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81 42. 남방 진출 =========================================================================
술과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는 평가는 고산국 왕실에서만 통용되는 이야기였다. 전 근대 사회에서 술과 담배는 보통 약용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더 흔했다. 동아시아에 담배가 들어온 초기에 소화촉진, 기생충 구제, 심신 안정 등의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피웠다.
“전하 개인 회사가 또 있죠?”
“그 정도로 충분하지 않소?”
내탕고는 왕 개인이 아니라 왕실의 금고였다. 그래서 혜영을 비롯한 후궁들에게 완전히 노출돼 있어서 내탕고 외에 따로 이민호 개인의 고정 수입이 생기는 회사를 몇 개 챙기고 있었다. 얄밉게도 비올레타가 노리는 것은 그런 개인 재산이었다.
“많을수록 좋죠. 전하께서 시암으로부터 보석을 수입하잖아요?”
“으윽! 제발 그것만은 건들지 마시오. 내명부 사람들에게 선물을 해줘야 할 것 아니오?”
“네. 그럼 할 수 없죠.”
싱긋 웃는 비올레타가 무서워 보였다. 그리고 루비와 사파이어에는 이민호밖에 모르는 비밀이 숨어있기 때문에 노출시킬 수도 없었다.
인공적으로 보석의 색을 바꾸거나 아예 인공 보석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세계 보석 시장이 수십 년 동안 크게 흔들릴 수 있었다. 인공 보석을 외부로 반출한 적은 없었으나 그 가능성만으로 고산국이 공공의 적으로 몰리거나 고산국에서 수출한 보석 관련 상품이 강제로 할인될 것을 걱정해야 했다.
열처리나 다른 가공 방법을 통해 보석을 인기 있는 색으로 바꾼 것을 인공 보석으로 분류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는다. 그러나 탄자나이트는 열처리를 가해야 비로소 화사한 푸른색을 띠게 된다.
“국영회사들이 방만한 경영을 하지 않도록 잘 관리하라고 하시오. 국영회사의 부패는 세금 도둑질과 동일한 효과가 있소.”
“예. 국가 예산을 집행하는 것과 같은 정도의 투명도로 관리하라고 할게요.”
한국에서 살 때 국영기업 경영진들이 하도 어이없는 짓을 하는 꼴을 많이 봐서 안심이 되지 않았다. 각 국마다 감찰부서가 따로 있었고 감사원 같은 통합 감사기관은 아직 없었다. 조만간 중앙부처와 국영기업을 가리지 않고 회계감사를 할 기관이 필요해질 것 같았다.
“경운차 만드는 회사나 전기 회사는 안 가져가시오?”
“필요 없어요. 그건 적자 회사잖아요.”
“쳇!”
철도와 술, 담배 회사를 국고로 넘겼고, 전기 회사와 경운차 회사는 아직 대량 투자가 필요해 이민호의 개인 회사로 남겨두었다. 전기 회사를 국영기업으로 전환하는 것은 상관없는데 자동차 회사를 국가 소유로 넘길 생각을 하니 조금 이상했다.
“지역별 총독부 외에 따로 수익사업을 전담하는 회사를 차리면 어때요? 브루나이 임업회사는 사업 분야를 너무 제한해놓은 것 같아요.”
“네덜란드의 먼 나라 회사처럼 말이오? 식민지 경영과 수탈을 목적으로 할까 염려되니 지역별 회사는 만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소.”
영국과 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들이 세운 동인도회사, 그리고 일본이 조선에 세운 동양척식회사가 이민호의 뇌리에 떠올랐다. 식민지 수탈과 학살의 대명사이기도 하지만 회사가 군사권까지 쥘 경우 자칫 또 다른 권력기구가 될 우려가 있었다. 그리고 현지인들과 짜고 독립을 추구할 가능성도 무시 못했다. 식민지 경영 회사들은 막판에 안 좋은 꼴을 보고 국가나 총독부에 흡수되는 것으로 종말을 맞이했다.
현재 브루나이 임업회사에서 나오는 이익금의 절반 이상은 반드시 브루나이를 위해 쓰도록 했다. 돈 쓸 곳이 없으면 하다못해 제방과 저수지를 만들거나 도로라도 닦아줬다. 동해국에서 모피 수입으로 생긴 이익금도, 아이누 섬에서 산 물건에도 값을 치른 후에 이익금을 따로 계산해 그 지역을 위해 투자했다.
