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50 40. 혼슈 전쟁 =========================================================================
“간식 드세요.”
때마침 아이샤가 닭튀김을 만들어왔다. 영락없이 현대의 프라이드치킨과 양념치킨 절반씩이었다. 이민호는 조만간 순살치킨과 닭강정도 만들 예정이었다.
“와! 닭튀김이에요.”
“평화와 닭튀김!”
닭 열 마리를 탁자에 올려놓고 이민호와 후궁, 시녀, 그리고 호위들이 나눠먹었다. 여러 나라 출신들이 모였는데도 닭고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 모두가 치킨은 사랑하지 않느냐고 설파한 심슨의 말이 맞았다.
닭고기를 많이 먹는 섬라군 덕택에 고산국에서 양계 산업이 대규모로 확장됐다. 겨울이라 조선에서 닭을 사는 것도 한계가 부닥쳐 아예 고산국에서 닭을 키우기로 했다. 덕택에 고산국 병사들도 자주 먹을 수 있게 큐슈에 닭고기가 충분히 공급됐다. 여자들이 눈치 보느라 차마 1인 1닭을 하지 못했으나, 다들 배가 나올 정도로 실컷 먹었다.
“하루 종일 앉아 있기만 하는데 기름진 음식을 이렇게 많이 먹으면 살 쪄요.”
“걱정하지 마시오, 공주. 그 동안 살이 전혀 안 찌지 않았소?”
이민호는 후궁들의 다이어트와 몸매 관리에도 신경을 써주는 훌륭한 국왕이었다. 밤에 한 시간씩 격렬한 운동을 시키면 여자들이 살이 찔 틈이 없었다.
주상아 공주와 비올레타, 시녀들, 민영과 호위들까지 합해 거의 20명의 젊은 여자들이 밤마다 헉헉거리며 땀을 흘렸다. 좁은 실내에서 운동하기에는 줄넘기만한 것이 없었다.
“그래도 걱정돼요.”
“그럼 특별 운동을 더 하시오. 도와드리겠소.”
이민호가 주상아 공주의 손목을 잡고 침전으로 향했다. 주상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종종 걸음으로 따라왔다. 뒤에서 민영이 야유를 했으나 신경 쓸 필요 없었다.
시녀가 침전에 따라 들어왔을 때 이민호는 이미 주상아의 옷을 다 벗기고 침대에 들어간 다음이었다. 침전 바깥 집무실에서 민영과 비올레타가 이민호의 흉을 보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군이 도착하고 며칠 지나자 시모노세키의 폐허를 가로지르는 참호선 세 줄이 완성됐다. 해협에 가까워질수록 더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으나 왜인들은 끝내 간몬 해협의 북쪽 해안에 닿는 참호선 두 줄을 완성하고 말았다. 가장 동쪽 히노야마 산기슭을 지나는 나머지 참호선 한 줄은 해안까지 계속 건설 중이었다.
“한 줄은 1연대가 위치한 히코시마를 향해, 한 줄은 히노야마를 거쳐 모지 성 앞 해협을 향해, 한 줄은 그 중간입니다. 서쪽부터 각기 1, 2, 3번 참호선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정말로 해협을 돌로 메울 것 같아? 저번에 모리 군도 실패했잖아. 히코시마는 훨씬 좁고 얕았는데도 반대편에서 막으니 방법이 없었어. 아무리 참호선을 판다 해도 돌을 바다에 굴리는 사이 엄청나게 많이 죽을 거야.”
“맞습니다. 수십만이 아니라 백만이 모인다 해도 단기간에 해협을 메울 수 없습니다. 공사기간이 못해도 석 달은 걸릴 것입니다.”
석 달이라면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 왜군의 병참보급선이 버틸 수 없다고 이민호는 판단됐다. 왜군이 수천 명 단위로 지킨다지만 고산국 해군과 육군이 언제든 공격할 수 있는 불안한 병참선이었다.
“모지 성 바로 건너편 히노야마 뒤를 지나는 참호선이 가장 수상합니다. 우리가 정찰하려 해도 철저히 막고 있으니 그쪽에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참모진이 예상하기에 적의 목표는 히코시마가 아니라 모지 성입니다.”
“모지 성이 튀어 나오긴 했지.”
“적은 해협을 메우는 척하면서 해협 밑으로 땅굴을 파는 것 같습니다. 저들은 굴을 파서 나온 돌과 흙으로 토성을 쌓고 있습니다. 참호선을 깊이 팠다 해도 예상보다 많은 바위가 나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땅굴을 파고 있어? 혐오스럽군!”
땅굴이라고 하니 이민호의 뇌리에 북한군과 베트콩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 시대는 물론 근대까지도 땅굴은 공성전 과정에서 흔히 이용되는 공격 수단이었다.
