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73 42. 남방 진출 =========================================================================
이민호는 국방연구소에서 새로 만든 장비 시연 행사에 아침부터 참가했다. 기관총은 다시 개량 중이고 다총신 연발총은 기계장치가 대략 완성된 반면 구경을 줄인 유탄을 새로 개발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국방연구소에는 총기개발 부서 말고 기계장치를 연구 개발하는 부서가 따로 있었다.
물을 뺀 넓은 논에서 경운차라 이름 붙인 네 바퀴 달린 트랙터가 수확을 하고 있었다. 벼를 연속 베어 한 방향으로 가지런히 눕히는 것은 아주 잘 됐다.
배에 탑재한 대형 내연기관 외에 소형 내연기관을 활용한 장비 또는 차량 첫 번째가 경운차였다. 동력이 약한 단기통 기관에 굴뚝에서 시커먼 매연이 퐁퐁 치솟고 소음이 무지막지하게 크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앞으로 개량하면 나아질 것으로 기대했다. 확실히 대형화보다 소형화하기가 더 어려웠다.
“잘 되는 것 같습니다, 전하. 다음은 밭이랑을 만들어보겠습니다.”
국방연구소장이 논 옆에 위치한 밭으로 이민호를 안내했다. 경운차가 서서히 움직이며 양쪽 고랑을 파고 흙을 모아 가운데에 밭두둑을 만들며 지나갔다. 잠시 후에는 쟁기 비슷한 장치를 달아 빠르게 밭을 갈았다. 농부 10여 명, 소 네 마리 이상의 역할을 충분히 대체할 수 있는 좋은 성능이었다.
그러나 경운차의 가격은 황소 열 마리 이상이었고, 정상적인 농부라면 경운차를 살 이유가 없었다. 소는 농번기가 지나 팔아서 돈을 벌 수 있는 반면 기계는 고장이 자주 나서 수리비가 든다. 현대 한국에서는 소를 키우는 사료 값도 들고 경운기와 가격 차이가 크지 않았으나 기계 장치가 비싼 이 시대에 그 정도 가격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농번기에 노동력을 구하기 어려울 때는 국영 농장 경영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경운차를 시운전하는 국영 농장에 농업연구소장과 선박연구소장 등 장인들이 몰려와 구경했다. 장인들은 앞으로 기관을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전선에 탑재된 내연기관을 지상에서 활용하기 위해 소형화를 진행하고 있지만 이게 말도 못하게 어려운 일이었다. 배기가스가 새지 않도록 밀폐하는데 어려움이 가장 컸고 기계 부품이 마모되지 않게 윤활유 소모량도 예상 외로 늘어났다. 석유가 바이오 디젤보다 싼 가격이 아니라면 이런 짓을 할 이유가 없었다.
“경운차 운전칸에도 짐을 실을 수 있지만 차 뒤에 수레를 달고 더 많은 짐을 운반할 수 있습니다. 배기량이 작아서 그런지 제대로 길이 닦이지 않은 자갈길에서 쌀은 3석이 한계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해요, 소장. 더 소형화하기 어렵겠소?”
“인원과 시간을 더 투입하면 가능하겠습니다.”
공돌이를 갈아 넣으면 불가능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기술인력이 부족한 고산국에서 무작정 장인들의 희생만 강요할 수는 없었다. 장인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 시간을 줘야 했다.
“실제 운영해보면서 앞으로 천천히 개량합시다. 다른 용도가 또 있으면 말해보시오.”
“원동기에 굵은 띠를 연결하면 배수기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저번에 전하께서 하명하신 대로 기관을 떼어 물가에 옮길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잘했소. 한 가지 기계로 실로 다양하게 써 먹을 수 있어야 하오.”
배수기는 가뭄 때 개울이나 저수지의 물을 퍼 올리는 농사용뿐만 아니라 광산 안쪽에 차오르는 물을 뺄 때도 사용할 수 있었다. 장인들이 만든 경운차는 그 외에도 현대 한국에서 경운기가 활용되는 대부분의 일을 할 수 있었다.
“다음은 주행 시험입니다.”
경운차가 넓은 들판에 섰다. 멀리서 깃발을 올려 신호하자 경운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속도가 점점 올라갔으나 사람이 빠르게 달리는 속도보다는 느렸다.
“시속 20리 속도로 경유 한 되에 50리를 갑니다.”
“아직도 연료 효율이 떨어지는군요.”
국방연구소장이 헛기침을 하더니 조심스레 이민호에게 물었다.
“혹시 평원에서 기병을 상대하게 만들 계획이십니까? 철판으로 사방을 가리고 안에 기관총 한 정만 탑재하면 막강할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요? 대규모 농사를 지을 농기계를 만드는 중이오. 아직 인구가 적어 절반 이상의 경지가 국영 농장 아니오?”
