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364화 (313/1,000)

00364  41. 일본 멸망  =========================================================================

총함장 이순신이 이끄는 전선 30여 척은 시코쿠 해안 도시를 포격하는 것만으로도 바빴다. 시코쿠 중앙이 산지 지형인 탓에 농지와 인구가 해안에 몰린 시코쿠의 특성상, 성곽 등 방어물을 함포로 무너뜨린 다음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혼슈에 의존하는 성향이 강한 중소 영주들은 바다가 막히고 육지에서 대군이 몰려오자 산으로 도망가서 조금이라도 버텼다. 초소카베 군과 도도 군은 영주들이 몸을 피한 산악지대로 깊이 추격해 싸우게 되었다. 그리고 3연대 기병대대는 1만여 기리시탄 의용병들과 함께 해안 도시를 돌아다니며 성과 마을을 접수했다.

다른 영지에는 병력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 전선에서 함포 몇 발을 쏘고 의용병들이 조총을 몇 발 쏘니 금방 싸움이 끝났다. 원정군이 병력은 많지 않더라도 그 배후에 도사린 고산국의 전체 전력이 두려운 탓에 영주들이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지휘관 감동이 영주의 가족과 병사,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 없을 것임을 약속하자 영주들이 곧 투항했다.

영주가 할복하는 사이 왜병들은 즉각 집으로 돌려보냈다. 왜병들이 무기를 바쳤다가 점령군이 그대로 들고 가라고 지시하자 어리둥절하면서도 무기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큐슈 총독 정문부가 원정군을 따라다니며 점령지마다 임시 다이칸(代官)을 임명해 민심을 안정시키고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나중에 보고서를 읽은 이민호는 영주들과 고위 가신들이 어째서 할복하는지 몰랐지만 포로로 끌고 와서 처리하는 것도 귀찮아서 일본 고유의 전통 문화를 존중해주기로 했다. 그런데 할복한 영주의 가족과 고위 가신들의 가족이 자발적으로 간몬 요새로 잡혀왔다. 며칠 두고 봤더니 그런 자들이 천여 명에 달해서 보급에 부담을 줄 정도였다.

“영주 가족들에 대한 처분을 바란다고?”

“예! 전하. 저희들은 패한 영주의 계집들을 포함한 가족입니다. 하녀나 그 무엇으로 삼아도 좋으니 전하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다만 먹고 살 길을 마련해주십시오.”

30대 중반 풍염한 자태의 영주 부인이 아직 어린 10대 초중반의 딸 둘을 품에 안은 채 오들오들 떨었다. 더 어린 딸이 영주 부인에게 물었다.

“어머니! 이제 우리 세 모녀는 저 남자에게 강제로 당하는 거예요? 한 자리에서?”

“슬프지만 그것이 패배한 영주 가족의 숙명이란다.”

“저 음흉하게 생긴 남자가 부끄러운 자세를 시킬 것 같아요. 난 처음인데 아프게 하면 어떡해요?”

일본어 통역을 맡은 장교가 통역을 못하고 배를 잡고 떼굴떼굴 굴렀다. 일본어를 아는 이민호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봐! 꼬마야! 무슨 생각을 그따위로 하는 거야?”

“어머! 일본어를 할 줄 아시네요? 음흉하게 생겼다는 말은 취소할게요. 데헷~”

모녀 셋을 한 자리에서 강제로 취한다면 정복감을 만끽할 수 있겠지만 이민호가 그런 욕심을 낼 사람은 아니었다. 영주 부인과 딸들은 남편과 아들이 전쟁터에서 죽고 하인들은 도망가서 먹고 살 길이 막막한 처지였다. 그런데 귀족이나 고위 사무라이의 가족들은 일을 잘하는 것도 아니라서 당장 쓸모가 별로 없었다.

“이들을 큐슈에 정착시키려고요? 지켜줄 남자들이 없잖아요.”

이민호가 이들이 정착할 땅을 주려고 지도를 살피는데 민혜가 반대했다. 남자가 거의 없는 마을은 다른 마을의 공격을 받아 생존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여기는 마을끼리 서로 정복해 약탈하고 노예로 팔아먹기도 하는 일본이라는 사실을 깜빡했다.

“주인님! 사람들이 방직공장 일이 힘들다고 잘 안 하려고 해요.”

“겨우 하루 여덟 시간 일하는 것도 힘들대?”

“고산국에는 그것 말고도 다른 재미있는 직업을 쉽게 구할 수 있으니까요.”

어느 사회에나 힘들고 천한 직업이 있기 마련이었다. 고산국에서는 육체적으로 힘든 일일수록 임금이 높은 편이지만 단순 노동직은 선호도가 확실히 떨어졌다.

