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348화 (297/1,000)

00348  39. 간몬 해협 전투  =========================================================================

“천일염전은 비밀이 아니오. 염전 기술자들을 보내줄 테니 만들려면 얼마든지 만드시오. 그래도 부족할 테니 고산국에 남는 소금을 수입해서 건어물을 만들 때 사용하시오.”

20세기 초반에 청나라 절강성 일대의 천일염전에서 대량 생산된 소금이 조선 소금 시장을 장악한 적이 있었다. 일본은 청나라가 조선을 경제적 속국으로 만들까 두려워 일본산 자염을 조선에 수출했다. 그러나 염도가 낮은 일본 소금으로 만든 간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상해서 못 쓰게 되고, 청나라 소금은 수입이 금지돼 소금 파동이 일어났다.

그래서 일본이 천일염전을 대규모로 건설한 곳이 평안도 서해안 일대였다. 일본에서 생산한 소금을 조선에 팔아먹고 싶어도 일본에는 염전을 만들 갯벌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남북한이 분단되면서 또 다시 소금 파동이 일어났고, 이때부터 남서해안이 염전으로 개발됐다. 한반도 남서해안과 도서 지방은 천일염전으로서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으나 개발 자체는 이렇게 늦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하오나 소금 값과 운송비용이 모두 높아서 차마 소금을 쳐서 건어물을 만들지 못합니다.”

“창고에 보관된 소금을 특별히 싸게 넘기겠소. 나가사키에 입항하는 무역선은 남는 공간에 소금을 싣고 오도록 규칙을 정하면 어떻겠소?”

큐슈가 완전히 점령되고 히라도가 초토화되면서 나가사키가 대외 무역항으로서 독점적인 지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지금은 겨울이라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무역선이 입항하지 않을 때였다.

그래도 고산국과 유구국, 명나라의 무역선들이 수시로 입항해 화물을 쏟아냈다. 일본에서 채굴한 구리와 유황은 온전히 고산국에서 수출을 통제하고 있었다. 지금 큐슈에서 외국으로 수출할 것이 없어 무역역조가 심각했고 은도 부족한 시기였다. 이민호와 정문부가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그것도 좋겠습니다. 무역선이 소금을 일정량 이상 싣고 오면 입항세를 감면해주는 것은 어떻습니까? 아니면 나가사키에서 남는 자금으로 소금을 수송하는 배를 고용하겠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무역이란 서로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것이오. 다만 일본에서 자염을 생산하는 자들이 일자리를 잃지 않도록 물량과 가격을 적절히 조절해야 할 것이오. 자염이 몸에 더 좋다는 식으로 알리거나, 정 안 될 것 같으면 처음부터 자염 생산자들에게 염전을 맡기시오.”

“아아! 그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주인님은 역시 성군이십니다.”

“정 총독에게도 누누이 강조했지만 백성을 다스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이오. 다들 먹고 살아야 할 것 아니오?”

“그렇습니다. 살 길을 찾지 못해 사방으로 떠도는 유랑민들을 보면 불쌍합니다.”

니시무라 겐타로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처음에는 전쟁 준비를 논의하다가 자연스럽게 무역이나 경제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러나 지금은 일본에서 총력을 기울여 쥐어짜낸 병력이 조만간 간몬 해협을 공격하러 올 예정이라 전쟁에 더 신경 쓰기로 했다.

“이번에도 적을 요새 앞으로 끌어들여 적 병력을 소모하실 계획이십니까?”

“어째서 혼슈 이곳저곳에 상륙해서 적의 동원능력을 줄이지 않느냐는 말씀이시오?”

지금까지 전선에 병력을 싣고 다니면서 일본 해안도시를 두들기고 때에 따라 병력을 상륙시켜 도시를 초토화한 작전을 자주 써먹었다. 다른 지휘관들도 그 작전을 지속하자고 건의했지만 이민호가 이유를 알려주지 않고 거부했다. 그래서 지금은 방어에만 주력하고 있었다.

“그런 의문도 있습니다.”

“조선의 유학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소. 적보다 약한 무기로 아군을 무장해서 내보내면 적의 전공을 세워주는 역할밖에 못한다고 말이오. 군인도 백성이니 우리 백성을 적의 아가리에 들이미는 바보짓이라고도 하오. 조선의 선조, 그러니까 선종 대왕께서 하신 말씀이오.”

“아아! 역시 유학은 부국강병을 위한 학문입니다.”

“어? 그렇게 되나요?”

