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53 40. 혼슈 전쟁 =========================================================================
큐슈 각 지역마다 다이묘들이 거주하는 거성과 주변 요충지에 산성이나 평산성 형태의 지성이 건설돼 있었다. 반란군은 기리시탄 의용병들이 지키는 거성을 피해 외곽 지역의 지성이나 산성을 점령한 채 반란군을 끌어 모으며 저항했다.
예전에 다이묘를 섬겼던 병사 출신 농민들 일부가 호응하고 있다고 해서 이민호는 걱정이 많았다. 반란에 가담한 자들은 외국군이 고향을 점령한 현실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옛 주군을 위해 의리상 무기를 들고 나섰다. 그나마 숫자가 적고 화약을 구하지 못해 반란군에 조총병이 거의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게 하시오. 오래된 건물을 문화재로서 보존하려고 했는데 군사시설은 어쩔 수 없겠지요.”
“어제 니시무라 씨와 대화를 나눴습니다. 큐슈에서 일어난 반란은 일본 관백이 배후에서 조장한 것 같다고 니시무라 씨가 의심하고 있으며, 저도 공감합니다. 자금과 무기를 실은 배가 어선으로 위장해 큐슈로 들어온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왜군이 간몬 해협을 공격한 날에 맞춰 동시에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도 그 증거입니다. 큐슈와 혼슈의 연락 통로인 바다를 제대로 차단시켜야 합니다.”
니시무라 겐타로와 미카, 그리고 시녀들도 멸망한 가문의 생존자들이었다. 현재 반란을 일으킨 자들 말고도 큐슈 어디선가 다이묘 가문의 생존자들이 남아 복수를 꿈꾸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지금 일어난 반란을 완전히 진압한다 해도 앞으로 영원히 신경 써야 했다. 이민호가 미카 가문의 복수를 대신 해줬으니, 상대편에서도 복수하겠다고 나서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어선들이 들락거리고 있으니 딱히 바다를 막기 어렵지 않겠소?”
“해군이 막고 있는 곳은 간몬 해협을 중심으로 큐슈 동해안과 북쪽으로 제한됐습니다. 전선 몇 십 척이 매일 바다에 나가 모든 해역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일단 어선들이 해안에서 일정 거리 이상으로 나가지 못하게 제한시켜야 합니다.”
큐슈 해안 지방에 거주하는 어민 대부분이 연안 어업에 종사했다. 해도와 나침반 같은 원양항해 도구가 없으므로 어선을 타고 나간 어민들은 해안이나 섬이 보이는 한도 내에서만 그물을 내렸다.
그러나 일본 어민들은 어촌 앞바다에서만 어업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서 고기를 잡았다. 임진왜란 전에는 조선 경상도 남해안까지 가서 고을 수령의 허락을 받아 정기적으로 고기잡이를 한 경우도 있었다. 동래 수군 안용복이 울산에서 울릉도로 향할 때 전라도 송광사의 스님 뇌헌이 소유한 배를 탔는데 이는 연안 어업의 폭이 의외로 넓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마치 명나라처럼 해금령을 내린다는 말이오?”
“지금은 임시 조치입니다만, 나중에도 적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은 어선이 바깥 바다로 나오는 것을 금하는 명을 어기면 적선으로 간주해 무조건 격침시키겠다고 위협하겠습니다. 그리고 전에 전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섬에 사는 자들을 모두 육지로 이주시키겠습니다. 이들을 내버려두면 금령이 지켜지지도 않을 것이며, 또한 감시를 조금만 게을리 하면 자연스럽게 왜구가 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명나라가 큐슈 정벌에 참가한 주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왜구 근거지인 여러 섬에 대한 정벌이었다. 그래서 큐슈가 이미 점령된 지금 왜구들의 섬을 비우는 것은 명나라와 약속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민호는 히라도와 고도, 일기도와 대마도에서 왜인들의 이주가 완료되면 북경에 주문을 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명나라 황제는 이번 일본 원정을 황제의 정치적 업적으로 삼고 있어서, 명군이 철군한 이후에도 모든 전공을 자기 몫으로 선전했다. 이민호가 명나라 주애공 겸 제독총병관의 관직을 유지하고 있어서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고, 주문을 올릴 때마다 상급을 받으니 이민호 입장에서 손해가 아니었다.
“섬에 사는 왜인들이 심하게 반발하더라도 공도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하시오. 그리고 섬사람들이 고향을 떠나더라도 먹고 살게는 만들어주시오. 아니, 먹고 사는 문제가 보장이 돼야 이주 명령을 쉽게 받아들일 것이오.”
