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84 42. 남방 진출 =========================================================================
“뭐? 저 설산 꼭대기에 올라갔다고?”
“예, 숙부. 산악부에서 방학 때마다 고산국의 높은 산을 하나씩 정복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옥산은 겨울방학 시작하자마자 오를 계획입니다.”
이민호는 관리들 거주 구역에서 가장 넓은 해군 총함장 사택, 이순신의 집에서 노닥거리고 있었다. 일본과의 전쟁이 끝나면서 공신을 책봉해 일등 공신 이순신에게 사택을 영구히 하사해서 이제는 개인의 저택이 되었다. 일등 공신은 이순신과 계복, 오응태, 이등 공신은 감동과 감불, 이억기와 므부투, 유정과 이여송 등으로 국적을 따지지 않았다.
지금은 평일 근무시간이라 이순신은 해군부에서 일하고 있고 사관학교 생도인 막내아들 이면과 조카 이완이 여름방학이라 집에 있었다. 이면이 다섯 살에 말 타고 달리던 충격적인 장면이 이민호의 뇌리에 떠올랐다. 예나 지금이나 이면은 배짱이 두둑했다.
설산은 3886미터로, 백두산 2744미터보다 훨씬 높고 후지산 3776미터보다 높았다. 더 남쪽에 옥산은 해발 3952미터나 된다.
“위험할 텐데 교장이 허락을 해줘?”
“교장님이 원주민 마을까지 마차 편을 마련해주셨습니다. 지도교관님 두 분하고 같이 다녀왔는데 운동 좀 하셔야겠더군요. 큭큭!”
이면이 페넌트, 즉 지금까지 정복한 산 정상의 이름이 적힌 작은 삼각 깃발 여러 개를 보여주며 자랑했다. 내년부터는 방학 때마다 외국으로 원정을 가겠다고 해서 주변 사람들을 걱정스럽게 했고, 최종 목표가 히말라야라고 밝혀서 아주 기겁하게 만들었다. 너무 높은 지역은 숨쉬기 어렵다고 하니까 산소 호흡기를 만들어내라고 이민호에게 졸라댔다.
“방학 때마다 마음대로 다닐 수 있으니 너는 참 좋겠다. 그런데 면이 너 왜 육군에 지원하려고 그래?”
이면은 고산국 정식 4년제 사관학교 1기였다. 사관학교가 개교하면서 초반에는 6개월, 심지어 기존 장교 교육은 3개월에 끝낼 때도 있었지만 1년, 2년으로 늘어나다가 지금은 4년제로 고정됐다. 이면부터 정식 1기라고 칭하지만 인사상의 특권은 없도록 했다.
“해군은 재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너무 강하잖아요. 알아보니까 유럽 해군도 별로 세지 않습니다.”
“그래도 너는 조선국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하셨고 고산국 초대 총함장을 지내시는 아버님의 아들이잖아. 다른 사람들이 너한테 기대를 갖는 건 해군이야.”
“위에 형님들이 계시니까 괜찮습니다. 막내 좋은 게 뭡니까? 가업과 상관없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만.”
이순신의 네 아들 중에서 장남 이회는 고향 아산에 남아 문과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염과 울은 고산국 해군에서 장교로 복무 중이고, 막내 면은 사관학교 생도였다. 이순신의 조카들, 해와 봉, 완 등도 해군이나 육군 장교로 근무하거나 사관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서자 이훈과 이신, 조카 분은 아직 어려서 학교에 다녔다.
이순신의 가문은 고산국에서 유일한 거대 무벌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순신의 아들과 조카들, 외가인 변존서 등 변 씨 출신의 군관들, 그리고 송희립 등 평생 이순신을 모신 군관들만으로도 해군의 지휘체계를 충분히 구성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계복이나 감불, 감동 등 여진족 출신 장수들은 국왕 이민호의 가문에 속한 것으로 인식됐다.
무벌 가문의 성장을 걱정스럽게 지켜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민호는 이 가문 사람들의 충정을 믿었다. 이순신의 후예들은 이순신의 위명 때문에 개인의 능력이나 적성과 상관없이 무과를 선택해야 했고, 항상 지켜보는 눈이 많아 행동거지에 제한이 많았다.
실제 역사에서 조카 이완은 후금군이 의주성을 함락하는 순간 항복하지 않고 자폭했다. 5대손 이봉상은 이인좌의 난 때 충청병사였다가 반란군에 잡혔는데, 반란에 가담하면 살려준다 해도 차마 충무공의 자손으로서 역적에게 항복할 수 없다면서 죽음을 택했다. 서자 이훈은 이괄의 난 때, 서자 이신은 정묘호란 때 전사했다. 후손들은 힘이 있다 해도 이순신의 이름을 더럽힐까 두려워 아예 반역에 가담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완아!”
“예! 숙부님!”
이민호가 이순신과 의형제를 맺는 바람에 족보가 많이 꼬여버렸다. 이면은 출생연도가 같은 이민호를 숙부라고 불렀고, 1579년생인 이완도 마찬가지였다. 사적인 자리라서 전하라고 부르지 않게 하는 것만도 어려운 일이었다. 이민호는 친구가 적었다.