오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원래는 유학도 국방에 꽤나 신경을 쓰는 학문이었다. 춘추전국시대의 난장판에서 국가가 살아남기 위해서 정치와 군사는 밀접하게 결합됐고, 토지제도에서도 국방력 증가를 위한 노력을 다양한 면에서 발견할 수 있다. 병사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사기를 높이고 다른 나라 백성들을 유인해 국력을 키우는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위정자들과 신하들이 오랜 시간 고민했다.

그러나 어떤 사상이든 관계없이 한 가지 사상이 사회 전반을 장악하고 나면 기득권자들의 보수적인 통치 수단으로서 작동하게 된다. 로마 가톨릭은 물론 불교나 이슬람교도 종교 창설 초기에는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종교였으나, 세월이 흘러 국교로 정해진 다음부터는 기득권을 옹호하거나 갖가지 부패상을 보여주게 되었다.

조선에서도 성리학이 지배 이념이 되면서 교조화되고 일당독재나 한 가문의 세도정치가 오래 지속되면서 급속도로 부패해갔다. 부패한 권력자들은 국방체계를 가장 먼저 무력화시켰다. 국방에 들어갈 돈이 아까우니까 국경에서 큰 문제만 안 생기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았다. 특히 중앙군을 사병화시켜 반란 진압에 특화시키는 반면 외적의 침공에는 극도로 무력해졌다. 하부 군사 조직에서도 관리나 장수, 아전들이 수시로 공금을 개인적으로 유용했고 병사가 되어 싸워야 할 병역 자원들을 수탈했다. 유학에서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권하는 정책과 정반대로 현실이 돌아갔다.

“무기의 성능 차가 크게 남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권력자들은 정면 공격만 고집하고 있으니 망할 날이 멀지 않았소. 우리 군대는 편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지치고 약해진 적을 섬멸하면 쉽게 끝날 것이오.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방어전을 선택했으니 참고 기다리시오.”

“고산국의 총과 포가 무서워 간몬 해협까지 참호선을 판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적의 총대장이 멍청이라면 다시 용감하게 정면 공격부터 할 것이오. 병사들이 떼로 죽은 다음에야 다른 방법을 생각하겠지만 그때는 늦기 마련이오. 그리고 만약 처음부터 참호전에 들어간다 해도 그런 전투는 내가 더 잘 아니 전혀 걱정하지 마시오.”

이민호는 간몬 요새에서 기다리면서 니시무라 겐타로와 해군을 통해 왜군이 집결되는 상황을 시시각각 보고 받았다. 관백과 오대로가 합의해 영지마다 동원하도록 지시한 왜군 25만 외에도, 고용되지 않은 사무라이인 로닌(牢人) 같은 낭인무사와 유랑민 등 지원병 몇 만이 더 모였다. 그래서 전투에 투입하기로 결정된 병력만 30만에 달했다.

섬이 많은 세토 내해에 고산국 해군 전선이 함부로 들어가지 못했으나 일본 전체에 배가 부족한 탓에 군량을 배로 실어 나르지 못했다. 또한 히로시마까지 고산국 전선이 활동하므로 일본의 군량 운반선들이 함부로 주코쿠에 접근하지 못해 군량 운반에 애로가 많았다.

일본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심지어 해외 원정 전쟁인 임진왜란에서도 보급은 상인 집단이 맡았다. 그러나 해안도시가 몇 년 동안 계속 공격받고 더 이상 배를 만들 수 없어 해상 운송업이 붕괴되면서 상업이 급속도로 쇠퇴했다. 병력 30만이 몇 달 동안 먹을 군량을 운반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왜인 백성들이 100만 가까이 동원돼 군량을 수레에 싣거나 어깨에 지고 서쪽으로 운반했다. 그런데 운송에 동원된 백성들은 군량을 먹지 못하게 금지돼 있었다. 운반할 사람들이 알아서 자비로 구해서 먹거나 고향 마을에서 떡 같은 휴대용 식량을 준비해야 했다.

쌀은 열효율이 높은 식량으로서 전투에 동원될 병사들이 먹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처음에는 군량을 운반하는 백성들에게 잡곡을 먹이려던 계획을 세웠으나, 잡곡은 쌀보다 양이 많아야 하고 당장 군량 운송이 시급해서 취소됐다. 최근 무역이 막혀 다이묘들에게 돈이 없다는 문제도 있었다. 그래서 운송에 동원된 백성들은 풀뿌리를 씹거나 군량운송로 주변 마을을 약탈해서 알아서 먹어야 했다. 당연하게도 군량운송로 주변이 단 며칠 만에 초토화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군량을 운송하다가 굶어죽은 자들, 병들어 죽은 자들, 겨울이라 추운 날씨에 노숙하다가 얼어 죽은 자들, 군량운송로 주변에서 마을을 지키다가 죽은 자들, 그리고 배고파서 군량에 손을 대려다가 들켜 사무라이에게 참수당한 자들이 10만이 넘어섰다. 아직 군량을 서쪽으로 완전히 운반하지 못했으므로 굶어죽고 지쳐죽고 싸우다 죽고 병들어 죽은 자들은 시간이 갈수록 계속 늘어났다.