“명을 받들어 그들에게도 토지를 분급하겠습니다, 전하. 하오나 왜인들의 식생활에서 물고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꽤 큽니다. 왜인들은 육식을 하지 않기에 반드시 물고기를 먹어야 합니다. 어민이 줄어들면 장기적으로 어획고가 줄어드는 문제가 있습니다.”
니시무라에게 명해 고산국에서 소금을 대량으로 실어와 건어물을 만들도록 했지만 어획고 자체가 줄어드는 문제는 따로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이민호는 큐슈의 연안 어업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고산국에 편지를 보내 어업연구소 직원 몇을 큐슈로 불렀다.
그리고 예국 참판에게도 편지를 보내 그를 장의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이민호가 자리를 비우면 총리인 혜영이 모든 일을 대행했으나, 혜영이 현재 임신 중이라서 장의위원장 자리에 걸맞지 않았다. 그것은 표면상의 이유였고 사실은 혜영이 전사자들의 장례를 주관하면서 감정 변화가 극심해질까 두려운 때문이었다.
더불어 이민호는 유족이 아닌 임산부와 8세 이하 아동의 국립묘지 입장을 금지시켰다. 동양식 생과 사의 터부와 관련돼서 이 시대 사람들에게 쉽게 납득됐지만 사실은 혜영과 다른 후궁들이 장례식에 가는 것을 막기 위한 규칙이었다. 이민호가 왕궁에 있었다면 상관없겠지만 원정에 나선 지금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진 후궁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이런 규칙까지 만들었다.
이번 전투에서 발생한 전사자들의 시신을 수습해 고산국으로 보냈다. 해병이 47명, 육군이 26명이었다. 부상자들 중에서 중상자도 응급처치만 끝내고 치료와 회복을 위해 고산국 병원으로 보냈다.
그 동안 극히 드물던 해병 전사자가 수십 명 단위로 한꺼번에 발생해서 고산국 백성들이 큰 충격을 받을 것 같았다. 사상자 명단과 전선 한 척이 반쯤 탄 피해상황을 관보에 곧이곧대로 발표하게 해서 유언비어가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했다.
저번에 탄약 야적장 경비를 섰다가 폭사당한 병사들도 논란 끝에 결국 전사자가 아닌 순직자 자격으로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순직 원인으로 ‘탄약 야적장 옆에서 술 마시고 모닥불 피웠다가 폭사’로 사실대로 비석에 적었다. 유족들이 반발했으나 손해배상 문제를 언급해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탄약 유폭 때문에 이민호가 그 동안 고생한 생각만 하면 치가 떨렸다.
간몬 해협 건너편은 여전히 조용했다. 히노야마 뒤쪽에서 계속 많은 양의 돌과 토사가 나온 것으로 미루어 해협 밑으로 땅굴을 파는 작업이 계속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며칠 후에 어업연구소장이 직접 큐슈로 건너왔다.
“제가 배를 타고 큐슈 서해안을 통해 오다가 봤습니다만, 큐슈에서는 고기잡이를 안 해도 됩니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큐슈 전역에 산재한 섬들 주변에 정치망을 쳐서 가두리 양식장을 만들어 대부분의 물고기를 기를 수 있습니다.”
“양식장 사업이 그렇게 많이 진행됐소?”
“물론입니다, 전하. 해중국 주변 해역에 가두리 양식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큐슈 주변 바다는 겨울에도 수온이 많이 내려가지 않으므로 조선보다 양식 조건이 훨씬 낫습니다. 고산국은 해안선이 단조로워 물고기 양식이 어려우니 고산국에서 소비될 물고기도 여기서 기를 수 있을 것입니다.”
“큐슈의 자원을 고산국에서 약탈하는 게 아니오?”
“큐슈에서 필요한 것보다 좀 더 많이 생산해서 남는 것을 고산국에 수출하는 것입니다. 큐슈의 어민들 입장에서도 이익이 될 것입니다.”
이민호 입장에서는 수출과 식민지 수탈이 비슷한 말로 들렸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일본으로 쌀을 수출했다지만 압도적인 경제력 차이를 이용하고 물가 조절을 통해 강제적인 수탈을 한 것이었다.
“양식장 어업을 하는 왜인들에게 충분한 경제적 이익이 돌아가도록 해야 할 것이오. 또한 고산국의 어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분업을 진행하시오.”