실제로 20세기에 들어서면 모지 성과 히노야마 남쪽을 잇는 선 아래에 간몬 터널이 뚫리고 그 위로는 간몬교가 세워진다. 시대를 불문하고 간몬 해협에서 이 지점이 가장 폭이 좁은 곳이었다. 그러니 이곳에 땅굴을 파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이민호는 해협의 폭과 건설 속도를 대충 추정해봤다. 모지 성 앞의 간몬 해협을 400미터로 잡으면 하루에 20미터만 파도 20일 안에 땅굴이 완성될 수 있었다. 총격이나 포격 등 고산국의 방해를 받지 않고 해협 건너편까지 땅굴을 완성시킬 수만 있다면 간몬 요새를 점령하고 히코시마 요새를 고립시킬 가능성이 높았다.
“우리가 모르고 당한다면 몰라도, 저들이 공사하는 것을 알아챘으니 땅굴 출구만 막으면 됩니다. 아니면 역으로 파고 들어가 땅굴 전체를 폭파시키거나 물로 채워도 됩니다.”
“저들도 우리가 알 것이라고 판단하고 다른 땅굴을 더 뚫을 수도 있어. 그리고 만약 밤에 간몬 요새 안에서 뚫고 나오면 위험하겠지. 아무래도 건너가서 반격을 해야겠다. 준비된 게 몇 가지 있긴 한데, 뭐가 좋을까? 일단 참호선에 물부터 채울까?”
두 방향에서 포격 지원을 받고, 게다가 해협 북쪽 해안에 접근한 전선에서 사격 지원을 해준다면 해협 주변은 언제든 고산국에서 장악할 수 있었다. 왜군이 대규모로 몰려오기 전부터 이민호가 여유 부리는 이유였다. 그러나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어? 비가 옵니다.
아침부터 날이 궂다 했더니 결국 비가 내렸다. 봄비치고는 비가 꽤 많이 쏟아져서, 땅이 촉촉이 젖어들더니 작은 도랑이 생기고, 왜인들이 판 참호선 안으로 흙탕물이 쏟아져 들어갔다.
“요 며칠은 반격하지 않아도 되겠다.”
비는 곧 그쳤으나 왜인들이 동원돼 참호선에서 빗물을 퍼내느라 난리였다. 옛 도시의 폐허 위에 누런 흙탕물이 흘렀다.
“적이 30만이라는데도 도련님은 굉장히 느긋하십니다.”
“요새의 방어력을 믿거든.”
그러나 이민호는 기동 방어를 중시하는 입장이었지 모리 군의 공격 때나 이번처럼 방어전에 치중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계복이 조금 불안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민호도 요새 자체는 별로 믿지 않았다.
“시모노세키에 주둔한 왜군이 현재 5만 정도입니다. 이들은 공격에는 관심 없으며 오직 공사 감독과 방어에만 치중하고 있습니다.”
“불안해? 걱정하지 마. 그런데 포격이 효과가 없으니 답답하다.”
참호선이 별로 깊은 것은 아닌데 양쪽 바깥에 돌로 석성을 쌓아서 공사에 투입된 왜인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기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포격을 중지시켰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났다.
- 콰쾅! 펑!
“뭔 소리야?”
2월 7일 오전, 등대에 올라온 이민호가 깜짝 놀라 해협 건너편을 살폈다. 시모노세키 서쪽 바다에 나타난 판옥선 10여 척과 전선 10여 척이 왜군 주둔지를 향해 포격을 퍼붓고 있었다.
왜병들은 고산국에서 포격을 가할 때는 땅에 엎드리거나, 나중에는 신경도 안 썼었다. 그러나 판옥선에서 허연 연기를 가득 피워 올리며 화포를 쏘자 다들 화들짝 놀라 달아났다.
“왜놈들은 어째서 전선보다 판옥선을 더 무서워하는 거야? 은근히 기분 나쁘다.”
그러나 고산국 전선이 포격을 해도 버틸 수 있게 왜군의 본진이 요새처럼 단단히 축조된 탓에 연합 해군의 포격은 큰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낮고 단단하게 돌로 쌓은 방어선이 높이 솟아오른 왜성보다 훨씬 방어력이 높았다.
전선과 판옥선들이 남쪽으로 이동해 모지 항에 입항했다. 판옥선에는 연합군이 큐슈를 건너가기 직전에 항복 사절로 거제도에 왔다가 억류됐던 토도 다카토라가 타고 있었다.
“고산국 국왕전하의 옥체를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고생했다. 전쟁 중에도 사신들이 수시로 양쪽 진영을 오가야 하는 것은 맞는데, 너무 자주 들락거리는 것도 좋지 않아서 말이지.”
“전하께서 고도의 정치적인 판단을 하셨다고 이해하겠습니다.”
