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46 39. 간몬 해협 전투 =========================================================================
일왕이나 일본 조정에 정치적 실권이 없다지만 형식적인 권력 정도는 아직도 쥐고 있었다. 그래서 다이묘들이 뜻을 모아 조정 대신들에게 요청하면 대신들이 일왕에게 상주하고, 일왕이 다이묘에게 출병 명령을 내리는 식이었다.
“언제쯤 쳐들어올 것 같소?”
“아직 결정되지 않았으나 1월 하순으로 예견되고 있습니다. 병력은 여러 영지에서 20만을 끌어 모을 계획을 세우고 있답니다. 하인들과 보급로를 경비할 군대까지 동원하면 물경 50만에 달합니다.”
“엄청나군요. 혹시 수군은 얼마나 준비됐소? 큐슈는 해안선이 넓어서 이곳저곳에 정신없이 상륙시키면 정말 큰일이오.”
고산국이 압도적인 화력을 보유하고 있으니 왜군 병력이 차라리 모일수록 처치하기 좋았다. 만약 나폴레옹의 침공을 받은 에스파냐나 미국 독립전쟁 때처럼 정규군도 아닌 시민군이 흩어져서 게릴라전이라도 벌인다면 대응하기에 최악이었다.
고산국의 적은 병력으로는 토벌은 물론 점령지 유지 자체가 어려워진다. 게다가 큐슈는 점령지라서 주민들이 언제든 적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있었다.
“다행히 수군은 거의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간몬 해협을 통째로 메우면서 넘어올 예정이라고 합니다. 왜군이 포와 총을 두려워해서 시모노세키에서 간몬 해협까지 거대한 참호선 여러 개를 파면서 차근차근 접근하기로 했답니다. 전국시대에 수공으로 성을 함락시킨 경험이 많아 다이묘들이 땅 파는 작전을 잘합니다.”
“컥! 대단하군요. 일본의 무식한 작전이나, 니시무라 씨의 정보망 모두에 감탄했소.”
당장 그날부터 여진족 기병을 다시 혼슈에 내보냈다. 혼슈 서부 주코쿠 지방 전역에서 강에 걸린 나무다리를 불사르고 돌다리는 무너뜨리고 도로 위 절벽을 무너뜨리는 등 왜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한 작업을 진행했다.
간몬 해협에 깔린 전운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섬라군은 돌아갈 준비를 하다가 전쟁을 돕겠다고 큐슈에 남아 교통 요충지 여러 곳에 주둔했다. 섬라군은 왜인들의 반란에 대비한 군세로서 적당했다.
섬라군 덕택에 고산국과 조선에서 양계 사업이 크게 발전했다. 화상이 나은 혜진이 왕도에서 최초로 닭튀김 요리를 선보여서 호평을 받았다. 이민호는 편지로 그 내용만 확인하고 그저 침만 삼킬 수밖에 없었다.
필리핀의 말레이 군은 기타큐슈에 배치돼 해안 방어를 맡았으며 유사시 히코시마를 지원하기로 했다. 유구군은 여전히 상륙교두보인 나고야를 지키면서 주변 점령지를 순찰하는 임무를 맡았다.
명군이 귀국한 후 여진 기병은 고산국에서 완전히 고용했다. 일단 여진 기병 전체를 동해국 백성으로 받아들이긴 했으나 일부는 고산국 본국이나 큐슈에 남기를 원했다. 그러나 비슷한 고산국의 해외 영토라도 동해국은 속국이고 큐슈는 점령지라는 차이가 있어서 원하는 대로 국적을 주기가 꽤나 난감했다.
여진 기병이 주코쿠를 공격하는 동안 해군 총함장 이순신이 전선들을 몰고 나가 시코쿠의 주요 해안 도시들을 공격했다. 시코쿠는 큰 섬이었지만 배라는 배는 모조리 모리 수군에게 빌려준 바람에 남은 배가 없어 일방적으로 포격을 당했다.
건너편 혼슈 사이 세토 내해 안쪽을 제외한 시코쿠의 서해안, 남해안, 동해안에 자리 잡은 도시와 마을이 모두 불타올랐다. 시코쿠 남쪽 해안 토사와 아키에서는 해병들을 상륙시켜 시코쿠의 다이묘들을 아주 기겁하게 만들었다.
시코쿠는 섬 중심이 산악지대에 가깝고 인구 대부분이 바닷가 평지에서 살고 있어서 고산국 함대의 공격에 특히 취약했다. 만약 수확철마다 서너 번만 해안평야를 불질러준다면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으로 변할 수도 있었다.
“어째서 고산국은 또 다시 가만히 있는 일본을 침략하는 겁니까? 대명과 조선국이 물러났으니 고산국도 물러나거나, 전쟁을 끝내는 조건으로 할양한 큐슈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지난번에 왔던 마에다 도시나가가 다시 사신단 대표로 모지 항을 방문했다. 저번에는 조금이라도 겁을 내는 눈치였으나 대규모 공격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사신 신분이 안전하다고 판단해서 그런지 기고만장했다.
