를 보유했으면서도 바로 남쪽에 붙은 자그마한 섬인 티도레를 점령하지 못하고 역사적인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음 날 경도 측정을 위해 탐사선 한 척을 남겨두고 함대는 테르나테 섬의 남동쪽 해안으로 향했다. 이미 어제 고산국 함대가 온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어서, 요새화된 항구에서 말레이계 병사들이 바짝 긴장한 채 고산국 함대를 맞이했다. 열대 지역이라 피부가 햇볕에 탄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말레이계 중심으로 파푸아 족과 약간 혼혈이 되어 피부가 더 검은 편이었다.

무장한 선원과 병사들이 가득 탄 크고 작은 배 500여 척이 항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감히 항구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항구에 몰린 군선들과 바다에 떠 있는 고산국 함대 사이에 잠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면 생도! 감상을 말하라.”

“바다에 널리 흩어져 사는 사람들이 교역으로 서로 엮여 있고, 소문이 아주 멀리까지 전해진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니! 자발적으로 소문이 퍼지려면 시간이 훨씬 많이 걸린다. 저 자들은 적극적으로 정보를 습득했음이 틀림없다. 향신료 무역으로 얻은 이익을 해외 정보 수집에 투자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빨리, 그리고 정확히 우리의 힘을 파악할 수가 없다.”

“과연 그렇습니다. 군선이 500척이나 되면 도전해볼 생각을 먼저 할 텐데 말입니다.”

“생도들은 들어라! 테르나테 술탄국은 주변 지역을 제압한 강국이면서도, 군선을 500여 척이나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우리 함대에 감히 도전하지 못하고 있다. 세상을 향해 귀를 항상 열어두고 있어서 우리가 누군지 안다는 뜻이다. 멍청한 결정을 내려 국가를 위기에 빠뜨리지 않으려면 항상 바깥에 귀를 열어두도록 해라.”

“예!”

생도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이민호가 내린 교훈보다는 멀리까지 고산국의 강성함이 알려졌다는 사실에 생도들은 몹시 뿌듯한 듯했다.

그 사이 항구에서 작은 배가 빠져 나왔다. 비무장임을 알리려고 배에 탄 사람들이 두 손을 휘젓는 꼴이 좀 웃겼다. 탐망선이 그 배를 좌승함으로 안내했고, 말레이어 통역이 몇 마디 말을 주고받더니 젊은 사신의 말을 이민호에게 전해주었다.

처음에 사신이 했던 말은 남양 제도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말레이어가 확실히 아니라는 사실만 이민호가 알 수 있었다. 나중에 고산국 언어학자들은 그들이 사용한 언어를 서파푸아 어족에 집어넣었다.

“고산국 국왕전하께서 직접 방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희 술탄께서는 고산국 국왕전하께서 오신 목적을 여쭈라 하셨습니다.”

“아! 걱정 마시오. 그냥 지나가는 길이오. 혹시 육두구와 메이스를 한 자루씩 살 수 있겠소?”

“예?”

바짝 긴장했던 관리가 맥이 풀렸는지 갑자기 뱃전에 털썩 쓰러졌다. 그 배는 즉시 항구로 돌아갔고, 배 세 척이 다시 좌승함으로 접근했다. 배에는 향신료가 들어있을 것이 분명한 자루가 가득 쌓여 있었다.

“고산국과 트르나테 사이에 우호가 맺어지길 기원하는 뜻으로 100자루씩 선물로 바치겠습니다.”

“뭘 이런 걸 다. 괜찮은데. 일단 올라오시오.”

줄사다리를 내려 늙은 관리와 아까 뱃전에 쓰러졌던 젊은 관리가 좌승함에 오르도록 했다. 선물은 받아야 예의인 법, 그 사이 육두구와 메이스가 가득 담긴 자루 200개를 받았다.

“테르나테, 아니 트르나테의 술탄께서는 건강하신지요?”

“물론입니다. 술탄이 너무 건강해서 탈입니다. 고산국왕 전하께 하례 올립니다. 왕비전하께서 2남 2녀 쌍둥이를 한꺼번에 낳았다고 들었습니다. 과연 국왕전하처럼 왕비전하께서도 보통 분이 아니십니다.”

“하하하! 축하해줘서 고맙소.”

후궁 네 명에게서 하나씩 낳았다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렇게 오해받는 편이 덜 창피할 것 같았다.

“그런데 어인 일로 멀리 이곳까지 행차하셨습니까?”

“그냥 지나가다 들렀소. 다른 일로 다른 곳에 가느라 군선 몇 척이 동행한 것뿐이오. 앞으로도 고산국과 우호를 다지도록 합시다. 그 동안 유구국 상인들에게 잘 대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도 하러 왔소.”

아라 공주가 해준 이야기에 따르면 고산국이 건국되기 전까지는 유구국 상인들이 트르나테에서 몹시 무시당했다고 한다. 말래카에 가서 되파는 향신료 중개무역을 했던 유구국 상인들은 육두구를 조금이라도 싸게 사려고 발악을 해서 트르나테 상인들에게 노골적으로 거지라고 박대를 받았다. 그런데 향신료는 가격 변동 폭이 워낙 커서 한 해 무역에서 크게 손해를 보는 바람에 향신료 중개무역에서도 물러서야 했다.

그러나 고산국 건국 이후부터는 대접이 완전히 달라졌다. 유구국이 해양 강국인 고산국의 속국으로 취급받으며 옥 도자기나 비단 등 주로 사치품을 교역했으므로 입항할 때마다 환영받았다고 한다. 트르나테에서 유구국을 통해 수입한 상품 절반 이상은 다시 다른 섬 지역으로 수출됐다.

“먼저 저희들이 고산국에 입조해서 조공을 바쳐야 했는데 뱃길이 너무 멀고 위험해서 가지 못했습니다. 다음에도 오실 때마다 성의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상관없소. 혹시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 사람들이 협박하거나 하지는 않소?”

이민호와 트르나테 관리들이 동시에 에스파냐 귀족 청년들에게 시선을 보냈다. 귀족 청년들은 모른 척 먼 산만 바라봤다. 에스파냐 사람들은 복장이 참 특이해서 이렇게 금방 눈에 띄었다.

“포르투갈이 그 동안 몇 번 침략을 했으나 이제는 포기하고 무역만 하고 있습니다. 에스파냐 상인들은 향신료를 사면서 항구와 요새 일대를 샅샅이 살피며 종이에 지도를 그려가고 있습니다. 벌써 쳐들어올 줄 알았는데 아직도 공격을 해오지 않아 의아하게 여기고 있는 참입니다.”

============================ 작품 후기 ============================

다음 회도 향료제도 섬들 이곳저곳 이야깁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네덜란드와 영국이 노리는 중요한 곳이니 주인공이 신경 써야겠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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