이들이 빠진 만큼 다시 백성들이 추가로 강제 동원돼 죽음의 길에 나섰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군량 운송은 끝나는 법이 없었다.

여기에 이따금 고산국 해군 전선이 해안 도로를 지나는 군량운송 대열을 공격하고 특전대대 대원들이 저격을 해서 길을 막아 해안 도로를 사용하기 어렵게 되었다. 산길을 이용할 경우 이동 거리가 더 길고 힘이 훨씬 더 들었다. 굶주리고 지친 자들이 죽어갔다.

그렇게 해서 군량 운송에 동원된 백성 2백만 중에서 최종적으로 50만이 넘게 사망했다. 나머지도 극도로 쇠약해져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전투가 없는 중에도 전쟁 때문에 얼마든지 사람이 죽을 수 있었다. 만약 전염병까지 돌았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었다.

나중에 이 문제로 이민호를 비난하는 일본인들이 있었다. 고산국 군대가 직접 왜인 백성들을 죽인 경우는 드물었으나 실제로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콧방귀를 뀌었다.

“동원한 백성들에게 잡곡죽이라도 먹이지 그랬어? 만약 내가 운송 책임을 맡았다면 공격 시기를 열흘쯤 늦추더라도 운송에 동원된 백성들을 굶겨 죽이지 않았을 거야. 무능하고 백성들의 생명을 우습게 여긴 다이묘, 사무라이 놈들이 잡곡 살 돈이 아까워서 자기 백성들을 죽인 거지.”

다이묘들이 아무리 돈이 없다고 엄살을 부렸어도 진짜 급하게 필요할 때는 돈을 풀었다. 다이묘가 자식에게 비단을 사줄 수는 없었지만 가격이 몇 배나 오른 화약 한 통을 사기 위해서는 꼭꼭 숨겨놓은 은을 풀었다. 결국 군량 운반에 동원된 백성들에게 먹일 얼마 안 되는 잡곡을 살 돈이 아까워서 수십만의 백성을 죽였다는 결론이 나왔다.

1594년 음력 1월 24일, 고산국 해군은 위험을 무릅쓰고 혼슈와 시코쿠 사이 세토 내해로 깊숙이 진입했다. 그 전에 입구 지역인 시코쿠 북서쪽 해적 본거지인 이요(伊予 또는 伊豫) 군 지역을 아주 초토화시키고 마사키의 마사키(松前) 성과 유즈키 성(湯築城)을 붕괴시켰다.

세토 내해에 본격적으로 진입한 다음부터는 해적 영지 여러 곳을 초토화시키고 배도 없는 선착장을 철저히 파괴했다. 그리고 바다에서 만난 몇 척 안 되는 군량 운반선을 불살랐다. 운송 비용을 감안하면 산지 쌀 가격의 몇 배나 되는 군량이 바다에 가라앉았다.

그리고 시코쿠 북부, 혼슈 남해안에 자리 잡은 도시들도 함포 사격을 통해 불태웠다. 가끔 해병을 상륙시켜 위협하기도 했다. 전선 30여 척이 다도해인 세토 내해 안을 하루 종일 휘젓고 다녔으나 왜군에 군선이 없어 감히 대항하지 못했다.

다음 날 새벽부터 전선에서 함포를 쏴댔다. 이민호가 눈을 부비며 일어나 함교로 갔더니 함장이 간단히 보고했다.

“전하! 서쪽으로 이동하는 적의 대규모 부대를 포착했습니다. 깃발을 확인하니 관동 지역 병력 같습니다. 앞 열은 도쿠가와 가문, 후미는 다테 가문과 후쿠시마 병력입니다.”

“저들은 혼슈 북동쪽 가문들 아니오? 아이누 군이 별 역할을 못한 것 같군요.”

현재 아이누 족이 혼슈 북쪽을 공격하고 있었다. 작은 배 수백 척을 타고 츠가루 반도에 기습적으로 상륙한 아이누 군은 왜인들이 거주하는 해안 도시와 마을을 내륙 쪽으로 밀어버리는 것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야전에서 매번 왜군에 막혀서 쉽게 남진하지 못했다. 고산국 사관학교를 졸업한 부족장 아들들이 지휘관을 맡은 것은 좋았는데 화력에서 압도하지 못하고 왜군의 측면 공격이나 야습에 자주 무너진 탓이었다.

