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375화 (324/1,000)

00375  42. 남방 진출  =========================================================================

오후에 제철소에 시찰 나가 용광로가 제대로 돌아가는 모습을 확인했다. 한 번 불을 때면 몇 년 연속 가동하는 것을 알면서도 직접 눈으로 확인해봐야 안심이 됐다. 그만큼 용광로는 산업발전의 핵심이었다.

철장들이 노 위에서 철광석과 석회석, 코크스를 넣고 밑바닥에 괸 용선과 슬래그를 2, 3시간마다 뽑아내는 반복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제철소에서 젊은 기술자들이 지난번보다 눈에 많이 띄었다. 이민호는 24시간 교대 근무하면서도 아직 인명 사고를 내지 않은 철장들의 노고를 높이 평가해 내탕금에서 상여금을 지급하도록 했다.

“소장이 젊은 장인들을 잘 가르친 것 같소. 안전이 최고요.”

“감사합니다, 전하. 작업장이 덥고 힘들지만 젊은이들이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직업이 재능 기부도 아닌데 사명감만 갖고 일하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일이 중요하고 힘들수록 더 많은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이민호의 신념이었다. 그래서 조선에서 생산한 철에 비해 품질이 훨씬 높은 대신 어쩔 수 없이 제품 생산원가는 다섯 배 이상이었다.

조선에서 철제품이 싼 것은 이유가 있었다. 조선에서는 요즘도 고을 수령들이 백성들에게 부역을 시켜 철광석을 캐서 선철을 만들었다. 그 중 일정 비율을 고산국에서 수입해 전기로를 통해 다시 품질을 높였다.

고을 수령은 철을 팔아 은을 만져서 좋고 고산국에서는 선철을 싸게 사서 좋았다. 수령이 철 판매 대금을 공금 계정에 넣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부역에 동원된 백성들만 대가도 못 받고 죽어라 고생했다.

“저기 쌓아둔 길쭉한 것은 뭐요?”

“현재 집중적으로 생산하는 철제품인 선로입니다. 어명을 받들어 아리수 하구부터 왕궁 앞 선착장까지 기관차 선로를 깔고 있는데 전하께서는 혹시 보셨습니까?”

“아! 뭔가 공사를 하더니 그것이었구려. 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확인해보겠소.”

이민호는 그것이 단순한 도로 공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철도 공사였다. 지난해 12월 원정을 떠나기 전에 철로와 디젤 기관차를 만들라고 지시한 기억이 떠올랐다.

관련 부서 장인들을 모아 장난감 기차와 철로를 만들어 보여주고 토론을 해서 철도 건설에 참가하기로 예정된 장인들에게 철도는 이미 익숙했다. 그러나 실제 제작에 들어가기 직전에 원정을 떠나게 되면서 철도 레일의 형태와 길이만 잡아줬었다. 이민호가 없어도 선로 생산, 기관차 개발, 노반 축조 등 여러 분야의 장인들이 자기들끼리 협의해서 잘 만들고 있었다.

선박용 디젤 기관이 이미 만들어졌고 원유도 싸게 사오고 있어서 증기기관차를 건너 뛰어 바로 디젤 기관차를 만들기로 했다. 궁성 앞과 아리수 하구 항구까지 30리 거리를 기관차가 오가면 화물 운송 시간이 훨씬 단축될 것으로 기대됐다. 구간이 짧은 최초의 철로인 만큼 시험적인 성격이 더 강했다.

레일의 간격은 고산국에서 흔히 쓰는 쌍두마차의 폭을 기준으로 1.5미터 약간 넘는 정도였다. 현대 기준으로 표준궤보다 약간 넓은 광궤에 속할 넓이였지만 기관차를 개발하는 장인들은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다. 장인들은 선로 폭이 너무 좁다면서 기관차는 아니더라도 뒤에 딸린 객차와 화물차가 탈선해서 옆으로 쓰러질까 겁을 냈다. 그러나 일단 이민호 주장대로 만들어서 운영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여기서 철광과 탄광을 오가는 마차 바퀴를 받치는 나무 선로도 효율을 높이기 위해 철로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철 생산량에 여유가 더 생긴다면 갱도 내에도 철로를 깔 예정입니다.”

“아무래도 철이 부족하니 용광로 하나를 더 만들어서 운영해야겠소.”

“아직 이르다고 생각합니다만, 현재 견습 철장들의 교육기간이 거의 끝나가니 두 달 뒤에 제작하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젊은 철장들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철광과 탄광이 제대로 돌아가서 천만 다행이었다. 그러나 철제품은 아무리 많이 생산해도 항상 부족했다. 조만간 왕도에서 국토 남단에 이르는 곳까지 철로를 깔아 기차를 운영하기로 계획을 세웠지만 철이 부족해 계속 늦출 수밖에 없었다. 철로를 건설하면서 들어갈 철의 양이 수만 톤으로 추정됐으니 적금 붓듯이 매달 조금씩 선로를 만들어 저축해야 했다.