고산국이 비록 교역의 탈을 쓰고 있더라도 해외 식민지를 경제적으로 수탈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아이누 섬 북동부 강변에서 사금을 쉽게 채취할 수 있다지만 유리구슬이나 쌀을 주고 싸게 사들이는 것을 제대로 된 교역이라 하기 어렵다.
그러나 지금까지 고산국 군대가 아이누 섬에 원정을 가서 소모한 전쟁 비용이 교역을 통해 얻은 이익보다 훨씬 더 많았다. 아이누 섬의 사람들에게 독립과 함께 혼슈 북부 200리의 영토도 넘겨주었다. 최소한 아이누 섬에 대해서는 이민호도 떳떳했다.
“혜영이 사랑해~”
혜영의 침소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나오는 순간 이민호가 잽싸게 문 안쪽을 향해 외쳤다. 진통 주기가 점점 짧아지는 것 같아 초조해졌다.
“전하! 므부투이옵니다.”
“어서 오시오, 대령.”
국왕의 자리에 있는 만큼 수시로 손님이 찾아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덩치가 좋은 흑인 호위병 둘이 멀찌감치 떨어져 대기했다.
흑인 병사들 사이에서도 종족별, 지역별로 암투가 벌어지고 있는지 내부 사정이 꽤나 복잡하게 돌아갔다. 그래서 므부투 대령이 같은 연대장인 감불, 감동과 달리 호위병을 달고 다니는 것을 특별히 허가해주었다.
병력이 충분히 늘지 않아서 대령들에게 아직 별을 달아주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과 전쟁이 끝나면서 지원자들이 좀 더 마음 편하게 입대하면서 점차 병력이 늘어나고 있었다. 전투 위주였던 군대가 앞으로는 탐험과 개척, 치안 유지 임무가 중시될 것으로 예상되면서 그 분야의 교육과 훈련 비중이 높아졌다.
“요즘 인도양으로 탐사를 보내시는 것 같은데 흑인 병사들도 끼워주지 그래요? 우리도 나중에 나라를 세운 다음에 배를 만들어서 멀리 탐사 보내고 그러게요.”
“수색과 정찰은 특수전대대에 파견 보내서 훈련시키고 있잖아? 아프리카에서 무슨 대양 탐험을 하려고 그래?”
“장기적으로 봐서 필요할 것 같아서요.”
이민호는 흑인 병사들이 아프리카로 돌아가기 전까지 가능한 많은 것을 배우고 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흑인 민간인뿐만 아니라 군인들에게도 벽돌 만들기나 건축, 농업, 목축, 상수도 가설 등을 가르쳤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구해온 여자 노예들은 주로 젊은 흑인 병사들과 결혼했고, 아프리카 문화뿐만 아니라 고산국의 문물을 빠른 속도로 배웠다.
이민호가 주변을 재빨리 살핀 다음 므부투에게 말을 놓으라고 턱짓했다. 말 놓고 안 놓고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닌데, 말 안 놓으면 친구 안 하겠다고 므부투가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민호! 우리 흑인들한테도 동등하게 기회를 줘.”
“너희들이 먼저 다른 나라를 침략할까봐 그런 거지. 나중에 혹시라도 해군이 필요하면 우릴 불러. 방어 전쟁이라면 동맹국으로서 얼마든지 도와줄 테니까.”
“주인 없는 새로운 땅을 발견할 수도 있잖아.”
“이미 남김없이 다 발견이 됐단 말이야. 가까운 남미에 배 타고 쳐들어가려고 그래? 나는 너희들이 스스로를 지킬 정도로 힘을 주겠다고 했지, 다른 나라를 침략할 정도로 강하게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어.”
이민호는 흑인들이 노예로 팔려가지 않도록, 영국이나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가 되지 않도록 도와주려는 것뿐이었다. 흑인 왕국이 또 다른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하는 것을 도와줄 이유가 없었다.
“에이! 너무한다. 아프리카는 좁잖아. 지도를 봐!”
“아시아에 이어 두 번째로 넓은 면적이야. 인구는 아시아보다 훨씬 적고. 괜히 확장할 생각 말고 고향 대륙이나 잘 지켜. 첫 세대에 할 일이 굉장히 많아.”