그래도 혼슈에 상륙한 아이누 군은 2만에 달했다. 조총도 3천 정이 넘었다. 그러나 아이누 섬을 일본인의 침략으로부터 지키기에는 충분했지만, 공격에 나서기에는 조금 부족한 전력이었다.

평소에는 서로 싸우기 바쁘던 혼슈 북부의 가문들이 일치단결해서 아이누 족의 전진을 막아냈다. 그래서 같은 도호쿠 지방이라도 바로 남쪽 후쿠시마 가문이나 다테 가문이 멀리 주코쿠 지방까지 올 수 있었다.

“전하! 계속해서 해군이 이 지역을 막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해안 도로 공격은 오늘까지요. 해안도로를 꾸준히 공격하면 왜군이 산간도로를 통해 군량을 운송하느라 효율이 훨씬 떨어지겠지만, 해군이 계속해서 막고 있을 수 없으니 할 수 없지요.”

사실은 왜군이 큐슈 원정을 포기할까봐 더 이상 군량운송로를 공격하지 못한다는 것이 진실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밝히지 않은 탓에 휘하 장교들 사이에 우려나 불만이 꽤 쌓였다. 마침 함교에 특전대대 대대장이 왔다가 이민호에게 물었다.

“전하! 몇 군데에 저희가 찍어둔 언덕에 병력을 투입해 사수하면 군량 수송로를 꽤 오래 막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탄약이 떨어져 사흘 안에 점령되겠지만 그럼 또 다른 언덕에서 버티면 됩니다. 이런 식으로 적에게 큰 피해를 주면서 시간을 끌 수 있습니다. 언덕을 방어하는 부대는 대부분 전멸할 것이므로 제가 직접 가서 사수하겠습니다.”

“대대장! 적당히 공격하고 물러나라고 하지 않았소?”

“저희들은 특수전 부대입니다. 그러나 그 동안 전하께서 기대하신 것보다 큰 역할을 하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심지어 보병연대보다 전과가 적은 것 같아 왜군 사무라이처럼 스스로 배를 가르고 싶은 심정입니다.”

용감하고 책임감 넘치는 무관은 어디서나 환영받을 수 있으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높이 승진하지 못한다. 그 전에 전사하거나, 작전이 단순해서 쉽게 간파되기 때문이다.

“대대장! 보병연대는 전투를 하고 특전대대는 전쟁을 하고 있소. 보병은 연대 체제인데 어째서 특전대대만 원정사령부 직할인지 잊어버렸소? 이번 전투로 전쟁이 끝나는 것이 아니란 말이오. 그러니 사수한다든지 전멸을 각오한다든지 하는 극단적인 작전은 하지 마시오. 힘들여 훈련시킨 특전대원을 살려두고 오랫동안 써먹고 싶소.”

“전하의 뜻이 그러셨다면 생환에 더욱 중점을 두도록 작전을 펼치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왜군이 간몬 해협으로 공격해오지 않으면 오히려 큰일이오. 30만이나 되는 병력이 각자 영지에서 방어를 한다고 생각해보시오. 탄약이 백배는 더 소모되어야 겨우 잡을 수 있을 것이오.”

“아! 그렇다면 일부러 끌어들이시는 거군요.”

“저번에 작전계획을 간단히 설명하면서 암시를 하지 않았소? 일부러 해군이 작전에 적게 나서고 있소.”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이 해협에서 막는 줄 알았습니다.”

적을 속이기 전에 먼저 아군을 속인다는 군사상의 격언은 실천하기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이민호는 어쩔 수 없이 지휘관들에게 왜군을 간몬 해협으로 끌어들인다고 밝힐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부터는 해군과 특전대대가 왜군의 군량보급로를 적당히 공격하게 되었고, 그 덕택인지 왜군의 보급기지가 점점 서쪽으로 이동했다. 물론 그 사이에도 군량 보급에 동원된 왜인들이 숱하게 죽어 나갔다.

1월 말이 되면서 시모노세키 북쪽에서 왜군 정찰대의 활동이 점점 늘어났다. 왜군이 언제 쳐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간몬 요새와 히코시마의 방어 준비가 모두 끝났다. 해군은 간몬 해협 주변 바다에 배치되고, 기리시탄 의용군은 요새 남쪽 해안 지대에 배치됐다. 여진 기병들은 중요한 역할을 앞두고 쉬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전쟁준비가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