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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360화 (309/1,000)

00360  40. 혼슈 전쟁  =========================================================================

“하지만 큐슈는 원래 일본의 영토입니다.”

“조선을 침략한 일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 이미 점령한 큐슈를 고산국에 준다고 하지 않았나?”

이민호는 궁성이 닌자들에게 공격당해 미카의 시녀 도키코가 죽은 일은 아예 언급하지도 않았다. 닌자가 궁성을 공격한 것은 다른 다이묘가 시킨 일이니 사신이 모른다고 잡아뗄 것이 분명하고, 이 시대에 암살자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것은 각자의 책임과 능력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사건 이후 이민호가 일본에 대해 좀 더 강경 일변도로 나간 면이 분명히 있었다.

“전하께서 딱히 종전을 원하시는 것 같지 않아 그런 약속은 유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이묘들이 불안해서 병력을 모아 큐슈 공격에 나선 것입니다. 다이묘들이 패해서 전쟁이 이미 끝났으니 이제는 병력을 돌려주십시오.”

일본인들과 대화하면 자기들 멋대로 생각하고 말을 내뱉어 이민호는 몹시 답답했다. 마에다 도시나가는 왜군이 대군을 집결시킨 시모노세키부터 큐슈까지만 전쟁터로 설정하고 그 외의 지역에서 고산국이 군대를 움직이면 침략이라는 엉뚱한 논리를 강변했다.

“편한 대로 생각하는군. 명군과 조선군이 큐슈에서 빠지자마자 일본에서 공격해온 것 아닌가? 전쟁을 일단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전하께서는 설마 일본 전체를 정복하실 겁니까? 저희가 병력을 모은다면 아직도 최소 50만은 더......”

일본인들은 이민호가 예상한 것보다 의외로 일찍 병력을 모아 방어에 나섰다. 여진 기병이 투입되고 엿새째 되는 날 5만이 넘는 병력이 비젠의 구라시키(倉敷)에서 여진 기병을 막아섰다. 구라시키가 히메지에서 도보로 사흘거리인 중요한 보급 거점이라 처음부터 방어를 맡은 1만에 더해 오카야마 성의 우키다 가문을 비롯한 여러 영지에서 급히 병력을 파견했다.

그러나 구라시키는 바다에 가까운 항구도시였고, 들판에 집결한 왜군은 여진 기병이 아니라 고산국 함대에 의해 처절하게 당했다. 우키다 가문의 가신인 총대장은 다른 가신들로부터 고산국 함대의 강력함을 경고 받았지만, 직접 당해보지 않은 자들은 함대의 공격력을 과소평가하기 마련이었다. 겁쟁이 취급을 받은 가신이 할복까지 하면서 설득했으나 5만 대군은 아주 옛날에 바다였다가 세월에 따라 지금은 간척된 들판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해안에 접근한 고산국의 전선과 수송선에서 쏟아 부은 포격은 우키다 가문 가신들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은 수준의 재앙이었다. 그러나 총대장은 여진 기병이 수송선에서 내리는 동안 모든 병력이 계속 제자리에서 버티도록 명령했다. 결국 밀집 상태에서 절반 정도가 포격에 의해 쓰러지고 총대장마저 포격에 산화하자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포격을 견디지 못한 우키다 가문의 부대가 뒤로 물러서는 순간 양쪽으로 우회한 여진 기병이 왜군의 측면을 덮쳤다. 중소 다이묘 몇을 포함한 주요 무장들이 이미 전사하고 강력한 여진 기병의 충격력을 견디지 못한 왜병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전략이 그렇게 정해진 탓에 추격전으로 섬멸을 노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래 된 항구 도시가 불타올랐다. 구라시키는 비젠의 중심지인 오카야마의 관문 역할을 맡은 항구 도시였다. 여진 기병은 개울 몇 개와 늪지대를 지나 20리 떨어진 인구밀집 지역 오카야마(岡山)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3연대 포병의 도움을 받아 아사히 강변에 세워진 오카야마 성을 무너뜨리고 불태워버렸다. 조선에서 포로로 잡힌 우키다 히데이에의 가신들이 필사적으로 막았지만 성곽이 보수 중이었기에 방어상 허점이 너무 많았고, 3인치 야포는 목재 위주로 지은 천수각부터 무너뜨리기 좋은 무기였다. 250년이 넘게 버티고 서 있던 성곽이 불타면서 붕괴했다.

오응태는 이민호가 지시한 대로 인명 살상을 자제시키고 오카야마 성 아래 마을은 물론 주변 거주지 마을에도 기병들을 보내 불을 질렀다. 설마 고산국 군대가 여기까지 쳐들어올까 싶어 피난을 떠나지 않은 주민들이 급히 몸만 빼어 도망쳤다.