일부러 토도 다카토라를 억류했던 이민호가 찔끔했다. 그리고 지금도 사실 몹시 불안했다. 다른 무장이 보는 것과, 축성 전문가인 토도 다카토라가 보는 것은 많이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해해줘서 고맙군. 그 사이 일본에서도 변한 게 많아 당분간 적응하기 힘들 거야. 자네의 새 영지인 시코쿠 우와지마 쪽에 내려줄 테니 저쪽 전선에 타게. 영지가 초토화됐다고 너무 상심하지 말고.”
“전쟁 중이니 성이 파괴될 것도 당연히 감수해야지요. 편의를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이만 하직 인사 올리겠습니다.”
토도 다카토라와 사신들이 일제히 엎드려 이민호에게 절을 한 다음 고산국 전선에 탑승했다. 전선이 바로 떠나자 민영이 물었다.
“사무라이 하나가 안 보이네요, 주인님?”
“나머지 놈도 벌써 할복했겠지.”
거제도에서 창자를 뽑아내는 멋진 퍼포먼스를 펼쳤던 사무라이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다른 무사가 여기서 다시 할복을 했다면 더 인상적이었겠지만, 그 무사는 그 정도 인내력을 갖추지 못했다.
토도 다카토라도 밑바닥에서부터 출발한 전형적인 전국시대 사무라이였다. 그러나 이민호가 알기로 그는 평범한 사무라이답지 않은 지혜와 인내력을 갖춘 위험한 인물이었다.
“주인님은 왜 이토록 시간을 끄세요? 건너편에 적 전투병력이 더 모일 때까지 기다리시는 건가요?”
“응. 그래야 포위 섬멸을 할 수가 있지.”
고산국의 능력으로는 간몬 해협을 방어하는 동시에 적의 배후에 상륙해 병참선을 끊고 왜군 30만을 시모노세키에 몰아넣을 수 있었다. 이것으로 간단히 전쟁을 끝낼 수도 있었다. 각 영지를 지키는 병력이 소수 있겠지만 공성전과 각개격파는 고산국 군대의 장점이었다.
“다른 의도가 있겠지만 물어보지 않을게요.”
“그래.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게 좋을 때가 있어.”
일본은 임진왜란 기간 동안 충원, 증원군을 포함해 왜군 전투병력 30만을 잃었다. 수군 노잡이나 상인, 하인들 같은 민간인들을 뺀 숫자였으니 다 합하면 최소 50만은 넘어갔다.
고산국 해군과 해병이 일본의 해안선을 돌면서 끼친 인명피해도 컸다. 그리고 이미 점령지가 된 큐슈를 빼고 주코쿠의 모리 군 병력과 징발된 민간인을 합해 20만이 죽었다. 큐슈를 빼고도 70만이 넘어가는 대규모 사상자가 최근 몇 년 동안에 발생했다.
그러나 이 시대 일본의 인구는 2천만 정도로 학자들이 추산했다. 지금 출동시킨 30만 대군이라는 병력을 두세 번 더 뽑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이들을 몰살시킨다 해도, 그리고 그 즉시 병력을 움직여 혼슈 전체를 점령한다 해도 일본 땅을 지배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었다. 자칫하면 섬라군이나 기리시탄 의용병 같은 보조군을 포함해 몇 만에 불과한 고산국 점령군이 30만 대군의 호수 안에 빠져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일본은 30만 대군이 전멸해도 다시 편성할 수 있지만 고산국 병력이 전멸할 경우 다시 회복하기 어려웠다. 이민호가 고민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지금 눈앞의 전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길게 봐야 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이민호가 노리는 적의 군세는 병력 30만이 아니라, 나중에 병력으로 징발될 수 있으나 지금은 군량 운반에 동원된 백성 100여 만이었다. 굶어죽거나 얼어 죽어서 숫자가 줄어들면 다시 영지에서 징집을 하니 100만은 계속 유지됐다. 그러나 일본의 전쟁 동원능력은 시간이 갈수록 바닥을 드러내게 된다.
“그래도 궁금해? 뭔가 아는 것 같은 눈치인데, 내가 잔인한 것 같지?”
“아니요. 일본인들이 조선에 한 짓이에요. 주인님에게 똑같은 보복을 받는다 해도 왜인들은 할 말이 없을 거여요.”
“이번 전쟁이 끝나면 일본에서 한두 세대가 비어버릴 거야. 앞으로 두세 세대가 지나야 간신히 채워지겠지. 그 사이 점령 정책을 완료하면 돼. 세월이 흘러도 일본의 인구가 늘지도 줄지도 않게 해야겠지.”
이민호나 고산국 군대가 이번 전투에서 직접 사살할 왜군의 숫자는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전쟁의 매커니즘을 이용해 부수적으로 적국의 백성들을 손 안 대고 학살하는 방법이 있었다. 이민호가 괜히 시간을 끄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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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장기적인 전략입니다.
읽기에 불편하더라도 전쟁에 이런 부수효과가 딸린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