“너라도 해군에 가라. 육군은 힘들고 지저분해. 깔끔하게 함포로 결판내는 게 낫지. 안 그래?”
“맞는 말씀입니다만.”
이완이 이면의 눈치를 살폈다. 이순신의 네 아들 중에서 장남 이회는 이순신의 선비적인 면을, 막내 이면은 부친에게서 장수의 기질을 물려받았다고 흔히 평가됐다. 이완은 어릴 적부터 말 타고 활 쏘는 이면에게 의지하려는 경향이 컸다.
이 집안에 고산국 해군을 맡겼는데 죄다 육군으로 가겠다면 곤란했다. 그래서 이민호가 직접 꼬드기기로 했다.
“동양에서는 고산국 해군이 가장 강할 거야. 예를 들어 일본은 왜선을 수천 척이나 동원했지만 그 엄청난 숫자로도 질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지.”
“맞습니다. 그러니 함대를 아무한테나 맡겨도 쉽게 이길 겁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압도적으로 유리한 것만은 부정하지 못합니다.”
임진왜란 전에는 조선 수군이 섬나라 일본 수군에 비해 약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경상좌수영 소속 진포는 수군 함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아예 성에 들어가서 싸웠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중반에 접어들기까지 조선 수군이 항상 이기면서 이제는 반대로 조선 수군이 압도적으로 강하다고 평가됐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통제사가 원균으로 바뀌니까 어떻게 됐는지 다들 알게 됐다.
전쟁 초기에 이민호가 원균을 물러나게 하는 바람에 오히려 이순신의 공이 적게 평가받게 된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이순신을 쉽게 고산국 함대를 맡길 수 있었다. 고산국 함대는 이민호가 직접 지휘할 때보다 이순신이 지휘한 이후로 전략적으로 훨씬 유연해졌다. 이민호가 이순신에게 함대를 맡긴 효과는 충분히 보고도 남았다.
조선에서는 아직 공신 책봉을 하지 않고 선정 중이었다. 이순신과 권율이 일등 공신에 오른 것은 실제 역사와 같았으나, 수공자를 누구로 정할 것인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순신의 국적은 여전히 조선이었으나 현재 고산국에서 일하는 바람에 비판하는 자들이 약간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순신 같은 인재를 고산국에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강하게 제기돼서 선무공신 일등 수공자는 이순신으로 점점 기울어지고 있었다. 고산국과의 외교 관계도 고려해서 광해군도 이순신을 수공자로 정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유럽에 가면 달라. 고산국에 들어오는 서양 배를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된단 말이야. 그건 장삿배, 상선이니까. 대서양에서 돌아다니는 유럽 군함은 고산국 전선보다 훨씬 크단 말이야. 복층 포갑판에 대포 74문을 탑재한 거대한 배가 유럽에서는 겨우 3급 전열함밖에 안 돼. 3층 포갑판에 120문 정도는 돼야 1급 전열함이야. 승무원이 800명에서 천 명 정도가 타.”
“우와!”
18세기 전열함을 100년 넘게 끌어와서 이면과 이완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머릿속에서 그런 거대한 전열함과 해전을 벌이는 전선에 타고 있었다.
“이것들이 배가 너무 커서 말이야. 완전히 해상의 요새야. 120문을 꽝꽝 쏴대도 상대편 배도 워낙 커서 금방 격침이 안 돼. 그 거대한 전열함 수십 척이 두 줄로 서서 지나가면서 서로 상대방 전열을 향해 대포를 쏴. 한쪽이 더 이상 못 버티고 물러날 때까지 하루 종일 말이야.”
“꿀꺽!”
둘이 넘어온다 싶었다.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대포를 쏘면 쏘는 대로 다 맞아. 이쪽저쪽 모두 숱하게 죽어나가면서도 계속 포를 쏴. 어때? 사나이답지? 하지만 아무리 피해가 크다고 해도 물러설 수 없어. 해전에서 패해 물러나면 전열함을 막을 배가 더 이상 없단 말이야. 조국이 적의 침공에 노출될까봐 정말 목숨을 걸고, 승조원의 절반이 죽거나 부상당할 때까지 싸워야 해.”
“숙부님! 한 줄로 싸우지 않고 아군 함선들이 뭉쳐서 적의 전열 한복판을 뚫고 지나가서 적 함대를 분리, 섬멸하면 어떨까요?”
이면은 기존 전술에 얽매이지 않았다. 판옥선이나 전선이나 순수한 범선이 아니라서 해전 중에 기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래서 쉽게 다른 전술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넬슨 등은 범선 시대 사람인데도 전열을 무너뜨려 승리를 움켜쥐는 해전 전술상의 혁신을 이뤘다.
“바로 그거야! 그렇게 해서 이길 수도 있어. 너희들이 총함장이 되면 그런 전술을 만들어서 실행에 옮겨야 해.”