“병력을 모으고 있다면서? 몇 만이라더라?”
“예? 누가 그런 헛소문을 퍼뜨립니까?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다만 고산국에서 이런 식으로 계속 침략행위를 반복한다면 그깟 25만이 아니라 그 이상이라도 모을 수 있습니다.”
“아하! 25만이었구나.”
마에다 가문이 도쿠가와 가문을 견제하고 있어서 아직 도쿠가와 가문이 표면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덕천가강의 사망으로 인한 후계 세습 과정에서 나타난 불협화음을 차단하기 위해 내치를 다지는 측면도 있었다.
현재 일본의 세력구도는 의외로 안정적이었으며, 무단파와 문치파 다이묘들의 감정대립으로 약간 시끄러운 정도였다. 고산국이 큐슈를 점령하고 있어서 일본 내부의 갈등이 억지로 덮인 감이 있었다.
“헉! 이를 테면 그런 병력을 모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알았어. 돌아가. 그런데 남의 집을 방문할 때는 선물이라도 들고 와야지. 알았으면 다음을 기대하마.”
마에다 도시나가가 항의하러 왔다고 하지만 사실은 간몬 해협의 방어태세를 살펴보러 온 것이 분명했다. 마에다는 간몬 요새와 해협 건너 히코시마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요새화되는 것을 보며 안색이 변한 채로 돌아갔다.
일본 사신들이 보고 간 것처럼 현재 간몬 요새에 대한 보강 작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야포를 가리는 포루를 천장까지 콘크리트로 단단히 쌓고 겉은 돌과 흙으로 보강했다. 함포를 간략화한 3인치 야포는 원래 분해, 결합하기 좋은 기병포에서 출발한 탓에 이동식 포가나 바퀴가 없었다. 이 기회에 나무바퀴 달린 이동식 포가를 제작했다. 물론 사격할 때는 삼각대에 얹어서 발사했다.
지난번에 모리 군이 요새 주변 해안에 상륙한 것을 고려해 해안 절벽 위에도 성을 쌓았다. 왜군이 대포를 거의 사용하지 않으므로 벽돌로 금방 쌓았다. 해안에서 위로 올라오는 길도 경사를 가파르게 하고 바위 같은 장애물을 옮겨서 방어에 유리하게 지형을 바꾸었다.
그 사이 요새 안에 벽돌로 주둔지 건물들을 건설해 2연대와 3연대 병력이 지긋지긋했던 천막생활을 드디어 끝낼 수 있었다. 그 사이 이민호는 임시 총독부가 들어선 사령부 건물에 세 들어 살았다.
서쪽 히코시마도 시모노세키 사이의 물길을 따라 성을 쌓아 방어력을 획기적으로 보강했다. 지형의 유리함만으로 몇 만 정도는 쉽게 막을 수 있어 그 전에는 일부러 성을 쌓지 않았지만, 병력 20만이 오로지 시모노세키 방향에서 몰려온다면 성이 아니라면 방어가 불가능했다.
왜인 포로들 2만이 남아서 일을 도와줬기에 공사가 빠르게 진행됐다. 시모노세키 쪽에서 뻗어 나온 반도를 파내서 물길을 넓히고, 중간에 총격이나 포격에 장애물이 될 만한 언덕도 깎아서 없애버렸다. 그리고 시모노세키 주변의 산에서 나무 한 그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요새 보강 공사를 하느라 조선에서 시멘트를, 고산국에서 철근을 어마어마하게 싣고 와야 했다. 해동국 수송선들뿐만 아니라 유구국에 불하된 외륜선들도 끊임없이 모지 항으로 화물을 실어 날랐다.
준비하는 동안 시간이 흘러 어느덧 1월 중순이었다. 아직도 곳곳에서 보강 공사가 진행 중인 간몬 요새를 돌아본 이민호는 성 밖에 주둔한 기리시탄 의용병들을 살펴봤다.
큐슈 서부의 기리시탄 의용병 3만 중에서 1만은 새 총독부가 들어설 오무타로 옮겨 주둔했다. 2만은 분고의 의용병 1만과 함께 간몬 요새 남쪽에 건설한 숙영지에 주둔하면서 포로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요새 보강 공사가 끝나고 왜군의 전면 공격을 방어하고 나면 정문부가 나머지 병력과 포로들을 데리고 여러 곳에 활용할 예정이었다.
“충성! 어서 오십시오, 국왕전하!”
이민호가 식당 천막에 입장하자 의용병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지만 마침 점심식사 시간이라 이민호도 의용병들과 같이 밥을 먹었다. 일본어로 식전기도를 마친 의용병들은 반찬이 형편없는데도 아주 맛있게 먹었다.