“쳇! 그럼 우린 아프리카로 끝이야?”
“너도 참 웃긴다. 아프리카는 뭐 만만할 줄 알아? 워낙 넓고 종족이 다양해서 잘못하면 평생 전쟁하러 다녀야할지도 몰라. 아프리카 전체를 정복할 생각은 처음부터 아예 하지도 마. 다스릴 수 있을 만큼 적당한 넓이의 왕국을 세우고 다른 지역은 영향력으로 다스리도록 해.”
아프리카가 적도 가까이 위치해서 메카토르 도법으로 세계 지도를 작성하면 다른 대륙에 비해 좁아 보였다. 그러나 아프리카는 아시아의 4분의 3 이상의 넓이였고, 북중미를 합한 북미대륙보다 넓었다. 그리고 정치가가 될 사람이 땅에 욕심을 부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 같았다.
그런데 고산국에서 지원해준다 해도 흑인 병사들이 아프리카에서 제대로 나라를 세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같은 흑인이라 해도 인종적, 언어적, 문화적으로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같은 국가로 묶을 수 있을지부터 의문스러웠다.
흑인 병사들이 노예로 팔려올 때 다른 부족들이 노예 사냥꾼으로 나섰으므로 이들에 대한 보복을 하지 못하도록 맹세하게 만들었다. 모든 부족들이 노예사냥에 나섰거나, 전쟁이 끝나고 나서 포로를 노예로 팔았기에 보복을 하다 보면 남아날 부족이 없었다. 그리고 이민호는 흑인 왕국이 적당한 넓이가 되길 바라지만 므부투는 영토 욕심이 많았다.
“그래도 사하라 사막 이남으로 제한한 것은 너무했다.”
“지금 인종 분포 그대로야. 유럽인들로부터 제대로 지키기도 버거울 걸? 키도 작은 게 땅 욕심이 너무 많아, 너는!”
“키가 작아서 땅 욕심이 많다, 왜?”
므부투가 욕심 많은 것 빼고는 유능한 편이었다. 동아프리카에서 교역어 역할을 맡는 스와힐리어를 빠르게 배우고 여러 부족 출신이 뒤섞인 흑인 병사들과 의사소통을 해가며 전체를 장악했다. 이민호가 밀어줘서 가능하긴 했지만 므부투 개인의 역량도 큰 편이었다.
므부투는 여성 평균 신장이 180cm에 근접하는 루오족 여성들 중에서 가장 미녀를 유혹해 결국 결혼에 성공했다. 키도 작고 노안인 주제에 능력이 좋았다.
“그래도 고맙다. 민호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노예로 팔려가서 엄청나게 고생하다가 죽어갔을 거야.”
“너희들은 이미 노예로 팔려왔었어. 부끄러운 과거라고 부정하지 마라.”
“쳇! 자존심 좀 세워주면 안 되나?”
“진실을 왜곡하지 마.”
고산국은 조선국의 동생 나라를 자처한 형제국이며,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사대하는 명목상의 속국이었다. 여러 가지 필요에 의해 신중하게 선택했고, 그것이 고산국에게 이익이므로 이 사실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 괜히 자존심만 앞세우다가 무역 길이 막히고 침공당하고 싶지 않았다.
“알았어. 그런데 교역 문제 말이야. 고산국하고만 하면 안 돼? 아랍 상인들은 워낙 되바라져서 제대로 다룰 자신이 없다. 천 년 넘게 흑인들 등쳐먹은 놈들이야. 인도나 마다가스카르 상인들도 마찬가지야.”
“바가지 쓰기 싫으면 너희들도 상인 세력을 키워야 할 거야.”
“쳇! 알았다. 어쨌든 고산국에서 건국을 지원해주고, 우린 고산국에 다이아몬드 광산 두 개, 금광 세 개만 넘기면 된다? 그것도 이익은 반분.”
“유럽 상인들한테 팔아봐라. 반값이라도 받나.”
“유럽이나 아랍이나 다 도둑놈들뿐이야. 민호도 미워!”