고산국 영토에서 철광석과 석탄 매장량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으나 광부 수급이 항상 문제였다. 이민호는 다른 나라에서 철광석과 석탄을 수입해 간단히 해결하면 어떨까 잠시 고민했다. 석탄이나 철광석은 흔한 자원이라서 필리핀이나 일본, 조선에서 얼마든지 수입할 수 있었다.

“소장! 지금도 철광과 탄광을 찾고 헤매고 있지 않소? 더 이상 찾지 말고 나머지 부족분은 외국에서 수입하는 게 어떻겠소?”

“그럼 훨씬 싸게 철을 만들 수 있어서 저는 좋습니다. 광부를 하려는 사람이 적어서 고민이십니까?”

고산국에서는 힘든 광부 일을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해서 문제였다. 가장 힘든 탄광은 범죄자들에게 맡긴다지만 경비 인력들도 고생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렇소. 그런데 다른 나라에서 수입하려 해도 힘든 일을 떠넘기는 것 같아서 조금 양심에 꺼린다오.”

“명나라에서는 옛날부터 석탄을 대량으로 캐서 도자기를 굽거나 요리할 때 사용하고 있습니다. 만약 석탄을 수입하신다면 광부들이 일이 더 생겼다고 좋아할 것입니다. 철광석도 마찬가집니다.”

“오호! 그렇다면 다행이구려. 그럼 명나라에서 수입하는 게 좋겠소.”

그 동안 고민하던 게 한 방에 날아갔다. 고산국의 철광과 탄광의 생산량을 적당히 줄여 그 자금을 전용해 명나라에서 수입하기로 했다. 이것이 훨씬 싸게 먹혔고, 철 제작단가도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명나라가 전란에 휘말릴 때에 대비해 수입 다원화가 필요했으나, 아직 시간이 남은 것 같아 당분간 미뤄두었다. 그 대신 다른 나라의 탄광과 철광 위치를 미리 확인하려고 각국에 문의해봤다. 그랬더니 이웃 나라들이 서로 사달라고 난리였다.

명나라에서 수입하는 양 외에 베트남과 필리핀에서도 석탄과 철광석을 매년 일정량 꾸준히 수입하기로 결정했다. 특히 수출 상품이 부족했던 필리핀 총독부에서 아주 좋아했다. 그리고 두 나라에 자원 수입대금으로 지불한 은은 고산국 상품과 바뀌어 고스란히 되돌아왔다.

고산국에서 필요한 양을 넘어서서 남는 철을 창고에 가득 쌓아두었다. 석유도 소비량보다 수입량이 훨씬 많아 보관 문제가 대두됐다. 그러나 이민호는 아주 든든했다.

화학연구소에서는 석유에서 유효 자원을 분리하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었다. 석유에서 뽑히는 고분자화합물 종류가 너무 많아서 특성을 비교하는 일만 해도 어마어마한 작업이었다. 당분간은 계속해서 인력을 투입해서 분리하고 쓸모를 찾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현재는 플라스틱 비슷한 중합체 개발이 거의 완성 단계였다.

오후 늦게 약속도 없이 기관차 제작공장을 시찰했다. 기관차는 장인들이 아주 튼튼하게 잘 만들긴 했는데, 참 멋대가리 없게 생겼다. 이민호가 지도해서 만들었던 기차 모형을 그대로 확대한 디자인이었다.

이민호는 장인들에게 공기 역학 어쩌고 이 시대 기준으로 알아듣지 못할 말을 마구 지껄이면서 기관차 앞부분을 날렵하게 고칠 것을 주문했다. 고산국 백성들을 본격적인 기계문명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맡아야 하는 것이 기관차인데 첫 인상부터 망칠 수는 없었다.

선로 부설 공사장에도 잠시 들렀다. 철길은 기존 마차 및 도보용 도로와 아예 다른 길을 만들어 인명 사고 위험을 원천적으로 줄였다. 궤도 폭이 좁다고 걱정하는 공국 토목부에서 노선을 가급적 직선화시키고 기초공사부터 아주 탄탄히 다졌다.

공국 토목부 직원들과 인부들이 노반 작업에 공을 들이는 것을 보고 이민호는 조금 안심했다. 처음 만들어보는 철도인데도 노반을 다지고 철근 콘크리트로 기초를 만들어 그 위에 침목을 깔고 선로를 부설한 밑에 자갈을 부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철도는 이민호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튼튼히 잘 만들어지고 있었다. 다만 철로 건설비가 예상보다 많이 들 것 같았다. 특히 철도 침목으로 브루나이에서 수입한 티크 원목을 써서 이민호가 아주 기겁했는데, 의외로 가격이 비싸지 않았다.

저녁 식사 후 이민호가 혜영과 민희, 일본 출신 네이, 유구국 출신 아야를 차례로 침소로 보냈다. 배가 남산 만하게 나온 채 뒤뚱거리며 걷는 후궁들을 하나씩 조심스럽게 침소로 인도하는 것은 이민호의 저녁 일과였다.

임신한 여자들을 내버려두고 몇 달 동안 원정을 떠났던 것을 반성이라도 하듯 이민호가 예비 아빠로서 자상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임신한 후궁들이 무척 기뻐했고, 주상아 공주와 비올레타 등 다른 후궁들은 몹시 부러워했다.