“고산국에서 그물로 잡는 물고기와 큐슈에서 양식하는 물고기가 어종이 다르더라도 어차피 서로 가격에 영향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농어와 넙치, 가자미, 감성돔, 가리비 등 고산국에서 소비량이 많으나 어획량이 적은 고급 어종 중심으로 큐슈에서 양식을 추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민호도 현대 큐슈에서 양식업이 활발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현대 한국의 횟집에서 국내산, 자연산이라고 내세우는 어종의 상당 부분이 큐슈의 양식장에서 실어온 물고기였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국내 어획량이 적고 양식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벵에돔은 매일 1, 2톤이 큐슈에서 수입돼 횟집 수조로 옮겨진다. 관세청에서 일일수산물수입현황이 발표되므로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민물 장어의 양식은 포기한 거요?”
“전하께서 하신 말씀이 옳았습니다. 강 하구에 어미 장어도 있고 자그마한 댓잎장어와 실뱀장어도 있지만 어미 장어의 뱃속에서 알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멀리 남쪽 깊은 바다에서 알을 낳는 것 같습니다.”
이민호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어업연구소장이 관리자가 아니라 시험정신이 투철한 사람이라서 든든했다. 이민호가 수조에서 종묘를 생산하는 것 위주로 가르쳤는데 소장은 정치망을 이용한 가두리 양식 방법을 스스로 연구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고산국은 해중국 영역을 제외하면 해안선이 단조로워 가두리 양식장을 할 만한 곳이 거의 없습니다. 애써 만들어봤자 태풍이 한 번 지나가면 고스란히 쓸려나갈 것 같아 어민들에게 양식을 권하기 어렵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요. 팽호도에서는 가능할 것이오.”
“얼마 전까지 해적들의 근거지 아니었습니까?”
“사람이 살지 않으니 해적들이 그곳에 근거지를 둔 것이오. 어민들을 이주시키고 매일 해안 경비대 배가 순찰을 돌아서 안심하고 살도록 만듭시다. 그런데 어민들이 그런 절해고도로 쉽게 옮길 수 있겠소?”
“제가 계산한 바로는 전염병만 예방할 수 있다면 다른 어민들보다 못해도 다섯 배 정도 수입을 많이 올릴 수 있습니다. 시설 설치를 위한 자금을 관에서 대주고 어업권을 3년이나 5년 단위로 갱신하겠습니다. 그래서 양식 어업이 특권으로 인식되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방법이오.”
어민에 대한 세금은 농민과 달리 생산물의 3분의 1이었다. 군에서 소요되는 양을 세금으로 받은 해산물로 충당하지 못할 정도였으니 아직 고산국의 어업은 미약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해군에 필요한 기관 생산을 마쳐야 어선에 기관을 탑재해서 어획고를 높일 수 있을 텐데, 이것도 아직 멀었다. 현재 여진 기병 2만여 기를 한 번에 실어 나를 수 없어 수송선을 대량으로 건조 중이었고, 기관도 많이 필요했다.
어느새 2월 23일이 되었다. 간몬 해협 주변에 봄기운이 만연한 가운데 모지 성의 폐허 주변에서는 왜군이 파는 땅굴을 차단하려고 대규모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공병들이 청진기 비슷하게 생긴 것을 귀에 꽂고 철판을 붙인 탐지기 비슷한 장비로 왜군들이 파고 있는 땅굴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왜적들이 파는 땅굴의 앞부분이 분명히 해협을 지나쳤습니다. 조만간 위로 파고 올라올 것 같습니다.”
“예상보다 깊게 파 내려간 것 같아. 하긴 은맥을 따라 100리 거리까지 파고든 인간들이니 이 정도 길이와 깊이는 아무 것도 아니지.”
이민호와 계복은 모지 성의 폐허에서 공사 현장을 지켜봤다. 왜인 포로인 인부들이 한 시간에 10분 꼴로 쉬는 시간마다 공병들이 왜군이 판 땅굴의 위치를 파악하려고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그러나 아직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해서 초조해진 이민호가 공병대 지휘관을 불렀다.
“죄송합니다, 전하. 땅속에서 소리가 들려오는 곳이 몇 곳 있지만 어느 쪽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병대 지휘관이 고개를 숙였다. 며칠 동안 거의 잠을 못 잔 얼굴이었다.
“중령! 왜군이 파는 땅굴의 출구가 반드시 하나일 거라는 생각을 버리시오.”
“아! 맞습니다. 마치 토끼나 너구리처럼 출구를 여러 곳 만들 수도 있겠습니다.”
공병대 지휘관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이민호가 괜히 해본 소리인데 지금 상황에 들어맞는 것 같았다.
“오늘 안으로 땅굴의 현재 위치를 보고하겠습니다.”
공병대 지휘관이 약속을 지켰다. 건너편에서 판 땅굴이 고산국에서 공사를 한 곳 바로 아래를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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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