이민호가 이 정도 유혹했는데도 이면은 금방 혼란에서 벗어났다.
“아버지가 총함장을 하셔서 그런지 해군은 너무 쉬워 보입니다. 저도 사관학교 참관단으로서 몇 번 참관했는데 아버지는 항상 일방적으로 승리하셨거든요.”
“남들은 같은 조건에서도 그렇게 못하니까 너희 아버님이 훌륭하신 거야. 그렇게 쉽게 이기는 조건을 만들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 보기에는 쉬워도 다른 사람한테 맡기면 엄청나게 고생하고, 아예 못 이기거든? 전선을 직접 설계한 나도 그리 쉽게 이기지 못했단 말이야. 쉬운 것을 잘해야 특기지. 그래야 국가와 국민에 봉사할 수 있어.”
“국왕전하께 충성하는 게 아니고요? 숙부께서는 국왕이시면서 오히려 국왕의 존재를 은근히 무시하십니다.”
“그게 그거니까. 짐은 곧 국가니라. 에헴!”
이면과 이완이 이민호를 보는 눈길이 이상했지만 이 시대 기준으로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직 방학이지? 해군이 뭘 할 수 있는지 보여주지. 마침 내일 브루나이 남쪽 남양으로 출항할 예정이니까 너희들도 참가해. 어명이다! 생도 이면과 생도 이완은 남양 원정에 참가하도록! 아침 9시에 출항이다.”
“예!”
사관학교장 김학에게 참관단 차출 명령서를 보내고 해군부 이순신에게도 찾아가서 통보했다. 이순신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민호의 말을 들었다.
“제 아들과 조카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별 다른 일은 없어야 합니다.”
“모기장, 모기약, 말라리아 치료약까지 다 준비했습니다.”
이민호가 이면과 동갑이란 말은 차마 못했다. 다만 출생연도만 같을 뿐이었다.
“전하께서는 마치 다른 위험은 전혀 없는 듯이 말씀하시는군요.”
“위험이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국왕좌승함은 위험한 곳에서 항상 멀찌감치 떨어져 있을 것입니다.”
“저 하나만 전하께 충성하면 됐지 꼭 아들과 조카까지 휘말리게 해야겠습니까?”
“강요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젊은이가 보기에 조선보다는 고산국이 기회가 많아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 말씀에는 동의합니다만.”
이민호와의 개인적인 약속 때문에 고산국에 와 있지만 이순신은 평생 조선의 충신으로 남을 것 같았다. 이민호는 조금 배가 아팠지만, 그래야 이순신다웠다.
“내일 출발하는 함대가 국왕좌승함 포함 전선 12척, 탐사선 3척, 탐망선 2척, 수송선 5척. 합 22척입니다. 해병 외에 원수부 직할 기병 1개 중대, 3연대 보병 1개 대대입니다. 남양 제도의 작은 나라 몇 개는 지도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버릴 정도의 전력입니다.”
“전쟁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무력시위요. 너무 걱정 마시오.”
고산국의 이름이 남양 제도에 알려졌다 하나 실제 군사력을 투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호주를 경영하려면 남양 제도를 수시로 통과해야 하므로 선박의 안전을 보장해주기 위해 미리 고산국의 힘을 과시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전하께서 침략자로 나선다면 과연 감당할 나라가 이 세상에 있을지 모르겠군요.”
“조선이나 명나라하고 싸울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제가 나이가 들면서 걱정이 많아집니다.”
“하하! 여해 형님께서는 아직 정정하십니다.”
조선 같으면 노장이 많았으나 고산국에는 이순신이 가장 나이가 많은 축에 들었다. 대원수 계복은 겨우 20대 초반이고 감동과 감불은 아직 10대 후반이니 장수급들이 다들 열혈 청년이었다. 싫든 좋든 이순신이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떠맡을 수밖에 없었다.
“절강 순무가 항저우 앞바다 섬들을 청소해달라는 요청이 세 번째로 들어왔습니다.”
“지난번에 황제의 칙서를 받았습니다. 당연히 황명을 받들겠다고 상주했으니 절강 순무에게 협조해주십시오.”
농민 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나면서 명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 그 기회를 틈타 해적들이 양자강 하구인 항저우와 닝보 앞 주산군도에 다시 자리를 잡은 것 같았다. 주산군도에는 거의 항상 해적이 둥지를 틀었다.
“해적들의 근거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섬 주변 수심을 측량하기 전까지 함대 파견을 미뤄놓았습니다.”
“음. 총함장의 판단이 옳습니다.”
“예. 그렇게 약간씩 지체하겠습니다.”
해적들이 항저우 앞바다에 자리 잡음으로써 명나라의 해상운송 체계에 혼란이 생겼다. 세금과 소금, 은광채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명나라는 앞으로도 계속 농민 반란과 해적들의 창궐로 인해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혼란이 생긴 초반부터 고산국이 함대를 파견해 정리해줄 필요는 없었다. 역사가 그대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두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 작품 후기 ============================
발리 섬에 신혼여행이 아니라 무력시위를 하러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