밤에 이민호는 브루나이 공주들의 침소에 가서 노닥거렸다. 말만 한 처녀들이 어린 아이처럼 귀엽게 놀고 있었다.

브루나이 공주들은 늘씬하고 아름다운 미녀는 아니었으나 통통한 몸매가 은근히 이민호를 자극했다. 살을 빼라고 이민호로부터 노골적으로 지적을 받은 두나도 여전히 통통했다.

“나무를 곡식처럼 목재로 키워서 판다는 것은 아무나 쉽게 생각하지 못할 거여요. 목재는 숲에 얼마든지 널려 있으니까요.”

“그야 덥고 비가 많이 내리는 브루나이나 그렇지. 다른 나라는 한 번 나무를 베면 30년 이상 벌거숭이산이 돼.”

티크목이 대표적으로 빨리 자라는 속성수일뿐만 아니라 브루나이 열대우림의 특성상 묘목을 심은 지 20년이면 웬만큼 상업성을 가질 정도로 나무가 빠르게 성장했다. 나무를 벤 곳에 다시 묘목을 심고 일부에는 경작지를 만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일꾼들에게 티크 묘목을 심는 일을 설득하기가 힘들었다. 티크 나무란 내버려둬도 자연히 자라나는 귀찮은 식물에 불과할 정도로 흔한 곳이 브루나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현지인 임업관리인들을 고용해 식재한 지역을 관리하면서 우수 품종을 번식시키도록 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동남아시아에 자리를 잡은 이후 브루나이는 더 이상 무역중개지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다. 나라가 기우는 와중에 에스파냐와 술루해적 등 외국 군대의 침공과 귀족들의 왕위다툼 및 내란으로 시달리던 브루나이는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러나 고산국에 전선 건조용 목재 수출을 하면서 재정 기반이 갖춰지고 넓은 지역에 치안이 안정되었다. 벌목꾼으로 고용되거나 벌목 과정에서 생긴 농경지를 통해 주민들이 먹고 살 길이 열리자 짧은 시간에 브루나이의 경제가 급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특히 최근에는 조선의 궁궐을 만드는데 원목 통나무와 굵은 목재가 많이 필요해져서 브루나이의 넓은 땅 전역에 활기가 돌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큰 권력을 쥔 자들은 브루나이 임업회사를 경영하는 공주들이었다. 처음에는 두나와 세나에게만 맡겼는데 일이 많아지면서 어느새 다른 공주들도 도와주고 있었다.

“죄송해요, 주인님. 브루나이 백성들이 요즘 들어 간신히 살아남게 됐다면서 술탄과 저희들만 칭송하고 있어요. 사실 주인님께서 시키신 일인데요.”

“아니야. 너희들이 하던 일이니 너희들이 칭찬 받아야지. 계속 잘하도록 해.”

“헤헤! 고마워요.”

브루나이 공주들도 다른 나라 출신 후궁들처럼 고산국과 고국 두 나라 모두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공주들은 멀리 고산국에 있으면서도 수시로 브루나이 임업회사 간부들로부터 보고를 받으며 업무를 지시하는 냉철한 경영자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그런 공주들도 침전에서는 이렇게 이민호 한 사람에게 매달리는 후궁일 뿐이었다.

브루나이 티크 목을 아주 싸게 대량으로, 그리고 안정적으로 공급 받고 있으니 가장 큰 수혜를 입은 나라는 브루나이가 아니라 오히려 고산국이었다. 영국과 네덜란드 등 해양으로 진출하려는 나라들이 배를 만들 목재를 구하기 위해 수백 년 동안 고생한 것에 비하면 고산국은 아주 쉽게 목재를 조달하는 셈이었다. 그것도 보통 목재가 아니라 단단하기로 유명한 티크 목이었다.

벌채사업은 항구에 이어지는 임업도로를 내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나무 높이보다 최소 두 배 넓게 닦은 이 길은 산불차단 도로를 겸했다. 티크가 47미터 정도까지 자라기에 100미터 폭이 넘는 도로는 숲속 작은 들판이나 다름없어서 주변 농민들이 양떼를 몰고 다니기도 했다.

티크 목재의 품질은 버마나 타이 북쪽 내륙지방에서 자라는 것이 더 낫지만 바다에 가까운 브루나이 티크가 개발하기에 훨씬 쉬웠다. 나무 길이 40미터, 지름 2미터짜리 목재는 사람과 가축의 힘으로 옮기기 벅찰 정도였다. 결국 바닥에 통나무를 깔고 위에서 굴리는 수밖에 없었다. 목재를 항구에 쌓아놓고 말린 다음 제재소로 옮기면 여기서 원형 톱으로 세로켜기를 해서 판자로 가공한 다음 주로 유구국 외륜선에 실어 날랐다. 조선 궁궐에 필요한 통나무 원목은 가지만 치고 통째로 배에 실었다.

============================ 작품 후기 ============================

브루나이 이야기가 한 회 더 이어질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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