이들 중 북쪽으로 도주한 자들만이 좀 더 오래 연명할 수 있었다. 서쪽에서 시간 차를 두고 몰려온 피난민과 패잔병들에게 약탈당하며 오카야마 주민들의 태반이 죽었기 때문이다. 피난민과 패잔병들의 대열이 오카야마 일대에서 식량을 구하며, 또는 화풀이를 하며 그나마 남아있던 건물들마저 남김없이 불태워버렸다.

“50만을 모은다고? 그럴까봐 짜증나서 이번에 아예 끝장을 내버려야겠다. 정복은 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일본을 멸망시킬 작정이다. 왜?”

마에다 도시나가가 무릎을 꿇었다. 그를 따라온 가신, 사무라이들이 함께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보통 정복을 당한 국가가 멸망한다고 한다. 그러나 정복하지 않고 멸망시킨다면 의미가 전혀 달랐다. 이민호의 위협에 마에다는 최악의 경우를 상상했고, 고산국에는 그 상상을 실현할 힘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다고 이민호가 모든 일본인을 죽이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국가체제가 무너지면 보통 오랜 기간 내분이 일어나고 급속도로 약화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국가체제가 붕괴됐다 해서 단번에 석기시대로 되돌아가지는 않겠지만 문명이 크게 쇠퇴하고 인구가 줄어드는 것이 자연스런 결말이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일단 오사카가 초토화되고 나서 생각해보자. 이야기는 그 다음이다.”

이민호가 사신단을 쫓아 보냈다. 마에다 도시나가가 엉엉 울면서 배를 타고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구라시키와 오카야마가 불탄 것을 보고 넋 놓아 울던 마에다가 바다로 투신자살을 기도했다가 가신들이 물에 뛰어들어서 겨우 살려냈다. 오카야마는 마에다 도시나가의 처남인 우키다 히데이에의 거성이 있는 곳이었다.

임무에 실패한 것이 명백해지자 사신단을 따라온 사무라이 다섯 명이 할복하면서 장기 자랑을 했다. 에도 시대처럼 사무라이들이 격식화된 할복을, 즉 칼을 배에 꽂고 그어 얌전하게 죽으면 좋겠지만 이런 식으로 가급적 인상적인 퍼포먼스를 펼치던 시기였다. 그 사무라이들은 마에다 가문이 아니라 여러 다이묘들이 파견했다.

사신단의 배는 두 척이었다. 마에다 도시나가가 떠나자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이 이민호에게 절부터 올렸다.

“전하! 황공하오나 주군의 시신을 모시고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아! 그 꼬마 대장? 어디에 묻혔는지 모르겠는데?”

가신이 손을 들어 올리자 배에서 일꾼들이 상자를 묶은 끈을 이마에 두르고 등에 지고 내려왔다. 이민호가 20개쯤 쌓인 상자들 중에서 하나의 뚜껑을 열었다. 누런빛이 이민호 얼굴에 일렁거렸다.

“일본인들이 겨우 당주의 수급을 돌려받겠다고 이런 뇌물을 줄 리가 없잖아?”

“그렇습니다. 도쿠가와 가문에서 고산국 국왕전하께 정식으로 항복하면서 드리는 선물입니다. 저희 가문은 조선을 침공하지도 않았고 이번 전투에서도 저희 주군이 어린 나이인데도 억지로 총대장을 떠맡았습니다. 저희 가문의 원수는 전하가 아니라 오히려 관백입니다.”

“웃기고 있네. 황금 상자 갖고 돌아가!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너희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여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해! 너희 주군의 시체는 공짜로 돌려주겠다.”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들이 몹시 당황했다. 그 사이 이민호가 전령을 보내 도쿠가와 가문의 당주와 가신, 고위 사무라이들의 시신을 파오도록 시켰다. 일반 병사들과 달리 천에 쌓여있는 시신들이 사신선에 실렸다.

“감사의 의미로 황금 상자는 놔두고 가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전하.”

찔리는 표정으로 보아 닌자들에게 고산국 궁성을 공격하도록 시킨 것은 도쿠가와 가문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닌자들은 의뢰받은 일을 제대로 했다. 비록 고산국 국왕 암살이라는 임무에 실패하고 시녀에 불과한 도키코를 죽이는데 그쳤지만 닌자들은 신원을 밝힐 만한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미카는 닌자들의 신원을 기어코 알아내고 말았다. 이가 닌자는 도쿠가와 가문과 협력관계였다.

3월 2일, 히메지를 함락시켰다. 히메지는 주요 보급 거점이며 동시에 병참선의 출발지였다. 바로 이곳에서 거의 10만에 달하는 왜인들이 군량을 이고 지고, 혹은 수레에 싣고 운반하는 시발점이었다.