“아! 실례했습니다.”
국방연구소장이 사과하면서도 슬그머니 웃는 것 같았다. 국방연구소에 경운차를 만들게 한 것부터 이것이 군사용도로 전용될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험! 험! 기관 효율을 좀 더 올려야겠소. 속도를 좀 더 올리고, 매연과 소음 문제를 해결해야겠소. 기관을 4기통으로 교환할 수 있게 공간을 미리 확보해두시오. 나중에 더 무거워 것을 감안해 제동장치와 차축을 충분히 튼튼하게 만드시오.”
이민호가 애써 부정했지만 경운차는 농기계보다는 장갑차 개발 계획이 맞았다. ‘방어력을 갖추고 움직이면서 안전하게 안에서 밖을 공격할 수 있는 수레’라는 개념은 고려의 검차 등 꽤나 오래 전부터 고안되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제대로 활약한 적은 드물었다.
임진왜란 행주대첩 당시 소모사 변이중의 원래 임무는 군량을 모으는 일이었다. 소를 다수 징발했다가 백성들에게 욕먹은 기록이 실록에도 나온다. 그 와중에 변이중은 화거(火車) 300량을 만들어 행주산성에 보내 승리에 큰 도움을 주었다.
변이중은 행주대첩 직전에 <선조수정실록>의 표현에 따르면 ‘망령되이 옛 법을 본받아서’ 소가 끄는 수레 사방을 나무판자로 가린 우거(牛車)를 만들었다. 변이중은 천여 명을 동원해 왜군이 점령 중인 죽산성을 공격하다가 왜군의 불화살 공격에 의해 크게 패배했다. 우거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실록에 없지만 소가 직접 화살 공격을 받지 않도록 충분히 가렸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럴 경우 현대 장갑차와 기본 개념은 같았다.
“경운차를 개량한 다음 여러 대를 만들어 국영 농장에 배치하고 농민들이 운전법을 배우도록 하시오. 그리고 오래 운영해봐서 문제점을 파악해 꾸준히 개량해야 할 것이오. 가끔 병사들에게도 운전법을 가르칠 계획이오. 병사들이 퇴직한 다음에는 대부분이 농민이 될 테니까 말이오.”
“역시 전하께서는 병사들에게도 경운차 운전법을 가르칠 계획이시군요.”
“에이! 소장에게만 밝히겠소. 장기적으로 군사용으로 전용할 계획이 맞아요. 그러나 기관을 탑재한 수레를 운영한 경험이 전혀 없기 때문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소. 경운차가 충분히 개량된 다음에는 우거 같은 군사용 장갑차를 만들 계획이오. 소장만 그렇게 알고 계시오.”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하오나 말씀은 없었어도 개발에 참가한 장인들은 다들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고산국이 인구가 적고 병력이 적다 보니 인명을 최대한 아끼는 방향으로 모든 군사 장비가 개발됐다. 그러나 고산국 병사들이 아무리 좋은 총을 갖고 방탄모를 쓰고 방탄조끼까지 입었다 해도 아이언맨을 만들지 않는 이상 전사자가 꾸준히 발생했다. 특히 야간전이나 시가전 같으면 적이 어디서 나타날지 몰라 완벽한 방어구를 만들기란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민호가 주목한 것이 장갑차였다. 이민호가 주목하는 장갑 차량의 핵심은 현대의 기갑전력과 달리 기동력과 화력이 아니라 방어력이었다. 총탄과 화살, 이 시대 유럽에서 사용하는 소형 포탄을 막아내고 여기에 더해 화공에 안 당할 수 있다면 충분했다.
그런데 3인치 포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과도한 무장 같았다. 그래서 일반적인 장갑차에는 수랭식 기관총이나 유탄을 발사하는 다총신 연발총으로 무장시킬 계획이었다. 물론 포를 탑재한 장갑차도 일부 만들 계획이었으나 장갑차 출력이 약해서 포탄 탑재량을 줄여야 할 것 같았다.
임신 8개월째 접어든 후궁들 앞에서 국왕이고 시녀고 할 것 없이 궁성 내 거주자들이 다들 설설 기었다. 출산예정자들이 다들 초산이고 궁성 내에 출산 경험이 있는 여자가 없어서 의사와 간호사가 상주하고 벌써부터 산파들이 대기했다.
이민호는 임신한 후궁들과 가급적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했다. 다른 여자를 안으며 밤일할 때도 눈치가 보였다.
“당나라 황제는 매월 보름을 기준으로 황후를 단독으로, 보름에서 멀어질수록 신분이 낮은 후궁들 숫자를 점점 늘려 최대 아홉 명까지 한꺼번에 침전에 들였어요. 그래서 황제는 매달 242명을 안아야 했지요.”