일본에서는 희생적인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선교 초기 단계가 진행 중이었다. 열정적인 신앙심을 가진 신도들이 이민호가 보기에 무척이나 좋았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개혁 이후 동양에 파견된 선교사와 현지 신도들은 그야말로 가장 순수한 종교적 열광 상태에 빠져 들어 있었다. 물론 어느 종교 집단이든 다 그렇듯이 세월이 흐르면 이익집단화가 진행되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순수했다.
“밥과 된장국, 생선 한 마리와 간장, 그리고 야채절임. 너무 간소하지 않나? 자네는 어떻게 생각해?”
“영주님이나 무사님들처럼 호사스런 점심을 먹는 것만도 황송한데 밥이 너무 많습니다. 고산국 군사들이 저희들을 살 찌워 잡아먹으려 한다는 소문도 한때 나돌았었습니다.”
“밥 먹는데 구역질나는 소리 하지 말게. 밥이 모자라지 않는다면 다행이야.”
당시 동양에서 평민들은 아침과 저녁 두 끼를 먹고 양반이나 사무라이 같은 상류층은 간단한 점심을 포함해 세 끼를 먹었다. 시대가 더 흐르면 평민들도 세 끼를 먹게 되나 지금도 전쟁 중인 병사나 농번기의 농민들은 세 끼를 먹었다. 기리시탄 의용군은 전쟁 중이 아닌데도 세 끼를 먹어 미안해했다.
그러나 이민호가 조선군을 볼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반찬이 너무 부실해 보였다. 휴대식량도 떡과 이리고메, 호시이 등 간단한 종류뿐이었다.
“반찬이 부족해. 어떤 반찬을 더 줄까?”
“매실 장아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것만으로 되겠어? 고기가 좋을 것 같은데.”
“육고기 말입니까? 고기를 먹어본 적이 없어서 맛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시대 일본에서 소와 말 외에는 키우는 가축이 없어 일반 백성들이 고기를 먹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아주 가끔 산에서 사냥한 멧돼지 정도, 또는 새 종류가 육식 가능한 고기의 한계였다.
사무라이들은 개사냥을 하고 나서 죽거나 다친 개를 잡아먹는 경우가 있었으나 이것도 극히 예외적인 경우였다. 개사냥이란 일정 공간에 개를 풀어놓고 말을 탄 사무라이들이 활을 쏴서 도망가는 개를 맞히는 일종의 유희였다.
“이런 화려한 식단보다는 차라리 사무라이들이 먹는 유즈케를 주십시오. 보급이 훨씬 간단해질 것입니다.”
“밥 먹고 싸워야 할 사람들이 보급 걱정해줄 필요는 없어.”
유즈케는 밥을 한 다음 물에 씻고 야채 몇 가지를 넣어 찻물에 다시 끓인 밥이었으나, 조선 기준으로는 빈약한 잡탕죽이었다. 여기에 잣과 쇠고기를 추가한다면 그런 대로 영양식이 될 것 같아 유즈케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식사를 마친 이민호는 의용병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리시탄 의용병들은 다들 얼른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농한기인 겨울마다 징집돼 전쟁터에 나온 경험이 많아 집에 돌아가는 것은 당분간 포기하고 있었다. 매달 나눠주는 은이 가정 경제에 크게 도움이 될 듯도 했으나 의용병들은 재산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신도들은 담배를 안 피우나? 큐슈 사람들은 담배를 많이 피운다고 들었는데.”
“몇 년 전에 교황 성하께서 공공장소에서 흡연을 금지하셨기에 참고 있습니다. 담배가 비싸기도 합니다. 사쓰마가 멸망했으니 담배가 품귀 현상을 일으킬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우르바노 7세 교황 성하께서는 참 훌륭한 분이셨지.”
고산국 왕도 인근의 천주교 성당 건축에 동원됐던 건축기술자들이 이민호에게 찾아와 하소연한 적이 있었다. 주임 신부로 파견된 포르투갈 신부가 성당 경내에서 담배를 못 피우게 해서 기술자들과 마찰을 빚던 시기였다.
이민호는 종교시설에서는 그 종교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식으로 신부의 손을 들어주었다. 종교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 제한은 필요했다. 절에서 일부러 고기를 구워먹는 일부 몰지각한 조선 유학자들에게 짜증이 나던 참이기도 했다. 그때 포르투갈 신부를 통해서 교황 우르바노 7세의 이름과 금연 정책을 들을 수 있었다.
우르바노 7세는 교황에 선출되고 재위 12일 만에 말라리아에 걸려 선종했다. 후임자인 그레고리오 14세, 그리고 인노첸시오 9세도 병에 걸려 1년도 채우지 못했다. 현재의 교황은 1592년 양력 1월에 선출된 클레멘스 8세로서 의욕적으로 교회 개혁과 유럽 평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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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한 회만 더 올리고 다음 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