히메지 성은 에도 시대 이전에 천수각이 세워지고 현대까지 살아남은 드문 경우로, 외관을 하얗게 칠해서 백로성(白鷺城)이라고도 불렸다. 바닷가에서 5km 정도 북쪽에 위치했으나 높은 곳에 세워져 멀리서도 꽤나 예쁜 모습의 성을 감상할 수 있었다.

이때의 성주는 풍신수길의 처남인 기노시타 이에사다(木下家定)로서 무장으로서 기량이 부족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히메지 성이 함포 사거리 이내에 들어와 있으니 병력이 얼마나 모였든 왜군의 패배는 기정사실이었다.

그러나 기노시타 군은 패하지 않았다. 이민호가 평가하기로, 기노시타는 열흘 동안의 작전에게 여진 기병에게 가장 통렬한 반격을 가한 다이묘가 되었다. 기노시타 이에사다는 병력과 운반에 동원된 하인들을 모조리 북쪽으로 옮겨 함포 사거리에서 벗어나 버린 것이다. 그리고 틈이 나는 대로 군량도 북쪽으로 옮기고, 주변에 목책을 쌓았다.

오응태가 히메지 공격에 관해 작성한 보고서 곳곳에서 한숨이 베어 나왔다. 해자로 둘러쳐진 히메지 성은 함포 사격으로 확실히 무너뜨렸다. 그러나 병력과 인원 그 어느 것에도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방어선이 겨우 목책이라도 기병 입장에서는 공격하기에 몹시 부담이 간 탓에 오응태는 여진 기병에게 전투를 하지 말고 시가지를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히메지 시가지는 건물들이 띄엄띄엄 서 있는 편이었다. 도시에 숲도 많고 도로도 넓었다. 화공이 그리 큰 충격을 주지 못했다. 오응태는 기노시타 군이 패잔병과 피난민의 파도를 막아내는 방파제로서 역할을 해낼까봐 몹시 걱정했다.

그러나 패잔병과 피난민의 무리는 여진 기병과 고산국 함대가 못해낸 일을 해냈다. 다음 날, 난병이 된 패잔병들이 들이닥치자 기노시타 군 병사들이 고향을 지킨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방어에 나서서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날 때마다 패잔병과 피난민들이 두 배씩 늘어났다. 처음에는 난병들을 어르고 달래면서 죽을 쑤어주면서 도와주었지만, 난병과 피난민들이 20만이 넘어가는 순간 통제력이 한계에 달했다. 같은 편을 구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분노한 난병들이 기노시타 군을 도륙해버렸다. 그리고 히메지 주변 마을에는 식량이 많이 남았던 탓에 난병들에 의해 아주 철저히 약탈당했다.

3월 4일, 여진 기병이 오사카를 점령했다. 그러나 지난해에 호되게 당했던 왜군 지휘부는 고산국 군대가 오사카를 무혈점령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복구 중인 시가지가 다시 한 번 불에 탔으나 주민들도 이미 피난을 떠난 뒤였다.

이민호는 만약의 경우 왜군이 오사카에서 공성계를 쓸 경우 교토를 공격하지 말라고 미리 지시해두었다. 교토까지 가는 100리 거리에 왜군이 대규모 병력으로 매복을 준비할 게 빤했기 때문이다. 역시나 나중에 확인해보니 그 지역에 최소한 12만이 숨어 있었다.

여진 기병은 교토 대신 더 가까운 동쪽의 나라를 공격했다. 천년 고도 어쩌고 하는 말이 전혀 통용되지 않는 시대라서 오래 된 문화재를 불태우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동대사가 불타올랐고, 관광객에게 과자를 강탈하는 사슴을 구경하지 못하게 되었다.

야마토 국의 고리야마 성이 불타고, 1만에 가까운 왜병들을 섬멸했지만 야마토, 이즈미, 기이 3국의 다이묘이며 풍신수길의 양자인 도요토미 히데야스(豊臣秀保)는 고리야마 성에서 찾을 수 없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히데야스는 가신들과 병력 4만을 이끌고 오사카에서 교토로 가는 길 주변에 매복했다고 한다.

3월 5일, 작전 목적은 완수했지만 총함장 이순신이 함대를 오사카 만에 정박시키고 탐망선을 간몬 해협으로 보냈다. 이민호가 작전 연장을 승인하자 고산국 함대는 오사카 만에 자리 잡고 그때부터 여진 기병을 사방으로 보내 초토화작전을 수행했다.

교토 방향에서 매복하고 있던 왜군이 맞상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야스의 병력 4만이 나오자 함포와 기병 돌격이 멋지게 어우러지며 왜군 병력을 격파했다. 도요토미 히데야스의 군은 절반으로 줄어들어 도주했는데 그 전투에서 총대장의 군기는 처음부터 보이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또 늦었네요. 죄송.

오사카와 교토에 대한 가장 강력한 공격이 남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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