“매달 200여 명이라니, 중국 황제들은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내명부 임시 수장인 혜진이 이민호를 한심하다는 듯이 노려봤다. 이민호는 한 달에 100명도 못 안았다. 단순히 수컷의 능력으로 판단한다면 이민호는 저질 체력이었다.
“그러니 주인님도 꾸준히 운동을 하세요. 요즘 주인님 체력이 여진 호위들보다 약하다는 소리까지 나오고 있어요.”
“그거야 당연하지. 호위들은 운동하는 게 일이거든?”
“주인님은 남자예요! 남자가 여자보다 체력이 약하면 존중을 못 받아요. 흥! 곧 제 생일이 다가오니까 주인님이 저보다 약하면 안 돼요.”
“그런가? 알았어. 우리 혜진이를 위해서라도 미리 힘을 길러놓을게.”
이민호가 이순신이나 정문부에게 시켰던 운동을 결국 왕궁 내에서 이민호가 하게 됐다. 운동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 이민호도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혜진이 어느덧 열아홉 살 생일이 다 되어가서 이민호도 몹시 기대됐다.
그러나 국왕 체면에 뜀박질을 할 수도 없어 궁성에 체력단련실을 만들어 몇 가지 운동 기구를 비치했다. 적과 싸우기 위해 체력을 기르는 병사나 호위들과 목적이 전혀 달라서 운동방법도 약간 차이가 났다.
서양 상인들이 출항하고 나서 이민호는 명나라와의 무역 현황을 점검했다. 국사를 도와주는 후궁들과 예조 참판뿐만 아니라 해동상단과 신라방 상인들도 집무실로 불려왔다.
고산국이 현재 명나라에서 수입하는 가장 중요한 상품은 비단의 재료였다. 처음에는 비단 완제품을 수입해 서양 상인들과 일본으로 수출하는 중개무역을 했으나 그 다음에는 직접 생산하면서 생사 수입량이 늘어났다. 그러나 생사에서 실을 뽑으면서 동시에 가공하는 편이 효율적이었으므로 그 다음에는 주요 수입품이 누에고치로 변했다. 고산국에서 서양 상인들에게 판매하는 고급 비단 수출량이 늘어나면서 명나라로부터 생사와 고치 수입량이 늘어난 반면 수입금액은 점점 줄어들었다.
“혹시 명나라에서 불만을 제기하지 않소?”
유럽 상인들이 명나라에서 수입하던 비단의 구매처를 대부분 고산국으로 바꿨으니 명나라의 비단 수출액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 명나라 경덕진의 도자기 수출액은 고산국의 5분의 1도 되지 않았다. 이민호는 그게 걱정이었는데 명나라의 사정은 조금 달랐다.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 명나라의 비단 생산량은 예전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늘어났습니다. 뽕나무 식재 면적과 생사 생산량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세금이 많아져서 백성들이 살기 어렵다고 하지 않았소?”
“가혹한 세금과 수탈로부터 농민들이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발악입니다. 농사를 지어봤자 대부분 세금으로 빼앗기니까 농민들이 부업으로 누에나 담배를 몰래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요즘에는 수출이 더 많이 돼서 비단 가격이 폭락하지 않았습니다.”
큐슈가 점령된 순간부터 명나라에서 해금령이 완전히 풀리면서, 그리고 명나라의 은이 계속 높은 가치를 유지하면서 동남아 각국에 비단 수출량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었다. 특히 광저우에서 말래카 해협을 거쳐 인도와 아랍, 오스만제국으로 수출되는 물량이 많았다. 비단 매입 대금을 은으로 결제하면 반값에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명나라의 비단 무역은 여전히 활발했다.
유럽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6세기에 비잔틴제국과 아랍 지역에 당나라의 비단 제조기술이 넘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십자군전쟁을 거치며 15세기부터 이탈리아와 프랑스 일부 지방에서도 비단 생산에 성공했으나 상대적으로 저가인 명나라 비단과 경쟁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물론 중국 학자들은 명나라 비단이 유럽산보다 더 고급 제품이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고산국에서 본격적으로 유럽에 비단 수출을 시작하면서 유럽의 견직물 산업 자체가 망해가고 있었다. 명나라 비단을 상대로 근근이 버티던 유럽산 비단은 가격과 품질에서 압도적인 고산국 비단과 비교해 더 이상 살아남기 어려웠다. 특히 고산국에서 생산한 수출용 비단의 문양은 동양보다는 서양인의 미적 취향에 더 잘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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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달리 진출은 안하고 개발하고 장사만 하고 있군요.
분명히 이곳저곳으로 탐사대를 보내긴 했습니다. 주인공이 못 나가니까 알 수 없군요.
조만간 다른 등장인물의 시점을 활용해볼까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