구소련이 해체되고 소련을 구성하던 국가들이 자본주의로 전환된 뒤에도 대졸 교사보다 광산 노동자의 임금이 여전히 더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대졸 남성이 편안한 교사직을 버리고 임금을 더 받자고 광산에서 막노동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좋아! 고산국에 가서 3년 동안 호국에서 배정한 직업에 종사하라. 3년 지나면 정식 고산국 백성으로 받아들여주겠다.”

“제가 듣던 것과 다릅니다, 전하. 전하께서는 천한 년들이 노예로 팔려갔는데도 바로 고산국 백성으로 받아들여주지 않았습니까? 농지도 분배해줘서 일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봐! 그들은 진작 고산국 백성이 된 자들이야. 억울하면 너도 일찍 고산국에 이민 오지 그랬어?”

영주 부인으로 있는 동안에는 절대 그럴 일은 없었다. 남들의 불행을 지켜보면서도 그런 불행에 빠지지 않아 안도하던 여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내 백성들이 전쟁터에서 많이 죽었다. 적국의 백성인 너희들이 내 백성의 자리를 차지해 권리를 누린다면 죽은 내 백성들이 억울하지 않겠나? 확! 다 죽여 버리는 것은 너무하고 오사카에 버리라고 할까 보다.”

“죄송합니다. 남편을 잃고 먹고 살기가 막막해서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나 봅니다. 저는 절대로 그런 지옥 같은 곳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혼슈, 특히 오사카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시코쿠 사람들도 잘 알고 있었다. 병력이 많은 혼슈에 비해 시코쿠는 비교적 평온하게 접수하는 중이었다. 고산국에 투항한 영주들 덕에 시코쿠 주민들은 혜택을 많이 본 셈이었다.

이민호가 호국 참판 앞으로 편지를 써서 영주 가족들을 공장에 배치시키도록 했다. 성인 여자들은 일을 하고 미성년자들은 학교에 보내도록 했다. 다만 고산국 백성들이 기본적으로 누리는 일정한 농경지를 소유할 권리는 당분간 유보되었다.

고산국 전체적으로 인구가 부족해 여자들도 일을 해야 국가 존립이 가능할 정도였다. 고산국 군대가 강해 보인다지만 여진 기병과 흑인 병사들을 빼면 해군과 해병까지 합해도 겨우 만 명 남짓했다.

건설 인력은 복건성 등 외국인 임금노동자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고산국 백성들이 살 주택은 잘 지었다. 표준 설계도가 몇 종류 있고 면적도 넓어서 앞마당 정원과 뒷마당에 텃밭까지 가꿀 수 있었다.

넓은 집을 관리하기 어려운 도시 노동자나 독신자들을 위해 3층 연립주택도 건설했다. 현대 한국의 아파트 같은 집합건물은 건설비도 싸고 관리하기 쉬워서 수요가 점점 늘어났다. 왕토사상에 입각한 토지공영제가 실시되는 고산국에서 부동산 투기가 일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전하! 일본 정복을 축하드립니다.”

“고맙소만, 동 두아르테는 왜 여기에 있소?”

마카오 소속의 외륜선 두 척과 범선 한 척이 모지 항으로 입항했다. 선장은 이민호와 오랫동안 거래를 했던 포르투갈 상인 두아르테였다.

“사카이에 무역하러 갔는데 몽땅 불타고 오사카도 허허 벌판이더군요. 그리고 일본인 처녀들이 스스로 고산국에 노예로 팔려가길 애원하고 나섰습니다. 차마 버리고 갈 수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데려왔지요.”

“혹시 사카이에 남은 사람들이 있소?”

“고산국에 팔려가길 원하는 처녀들을 포함한 난민들이 아마 5만 명쯤 되는 것 같습니다. 굶주린 자들이라 언제 죽을지 모르겠습니다.”

“휴우! 당장 계약합시다. 그들을 운송해오시오. 가족 단위라도 상관없이 다 데려오시오.”

쌀을 잔뜩 실어서 난민들을 구제하고 나머지 처녀들도 실어오도록 배삯을 지불했다. 오늘 두아르테가 싣고 와서 모지 항에 내린 여자들은 3천 명 정도였다. 처녀들은 작은 외륜선에 꽉꽉 들어차 마치 짐짝처럼 실려 왔으나 지옥에서 빠져 나와서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전하! 저희들을 긍휼히 여기시어 고산국 백성으로 받아들여주시면 백골난망이겠사옵니다.”

“어째서 말을 그리 어렵게 하냐? 전쟁이 일어나면서 여자 노예 신분으로 고산국으로 이민 가는 길은 당분간 막혔다. 그러니 당분간 큐슈 총독부에서 시키는 일을 하면서 조선말을 배우도록 해라.”

일본인 처녀들을 큐슈 총독부 소속으로 배치시키고 일을 하면 임금을 주기로 했다. 처녀들 절반 정도는 벳푸 온천에 보내 여관업에 종사하도록 했다.

“주인님! 저들을 큐슈에 남을 여진족과 결혼시키면 어때요?”