므부투가 투덜거리며 돌아갔다. 기껏 흑인 병사들이 고향에 나라를 세우도록 도와줬는데 나중에 모르는 척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흑인 국가가 건국 후 최소 몇 십 년 동안은 고산국에 여러 가지를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총기만 해도 흑인들은 제조기술을 갖지 못했다. 특히 실탄은 고산국에서 전량 수입해야 했다. 만약 억지로 흑색화약을 탄약으로 쓸 경우 보병총 성능이 확 떨어지고 총열의 내구연한도 대폭 줄어든다.
여러 손님을 만나 대화하고, 서류를 결재하면서 밤을 지새웠다. 문틈으로 살짝 들여다봤는데 혜영이 산발을 하고 눈은 퉁퉁 붓고 입술은 부르튼 채로 낮은 목소리로 신음 비슷한 비명을 힘겹게 질러댔다. 몹시 안쓰러웠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는데 혜영이 화들짝 놀라더니 수건을 얼른 얼굴에 덮어 썼다. 그리고 문을 닫으라고 고함을 질렀다. 섭섭했지만 혜영이 해산 직전의 초췌한 모습을 안 보여주려고 해서 이민호도 어쩔 수 없었다.
밤에 깜빡 졸다가 깨어났더니 민영의 무릎이었다. 이민호가 혜영의 침소 안을 살짝 들여다봤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어느새 야간 당직자로 바뀌어 있었다.
혜영은 어느덧 지쳐 잠들었고, 의사가 수시로 혜영의 맥박을 재었다. 그리고 시녀들이 혜영에게 부채질을 살살 해주었다. 이민호가 안심하고 창밖에 고개를 내밀어 바깥바람을 쐬었다.
자정이 넘었는데도 중앙시장에는 사람들로 가득 찼고 가로등이 환히 비치는 거리에는 청소년들이 나와서 밤늦게까지 뛰어놀았다. 브루나이에서 수입한 천연고무로 공을 만들고 학교에서 축구와 농구, 배구 규칙을 가르쳐줬더니 편을 짜서 아주 잘들 놀았다.
자라나는 청소년 교육은 공부보다 놀기에 중점을 뒀다. 체육과 음악을 중시하는 북유럽식 교육이 이상적이라 생각해서 그렇게 교육과정을 짰고, 고학년도 오후 세 시에는 집으로 돌려보냈다. 장래 군인이나 모험가를 쉽게 충원할 수 있다는 속셈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그랬더니 청소년들이 다들 밤늦게까지 줄기차게 뛰어노는 것이었다. 예전 인생이나 이번 인생에서 저렇게 마음껏 뛰어논 적이 없었던 이민호로서는 몹시 배가 아팠다.
“부러우세요? 그럼 주인님도 같이 뛰어놀아요.”
“국왕 체면에 공놀이하면서 뛰어놀 수는 없지. 하하!”
이민호는 다시 민영의 품안에서 잠들었다. 혜영이 아기를 낳은 것은 초산인데도 의외로 빠른 다음 날 오후였다. 우렁찬 아기울음으로 인해 호위들 사이에서 왕자님, 원자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기를 목욕시키고 혜영이 초유를 먹인 다음 이민호의 입장이 허용됐다. 강보에 쌓인 시뻘겋고 쭈글쭈글한 갓난아기를 안아 든 이민호가 어쩔 줄 몰랐다.
왕궁의 성벽에 취타대가 올라가 나발을 불어 원자가 생산됐음을 백성들에게 알렸다. 왕도의 백성들 수만 명이 생업을 제치고 왕궁 앞으로 몰려와 왕실의 2세 생산을 축하했다.
“혜영이 정말 수고했어.”
“어서 나올 것이지 어미를 그토록 고생시켰네요.”
“엄마 닮아 아기가 정말 예쁘네.”
침소는 무균실 비슷하게 소독을 철저히 한 곳이었다. 이민호는 날숨이 아기에게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아기를 혜영에게 돌려주었다.
“원숭이 닮았는데요?”
“첫 날에만 그렇겠지. 잘 먹이면 피부가 탱탱해질 거야.”
아기 둘 이상을 낳은 젊은 유모 두 명이 침소에 대기하고 있었다. 이민호와 달리 태어난 순간부터 복 터진 녀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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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낳는 묘사는 해본 적이 없어서 어색하네요. 슬쩍 넘어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