“여진 기병들은 동해국에 가족이 있어서 돌아가야 하지 않나?”

“여진 기병 중에서 가족이 있는 사람은 얼마 안 돼요. 요동에서 난리를 치던 여진 기병들은 부족과 마을, 가족으로부터 분리된 사람들이 태반이에요.”

“그래? 안 됐구나.”

사실 여진 기병 중에서 총각은 별로 없고 홀아비가 대다수였다. 그들의 가족은 다른 여진 부족에게 약탈당해 흡수된 다음이었다. 그러니 해서여진이나 건주여진에 악감정을 품고 흡수되지 않고 자기들끼리 모여 버틴 것이었다.

그러나 약탈만으로는 그런 큰 무리를 유지할 수 없어 붕괴될 즈음에 이민호가 손을 내밀었다. 여진 기병들은 흑인 병사들과 비슷하게 고향과 삶의 터전을 잃고 부평초처럼 살아와서 이민호 개인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컸다. 조선 출신 사람들에게 여진족은 사고뭉치 야만인이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살아남으려니 최소한 이민호의 명령에는 절대 복종했다.

“전하! 일본의 요청에 따라 기병을 출전시킨다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어째서 출전을 자꾸 늦춘 거죠?”

여진 기병이 배를 타고 출발한 다음 날 비올레타가 눈에 쌍심지를 키고 이민호에게 따졌다. 이민호가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변명했으나 비올레타에게 잘 통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원정은 준비가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오.”

“혹시 일본의 농번기, 특히 모내기철을 기다리는 것은 아닌가요?”

“그럴 리가 있소? 일본 조정에서 세금을 받아야 나도 배상금을 쉽게 받지 않겠소?”

“오늘은 벌써 4월 20일이에요! 음력으로 3월 30일이면 일본에서는 이미 농사철이란 말이에요!”

“여길 보시오. 여진 기병의 기동로요. 작전 기간이 짧고 작전 지역도 매우 좁으니까 주변 농경지에 끼칠 영향은 극히 적을 것이오. 그대의 고운 마음씨를 알고 있는 내가 일본 농민들이 입을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테니 걱정 마시오.”

이민호가 보여준 지도에는 여진 기병의 기동로가 그어져 있었다. 오사카에서 시작해 교토 동쪽을 통해 비와 호 남쪽을 지난다. 그리고 다시 회군하게 되어 있었다.

“저는 마닐라에서 살았기 때문에 왜구나 다름없는 일본인들을 결코 좋아하지 않아요. 하지만 전쟁은 권력을 가진 나쁜 사람들이 일으키고, 농민들은 죄가 없어요. 그러니 쌀을 보내 그들을 살려주세요. 오랜 전쟁으로 식량이 많이 부족할 거여요.”

“일본 조정이나 다이묘들은 쌀을 산더미처럼 보관하고 있지만 풀 생각을 하지 않는다오. 그리고 농민에게 나눠준 쌀은 사무라이들이 세금을 걷는다는 명목으로 결국 다 차지할 것이오.”

“그래도 제발 난민들이 먹고 살 방도를 마련해주세요.”

일본 기득권층이 하는 짓은 마치 19세기 중반 아일랜드에서 대기근으로 인해 사람들이 굶어 죽어 가는데도 벨파스트 항구에서는 밀과 옥수수를 잉글랜드로 계속 실어 나른 것과 같았다. 미국에서 긴급 구호 식량을 실은 배가 도착했을 때도 벨파스트 항구에서는 여전히 영국으로 식량을 반출하고 있었다. 오스만 황제가 구호금으로 1만 파운드를 보내려 했으나 영국 여왕이 2천 파운드를 아일랜드에 보낸 탓에 1천 파운드만 보내라는 권고를 받았다.

그러나 오직 감자 마름병이 유행한 것 때문에 아일랜드 사람들이 굶어죽은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에 아일랜드 농민들은 대부분 농지에서 쫓겨나 감자를 심을 텃밭도 부족했다. 200만 명이 미국으로 이민 가는 동안 불결한 영국 배 안에서 절반 이상이 돌림병으로 죽었다.

그보다 100년 전 18세기 중반에도 비슷한 감자 흉년으로 인한 대기근이 있었다. 그때 <걸리버 여행기>를 지은 조나단 스위프트는 <겸손한 제안>이라는 수필에서 아일랜드 하층민의 아기를 영국 귀족들의 식사로 제공하자고 풍자했다.

영국인들은 최악의 식민통치를 아일랜드에서 하면서, 농지를 빼앗아 아일랜드 사람들을 굶어죽게 만든 책임이 있었다. 이런 구조화된 살인과 약탈에 기여한 영국인들을 아일랜드 사람들이 비난하자, 영국인들은 아일랜드 사람들을 거지 떼라고 경멸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폭력의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제대로 사과하는 경우가 드물다.

============================ 작품 후기 ============================

자꾸 1시에 올리네요. ㅠ.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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